최근에 제나린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따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방과 후 교실'의 선생님이 되었다. 학교가 끝나고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도시 아이들과 달리 그것이 쉽지 않은 농어촌 지역에서는 방과 후 교실을 하고 있는 학교가 꽤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민자들이 '영어' 선생님을 하는 경우를 방송에서 보여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제나린이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특히 우리가 촬영했던 이 날은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오고 학생들의 학부모가 참관하는 공개수업 형식으로 진행된 수업이었다. 그 때문에 며칠 전부터 잔뜩 긴장했었다는 수업 당일, 너무나도 큰 목소리(!)로 매끄럽게 수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분에 모두가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장학사도 학교 선생님들도 칭찬 일색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늘 상 한국에서 다문화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다문화에 대한 논의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칭찬하는 가운데 제나린이 좀 더 ‘완벽한’ 한국어를 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결국 한국의 자녀들을 잘 키워내는 것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는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민자들이 영어 교사를 할 수 있는 ‘장점’을 소개하는 어느 방송을 보는 것만큼 나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결국 지금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서 다문화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 부분은 ‘영어’처럼 ‘우월한 문화’이거나 혹은 ‘다문화 페스티벌’처럼 보여주기 위한 상품 같은 것이었나 싶어서였나 싶었다. 재미있게 수업 듣다가 생각에 잠기게 되는 대목이었다.

어쨌거나 6월 29일 햇수로 한 해가 지나고 거의 반 년 만에 평택의 민성노련을 찾았다. 레드마리아 첫 촬영이 바로 민성노련에서였다. 이것의 의미가 특별한 것은 레드마리아 시작한지도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났다는 의미이기도 해서다.

올 해 민성노련에서 치르는 성노동자의 날은 작년처럼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 국수를 만들어 먹고 성노동자들끼리 집회를 갖는 대신 민성노련과 네트워크 사람들끼리 조촐하게 간담회를 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이희영 위원장이 늘 말하는 거지만 임원진들의 활동이 부진하고 노동자들이 절반 이상 바뀌는 바람에 민성노련의 운영이 힘들어졌단다. 그래서 오히려 간담회에 많은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희영 위원장의 바람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중에는 대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도 와서 이희영 위원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번 성노동자의 날은 작년보다는 조촐하게 끝났지만 여러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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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목요일: 오전, 5년간 기륭조합원들의 투쟁을 촬영했던 故 김천석의 49제 참석
                      오후, 기륭 전자 신사옥 앞에서 1박 2일 노숙농성

6월 5일 금요일: 아침 출근 투쟁

6월 6일 토요일: 기륭회의, 기륭조합원 김소연 분회장 집 방문

6월 7일 일요일: 기륭조합원 인권영화제 참석, 
                      故김천석 유작인 기륭조합원 투쟁을 촬영한 영화 '우리는 쓰다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이 아니다!' 관람

6월 8일: 김소연 분회장 ILO 총회 참여위해 프랑스, 스위스로 출국, 그 전에 민주노총에서 기자회견

 
첫 날, 마석에 있는 납골당에 5년간 계속 기륭 조합원들의 투쟁을 촬영해 왔던 故김천석의 49제에 기륭 조합원들이 찼아 갔다. 돌아가신 분의 어머니가 오열을 하셨고 그 옆으로는 어린 아들이 2명 있었는데 김소연 분회장이 요즘 부쩍 자기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다는 소리가 가슴이 아팠다. 최근에 같이 투쟁했던 조합원 한 명도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오전동안 49제를 지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기륭 전자 신사옥 앞에서 1박 2일 노숙농성을 준비했다. 이날 노숙농성이 있기 전 집회동안 기륭전자 신사옥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나와 시끄럽다며 잠깐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경찰이 들고 있어야 할 소음측정기를 주민이 들고 있고 술먹은 취객은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른다.  약 6개월 전만 해도 음료수를 건네며 수고한다고 말붙이던 주민이 있었다고 했는데 같이 촬영나온 은형은 씁쓸하단다.  

여하튼, 문화제 시간동안은 간혹 주민들도 나와 구경을 하곤 했는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분위기가 사뭇 좋았다. 문화제가 끝난 후 삼삼오오 모여 술자리를 갖고 하나 둘 잘 준비를 했다. 기륭 신사옥이 있는 건물 앞에 말그대로 맨 바닥에 침낭을 깔고 천정없이 별이 보이는(?) 곳에서 노숙을 할 준비하는데 서울 한복판에서 해보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출근투쟁까지 마치고 이날 일정을 마쳤으며 경은과 경순은 제나린 촬영을 위해 정읍으로 내려갔다.

다음 날, 김소연 분회장이 ILO 총회에 참여하기 전 기륭 조합원들과 일정 정리 회의를 했다. 회의를 마치고 배고프다고 아웅성인 조합원들과 함께 오리고기를 먹으러 멀리까지 나갔는데 이렇게 함께 먹는 것이 오랜만이란다.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석순언니의 공동텃밭(?)에 들렀다 치커리니 상추니 하나 둘씩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이날 김소연 분회장 집에 갔다. 김소연 분회장의 일상생활을 찍기 위함이었는데 알고보니 흥희언니랑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마트에 들러서 장도 보고, 일주일이 넘도록 밀렸던 빨래를 하고 노래를 듣고 저녁에는 종희언니와 다른 금속지부 지회장 언니를 불러 술자리를 갖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

일에는 인권영화제에 참석해 자신들이 찍힌 영화 '우리는 쓰다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이 아니다!'를 봤다. 故김천석이 찍은 영화였다. 출국전날이라 이것저것 선전물을 챙기고 업무를 봤다.

당일, 정말 어김없이(대단한 소연언니!) 출근투쟁을 하고 민주노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는 일정이었다. 김소연 분회장은 27일 돌아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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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상암동의 사무실을 대학로로 옮기고 나서 거의 매일 같이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고 있다. 그러고 있노라면 일본이나 필리핀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촬영을 나가는지라 하루쯤 쉬었으면 했었는데 한국에서는 중간 중간 잡히는 촬영 일정이 오히려 너무나도 기다려진다. (이 얼마나 간사한 마음인지!) 어쨌든 최근에 촬영하고 있는 인물들은 제나린과 기륭 조합원들이다.

일본 촬영을 마치고 국내 촬영을 시작하게 되면 어쨌든 ‘기륭 조합원이 머물고 있는 컨테이너에서 하룻밤 보내기’가 아주 분명하게 정해진 촬영이었는데, 드디어 이날 하게 되었다.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주였다. 마침 비 내리는 날 빗물로 설거지를 했는지 컨테이너 밖에 그릇이 쌓여 있었다. 이날은 아기를 낳고 최근에 오랜만에 다시 컨테이너를 찾은 화숙 언니도 보였다. 종희 언니가 아기랑 놀고 있었고  김소연 분회장은 바빠서 저녁 늦게 온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 김소연 분회장이 왔고 간단한 술자리를 갖고 뜨뜻한 컨테이너에서 그날 다섯 여자가 줄지어 빽빽이 잠을 잤다. 다음날 여전히 그렇듯 기륭신사옥 앞에 가서 플랜카드를 걸고, 조합원들이 피켓을 들고, 김소연 분회장은 출근 길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 앞에서 피켓을 들고 출근투쟁을 했다. 마찬가지로 이날도 비가 내렸다. 오늘같이 일인시위를 하거나 선전을 하거나 번갈아 가면서 출근투쟁을 한다고 했다.

늦은 아침이었지만 출근투쟁이 끝나고 모든 조합원들이 컨테이너로 돌아가 아침 밥을 먹었다. 컨테이너에 남아 있었던 윤종희 언니가 만든 맛있는 멸치볶음과 엊그제 만들어 놓은 밀가루 반죽으로 전도 부쳐 먹었다. 우리까지 열사람이 빼곡하게 앉아 밥을 먹었다. 그 어찌 맛있는 밥이 아닐 수 있겠는가. 소견이지만 난 어쨌든 그런 분위기가 몸서리쳐지도록 좋다. 이날은 기륭 조합원들의 회의와 김소연 분회장의 회의참석 모습을 간단히 촬영하고 마쳤다. 앞으로는 컨테이너에서의 기륭조합원들의 모습을 많이 담게 될 것이다.

그 주 토요일, 오랜만에 제나린의 집을 찾았다. 제나린이 신태인에 있는 아파트에서 예전에 시어머니가 살았던 정읍에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를 한 뒤였다. 이번에 모내기철이었기 때문에 비닐하우스에서 모종을 키우고 앞마당에 있는 작은 텃밭에는 토마토며 가지, 고추가 심어져 있었다. 맑은 날씨도 내리 이어졌고, 오랜만에 온 제나린 집에서는 촬영이 아닌 휴가 온 기분마냥 3일을 편하게 지냈다. 경은은 드라마 ‘내조의 여왕’을, 또 경순은 액션영화들을 오랜만에 보는 TV 앞에서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 (맨날 TV만 본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 없으시길)

원래는 제나린을 필리핀 촬영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섭외를 했지만 이후에 한국 촬영인물 중 한 인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때문에 한국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이 더 필요했다. 어쨌든 계속해서 이번에 모내기를 시작으로 농사일을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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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간 연달아 굵직 굵직한 집회들이 있었다. 4월 29일은 용산 참사 100일 추모제가 있었고, 4월 마지막 날은 노동절 전야제가 있는 날이었으며, 5월 1인은 노동절이고, 5월 2일은 촛불 집회 1주년 집회가 있던 날이다. 이 집회 일정에 기륭이 참여 했는데, 이 전에 10일간 전국을 자전거로 순회하며 비정규직 문제와 투쟁중인 각 사업장을 방문하며 선전을 펼친 ‘질주단’이 마지막 지역인 서울에 입성하는 날이었는데 그 첫 집회를 기륭 신사옥에서 가졌다. 이번에 윤존희씨는 이 질주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기륭에서 여느 때처럼 집회를 가졌으나 오랜만에 온 기륭전자 신사옥 앞에 못보던 플랜카드가 걸려 있다. ‘소음 때문에 못살겠다, 자식 교육 다 망친다.’ 이런 요지의 내용이었는데, 보면서 내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사옥 앞에서의 집회를 마치고 문화관광부 앞에서 국립오페라단 해고와 관련하여 다시금 기륭조합원들이 참여한 집회를 마치고 용산, 화재로 무너져 버린 건물 앞에서 조촐한 추모제에 참여했다. 유가족들이 용산에서 서울역으로 (인도로) 걸어가려고 했으나 ‘허가받지 않은 집회’가 될 가능성 때문에 경찰쪽에서 거리를 막아섰다. 하는 수 없이 모두 지하철로 이동하여 추모제가 열리는 서울역 광장으로 향했다. 사실 원래는 시청에서 추모제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그곳은 이미 다 막아놨다고 했다. 4개 종교에서 각각 추모제를 하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다음날 오전, 일찍부터 집회 일정이 있었는데, 특히나 재능교육이 근 500일째 (농성 497일)를 맞이하면서 이곳저곳에서 연대하러 온 학생들이며 다른 조합원들이 모였다. 오늘 재능교육에서의 집회는 꽤 격렬하게 이어졌는데 몇몇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경찰들에게 이유 없이 둘러싸여 그 중 4명이 연행되었다. 기륭조합원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조합원 사람들은 일정에 없이 송파경찰서까지 가서 연행된 사람들 면회를 하고 노동절 전야제가 열리는 건국대학교로 이동했다. 사실 이날 건국대학교 안에서 전야제가 있을 예정이었으나 학교 측에서 거부해와 학교 앞 거리에서 전야제가 열렸다. 다음날 노동절은 여의도에서 3시간여 진행됐고 이후 종로에서 명동으로 이동하면서 집회를 가졌다. 이날 집회가 굉장히 격렬하게 진행됐는데 이날 연행된 사람이 꽤 됐다고 전해진다. 기륭전자분회 사람들과, 경순과, 경은과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며 이동하면서 집회모습과 기륭전자분회 사람들을 촬영했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회 마무리하고 늦은 저녁밥을 먹고 헤어졌다.

본격적으로 경찰과의 충돌이 있었던 것은 그 다음날 촛불 1주년 집회가 있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시청 앞에서 열린 이 집회에는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전경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본격적인 집회는 시청으로 거리 행진을 시작할 때였는데 이날 서울 하이 페스티벌 개막식이 시청 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시청 앞 거리를 행진하던 사람들이 개막식이 열리는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몰리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였다. 페스티벌에서 튼 노래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깃발을 흔들자 전경들이 광장을 봉쇄하고 시위대 중 일부는 축제가 열리는 무대까지 올라가게 됐다. 페스티벌은 중단됐고, 경찰서장은 방송으로 여전히 광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반시민’이 아닌 시위대로 분류되어 연행된다는 말을 연거푸 반복했다. 시위대중 일부는 다시 방향을 돌려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에서도 이미 전경들이 배치되었고 그곳에서도 방송으로 연행해가겠다는 말을 몇 번 하더니 이내 순식간에 군중 속 몇몇 사람들을 연행해 갔다. 촛불 집회가 있었던 이후로 최대 인원을 연행했다고 뉴스보도가 나왓다. 일전에 3일간 있었던 집회 중 가장 격했던 집회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날은 기륭사람들을 찍는 대신 격한 집회 모습을 더 많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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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에서 주최한 제주도 4․3 정신 계승 노동자 대회가 제주도에서 1박 2일의 일정동안 열렸다. 이번에 기륭전자분회에서 4명이 참여했다. 김소연 분회장을 비롯한 나머지 몇몇 사람은 3일 날 있은 기자회견을 갖은 직후 연행되었기 때문에 제주도에 올 수 없었다. 급히 결정된 촬영일정이라 이번 일정은 부득이하게 나 혼자 출발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달랐기 때문에 먼저 다른 비행기로 제주도에서 일행을 기다렸고 그 뒤 기륭전자분회 사람들을 비롯해서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 ‘함께 맞는 비’에서 온 사람들 등이 함께 왔다.

첫 번째 일정은 제주 시청에서 시작되었다. 시청 앞에서 ‘제주도 4․3 정신 계승’이라는 주제로 집회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거리행진을 하며 거리 선전전등을 했다. 기륭에서 선전물을 뿌려주는데 고등학생들한테도 나눠준다. 어려도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단다. 하루 종일 거리 행진을 했고 저녁이 돼서 숙소에 돌아왔는데 숙소로 이동하는 중에 버스 안에서 기륭 조합원들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 했다. 다른 조합원들은 연행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기들끼리만 이 좋은 제주도에 오게 돼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숙소는 제주 4․3공원이 바로 앞에 보이는 유스호스텔이었다. 저녁에는 각 사업장에서 온 사람들의 소개를 하고 제주도에서 4․3을 연구하는 연구원을 불러 간단한 역사를 듣고,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기륭전자분회의 윤종희씨는 딸 2명을 데리고 왔는데, 간간히 여성분들 중 자녀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눈에 띈다. 새벽 1시가 넘을 때까지 대화는 무르익었고 기륭 조합원사람들은 엊그제 일정과 오늘의 일정이 연달아 있던 탓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은 제주 4․3과 관련한 유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채워졌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예전에 학살당한 마을이며 근처 오름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 시간이 금방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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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의 촬영은 사실 19일 카나가와 현에 위치한 단체들이 참여한 춘투 총행동부터 시작되었다. 일전에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과 했던 일일행동과 비슷한 일정으로 오늘 춘투도 진행됐는데 각 기업이나 작업장을 항의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날 모니카는 유니온 활동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날은 모니카를 중심으로 춘투 일정을 좇았다.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모니카의 일상생활을 촬영하기로 했다. 주말, 촬영하는 덕분(?)이라며 오랜만에 언니가 놀러 온다고 했다. 모니카가 사는 곳은 도쿄 외곽인데 집 앞으로 개천이 있고 유채꽃이 가득 피어 있다. 그 길로 쭉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제법 많은 사람들이 피크닉을 즐기러 나와 있었는데, 모니카도 마트에서 산 도시락을 사가지고 와서 조금 늦게 도착한 언니와 나눠 먹었다.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활동가이자 모니카의 친구인 콘도상도 함께 했다. 언니도 페루에 있다가 동생인 모니카보다는 조금 늦게 일본에서 생활했지만 그녀도 일본에서 생활한지 오래된 탓에 모니카와의 대화 중간 중간 스페인어보다는 일본어가 많이 튀어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모니카와 언니가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보였다(!). 이날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는데 저녁에 몹시 추웠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을 넣은 유탄포(보온용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잤다. 일요일 모니카도 단테도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이것저것 하는 모습들을 촬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연극을 관람하기로 했다. 니케진, 파견노동 등을 주제로 한 연극이었는데 우연히도 연극의 주인공 이름도 마리아였다. 연극 관람 후 친구들과 맥도날드에서 담소를 나누고 난 후 집으로 갔다.

다음날 월요일 이날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요일 때와 비슷하게 하루 일정을 보내고 저녁 즈음 모니카가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다. 방문한 곳은 일본 내 거주하는 외국인(99.9%가 캐나다나 미국 등지에서 온 백인)이 모이는 모임이었는데 이날 상영한 다큐멘터리도 일본 내 있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이주노동자를 주제로 한 영화였다.

공장 일이 있었던 다음 이틀간 모니카의 출근 날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뉴스를 보며 날씨를 보는 등의 모습을 촬영했다. 공교롭게도 공장 내 촬영을 허가 받지 못해서 부득이하게 출근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었는데, 이조차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촬영해야 하는 것이라서 아쉬웠다. 요즈음 모니카는 공장과의 교섭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하는 것이 무척 예민한 문제였던 것이다. 어쨌든 멀리서나마 모니카가 출근하는 장면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출근 장면을 이튿날에도 한 번 더 찍고는 모니카의 생활 모습 촬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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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2일

경순과 경은은 시즈오카에서의 촬영 때문에 11일 날 출발하고, 나는 따로 사토상의 일상을 찍기 위해 코리야마로 출발했다. 13일에 있을 파나소닉 공판과 14일 날 딸의 결혼식 등 중요한 일정들이 있었다. 5시쯤 코리야마에 도착했고 사토상이 마중 나와 있었다. 첫날 굉장히 긴장을 했었는데 이유인즉슨 그동안 통역을 해줬던 친구들이 없이 처음으로 혼자 촬영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토상과 사토상의 가족들과 먼저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족들과 손짓, 발짓, 영어, 일본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다가 사토상이 저녁에 집안일 하는 모습부터 촬영했다. 내일 있을 파나소닉 공판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할 것 같았는데 이미 일주일 전에 그런 준비들은 끝내놓은 터라 달리 준비할 것이 없단다. 내가 오지 않았던 일주일 전에는 굉장히 바빴는데 이번 주 일주일간은 그나마 여유로운 편이라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사토상의 일상생활을 좇아 촬영할 예정이다.


2009년 3월 13일

오늘은 파나소닉 공판이 있는 날이다. 사토상이 아침에 정신없이 준비해서 나와서 공판이 있기 전 그 앞에서 짧은 거리홍보와 짧은 집회를 했다. 가장 긴장되는 촬영 날이었지만, 실상 이날 촬영은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재판이라고 하지만 다음 재판 회기를 짧게 언급하는 정도였긴 했지만, 심지어 이날은 재판소 앞마당에서 조차도 카메라를 들지 못하게 했다. 아쉬운 대로 기자회견 겸 짧은 집회(일본에서는 주로 집회라 함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실내 건물 안에서 발표하는 느낌의 모임을 말함) 시간을 가졌다. 일전에 코리야마 역에서 경순과 사토상의 인터뷰를 했던 아사히 신문 기자가 이날도 함께 참석해서 기록을 했다. 외에도 기자 5여 명 정도가 참석해서 기록을 했다. 이날 사회는 사토 쇼코 상의 남편이 봤다. 생각해 보면 정말 사토 쇼코상의 투쟁에는 그녀만큼 그의 남편도 늘 함께였다. 간단한 집회가 있은 다음 시청으로 가서 파나소닉 문제 등을 공무원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도 갖었다. 사실 이날 이야기는 ‘건의’의 형태로 더 많이 이루어졌다.

오늘, 재판도 재판이었지만 내일 있을 큰 딸의 결혼식 때문에 쇼코상은 더욱 정신이 없어보였다. 집에 돌아가니 쇼코상의 시부모님이 와계셨다.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서 싸오신 일본요리들을 먹고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여러 이야기를 했다. 쇼코상은 시어머니에게 최근에 큰 아들이 직장에서 월급이 깎인 이야기, 자신의 재판 등 자신의 이야기들을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 했다. 또 내일 있을 큰 딸 나호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큰딸 나호 30세, 둘째 타쿠 28세, 막내 유키 20세)  (이날 사토상 찍은 테입 ②번 사토상의 요구로 초반 시어머니와의 대화 걸러야 함)


2009년 3월 14일

드디어 사토 쇼코상의 딸 나호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중요한 결혼식 당일이었지만 이날은 가장 중요한 결혼식 장면을 촬영하지 못했다. 일본과 한국의 결혼식이 크게 다른 점은 한국의 결혼식보다 일본의 결혼식은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참가하지 어렵다는 것이다. 이날 특히나 신랑측이 촬여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촬영할 때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당황해서 허둥대기 일쑤였다. 아쉬운 대로 중간 중간 쇼코상이 결혼식 전 준비하는 모습, 딸과 대화하는 모습(딸의 모습도 아쉽지만 앞 모습을 촬영할 수 없었다) 등을 촬영했다. 결혼식은 꽤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결혼식 도중에 몇 번이나 쇼코상은 결혼식에 함께 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나에게 전화를 하며 괜찮냐고 물어보고 음식도 가져다주었다. (사토상도 참, 실은 좀 민망하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결혼식을 마치고 피곤한 얼굴로 다들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가족들 이야기 하는 모습들을 본격적으로 찍고 싶었는데 실은 가족들 대부분이 촬영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시어머니와 대화하는 쇼코상의 모습을 다시금 찍었다. 쇼코상은 시어머니와 어제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틀 연속 긴장한 탓인지 쇼코상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2009년 3월 15일~16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주로 부엌에서 이것저것 씻고 준비하는 모습을 찍었다. 주로 쇼코상을 좇아 하던 촬영이 밖에서 집회하거나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는 모습이었다면 오늘은 주로 쇼코상이 집에서 일상적으로 지내는 모습들이었다. 이틀을 밖에서 힘들게 보낸 탓인지 오늘은 조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의 쇼코상이었다. 이날은 오후에 돌아가신 쇼코상의 부모님 산소에 가기로 했다. 나호의 결혼을 이야기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의 산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소 앞에서 쇼코상과 나호의 모습을 촬영하고 돌아오니 오후, 저녁 준비를 하는데 이날은 내가 마지막으로 쇼코상네서 묵는 날이라고 근사한 저녁을 준비해주셨다. 어쨌든 이날 다들 마지막을 아쉬워하면서 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이곳에서 일주일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일본어가 많이 늘었다. 다음날 오후 버스였기 때문에 다시 쇼코상의 일상을 찍었다. 아들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등, 아침부터 오랜 시간동안 쇼코상은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메일을 확인하고 청소를 했다. 쇼코상이 밖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을 좀 더 많이, 잘 찍고 싶었던 점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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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5일~6일

<방마리아 어머니 일상> 

10시쯤 혜진의 사무실 출근 시간에 맞춰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사무실을 방문했다. 도착하자마자 방마리아 어머니께서 도착하셨고, 통화업무를 보신 뒤, 밖에서 볼 일이 있다고 하여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을 나왔다. 8년 전, 마리아 어머니의 도움으로 비자를 얻고 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분으로부터 2주 전에 전화가 와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혜진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경은도 사무실 주변 일대를 돌며 사진을 찍기로 하고 나와 경순은 할머니의 업무를 쫓아가기로 했다. 사무실에서 두 시간 걸쳐 떨어져 있는, 무려 전철을 5번 정도 갈아타고 일본에서 난생 처음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이리구치(정확치 않음)라는 곳에 도착했다. 근처에 와서 마리아 어머니를 보자마자 달려오신 분은 울면서 마리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16년 전 한국에서 일본으로 와서 일을 했는데 8년 전 갑자기 몸이 안좋아져서 입원을 했는데 심장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이란다. 그런데 당시에 오버스테이인 처지인데다가 입원비가 없어서 힘들어진 차에 지금의 재일교포인 남편을 통해서 마리아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8년 전 그렇게 도움을 받고 나서 어떻게 연락할까 고민하다가 이제야 연락을 한다며 굉장히 미안해했다. 도착한 조그만 아파트에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지내고 있고 시어머니는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정기적으로 시설에서 지내실 때가 있다고 했다.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한국 이주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방마리아 어머니 덕분에 받았다는 비자와 장애인 할인 택시권과 생활보험 카드 같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가기는 두 시간이 걸려서 갔는데 머문 시간은 채 1시간도 안 돼서 금방 나왔다.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집에 손자와 아들이 와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갔다. 이전에 어머니 댁에서 회를 얻어먹지 못한 내가 대표로 오늘 먼저 어머니 댁에 가있기로 했다. 18살 때부터 뱃일을 해 오신 아버지(방마리아 어머니 남편)가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스시를 만들어 먹고, 옛날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시더니, 옛날 애인이었다며 이미자의 ‘동백꽃 아가씨’를 틀어주셨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온 경순, 경은, 혜진이 오고 노래방 기계를 틀고는 다들 춤을 추고(예전에 필리핀 부클로드 세미나 마지막 날 밤 춤 출 때도 그렇더니 이번에도 경은이 제일 신나서 춤을 췄다) 아버지는 그 열기를 이어 노래도 열창하셨다. 이렇게 혜진이 촬영에 함께 한 첫 날도 지나갔다.

다음 날, 어머니께서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낼 옷들을 챙겨 보낼 것이라고 해서 찾아갔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리더니 저녁까지 세차게 내린 날이다. 사무실에서 200엔 점심을 먹었는데, 재료가 평소보다 비싼 점심이면 300엔을 낸단다. 점심을 먹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버스를 타고 어머니댁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보니 어제 거실에 한가득 있던 옷들이 고아원에 보낼 옷들이었다고 한다. 다 어디로부턴가 기부해 온 옷들인데 각 기관들에서 연령대별로 입을 옷들을 따로 구분해 깨끗이 개어 놓고 계셨다. 이 날 같이 일을 도와주신다고 한, 마리아 어머니의 대녀인 이가라시 상도 오셨다. 정리하면서 ‘대장금’이야기도 하고, 마리아 어머니가 한국 동요도 불러주시고, 아버지가 틀어놓은 쓰시마 섬에 관한 TV 프로그램 녹화 테이프도 보면서 천천히 일을 하셨다. 4시간쯤 계속 일하시다가 정리하고 아버지가 차려놓은 간식을 먹으며 각 기관들에 보낼 주소를 쓰고 택배를 부쳤다. 자주 이렇게 어머니가 일을 하시고, 아버지가 먹을 것을 내오셨다. 저녁에 아버지가 끓여주신 오뎅탕을 미처 못먹고 가니 어머니가 싸주셔서 집에 와서 경은과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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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6일 목요일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일일행동>

카와사키 역에서부터 출발하는 이날 일일행동에서 나는 방마리아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화면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작은 분이셔서 놀랐다가 프리뷰할 때 뵌지라 왠지 모를 친밀감에 반갑게 인사했다. 아쉽게도 이날 일일행동에는 같이 참여하지 못하신다고 했다. 이날 일일행동은 오전에 3개, 오후에 3개의 회사를 찾아다니며 그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리플렛을 나눠주는 등의 행사를 진행한다. 그 회사에는 후지필름이나 혼다와 같은 대형 기업들도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많았는데 현재는 닛케진이나 페루에서 이주하여 노동자였던 사람들이 많아졌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해본 사람중에는 대부분 지금 현재 실직상태라고 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8년 일본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전철로 이동을 했는데 이주노동자 파견문제에 대한 문구가 적혀진 조끼를 입고 우루루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그간 일본에서 봐왔던 줄맞춰서 천천히 길을 걷는 행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재미있었다. 오전에까지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했는데 중간에 전철을 타는 도중에 빠져나갔는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재밌었다.

이날 일일행동치고는 너무 빡빡한 행진일정이었는데 하루 종일 부슬비가 오락가락해서 그렇게 느낀 이유도 있겠다. 이날 경순은 구호를 외치는 도중에 무라야마 상으로부터 ‘꾸역꾸역’ 불려나가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부르기도 했는데 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경순이 진지한 태도로 임한 탓에 사람들도 진지하게 경순의 노래를 들었다. (중간에 가사가 틀리긴 했어도 끝까지 부르는 모습을 보니 멋있더라!) 5시쯤 후지필름 앞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그곳에서 바로 해산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눈 브라질에서 오신 분은 해산하기 전 스텝들 네 명을 차례대로 꼭 안으며 다음에 브라질로 꼭 놀러오라는 말을 하고는 헤어졌다.




Posted by 빨간경순





2009년 2월 24일 화요일

<요요상, 카마쿠라의 빵집>

혼자 요요상을 따라 촬영한지 3일째가 됐는데, 찍다보니 서로 느끼는 것이지만 요요상을 따라가다 보면 주로 음식이 나오는 장면이 많아서 자신이 영화에 나올 때 무슨 음식 소개 프로그램 같지 않을까 하며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

카마쿠라는 관광지인데 요요상이 일하는 빵집은 시장 구석에 있는 조그만 가게였다. 요요상은 이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빵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빵을 팔기도 하며 이곳에서 (오늘로 2번째이긴 하지만) 수요일에 열리는 베지식당에서 사용할 재료들을 손보기도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주일동안 왔다갔다 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6명 정도이고, 주로 젊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빵집의 주인 또한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오전에 요요상은 빵집 바로 귀퉁이를 돌면 나오는 조그만 시장(위에 천장이 있는)에서 금방 장을 봤다. 시장이 작아서 장을 보는데도 금방 끝났다. 그리고는 시장 구석에 마련해둔 캐리어와 가방에 채소를 넣어놓고 다시 빵집 주방에서 빵을 만들었다.

구석에 위치한 빵집임에도 불구하고(옆에도 바로 빵집 하나가 더 있었다) 손님들이 꽤 많이 찾아왔다. 점심시간에는 조그만 가게가 더 비좁아졌다. 그때 경은과 나는 그 시간대를 피해 근처에 있는 바닷가에 왔다. 저녁에도 똑같이 빵을 만들다가 8시쯤 넘어서 빵가게가 문이 닫고 그제서 요요상은 오늘 장본 채소로 내일 요리에 쓰기 편하게 손질했다. 주인에게 부탁을 하고 그래서 이곳 주방을 쓸 수 있게 된 것이지만 마음이 급한 요요상이 바쁜 것이 눈에 보였다. 요요상이 사는 곳에는 주방이 따로 있는 집이 아니어서 늘 거리가 먼 부모님집이나 이런 주방이 있는 곳을 전전하며 베지식당을 준비한다고 했다. 몸이 작은 요요상이 그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집에 가니 걱정이 되고, 이날도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가서 내일 또 하루종일 베지식당을 열어야 하니 힘들겠다하니 괜찮다고 자기는 괜찮은데 우리들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이날 생각보다 빵이 많이 남아서 남은 빵도 손질한 채소와 함께 싸서 가게를 나왔다.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