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두 번의 눈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 재일조선인이자 여성학자인 야마시타 영애의 눈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강연 중 그녀는 “강제 연행이 있었다면 문제지만 없었다면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데요. 정말 피해자분들과 만나면 알겠지만, 그 분들을 무시하는”이라 말하다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못다 한 부분에는 조선인·소녀 위안부 뿐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와 매춘부 출신의 위안부에게도 위안소의 생활은 성노예에 다름없다는 말이 생략돼 있을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의 가시화 이후에도 비가시적 존재로 남아있던 이들에 대한 가시화이자, 성노예라는 폭력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한 고발이다. 두 번째, 故배봉기 할머니의 삶을 기록한 [빨간 기와집]의 저자 가와다 후미코의 눈물. 취업사기로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고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배봉기 할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던 중, 결혼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가와다 후미코는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까, 굉장히 각오를 하고 낳았어요. 그런 면에서 힘든 일이 많이 있었는데, 배봉기 씨가 버티게 해줬어요.”라며 흐느낀다. 이 연대와 공감의 감정은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고, 위안부 생활을 했던 오키나와에 남는 것을 택한 배봉기 할머니의 삶과 미혼모로 살아온 그녀의 삶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가부장 구조 하에서의 고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두 번 이혼한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편견과 비난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성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매춘혐오로 인한 인권침해, 민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운동의 논리 속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위안부들의 이야기로까지 확장되는 <레드마리아2>는 여러 시대와 상황에 존재하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적 구조를 끝까지 추적하여 드러내는 급진적인 다큐멘터리이다.(권은혜)
“엄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는 자전적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곧바로 예상치 못한 질문들의 연쇄로 성큼성큼 건너간다. 한국과 일본, 호주 등의 성노동자의 인권과 법적 지위를 묻는가 했더니SWASH 활동가들과의 대화에서 느닷없이 위안부 논의가 튀어나오면서 카메라는 야마시타 영애, 나가이 가쓰, 안병욱 등 학자들에게로 향한다. 이어 열악하고 위험한 한국 성노동자들의 현재 상황이 삽입되고, 일본인 위안부들의 ‘침묵’의 의미를 질문하는 이케다 에리코에 이를 즈음이 되면, 엄마의 방에서 출발했던 감독의 고민이 왜 그다지도 과거와 현재, 위안부와 성노동자를 오가며 이질적으로 보이는 질문들을 축적해 왔는가 감이 잡힌다. ‘매춘(부)’이라는 낙인이 그 동안 역사와 정치와 운동 모두에서 어떤 것들을 은폐하고 침묵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다. 이제는 신성한 피해자의 기표가 된 ‘위안부’와 ‘매춘부’라는 단어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피해자로서 자기존재를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 계속 억압되는 성노동자들의 인권 등. 그래서 이 영화는 이미 발언된 ‘피해자성’과 여전히 발언되지 못하는 피해자에 대해 묻는다는 점에서 도발적이다. 감독은 도입부에 이어 마지막에도 ‘엄마’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으로 영화를 마무리하지만, 박유하와 정대협, 성매매 특별법 폐지 시위 현장을 경유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마련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 답할 것을 요구 받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서이고, 그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백문임]
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감독의 내레이션 자막으로 시작된 다큐멘터리는 곧이어 한국의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GG, Giant Girls)활동가, 성노동자 연희, 혜리, 밀사의 활동과 노동의 일상을 따라간다.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성 노동자들의 실태조사 및 연대를 위해 출국한 연희와 밀사는 일본의 스와쉬(SWASH, Sex Work and Sexual Health) 활동가 가오린과 유키코를 만나 일본과 한국의 성산업 인식과 노동 환경의 차이를 체감한다. 사회가 낙인한 이미지로서의 성노동자가 아닌, 그녀들 스스로 정의하는 성노동자로서의 정체성과 그녀들이 되묻는 여러 질문과 대화를 통해 그 동안 삭제되고 숨겨진 존재가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일상을 살아가는, 또한 침묵하지 않고 발화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감독은 위안부 문제를 강제연행의 유무, 한일 내셔널리즘의 문제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각적인 측면의 위안부 문제 및 운동에 대한 그들의 의견과 삭제되었던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구술한다. ‘정대협’에서 10년간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운동을 했던 야마시타 영애는 그 운동 안에서의 남성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위안부 담론을 비판했다. 정부, 언론, 한국 운동 단체 등에서 일본인 위안부는 매춘부, 한국인 위안부는 성노예로 규정하여 매춘부 출신의 위안부가 운동에서 배제됐던 과정, 일본 안에서 담론화 되지 않는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마주하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되면서, 야마시타 영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결국은 다른 결로서 이런 담론 및 규정에서 출발했음을 환기하고, 개인의 정체성 역시 동일화하거나 양자택일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최초로 밝힌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술된 『빨간 기와집』의 르뽀작가 가와다 후미코는 일본과 조선의 근대사적인 측면의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관점으로는 배봉기 할머니의 인생을 기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위안부 라는 낙인 뒤에 가려져 있던 가난한 환경과 전쟁 안에서 배봉기 할머니의 삶의 궤적을 5년간 취재하고, 5년간 저술했다. 배봉기 할머니는 단순히 취재 대상으로서가 아닌 가와다 후미코가 개인의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녀의 응축된 감정과 개인의 역사, 배봉기 할머니의 삶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편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위안부 연구자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으면서, 이 다큐멘터리는 그간 내셔널리즘 문제로 크게 퉁친 다음, 숨기고 취하지 않았던 역사의 잔해와 쟁점들을 오롯이 직면한다. 그간 역사와 사회에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재현된 여성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감독의 어머니를 비롯 가부장 사회의 성윤리속에 지워진 많은 여성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기록하여 이 다큐멘터리 자체로 기록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한다.
얼마 전, 이슬람 페미니즘에 관한 한 강의에서 더위를 피하고자 사용되었던 베일이 어떻게 고대 아시리아 제국을 통해 성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전에 없던 국가라는 개념이 확장되고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성들을 중심으로 영토와 신분, 재산을 승계하고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고, 이에 여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장치로써 베일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승계와 상속에 이바지할 여성, 즉 군주의 아내나 딸, 남편이 있는 여성들은 베일을 쓰게 되었고, 노예나 매춘부 등에게는 베일이 ‘금지’되었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베일을 쓰면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말하자면 당시의 여성들에게 베일은 일종의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표식이자 동시에 특정한 남성에게 ‘귀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만이 ‘안전을 보장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여성들은 감히 ‘보호받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베일이 금지된 여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그만이었지만 베일을 쓴 여성들, 즉 자신들의 연대기를 이어줄 ‘귀속된 여성’들을 지키는 것은 곧 이슬람 남성들과 그 공동체의 자존심이 되었고, 나아가 이슬람 민족주의의 기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 ‘지켜지지 못한 여성들’, ‘강간당한 여성들’이 그 공동체, 남성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추락시킨 상징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베일이 벗겨지는 것, 베일이 금지된 여성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베일은 여성들 스스로 내면화 과정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다시 끈질기게 유지되고, 재강화되어 왔다.
비단 이슬람만이 아니다. 성녀와 창녀, 아내 혹은 순결한 여자와 매춘부를 가르는 이중규범은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여성 통제의 도구이자 민족적 자존심의 상징이 되어왔다. 이 영화, <레드마리아 2>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성노동자들의 삶과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교차시켜 짚어가며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이중규범의 잣대를 다시 파고든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 ‘들판에서 울며 끌려간 소녀’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이 폭력을 증언할 자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냐고. 여성들을 군수물자처럼 동원한 그 끔찍한 역사에서 일본인 ‘위안부’ 여성들, 유곽에서 동원되어 온 매춘 여성들의 경험은 정말 본질에서 다른 것이냐고 말이다. 왜 해방 후 조선에 돌아온 ‘위안부’ 여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가. ‘강제 성노예’와 ‘매춘부’를 구분 짓는 과정을 통해 한국과 일본에서 다시 면죄부를 얻어 온 것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위안부’의 역사를 ‘지켜주지 못한 역사’, ‘민족의 자존심이 수탈당한 상징’으로 만들어 갈수록 그 역사에 숨은 더욱 근본적인 폭력의 본질은 망각된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가 단지 ‘일제 폭력의 증언’과 ‘민족의 역사’로만 증명되어야 할 때, 그 잔인한 시대에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내야 했던 수많은 여성의 다양한 경험과 연대의 역사는 구체성을 잃고 삭제되어 간다.
그리고 이 강제와 자발, 소녀와 매춘부의 이분법적인 구도는 지금도 여전히 성노동자들의 현실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매춘부였다는 이유로 위안소의 폭력을 증언할 수 없었던 수많은 또 다른 ‘위안부’ 여성들처럼, 성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 현장을 떠나 ‘보호받는 여성’의 위치로 돌아오지 않으면 노동의 조건과 폭력의 경험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해외에서 성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나라 망신시키는 년’ 취급을 당한다. 법이 낙인을 강화하고, 다시 낙인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현실에서 안전한 노동을 위해 필요한 콘돔은 단속의 증거물이 되어 도리어 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하지만 이제 성노동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하우를 만들어내고, 이를 공유하며 스스로 주체가 되는 연대의 움직임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베일을 쓸 자격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일 없이 스스로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레드마리아 2>는 불편한 영화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꼭 필요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제국주의, 민족, 국가, 전쟁, 폭력, 강제/동원/자발의 스펙트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 권력과 규범의 복잡한 교차점들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내면화하거나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동조해 온 모든 전제를 쿡쿡 쑤셔댄다. 이제 우리가 이 불편한 질문들을 제대로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
이 영화의 제목이 ‘레드
마리아’잖아요. 전작
<레드 마리아>도 그렇고요. ‘마리아’에 ‘레드’가 같이 들어가서
어떤 힘을 만들어내는데요. 영화를 구성하시게 된 이야기를 제목과 더불어 이야기해 주시면.
경순 일단 <레드 마리아2>이기 때문에, <레드 마리아1>을 보신 분도 있고, 안 보신 분이 더 많을 것 같은데요. 일단 저는 한국의 고도의 자본주의와 사회가 달라졌지만 그 발전만큼 사실 여성에 대한 인식이나 그런 것들이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레드 마리아>의
기획 자체는 그것을 ‘몸’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에서 출발했고요. 그리고 ‘레드’라는 이미지가 주는 것처럼 순결하지 않은, 기존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규정하는 것들을 바꾸는 새로운 여성의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승민 개인적으로는 ‘마리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성경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와 성모 마리아가
있는 것처럼 ‘레드’가 가지고 있는 느낌이 영화 안에서는
여러 결로 느껴지더라고요. 어떤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권의 색깔일 수도 있고요. 그런 것들이 연결돼서 와 닿는 제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영화 안에서도 많은 분이 바깥에서, 마치
박유하 교수의 책을 읽지 않고 접근하는 것처럼 <레드 마리아2>
역시도 보지 않고 무엇을 다루었나를 가지고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만나게 되는데요. 감독님께서는
사실 어머니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노동자, 위안부의 이야기를 이어내셨어요.
이렇게 구성을 잡으신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경순 저한테는 뭐라고 할까요. 이미
성노동자나 위안부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가 제게 포함이 되어 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옆집 언니, 아줌마, 할머니 그리고 내가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이
‘매춘’이나 ‘성노동’과 특히 한일간의 이슈가 된 ‘위안부’ 문제까지요. 그것이 이슈가 된 당사자가 있지만, 이미 우리의 문제가 됐고 나의 문제가 됐기 때문에 분리할 수가 없던 거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성 문제를 대할 때 굉장히 분리되게 대하는 게 있는 거죠. 사실 매춘 여성을 이야기할
때 매춘부와 나는 다르다는 입장으로 접근하잖아요. 굉장히 특수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뭔가 안된 사람들… 여러 가지의 것으로 보지만, 사실 제가 보기엔 여자를 걸레라거나 무엇 같다고 하는 취급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취급으로 그들을 자꾸 특수화하는
것이 저는 불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르지 않은 문제가 왜 굉장히 다르게 이야기가 되고, 불편한 이야기가 되고, 남들의 이야기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에 제게는 영화에서 포함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야기를 함께해야만 좀 본격적으로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게 너무 막혀있다 보니까, 이걸
뚫고 그다음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다음 이야기가 계속 못 나오고 거기에서 피해냐 아니냐 무엇이냐 하는 데서만 멈춰버리는 거죠. 그리고 삭제된 이야기가 너무 많고요.
보다 근본적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고,현재를 직시하는 사람인데 이 작업을 시작할 때 가장 문제의식을 느낀 건‘기록’이었어요.기록이 없구나.내가 뭔가 문제의식을 갖고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는데,기록이 별로 없는 거예요.내가 보고 싶은 어떤 이야기들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 이야기들(의 기록)이 너무 없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그래서 이거 정말 문제구나,이렇게 되면 먼 후세에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게 그리고 그 이야기와 맥락이라는 게.이 영화는 기록에 대한 문제의식도 사실 갖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영화에 나오는 가와다 후미코 선생님이나 배봉기 할머니나 그분들이 지금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제가 그 기록과 역사를 복원하는,그리고 영화 하는 한 사람으로서 기록이라는 게 어떤 의미다라는 걸 다시 한 번 고민하는 것도 영화를 만들면서 있었던 것 같아요.왜냐면 그것 자체가 여성사고 역사고 이런 거잖아요.이제 우리의 여성사라는 것이,저의 오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다시 쓰일 필요가 있다.이런 부분들을 개인적으로 많이 고민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 같아요.
이승민실제로 감독님이 수많은 이야기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머니와 성노동자와 위안부의 이야기를 동일 선상에 둠으로써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힘이라고 하는 것들.거기서부터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고,때로는 그것을 이어내는 부분에서‘왜 이걸 이어내지 못했을까.’혹은‘당연히 연결되는 건데,어떤 의미에서 연결키지 못했던 걸까.’하는 어떤 지점들을 영화 안에서 거기서부터 시작해버리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떤 아래에 있던 이야기들을 위로 올라가게 하면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게 아닌가,시작하게 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감독님께서 이야기하셨는데,기록에 대한‘나’의 입장이라고도 이야기하셨고요.영화에 감독님이 등장하시잖아요.지금까지 영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감독이자‘나’로 등장하는 감독들이 있었는데,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사뭇 다른 접근을 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어찌 보면 감독님이 직접 굉장히 자연스럽게 등장하기도 하지만,감독님의 물음을 다른 여성들 혹은 다른 활동가들을 통해서 굉장히 유연하게 어떤 질문들과 물음들을 던져 가면서 영화를 끌어가시고 저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고 생각했어요.그래서 감독님께서 영화에 개입하시는 방식들 혹은 개입하시면서 영화 속에서 혹은 밖에서 이 이야기를 찾아가신 과정들을 들려주시면.
경순사실 외부에서 저를 볼 때 제가 굉장히 주장이 강한 사람이라고 보는데,사실 저는 굉장히 영화가 주장이 되는 걸 좋아하진 않아요.그래서 제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그런 형식 자체를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하나 있고요.또 하나는,예민하고 불편한 주제일수록 그것이 더더욱 주장이 아니라 관객들의 이야기로 여지를 넘기는,그런 질문 과정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요.그래서 내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결국은 관객들도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겠냐는 선에서 접근했던 것 같아요.그래서 제 속의 어떤 생각이나 입장이 있겠지만,그것이 오히려 더 깊은 곳을 보는 데 방해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너무 깊숙하게는 들어가지 않지만,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한 내 목소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 선에서 편집하고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이승민감독님이 만난 사람들과 감독님이 맺어가는 관계들과 이 영화에서 관계들을 통해서 저희에게 전달하고 있는 이슈들이,결코 명시적으로‘지금 이 이야기들은 성녀와 창녀로 나누어져 있는 여성 이분법에 대한 거야!’라는 주제화를 단 한 번도 하고 있지 않지만,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것을 관통하게 하는데요.그것이 비단 이 문제뿐 아니라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불거져 나오는 이 사회의 이슈들,그동안 담론이 되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더라고요.이승연 위안부 사건 그 사건에 정말 많은 정책이나 달라붙어 있는 이미지들,가장 최근에는 아이유의‘제제’까지도 사실은 우리가 다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것이 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성격이라고 하는 것들.덜어내지 못할 때 계속 달라붙는 이야기구나.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생각을 하게 했던 것 같아요.주장의 방식이 아니라 이렇게 저희에게 던져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더 환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영화이지 않았나 합니다.
관객1영화 잘 봤습니다.영화 자체에서는 가부장적 인식을 문제 삼고 있는데,솔직히 영화를 자세히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가난함’이거든요.여성들의 가난함이 제일 많이 나온다고 저는 느꼈어요.어떻게 보면 성노동과 성노동자의 처지라든지,성노동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와,그에 따라서 추후에 영화를 만드실 때 그런 것들이 반영될지도 궁금합니다.
경순전작<레드 마리아>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약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저는 아이를 낳고,섹스하는 것 자체도 다 성노동이라고 생각해요.그런데 임금을 받고 하는,직업으로서의 성노동은‘성서비스’가 되는 거죠.그걸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노동하시는 분들의 일이라고 하는 거기 때문에요.그들이 그 말을 쓰는 걸 오히려 불편해하잖아요. ‘어떻게 섹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지 어떻게 노동이냐.’고.그런데 저는 노동이라고 생각해요.출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노동의 일환이라고 저는 생각해요.단지 그게 우리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서,예를 들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어떤 윤리와 관습에 계속 맞섰던 거잖아요.그런데 엄밀히 생각하면 가부장이라는 사회는 일부다처제거든요.이 가부장 사회가 유지됐던 것은 사실 집 안에 있는 여자와 집 밖에 있는 여자의 존재가 가능했던 구조라는 거예요.그런데 그걸 우리가 자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고 과거에는 돈 없는 여자,집 안의 구조에 들어가기 힘들었던 여자들은 다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노동은 거의 그런 일이었던 거죠.이런 부분들을 좀 다시 다양하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거예요.그렇지 않다 보니까 사실 가사노동 이런 얘기는 근대 이후에 나오고 있잖아요.근대 가족이 만들어지고 전업주부가 생기고 하면서 나온 얘기지,여성들은 계속 어떤 형태로건 노동을 했거든요.성노동도 늘 했고,육체나 일반 생산 노동도 늘 하고 있던 거죠.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역사에서는 기록되지 않다가 여성의 문제나 여성인식이 점점 높아지면서 여성의 권리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여성사가 사실 생긴 거라고 봐요.그런데 그 안에서,구체적인 그 가부장 안에서 집 밖에 있던 여성들의 역사는 사실 여자들이 스스로도 부정하고 싶었던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으로 치환되면서 계속 그 이야기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제 영화라는 것은 결국,감독이나 작가라는 건 결국 자기 이야기가 반영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까 늘 이런 이야기는 반영되겠죠.조금씩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내용이 다를 뿐이지,제가 설정하는 여성에 대한 캐릭터나 그런 이야기들은 결국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관객2안녕하세요.영화 정말 잘 봤고요.무겁고 힘들 거란 생각을 했는데,성노동을 성노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주셔서 굉장히 의미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저의 관심 분야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영화를 보면서,감독님이 연결한 상황들이 약간 그렇게 연결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있었는데요.어떤 부분이냐면,감독님의 작품 속에서는 이 사안을,여성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 성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에서 동일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걸 위안부 문제에 대입하게 되면,위안부 문제는 성,계급에 더해 민족의 문제가 있잖아요.더군다나 일본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서 그 모순을 식민지로 전가하는,식민지에서 그 모순이 더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거죠.그것이 식민지에서도 성과 계급의 문제가 중첩되면서 한국의 피해자 여성들이 더 많이 탄생했다는 측면들이 있는데요.이걸 성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만을 다루게 되면,사실 일본인 피해자들과 조선인 피해자들 사이에서 조선인 피해자들이 민족##을 덮어쓰게 되면서####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 사장될 여지가 있다는 것 하나하고요.
또 하나는 감독님이 박유하 씨의 멘트를 따셨는데요.제가 박유하 씨의 글을 다 읽고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박유하 선생의 그 글이 구조를 미화한다는 생각 때문이거든요.무슨 말이냐 하면,성,민족,계급 이 모순들이 중첩되면서 작동되는 권력의 작동방식을 구조적으로,근원적으로 물었을 때 이것이 어떤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데 박유하 선생의 글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글이었어요.더군다나 한국 사회에서는 매춘의 문제를 들어서 이것이 계급 모순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매춘문제일 수 있다고 하는 문제 제기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박유하 선생의 글의 효과는 현실의 구조 자체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측면이 있다고 저는 보거든요.그런데 감독님이 멘트를 따오게 되면서 박유하의<제국의 위안부>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고민할 때,더군다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식민지에서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은 성,계급,민족의 모순을 가장 심하게 받은 피해자 여성들인데 그 피해자 여성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가지고 올 때 지식인이 주의해야 하는 윤리적 측면들이 간과될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거든요.그런데 그 의미성,의미가 있는 그 부분만을 감독님이 사용하신 건 아닐까.해석이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경순그건 말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웃음)저는 박유하 선생님을 제가 영화를 기획할 때<제국의 위안부>가 아니라<화해를 위해서>라는 책 때문에 논쟁이 있던 기사를 보게 됐어요.그래서 저는 굉장히 궁금하더라고요.왜냐면 제가 매춘부 출신의 위안부 이야기를 찾고 싶었는데,이 이야기가 자료가 너무 없고,제가 볼 수 있는 자료들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는데 한국에서 이런 게 있었구나.그 당시 논쟁이 있을 때 제가<레드 마리아>때문에 해외 촬영으로 필리핀에 가 있을 때더라고요.너무 재밌었어요.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도대체 이게 뭘까 하고 처음엔 자료에 있는 논쟁만 보다가 그 자료에 있는 논쟁을 봤을 때도 제겐 박유하 씨의 말하는 입장이 거슬리지 않더라고요.그래서 책을 좀 봐야겠다 해서 봤더니 책이 절판돼서 없는 거예요.그래서 출판사에 어렵게 연락해서 구해서 봤는데요. <화해를 위해서>를 보면서 공감이 갔어요.왜 이게 이렇게까지 문제가 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실제로 박유하 씨를 만나보고 싶더라고요.그래서 물어물어 연락해서 만났는데,만나서 대화하는데 너무 잘 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거죠.예를 들면,관객분께서 말씀하시는 어떤<제국의 위안부>의 문제나 학문적 위험성이 있다는 부분과,저는 학문 쪽과는 관련이 없는 일반적인 사람으로 내가 평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느꼈던 어떤 게,분명히 연구하신 분들이 다른 비판을 했던 분들이 있지만,범 위안부로 묶여있는 이 속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이 답답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박유하 선생님이 너무 잘 이해가 됐어요.그러니 저는 그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공격을 당하는 것일까. ‘이렇게까지’라는 부분이 약간 의아한 사람이에요.사실은 제가 영화에서 국내 위안부 할머니들이나 국내 위안부 운동을 영화에 찍을 생각이 없었어요.그런데 영화 자체가 중첩으로 있기 때문에,이 비판의 목소리가 그 반대의 이야기와 겹쳐 있는 거죠.그래서 박유하 선생님을 맨 처음에 만났을 때는 자료나 사전 취재 차원에서 만나 뵀다가,그 이후에<제국의 위안부>가 나오고,좀 잠잠했는데 그다음에 기소 사건이 벌어졌잖아요.그래서 촬영하게 되기도 했는데요.실제 제가 영화를 기획하는 데 박유하 선생님이 주신 도움은 제가 영화에 쓴 그 맥락에서 제가 바라본 이해가 가장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서 지금 관객분께서 말씀하신 어떤 책에서의 위험이나 그런 부분은,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들에 의해서 그것이 그렇게 탐독이 되는 부분이 오히려 더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저도 개인적으로 기소 사건에서 검찰과 말했던 부분을 봤는데,책의 내용을 저는 그렇게 안 읽었는데 왜 검찰은 이렇게 도출이 됐을까도 저는 오히려 의아한 사람이에요.그리고 박유하 선생님을 만나거나 세미나나 토론하실 때 보면,저는 이해가 잘 되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될까도 사실 의아한 사람이기 때문에,그러면 한 편으로 보면 내가 이상한 건가?나도 어떤 위험성을 가진 사고를 하는 사람인가?이렇게 거꾸로 보게 되는데요.얘기를 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거죠.물론 가끔 저에게 너무 앞서간다거나,지금 그런 얘기가 먹히겠느냐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박유하 선생 역시도 비슷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좀 하고요.
그런데 제가 일본 취재를 하면서 많이 느낀 게 뭐냐면요.영화에도 나오지만,국내에선 접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인 거예요.그런데 사실은 이케다 에리코 선생님이나 이런 분들이 한국의 위안부 운동의 일본 지지자로 기사나 인터뷰도 하시는 분들인데요.국내에서 본 자료로만 판단을 해보면 저분들의 생각을 잘 모르겠더라고요.저분들이 일본인 위안부,왜 자국의 가난한 여성들의 이야기들은 왜 하지 않았을까 너무 궁금했거든요.사실은 내가 몰랐던 거지 가서 인터뷰하고 물어보니까 다 알고 있지만,가해국이라는 시민의 피해의식이 그런 이야기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는 게 된 거예요.이게 대체 뭐냐.지금 말씀하신 계급,민족의 문제가 위안부에 얽혀 있는 건 사실이지만,그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정확히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여성의 문제가 한 번이라도 민족이라는 국가라는 이유로 보호받은 적이 있었나.없었던 여성들이 가난한 여성들,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이 연대할 수는 없었나.그것이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운동의 초석이었다면 정말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이것이 오히려 민족이고 식민지고 이런 문제 때문에 더 발목이 잡혀서 더 할 수 있는 연대가 안 되고,그 이야기들이 이제는 기록조차 저처럼 이 이야기에 달려들지 않으면 그 이야기에 접근하기 힘들어진 걸 보면서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정말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박유하 씨를 비판하는데 쏟는 그 열정,저는 이것도 정말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이건 영화 외적인 이야기인데요.박유하 씨는 저에게 어떤 취재를 하는 데 있어서 누구를 소개해 주시는 역할을 오히려 하신 거죠.이분이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가진 우호적인 연대의 눈길이나 시선에서 타인은 이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매도하고 있는 게 많은가를 저는 오히려 더 많이 확인한 것 같아요.그래서 그게 더 불편해지는 거죠.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고요.그리고 언론이 지금 그런 역할들을 하는 속에서 과연 우리가 진실을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우리 스스로도 그런 모습을 바꾸지 않는데 과연 그 진실은 어느 우물을 파야 나오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그래서 말씀해주신 위험성이라는 부분은,우리가 좀 길게 봤으면 좋겠어요.길게 보고,지금 얼마나 많은 분이 연구를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막히는 건 피해를 당한 할머니들에게도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요.이게 정말 할머니들을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식도 되게 달라요.여러분들이 찾아보시면 알지만,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가와다 후미코 선생에게 풀어주셨던 방식이 사실 한국 사회에는 별로 없습니다.말이 길어졌네요.어쨌든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또 질문이 나오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승민저도 사실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나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서 아주 당연하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왜냐면 이게 왜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느냐면,영화 속에서도 그렇고 논쟁이 되는 모습 자체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향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위안부에 대한 것들이 정말 그 이야기인가.지금 거기에 붙어 있는,박유하 씨의 책을 저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어렵게 구해서 보면서,삭제된 버전과 아닌 버전을 보면서 왜 이게 삭제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것이 이토록 이야기가 되는지에 대해,이것을 옹호하고 하지 않고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이 그렇게 공론화되고 이야기되는 현장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여기 흥미에 깔린 그 밑바닥은 과연 무엇일까.그래서 제가 읽은 이 영화는,어떤 들끓고 있는 이슈가 있을 때 그 이슈에 달라붙어서 그걸 들끓게 만드는 지점의 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계속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관객3오늘 쇼케이스에서<레드 마리아2>를 보게 되어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요.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하나는 영화 내적인 것인데요.중간에 안병직 교수가 나오셔서 식사하다가,할머니들은 불쌍한데 그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 거짓말을 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분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요.다른 인터뷰들과는 다르게 그 장면만 컷 전환이 갑작스럽게 되고,그리고 나서는 안병직 교수가 다시 나오지 않으시더라고요.급작스러운 컷 전환에 대해서,편집하실 때의 의도가 궁금하고요.
또 하나는,자료집을 보니까 저작권 문제로 작곡을 의뢰하셨다고 하셨는데요.쓰시려다가 못 쓰신 음악이 어떤 건지도 궁금합니다.
경순안병직 선생님은 사실 뉴라이트 쪽 사람이잖아요.이 분을 꼭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위안부 운동 초기에 함께 하셨던 분이더라고요.야마시타 영애 선생님 때문에 알게 되었는데요.본인의 누이가 근로정신대로 끌려가신 거예요.그래서 이 분은 근로정신대와 위안부가 다르다는 걸 굉장히 초기부터 많이 말씀하셨던 분이고,그래서‘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라는 이름도 바뀌어야 하는데,왜 자꾸‘정신대’라고 하느냐고 문제 제기를 초기부터 많이 하셨고요.그러다가 정신대연구소(한국정신대연구소)를 나온 이유가 너무 정대협이 반일 쪽에 초점이 많이 있다(는 거죠).어쨌든 그분은 개인적으로 그런 부분을 많이 비판하셨던 것 같고요.그래서 그만두셨다고 하더라고요.그런데 이분이 계속 근현대 쪽을 연구하셨던 분이고,위안부 문제는 본인의 관심사였고요.그래서 야마시타 영애 선생님이 일본 취재를 갔을 때 만약 기회가 되면 한번 말씀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내키지 않았어요.저도 편견이 있는 거죠.여전히.
안병직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했다.이런 말만 듣고 우리는 안병직을 판단하는데,사실 안병직 선생의 이야기는 모르는 거예요.그래서 궁금했어요.그러던 차에 일본에 있는 우익잡지 중 하나인‘문예춘추’라는 데서 안병직 선생님을 인터뷰하러 왔는데,늘 자기 얘기가 왜곡되니까 거절을 하신 거예요.거절했는데 그러면 기사 인터뷰는 안 할 테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없느냐고 해서 만나서 이야기했대요.아마 거기서 영화에 나온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겠죠.그랬는데 그 이야기가 기사화돼버린 거예요.그러면서 또 내용이 왜곡됐고 그래서 이분이 그 잡지를 고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야마시타 영애 선생님에게 도와달라고 자문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거예요.
이게 참 웃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왜 이런 건 신문기사로 보도가 안 될까.만약 한국에서 다른 위안부 할머니 얘기라거나 안병직에 대한 이야기는,어떤 진위가 아닌 이야기들도 나가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이 이야기는 나가지 않는 거예요.야마시타 영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한국을 보고 있으면 너무 답답하다는 거예요.사실 지금 한국이 공격해야 하는 건 그런 식의 왜곡되는 일본 매체나 그런 걸 갖고 싸워야 하는데,왜 박유하에 그렇게 매달리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굉장히 공감했고요.그때 이야기를 들으면서,스스로도 반성을 많이 했죠.물론 안병직 선생님께도 말씀을 드렸어요.선생님이 가진 어떤 정치 성향의 부분들에는 제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그 부분은 반대한다고.하지만 선생님이 갖고 있는 이런 이야기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그러니까 웃으시더라고요. ‘역시 젊으니까 말을 솔직하게 잘하네’이러시면서.
이런 거예요.과연 우리가 정말 기록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우리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진실과 실체는 무엇인가.이 모습으로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 것인가.이런 것들을 생각하니까 정말 머리가 답답한 거예요.그래서 안병직 선생님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있고요.그리고 그분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도 충격이었어요.왜냐면 제가 늘 한국의 위안부 운동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갑갑했던 게 그거거든요.이렇게 전 국민이 지지를 하는데,도대체 왜 여전히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뀌지 않는지.막말로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고 나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 것이냐는 부분이 제게는 개인적으로 큰 고민이었어요.그런데 그걸 이렇게 정치적으로 맞지도 않는 이 할배가,이 말을 하는 건 제게 굉장히 중요했고요.그 이후에 어떤 논쟁이나 말이 이 영화에선 중요하지 않다고 제가 판단한 거죠.그런 의미에서 넣었던 거고요.
두 번째 질문은,노래는 이것도 우리의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하는데요.제가 사실 후반 제작비가 없어서 편집할 때부터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 음악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그래서 음악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하고,기존 곡 중에서 골라서,그전 상영 때는 음악을 틀었는데요.모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곡을 영화에 썼어요.그런데 계속 그분에게 음악 허락이 안 되다가 연락이 왔어요.자기는 성노동자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성노동자가 나오는 영화에 자기 음악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한다고.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죠.그때 제가 좀 씁쓸했던 건 저 노래를 듣고 수많은,그게 성노동자건 누구건 많은 위안을 받으며 듣는 음악인데 그 음악의 주체자는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는 이 아이러니한 것이요.그렇지만 저작권이라는 게 그런 거기 때문에요.오늘 마지막 엔딩 곡이 새로 작곡한 거예요.
이승민저는 안병직 교수님 장면을 또 다르게 봤는데요.저는 말씀하시는 내용보다 그 말씀 하시는 태도, ‘그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그 태도에서 굉장히 가부장적인 느낌을 받았고,거기에서는‘소유된 우리 여자’라는 태도들이 있는 상태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서 안병직 교수의 그 장면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그렇지만,본인이 궁극적으로 가진 것은 가부장적인 태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 읽혔고요.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던질 때 그래서 페미니즘이 뭐냐고 하는,오히려 반감을 가지는 방식으로,저는 정신대의 문제가 한국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서 정신대의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굉장히 멍했거든요.만약 감독님께서 그 장면에 무언가 더 덧붙였다거나 아니면 다른 인터뷰로 넘어갔다면 오히려 그것을 연결하지 않고 넘어가면서 이 이야기들을 컷으로 연결해주고,급작스럽게 나오는 어떤 다른 느낌과 또 연결되는 거죠.그래서 그 말들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성노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물려주고 그것을 어떻게 안전하게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음침한 불법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 거기서 나오는 감정들이 저는 개인적으로 그 연결이 훨씬 다르지만,힘이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덧대어 이야기해 봤습니다.
관객4잘 봤습니다.다들 소개는 안 하셨는데,저는 정대협에서 국제법을 공부한 사람인데요.정대협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건 절대 아니고요.좋았던 것이,할머니분들과 성노동 여성분들만 다루신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있는 분들까지 같이 병렬했다는 것이 그림같이 전체적으로 모여있는 점,감독님께서 통합적인 시선을 보여주신 점이 감명 깊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한편으로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데 빠진 것들이 있더라고요.수요 시위 장면을 빼셨고,소녀상을 빼셨고 그리고 정대협의 입장을 박유하 논쟁에서는 배경으로 제시한 것 같은데,정대협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셨고요.이것은 아마 감독님이 정대협과 같은 하나의 권력,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결집한 것 또한 무형의 권력체로 바라보신 건지 그러시다면 그런 면에서는 새로운 저항이라고 할까요?문제를 둘러싼 힘들을 감독님께서 그리시려고 했던 건 아닌지.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다 알지만,영문 자막에서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아서 어떤 특별한 생각이나 의도가 있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경순정대협은 굉장히 많은 분들이 지지하고 지원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뭐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그리고 그 안에 계신 분들의 생각도 다 같은 건 아니기 때문에.그런데도 정대협으로 이야기되는 이유는 있는 거죠.그곳이 어쨌든 한국에서의 위안부 운동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제가 초반에도 말씀드렸지만,이 영화의 출발에서는 위안부 운동 자체가 포커스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어쨌든 계속 저는 이 매춘 문화 자체가 여성 문화와 연관이 있고,여성의 몸과 연관이 있는 그 줄기를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부 운동 자체가 이 영화에서 화두가 돼버리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묻힌다는 생각을 했어요.그래서 그 예의 논쟁이 이 영화에서 주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다는 생각을 했고,단지 이 매춘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에는 왜 이렇게까지도 예민한가.그리고 그 현상으로써의 한국에서의 박유하 사건.이것을 보여주는 정도면 저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고요.그런데 위안부 관련 이야기가 되려면 좀 더 다르게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정대협을 굳이 영화에서 따로(다루지는 않았던 거고요).정대협에서는 이 매춘부 출신의 위안부를 끌어안고 있지 않은데 저의 이야기는 그것을 하고 싶었던 건데,가서 그 이야기를 물어보면서 위안부 운동에 대한 영화가 되는 방식을 원하지 않았던 거죠.그래서 굳이 거론하지 않았던 거고요.
지난번에도 비슷한 분이 있었어요.그분도 아마 정대협에서 어떤 활동을 하시거나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 같은데,왜 정대협에는 가서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하시더라고요.그런 맥락에서만 보시면 그렇게 보시는 분들도 계시지만,제가 애초에 의도했던 건 그런 맥락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렸던 거죠.원래 영화라는 게 그렇잖아요.보고 싶은 맥락에서 그 문제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관심을 갖고 보시는 분은 그게 중요할 수 있지만,어쨌든 여전히 저에게 출발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하지만 그런데도 계속 많은 사람으로부터 정대협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미 그 영향이 굉장히 크다는 거죠.그래서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을 싸잡는 건 아니어도 그 대표성에서 분명히 되돌아봐야 할 것은 있고 그런 이야기는 이 영화와 별개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승민영화는 관객이 각자 접속하고 싶은 부분으로 접속하게 되고,그 접속을 한 부분을 보다 보면 아쉬워지는 부분이 있고,그런 부분을 다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영화에 겨냥하는 부분들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굉장히 많은데요.사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모두를 이야기하지 않고 내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서 끌고 가잖아요.그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감독님께서도 전달하신 것 같아요.
지금 말씀하셨던,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요.저는 영화에서 그런 모습들이‘깨알 재미’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예를 들면 영화 시작하자마자 운동권 용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영화를 저렇게 시작했을 때 이제 영화를 보면 왜 그랬을까 하는 작은 재미 같은.운동권 용어라는 걸 들어가다 보니 이야기를 하게 되고,그러다 보니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가서 자기네들만의 이야기가 되잖느냐고 하는 말을 잡담처럼 지나면서 얘기할 때,저는 그것이 어쩌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론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굉장히 감독님스러운 방식으로 깨알같이 던지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부분이었고요.
또 하나는 역시 굉장히 사소한 듯 넘어가시는 장면 중 하나가,라면을 먹는 장면에서 한 번도 컷이나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일본 쪽 액티비스트가 하는 말이‘이 장면만 찍으면 내가 라면만 계속 먹은 것 같지 않느냐’고 하는 게,사실 영화에서 그것이 크게 어떤 맥락을 가져온다기보다는 저는 그렇게 툭툭 들어가는 속에서 감독님이 영화를 향해서 혹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저희가 이것에 어떤 고민의식이 없지 않다고 하는 것이 흩어진 듯 뿌려진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그리고 그것이 감독님 영화를 전체적으로 구성해나가고 있을 때 어떤 사건 위주로,인물 위주로,담론 위주로 끊어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꾸려내시는 것이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말하고 있는 지금의 현상과 굉장히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5영화 보면서 들었던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일단 영화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왜 일본은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이 매춘부들이 많고,왜 조선은 매춘부뿐 아니라 매춘을 하지 않았던 여성들도 동원되었나.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그 부분에 의문이 들더라고요.그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고요.
두 번째 질문은,성노동자 내부에서도 자기수행적 자율성의 측면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들이 많은 거로 알고 있어요.예를 들어서 성매매를 하는 분들 안에서도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하고 합법화하자는 분들이 있는 반면,본인들이 성노동을 하지만 이것은 노동이 아니고,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인정해주는 것과 성매매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싸우는 분들이 계시거든요.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고요.
저는 단지 영화가 피해자가 위안부로서 피해자로 호명되지 않는 가부장제 내의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에 대한 관념에 대한 도전인 건지,아니면 나아가서 자신들의 주체적 자율성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구인 건지 아니면 그 둘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건지.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이 수행했던 카미카제 등에 동원됐던 일본군들이 자기 뜻대로 자율성을 가지고 그것을 이행한 것이냐 아니면 어떤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선택했고 따라서 그 사람들의 개인적인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게 있거든요.제가 박유하 선생님의 책을 보면서도 일본군과 위안부의 사랑도 있었고 서로 도와주는 관계도 있다고는 하는데 사실 위안부 여성들도 이야기했을 때 그걸 믿어서 수행했는지와 그렇게 말하더라도,정말 사랑했다면 오히려 그런 구조 자체가 이해가 안 됐거든요.그런 상황에서 만나게끔 상황을 세팅한 일본 정부와 제국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해야지 그걸 개인의 논의로 넘어가는 것이요.그 부분에 대해서도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했고요.
마지막으로는 영화를 보다 보면 성매매를 수행하는 과정 등에 대한 논의들이 제 기준에서는 굉장히 자세하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화면을 구성하실 때 굉장히 치밀하게 배치하셨을 거로 생각하는데요.저는 예를 들면 피해자가 자신이 성희롱을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할 때 본인은 그런 의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가부장제의 담론 아래서 자신의 말이 성희화화돼서 희석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든요.그래서 저걸 보면서도,과연 저분들은 자신들은 노동으로 한다는 말을 하면서 과연 관객분들이 그걸 볼 때 그런 장면들을 어떻게 해석할까.정말 개개인의 느낌에서 어떤 식으로 그 사람들을 다시 성희화화하는 방식으로 보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특히 콘돔으로 풍선을 터뜨리는 그런 행위를 했을 때 보면서 우려되기도 하고,저조차도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께서는 어떤 의도로 넣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경순혹시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저보다도 여기 계신 다른 관객분들이 다르게 보신 분이 계시면 이야기해주시면 어떨까 싶은데요.지금 질문하신 분처럼 보셨는지 아니면 다르게 보셨는지요.
관객6저는 다르게 봤는데요.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노동자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수월하게 해내는 능숙한,전문성을 가진 거로 봤습니다.
경순감사합니다.왜냐면 이제 그게,제가 영화를 오늘 여섯 번인가?일곱 번째 상영인데요.아직도 보지 못한 분들이 많기 때문에 보신 분들의 반응이 이렇게 두 가지예요.한쪽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가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그런데 너무 그런 장면들이 포르노그래피같고 그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하시는 분이 계시고요.한쪽에서는 성노동이라는 게 무엇인지 실체가 안 보였는데 어떤 노동이 노동인지를 보여줘서 좋았다,이걸 가지고 직업이고 전문성이고 라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어느 쪽이 맞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저는 그런 것이 보이길 바랬던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첫 번째 질문은,성노동자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 쓰인 지가 얼마 안 됐어요.그래도 벌써 한10년은 되어가는 것 같은데요.이10년이 되는 동안,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면1987년도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어요.전국에 있는 노동자들이,하물며 현대 뭐 이런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자기가 노동자라는 의식 없이 살았던 그 시대에 어쨌든 전국에 있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큰 싸움들이 있었거든요.그때 자기가 노동자라는 의식을 못 했던 이 노동자들이,자기가 노동자라는 의식을 가지면서 엄청난 권리 이런 것들에 자극을 받기 시작했던 거죠.저는 성노동자들을 보면서 그 생각이 들었어요.이 친구들이 매춘 여성,성매매 여성으로 불릴 때와 자기를 성노동자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되게 많이 달라지는 거예요.나도 인간답게 살 수 있구나,나도 내 직업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구나.저는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봐야 하는 인권의 개념은 여기서 우리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그것이 먼저 옳다 아니다 이건 앞으로 계속 논의되고 고민해야 하는 거고,그것이 처음이고 당황인 사람들은 시간이 필요한 거고요.그래서 지금 있는 이 흐름으로 뭐가 더 맞고 틀리다,제 입장은 있지만,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왜냐면 우리가 이미 접하기 시작한 지가 얼마 길지 않기 때문에 저도 처음에 당황했던 시간이 있는 것처럼 그건 앞으로 계속 고민하면서 달라져야 하는 거지 지금 한 부분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 같고요.
두 번째 질문은,저는 그렇게 생각해요.저는 사실 섹스에 자유롭지 않아요.제 환경이.그래서 저는 오히려 남성들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게 굉장히 불만인 사람이에요.나에게도 그런 자유가 있으면 좋겠다가 오히려 더 먼저인 거죠.그니까 지금 젠더화 되어있는 건 사실이고,여성들이 훨씬 이 사회 구조에서 공급자 입장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저의 포커스는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저의 욕망이에요.아까 말씀드렸듯이 성노동자나 매춘부,위안부 이야기,저의 부모님에 대한 시선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저의 간절함은,저도 이렇게 자유롭게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똑같이.그리고 지금은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우린 자유롭지 않아요.저는 그게 더 불만이에요.그리고 그분들이 영화에서도 봤지만,실제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은 거죠.과거 식민지 시대나 그전에는 정말 팔려서,구조적인 인신매매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본인이 자긍심을 갖고 그 일을 하는 거고,그런 점에서 아마 조사하면 통계치가 더 많이 나올걸요?그래서 그 성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나를 위해서 이런 인식들이 바뀌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예를 들면,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휴 얘,차라리 원나잇을 하면 괜찮아.그런데 어떻게 섹스를 돈 주고 하니?그건 말이 안 돼.’라고 하시는데,왜 그게 말이 안 되는지.그 이유로 그걸 반대하는 것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그렇게까지 해서 자기가 힘들게 했는데,돈을 받는 게 왜 나쁜가.그리고 일이 그것이 오랫동안 직업화되어 있는데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그러면서 반대를 하지만 그 사람이 처한 환경,지금도 모텔에서 성노동자들이 그렇게 하다가 죽는 사례가 많아요.우리는 사건 터질 때만 가십 정도인 거지 그걸 왜 보장을 해 주지 않느냐고요.만약 그렇게 한다면,제 생각인데,저는 훨씬 건강한 거래가 이루어질 거라고 봐요.예를 들면 여자들의 경우는,저도 나이가 있기 때문에 제 주변에 결혼을 한 친구나 선배들이 그렇기 때문에 알지만,정말 오히려 결혼한 사람이 성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 더 많아요.그러니까 이런 걸 왜 우리는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는가.왜 이런 걸 욕망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이 저는 답답한 거지 그 친구들의 그런 건,당연히 만들어져야 하는 거죠.다른 문제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어쨌든 제가 답변드리는 건 이런 방식인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객7저는 영화를 어떻게 느꼈냐면,예를 들면 굉장히 심플하고 매혹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위안부와 매춘부를 함께 어떤 병렬이라고 하셨는데,저는 병렬이라기보다는 사실 보이는 사람들의 사는 것을 함께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예를 들어서 정대협이 처음에 시작할 때 여성단체였음에도 불구하고,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피해자로 호명하면서 사실상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지워버렸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왜냐면 증언집만 봐도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변해가나 하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독립투사가 아니었는데 나중에 가면 독립투사가 되고,끌려가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증언집에는 끌려갔다고 나오고.그런 우리의 열망이 거기에 투사돼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지워나가고 우리가 듣고 싶었던 것들만 듣게 되면서 실제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우리가 원하는 목소리들이 모여서 만든 초상이 대표적으로 위안부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근데 우리는 사실상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어떤 분들은 피해자다,예를 들어 성매매 종사하시는 분들에 대해서‘성노동자는 피해자다.’혹은‘불결한 여성들이다.’이런 이야기들은 많이 나오는데 정작 성노동자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듣지 않았잖아요.그러니까 우리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목소리와 박유하 선생이 이야기한 부분들이,아까 관객분이 위안부들의 증언을 들으면 연애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부분을 가지고 마치 피해자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박유하 선생이 한 건 잘못이 아니냐고 하셨는데요.바로 그 부분이 아까 그분이 이야기하신,구조적 모순 속에서 강요된 어떤 것이지 거기서 연애를 했으니 피해자가 아니냐고 박유하 선생이 책에서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오히려 그 점을 지적했지.그러니까 제국주의적 구조 안에서 그 여성들이 이‘위안’이라는 이념 하에 당했던 삶 전반을,우리나라에서 듣고 싶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삶 전반을 끌어오기 위해서 애썼던 책이 저는<제국의 위안부>라고 생각하는데요.그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사라진 목소리들을 찾아서 들려주고.그것과 동시에 우리가 듣고 싶지 않았던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줘서 굉장히 좋았고요.
영화를 보고 나서 사실 저는 이 영화를 일반 대중들 특히 한국의 전형적인 남성들 그리고 남성화된 시선을 가진 여성들이 보면 한마디로 박유하 선생이 마녀사냥을 당한 것처럼 굉장히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굉장히 용감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요.그런 부분이 두렵지 않으셨어요?저는 이렇게 독립영화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아니라,그런 일반 대중들의 어떤 돌팔매질이 두렵지 않으셨는지.
경순사실 그래서 초기에 영화를 기획할 때 많은 분이 우려를 하셨죠.그리고 저도 조금 너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그런 논란에 휩싸이는 걸 피하려고 노력했던 건 사실이에요.그래서 빚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공개적으로 작업하지 못하다 보니.그런 힘든 점이 있었지만,그런데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그만큼 더 답답했기 때문에,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그런 공격이 있는 건,공격이 있는데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그러나 그런 공격이 있을수록 우리의 수준을 보는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더 많은 걸 얻을 수도 있는 거죠.그렇게 생각하고요.또 제가 박유하 선생처럼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까 싶습니다. (웃음)
이승민저는 오늘 보면서 되게,자신의 위치들에서보다 더 많이 어떤 보이지 않는 대중에게,관객을 염려하는 마음을 더 많이 느끼시는 묘한 시선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그러니까 대중을 믿자,관객을 믿자 이런 게 아니라,왜 우리는 더 많이 일어나지 않은 많은 일에 염려가 더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하기도 했습니다.이 영화를 공격하는 사람이든,제가 시작하며 말씀드렸던 아이유의‘제제’문제에 공격하는 사람이든 그들도 공격하면서 한 게 아닐 거로 생각해요.하면서 변하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이야기가 생겨나고.어쨌든 그 담론이 일어난 걸 지켜보고,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어 움직이는지 그 힘들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어떤 힘의 방향이라고 저는 감히 한 번 생각하고요.그런 부분에서 감독님의 작품은 여러분이 말했던 것처럼 제게도 파격적인 부분이 분명 있는데,그 파격의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 너무 일반적일 수 있는 것들이지 않나.그리고 그것이 또 담론이 되고,논쟁이 되고 나아가서 말씀하셨던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어떤 지점이 이 영화를 키울 힘일 수도 있고 이 영화가 고민하는 영역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는 엄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성노동자의 이야기와 한일 위안부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어떤 연유인지 연결 자체를 부정하는 어머니, 성노동자, 위안부를 영화는 ‘감히’ 동일선상에 놓고 이어내고 있다. 여기에 더해 감독은 자신에게 스스로 던진 질문을 향해 이들이 속한 세상을 만나간다. 엄마에게 묻고팠던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 사회에서 담겨지고 살아내는 ‘여성’들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경순 감독의 <레드 마리아2>의 힘은 바로 이 유연한 ‘연결’과 ‘물음’ 그 자체에 있다.
경순 감독의 <레드마리아2>는 전작 <레드마리아>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레드마리아> 역시 유연한 ‘연결’의 힘을 통해 여성의 다양한 결을 드러내었다. 한국, 일본, 필리핀을 넘나든 영화는 여성의 몸에 새겨진 기억을 담아내면서 여성과 세상이 맺고 있는 다층적인 관계 맺음을 이어내었다. 노동과 여성, 빈곤과 여성, 이주와 여성, 성과 여성, 거주지와 여성을 다층적 결을 여성의 몸을 통해 이어낸 영화는 여성에 대한 통념적이고 도식적인 인식을 가뿐하게 넘어서면서 친밀하면서도 담담하게 말 걸기를 시도했었다. 그리고 4년 후 지금 <레드마리아2>는 전작의 문제의식을 더 날카롭고 더 구체적으로 대면하고 있다.여성으로 대표적으로 통칭되어 소구되는 그룹에 다가가 그들 개별 여성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이 사회 속에서 이들 여성이 놓인 위치에 대해 조용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그리고 묻는다. 노동운동에서 성노동을 배제하는 상황, 성노동자를 범죄자 취급하는 모습, 위안부 여성을 숭고화시키다 못해 박제화하는 모습, 일본 위안부와 한국 위안부를 애써 분리하려는 담론, 그리고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 엄마를 손가락질하던 주변 상황까지. 드러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의 논조가 내재되어 있다. 여성을 ‘창녀’와 ‘성녀’로 이분법화하는 그 저렴하고도 비루한 편견.
영화는 편견의 실체를 드러낼 뿐 가르치려 들거나 주장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저 이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이 사회에서 발현되고 있는지를 유연한 연결을 통해 접속시켜내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성노동자-위안부의 연결은 한 뿌리에서 파생된 여러 줄기의 현상들을 직시하게 하는 당연하고도 파격적인 구성이다. 매춘에 대한 ‘낙인’을 거둬내고 바라보면 실체는 늘 그렇듯 간명하다. 어머니는 성을 기반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며 붙여진 이름이며, 성노동자는 성을 노동으로 임금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직업이며, 위안부는 전쟁터에서 성노예로 유린당한 피해자 여성들인 것이다. 영화는 이 간명함(!)을 기반으로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지를 드러낸다. 영화는 여성의 성에게 둘러싸여 덧입혀지고 왜곡된 도처의 사건들을 차분히 조망하는 듯하지만, 그 차분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깊은 한숨을 자아내도록 한다. 말 사이사이, 행동 사이사이에서 행간이 읽히기 때문이다.
특히 몇 장면이 영화 끝나고도 맴돈다. 운신도 힘든 위안부 할머니들을 전면에 앉히고 자신들의 목소리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규탄하는 나눔의 집의 집회 장면, 위안부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여 국가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의식을 드러낸 안병직 교수가 불쑥 드러난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박유하 교수가 전화에 시달리며 반복하여 말하고 또 말해도 소통되지 않는 과정들을 지켜보다 보면 여성을 둘러싸인 겹이 얼마나 얄팍하고도 두터운 지를 동시에 체감하게 한다.
가부장 담론에, 민족주의 담론에 칭칭 감싸여 있는 여성문제의 정체와 본질에 다가가는 작업으로서, 영화는 연대와 공감을 구축해가는 성노동자들의 인권 활동과 함께, 야마시타 영애의 문제의식과 더불어, 박유하의 연구와 행보를 지지하면서 그리고 위안부 배봉기 씨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삶에도 힘을 얻은 가와다 후미코와 나란히 서 있다. 여성을 여자사람으로 애써 치부하지 않아도 ‘여성으로서 제대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몇 중의 가능성의 조사 나열이 안타까운 문구이긴 하다)으로 영화는 놓여있다.
영화만들며 놀기<민들레>1999,<애국자게임>2001,<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003,<쇼킹패밀리>2006,<잼다큐 강정>2011,<레드마리아>2011,모든영화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음.
redsnowm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