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의 촬영은 사실 19일 카나가와 현에 위치한 단체들이 참여한 춘투 총행동부터 시작되었다. 일전에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과 했던 일일행동과 비슷한 일정으로 오늘 춘투도 진행됐는데 각 기업이나 작업장을 항의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날 모니카는 유니온 활동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날은 모니카를 중심으로 춘투 일정을 좇았다.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모니카의 일상생활을 촬영하기로 했다. 주말, 촬영하는 덕분(?)이라며 오랜만에 언니가 놀러 온다고 했다. 모니카가 사는 곳은 도쿄 외곽인데 집 앞으로 개천이 있고 유채꽃이 가득 피어 있다. 그 길로 쭉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제법 많은 사람들이 피크닉을 즐기러 나와 있었는데, 모니카도 마트에서 산 도시락을 사가지고 와서 조금 늦게 도착한 언니와 나눠 먹었다.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활동가이자 모니카의 친구인 콘도상도 함께 했다. 언니도 페루에 있다가 동생인 모니카보다는 조금 늦게 일본에서 생활했지만 그녀도 일본에서 생활한지 오래된 탓에 모니카와의 대화 중간 중간 스페인어보다는 일본어가 많이 튀어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모니카와 언니가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보였다(!). 이날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었는데 저녁에 몹시 추웠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을 넣은 유탄포(보온용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잤다. 일요일 모니카도 단테도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이것저것 하는 모습들을 촬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연극을 관람하기로 했다. 니케진, 파견노동 등을 주제로 한 연극이었는데 우연히도 연극의 주인공 이름도 마리아였다. 연극 관람 후 친구들과 맥도날드에서 담소를 나누고 난 후 집으로 갔다.

다음날 월요일 이날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요일 때와 비슷하게 하루 일정을 보내고 저녁 즈음 모니카가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다. 방문한 곳은 일본 내 거주하는 외국인(99.9%가 캐나다나 미국 등지에서 온 백인)이 모이는 모임이었는데 이날 상영한 다큐멘터리도 일본 내 있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이주노동자를 주제로 한 영화였다.

공장 일이 있었던 다음 이틀간 모니카의 출근 날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뉴스를 보며 날씨를 보는 등의 모습을 촬영했다. 공교롭게도 공장 내 촬영을 허가 받지 못해서 부득이하게 출근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었는데, 이조차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촬영해야 하는 것이라서 아쉬웠다. 요즈음 모니카는 공장과의 교섭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하는 것이 무척 예민한 문제였던 것이다. 어쨌든 멀리서나마 모니카가 출근하는 장면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대로 출근 장면을 이튿날에도 한 번 더 찍고는 모니카의 생활 모습 촬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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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2일

경순과 경은은 시즈오카에서의 촬영 때문에 11일 날 출발하고, 나는 따로 사토상의 일상을 찍기 위해 코리야마로 출발했다. 13일에 있을 파나소닉 공판과 14일 날 딸의 결혼식 등 중요한 일정들이 있었다. 5시쯤 코리야마에 도착했고 사토상이 마중 나와 있었다. 첫날 굉장히 긴장을 했었는데 이유인즉슨 그동안 통역을 해줬던 친구들이 없이 처음으로 혼자 촬영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토상과 사토상의 가족들과 먼저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족들과 손짓, 발짓, 영어, 일본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다가 사토상이 저녁에 집안일 하는 모습부터 촬영했다. 내일 있을 파나소닉 공판과 관련하여 무언가를 할 것 같았는데 이미 일주일 전에 그런 준비들은 끝내놓은 터라 달리 준비할 것이 없단다. 내가 오지 않았던 일주일 전에는 굉장히 바빴는데 이번 주 일주일간은 그나마 여유로운 편이라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사토상의 일상생활을 좇아 촬영할 예정이다.


2009년 3월 13일

오늘은 파나소닉 공판이 있는 날이다. 사토상이 아침에 정신없이 준비해서 나와서 공판이 있기 전 그 앞에서 짧은 거리홍보와 짧은 집회를 했다. 가장 긴장되는 촬영 날이었지만, 실상 이날 촬영은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재판이라고 하지만 다음 재판 회기를 짧게 언급하는 정도였긴 했지만, 심지어 이날은 재판소 앞마당에서 조차도 카메라를 들지 못하게 했다. 아쉬운 대로 기자회견 겸 짧은 집회(일본에서는 주로 집회라 함은 한국에서와는 달리 실내 건물 안에서 발표하는 느낌의 모임을 말함) 시간을 가졌다. 일전에 코리야마 역에서 경순과 사토상의 인터뷰를 했던 아사히 신문 기자가 이날도 함께 참석해서 기록을 했다. 외에도 기자 5여 명 정도가 참석해서 기록을 했다. 이날 사회는 사토 쇼코 상의 남편이 봤다. 생각해 보면 정말 사토 쇼코상의 투쟁에는 그녀만큼 그의 남편도 늘 함께였다. 간단한 집회가 있은 다음 시청으로 가서 파나소닉 문제 등을 공무원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도 갖었다. 사실 이날 이야기는 ‘건의’의 형태로 더 많이 이루어졌다.

오늘, 재판도 재판이었지만 내일 있을 큰 딸의 결혼식 때문에 쇼코상은 더욱 정신이 없어보였다. 집에 돌아가니 쇼코상의 시부모님이 와계셨다.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서 싸오신 일본요리들을 먹고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여러 이야기를 했다. 쇼코상은 시어머니에게 최근에 큰 아들이 직장에서 월급이 깎인 이야기, 자신의 재판 등 자신의 이야기들을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 했다. 또 내일 있을 큰 딸 나호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큰딸 나호 30세, 둘째 타쿠 28세, 막내 유키 20세)  (이날 사토상 찍은 테입 ②번 사토상의 요구로 초반 시어머니와의 대화 걸러야 함)


2009년 3월 14일

드디어 사토 쇼코상의 딸 나호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중요한 결혼식 당일이었지만 이날은 가장 중요한 결혼식 장면을 촬영하지 못했다. 일본과 한국의 결혼식이 크게 다른 점은 한국의 결혼식보다 일본의 결혼식은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참가하지 어렵다는 것이다. 이날 특히나 신랑측이 촬여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촬영할 때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당황해서 허둥대기 일쑤였다. 아쉬운 대로 중간 중간 쇼코상이 결혼식 전 준비하는 모습, 딸과 대화하는 모습(딸의 모습도 아쉽지만 앞 모습을 촬영할 수 없었다) 등을 촬영했다. 결혼식은 꽤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결혼식 도중에 몇 번이나 쇼코상은 결혼식에 함께 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나에게 전화를 하며 괜찮냐고 물어보고 음식도 가져다주었다. (사토상도 참, 실은 좀 민망하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결혼식을 마치고 피곤한 얼굴로 다들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가족들 이야기 하는 모습들을 본격적으로 찍고 싶었는데 실은 가족들 대부분이 촬영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시어머니와 대화하는 쇼코상의 모습을 다시금 찍었다. 쇼코상은 시어머니와 어제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틀 연속 긴장한 탓인지 쇼코상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2009년 3월 15일~16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주로 부엌에서 이것저것 씻고 준비하는 모습을 찍었다. 주로 쇼코상을 좇아 하던 촬영이 밖에서 집회하거나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는 모습이었다면 오늘은 주로 쇼코상이 집에서 일상적으로 지내는 모습들이었다. 이틀을 밖에서 힘들게 보낸 탓인지 오늘은 조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의 쇼코상이었다. 이날은 오후에 돌아가신 쇼코상의 부모님 산소에 가기로 했다. 나호의 결혼을 이야기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의 산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소 앞에서 쇼코상과 나호의 모습을 촬영하고 돌아오니 오후, 저녁 준비를 하는데 이날은 내가 마지막으로 쇼코상네서 묵는 날이라고 근사한 저녁을 준비해주셨다. 어쨌든 이날 다들 마지막을 아쉬워하면서 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이곳에서 일주일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일본어가 많이 늘었다. 다음날 오후 버스였기 때문에 다시 쇼코상의 일상을 찍었다. 아들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등, 아침부터 오랜 시간동안 쇼코상은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메일을 확인하고 청소를 했다. 쇼코상이 밖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을 좀 더 많이, 잘 찍고 싶었던 점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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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5일~6일

<방마리아 어머니 일상> 

10시쯤 혜진의 사무실 출근 시간에 맞춰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사무실을 방문했다. 도착하자마자 방마리아 어머니께서 도착하셨고, 통화업무를 보신 뒤, 밖에서 볼 일이 있다고 하여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을 나왔다. 8년 전, 마리아 어머니의 도움으로 비자를 얻고 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분으로부터 2주 전에 전화가 와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혜진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경은도 사무실 주변 일대를 돌며 사진을 찍기로 하고 나와 경순은 할머니의 업무를 쫓아가기로 했다. 사무실에서 두 시간 걸쳐 떨어져 있는, 무려 전철을 5번 정도 갈아타고 일본에서 난생 처음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이리구치(정확치 않음)라는 곳에 도착했다. 근처에 와서 마리아 어머니를 보자마자 달려오신 분은 울면서 마리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16년 전 한국에서 일본으로 와서 일을 했는데 8년 전 갑자기 몸이 안좋아져서 입원을 했는데 심장 쪽에 문제가 생긴 것이란다. 그런데 당시에 오버스테이인 처지인데다가 입원비가 없어서 힘들어진 차에 지금의 재일교포인 남편을 통해서 마리아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8년 전 그렇게 도움을 받고 나서 어떻게 연락할까 고민하다가 이제야 연락을 한다며 굉장히 미안해했다. 도착한 조그만 아파트에 시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지내고 있고 시어머니는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정기적으로 시설에서 지내실 때가 있다고 했다.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한국 이주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방마리아 어머니 덕분에 받았다는 비자와 장애인 할인 택시권과 생활보험 카드 같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가기는 두 시간이 걸려서 갔는데 머문 시간은 채 1시간도 안 돼서 금방 나왔다.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집에 손자와 아들이 와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갔다. 이전에 어머니 댁에서 회를 얻어먹지 못한 내가 대표로 오늘 먼저 어머니 댁에 가있기로 했다. 18살 때부터 뱃일을 해 오신 아버지(방마리아 어머니 남편)가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스시를 만들어 먹고, 옛날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시더니, 옛날 애인이었다며 이미자의 ‘동백꽃 아가씨’를 틀어주셨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온 경순, 경은, 혜진이 오고 노래방 기계를 틀고는 다들 춤을 추고(예전에 필리핀 부클로드 세미나 마지막 날 밤 춤 출 때도 그렇더니 이번에도 경은이 제일 신나서 춤을 췄다) 아버지는 그 열기를 이어 노래도 열창하셨다. 이렇게 혜진이 촬영에 함께 한 첫 날도 지나갔다.

다음 날, 어머니께서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낼 옷들을 챙겨 보낼 것이라고 해서 찾아갔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내리더니 저녁까지 세차게 내린 날이다. 사무실에서 200엔 점심을 먹었는데, 재료가 평소보다 비싼 점심이면 300엔을 낸단다. 점심을 먹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버스를 타고 어머니댁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보니 어제 거실에 한가득 있던 옷들이 고아원에 보낼 옷들이었다고 한다. 다 어디로부턴가 기부해 온 옷들인데 각 기관들에서 연령대별로 입을 옷들을 따로 구분해 깨끗이 개어 놓고 계셨다. 이 날 같이 일을 도와주신다고 한, 마리아 어머니의 대녀인 이가라시 상도 오셨다. 정리하면서 ‘대장금’이야기도 하고, 마리아 어머니가 한국 동요도 불러주시고, 아버지가 틀어놓은 쓰시마 섬에 관한 TV 프로그램 녹화 테이프도 보면서 천천히 일을 하셨다. 4시간쯤 계속 일하시다가 정리하고 아버지가 차려놓은 간식을 먹으며 각 기관들에 보낼 주소를 쓰고 택배를 부쳤다. 자주 이렇게 어머니가 일을 하시고, 아버지가 먹을 것을 내오셨다. 저녁에 아버지가 끓여주신 오뎅탕을 미처 못먹고 가니 어머니가 싸주셔서 집에 와서 경은과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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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6일 목요일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일일행동>

카와사키 역에서부터 출발하는 이날 일일행동에서 나는 방마리아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화면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작은 분이셔서 놀랐다가 프리뷰할 때 뵌지라 왠지 모를 친밀감에 반갑게 인사했다. 아쉽게도 이날 일일행동에는 같이 참여하지 못하신다고 했다. 이날 일일행동은 오전에 3개, 오후에 3개의 회사를 찾아다니며 그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리플렛을 나눠주는 등의 행사를 진행한다. 그 회사에는 후지필름이나 혼다와 같은 대형 기업들도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많았는데 현재는 닛케진이나 페루에서 이주하여 노동자였던 사람들이 많아졌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해본 사람중에는 대부분 지금 현재 실직상태라고 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8년 일본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전철로 이동을 했는데 이주노동자 파견문제에 대한 문구가 적혀진 조끼를 입고 우루루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그간 일본에서 봐왔던 줄맞춰서 천천히 길을 걷는 행진과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재미있었다. 오전에까지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했는데 중간에 전철을 타는 도중에 빠져나갔는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재밌었다.

이날 일일행동치고는 너무 빡빡한 행진일정이었는데 하루 종일 부슬비가 오락가락해서 그렇게 느낀 이유도 있겠다. 이날 경순은 구호를 외치는 도중에 무라야마 상으로부터 ‘꾸역꾸역’ 불려나가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부르기도 했는데 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경순이 진지한 태도로 임한 탓에 사람들도 진지하게 경순의 노래를 들었다. (중간에 가사가 틀리긴 했어도 끝까지 부르는 모습을 보니 멋있더라!) 5시쯤 후지필름 앞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그곳에서 바로 해산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눈 브라질에서 오신 분은 해산하기 전 스텝들 네 명을 차례대로 꼭 안으며 다음에 브라질로 꼭 놀러오라는 말을 하고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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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화요일

<요요상, 카마쿠라의 빵집>

혼자 요요상을 따라 촬영한지 3일째가 됐는데, 찍다보니 서로 느끼는 것이지만 요요상을 따라가다 보면 주로 음식이 나오는 장면이 많아서 자신이 영화에 나올 때 무슨 음식 소개 프로그램 같지 않을까 하며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

카마쿠라는 관광지인데 요요상이 일하는 빵집은 시장 구석에 있는 조그만 가게였다. 요요상은 이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빵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빵을 팔기도 하며 이곳에서 (오늘로 2번째이긴 하지만) 수요일에 열리는 베지식당에서 사용할 재료들을 손보기도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주일동안 왔다갔다 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6명 정도이고, 주로 젊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빵집의 주인 또한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오전에 요요상은 빵집 바로 귀퉁이를 돌면 나오는 조그만 시장(위에 천장이 있는)에서 금방 장을 봤다. 시장이 작아서 장을 보는데도 금방 끝났다. 그리고는 시장 구석에 마련해둔 캐리어와 가방에 채소를 넣어놓고 다시 빵집 주방에서 빵을 만들었다.

구석에 위치한 빵집임에도 불구하고(옆에도 바로 빵집 하나가 더 있었다) 손님들이 꽤 많이 찾아왔다. 점심시간에는 조그만 가게가 더 비좁아졌다. 그때 경은과 나는 그 시간대를 피해 근처에 있는 바닷가에 왔다. 저녁에도 똑같이 빵을 만들다가 8시쯤 넘어서 빵가게가 문이 닫고 그제서 요요상은 오늘 장본 채소로 내일 요리에 쓰기 편하게 손질했다. 주인에게 부탁을 하고 그래서 이곳 주방을 쓸 수 있게 된 것이지만 마음이 급한 요요상이 바쁜 것이 눈에 보였다. 요요상이 사는 곳에는 주방이 따로 있는 집이 아니어서 늘 거리가 먼 부모님집이나 이런 주방이 있는 곳을 전전하며 베지식당을 준비한다고 했다. 몸이 작은 요요상이 그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집에 가니 걱정이 되고, 이날도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가서 내일 또 하루종일 베지식당을 열어야 하니 힘들겠다하니 괜찮다고 자기는 괜찮은데 우리들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이날 생각보다 빵이 많이 남아서 남은 빵도 손질한 채소와 함께 싸서 가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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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1일 / 22일

<요요상, ‘결혼제도 반대’강연 참석 / 공동농장>

토요일 일정은 세 팀으로 나뉘어서 가기로 했다. 나는 바로 오후에 있을 ‘결혼제도를 알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훈코 씨가 강연하는 곳에 요요상과 같이 가기 위해서 코엔지로 향했다. 코엔지에서 요요상을 만나 함께 가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선 그동안 우리 네 명이 한꺼번에 갔을 때 보았던 요요상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는데, 우선 요요상 또한 더 편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오늘 있을 강연은 자유롭게 40명 정도의 인원이 선착순으로 들어와 무료로 하는 강연이었는데 강연자가 오늘 강연내용과 관련한 내용을 자비로 조그만 책자를 냈는데 이를 읽은 요요상이 관심이 있어 오늘 강연을 참석한다고 했다. 오늘 강연자인 훈코씨는 현재 ‘싱글맘’인데 자신이 경험한(사실 못하는 일본말로 들은 거라 신뢰성이 없지만) 결혼제도가 얼마나 억압적인 제도인지를 이야기했다.

사실 오늘은 촬영 그 자체 내용보다도 일본에서의 촬영이 정말 녹록치 않음을 다시 한 번 느낀 날이었다. 필리핀에서도 말라야 로라스의 할머니들을 찾아온 일본 학생들이나 이날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요요상이 참석한 강연’이라기 보다 강연의 기록촬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촬영 그 자체보다 촬영인물과 더 가까워진 것에 더 의의를 두었다. 강연 촬영 내내 스텝들에게 우리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내가 촬영할 수 있도록 요요상이 도와주었다.

22일 일요일, 도쿄의 동부쪽에 있는 타치가와立川 역 근처에 있는 공동농장에 오늘 요요상과 같이 가기로 했다. 요요상은 사짱(시로우토의 난에서 봤던 머리 긴 분)의 소개로 이번 공동농장에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라고 했다. 타치가와는 원래 예전에 미군기지가 있었던 곳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미군이 철수해 있는 상태이다. 경찰이나 자위대가 있는 훈련장에서 헬리콥터를 띄우는 등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소음 때문에 이날 만난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쨌든 미군이 떠나기까지 그동안 지역 사람들의 많은 노력이 있어왔다고 한다. 한국의 평택에서도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이 한창 있어왔듯이 타치가와의 미군비행장 근처에 있었던 작은 마을에서 주한미군 재배치라는 문제에 저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무려 5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오늘 방문한 공동농장도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것인데, 과거 미군기지가 확장하려는 것에 저항으로 그 땅을 미군기지가 들어설 수 없게 그 땅에 농사를 지은 것이 그 일환이라고 한다.

오늘 공동농장에 온 사람들은 이제 타치가와에 있던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운동을 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반전운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고 전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나이대도 성별도 지금 하는 일도 너무나도 달랐는데 각자 관심이 있는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도 이렇게 함께 한 땅에 같이 농사를 짓게 됐다고 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분이 말했다. 오늘은 따뜻해진 날씨에 맞추어 미리 만들어놓은 비료를 오전동안 뿌리고 흙을 갈고, 그날 모인 사람 중 음식을 싸오신 분이 있어 일이 끝나고 나눠 먹었다. 한동안 파고 여전히 땅에 남아 있는 채소 몇 가지를 각자 나눠가지고 가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밭에서의 일이 끝난 뒤 요요상과 오오구라상과 함께 예전에 미군기지가 있었던 자리에 가보기로 했다. 옛날에 있었던 미군기지 안의 사택들은 현재 사유재산처럼 이용되고 있고 또 일부의 땅은 미군이 살던 사택들을 빌리거나 사는 등 사유재산으로 이용되고 있고 일부는 현재 소년원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요요상이 전했다.

아침부터 요요상과 함께 있으면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날이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오늘 촬영하면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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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상 일정 in 코엔지: 시로우토의 난 12호점 이벤트 / 수요 베지식당 / 면생리대 모임 >

‘시로우토의 난(아마추어의 난)’ 12호점에 이벤트가 열리는 코엔지로 다시 향했다. 이곳에서 오늘 각자 손수 만든 옷이나, 액세서리, 잡지, 케잌 등을 작은 규모로 만들어 놓고 판매하는 등의 행사를 했는데, 요요상은 여기서 음식을 만드는 등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았다. 정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도 많이 찾아왔는데,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이렇게 찾아왔다고 했다. 이날은 한국에서도 손님 두 분이 찾아왔었다. 왔다 갔다 하는 사람만 족히 50명이 훌쩍 넘을 듯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알아서 돈을 내고 맥주나 케잌을 먹는 등 자유로워 보였다. 주로 인디음악이 흐르고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홍대 어딘가의 가게와 같은 분위기였다.

이날 요요상의 첫 촬영을 하고 요요상의 일정을 좇아 다음 주에 열리는 수요일 베지식당(채식 식단을 주主로 한 식당)을 촬영하면서 요요상을 이어 촬영하기로 했다. 베지식당은 코엔지에 있는데 특히 코엔지의 분위기 자체가 조그맣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게들이 많았고, 외국인들도 상대적으로 많이 보이는 동네였다. 특히 시로우토의 난素人の 亂이라고 이름 지은 가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구제 옷을 파는 가게이거나 중고물품 등을 파는 가게가 그것인데 베지식당 근처에 다 모여 있었다. 이벤트가 열린 곳은 이 이름을 딴 12번째 가게인 셈이다.  재밌었던 것은 베지식당은 원래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인데 수요일마다 쉬는 날을 이용해서 요요 상이 가게를 빌려 베지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빌린 돈을 이날 베지식당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내는 데 남을 때도 있지만 주로 그 돈이 그 돈인 경우가 많단다. 이날 일본의 공휴일이었는데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오늘따라 일이 더 늦게 끝났다고 하는데 시간을 보니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어있었고 정리까지 마치다 보니 2시가 넘어서야 요요상이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요요상의 방은 고시원처럼 각 층에 얇은 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만 방이었다. 어제 찾아가 본 도쿄 외곽에 있는 부모님 집은 좋은 집이지만 자신의 집은 작고 지저분하다며 방을 안내해주었다. 자신의 주방을 딱히 같고 있는 형편도 아니고 자신의 집도 이렇기 때문에 부모님 집을 전전하며 베지식당에서 쓸 음식재료를 준비한다고 했다. 12호점에는 평소에도 요요상의 친구인 오오쿠라 상이 살면서 지내고 있는 곳인데 요요상이 잠들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오니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늦어졌으니 오늘은 시로우토의 난 12호점에서 잠을 청하기로 하고 늦은 새벽에서야 촬영을 마쳤다.

20일 시로우토의 난 12호점에서 이날 면생리대 만들기 모임이 있었다. 노라의 이치무라 상이 와서 면생리대를 소개하고 한국의 피자매 연대에서 제작된 면생리대 만들기 동영상을 보며 15여 명 정도가 모여 면생리대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있는 아저씨도 있었고 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학생도 있고 한국에서 'W' 프로그램을 찍으러 온 사람도 있었다. 이날 W 제작팀은 이치무라상을 찍고 있었다.

역시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있는 자리임에도 허물없이 이야기 나누고 진지하게 면생리대를 만들며 웃고 음식들을 먹었다. 중간 중간 만들어진 면생리대 모양 또한 다양했다. 중간에 어떤 분은 일본사람보다 한국 사람들이 더 몸에 관심이 많다며 한국에 면생리대를 쓰는 사람이 더 많지 않느냐며 물어왔다.

이날도 코엔지에서는 늦게까지 면생리대를 만들고 새벽이 되어서야 모임이 끝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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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3일 금요일

<전노련 비정규직 노조 집회 및 거리행진>

전노련(전국노동조합총연합) 산하 비정규직 노조의 2․13 중앙 집회가 히비야hibiya 공원 안에서 열렸다. (참고: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이 672만6천명,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련: 공산당계)이 97만8천명,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가 16만 명이고, 주요단체별 노동조합원수가 점하는 비율은 연합 65.2%, 전노련9.5%, 전노협 1.6%이다) 공무원 파트, 여성 파트 등 몇 개의 파트별로 나뉘어져 전체 비정규직 노조원이 수천 명이 참여한 큰 집회였다. 이날의 주요 이슈는 마찬가지로 파견노동이나 비정규직 노동 문제였다.

중소기업들의 사장들이 나와서 발언을 하고 양복차림의 공무원들이 앉아 있거나 생활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의 참여, 비정규직 노조 그 자체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민주노총의 최대 주력 조직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는 지난해에 비정규직을 똑같은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규약 변경을 부결시켰다. 최근에 있었던 민주노총 내 성폭력 문제도 한국 노조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중 하나인데 비단이러한 한계나 문제점은 비단 한국 노조만의 문제점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의 노조들이 조직 확대에 더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노동조합원총수가 정점이었던 10여 전에 비해 계속해서 노조원의 수는 하락세를 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에서의 여성노동자의 위치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로 우리들의 삶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최근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신문의 발표가 보도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일본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비정규직과 여성노동 이슈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주변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날 참석했던 여성노동자들(특히 생협에서 나온 노동자들이 많았다. 일본은 생협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는데, 생협 의 운영진은 따로 구성되어 있어서 비정규직 문제가 나오고 있다고 집회 참석자 중 한 생협 여성분이 말씀해 주셨다)이 가장 눈에 띄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준비해왔었는데 빨간 망토를 두르고 젖소무늬 옷을 입는 등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나에게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중앙 집회가 끝나고 점심을 먹은 뒤 공원 정문에서 출발하여 긴자ginza의 거리를 걸어 거리 행진이 있었다. 거리행진이 있고 경단련(일본경제단체연합회, 한국의 전경련에 상당) 건물을 시위대들이 포위하고 앞에서 30분간 발언을 한 뒤 이날 집회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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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1일~12일

<코엔지/요요기 공원에서 하룻밤>

드디어 일본에서의 3번째 촬영인물이 섭외됐다. 요요 씨를 만난 것은 코엔지에 위치한 작은 가게에서였는데, 그 가게는 요요 씨의 소유가 아니라 공휴일에 맞춰 쉬는 가게들에서 식사와 차를 파는 가게를 잠시 빌린 것이라고 할 때 무척 흥미로웠다. 아마추어의 난(素人の乱)이라는 이름의 가게는 지금 요요 씨가 일하는 형태의 가게뿐 아니라 다양한 업종과 형태로 12개가 있다고 했다. 요요 씨가 하고 있는 가게에서는 간단한 식사와 차를 파는 곳이었다. 빵을 만드는 것이나 요리를 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요요 씨의 가게에 이날 찾아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마찬가지로 공휴일이라서 평소보다 손님이 더 많은 것 같다고 요요 씨는 말했다. 특히 이 가게를 찾아온 사람들은 평소에도 잘 알고 지내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요요 씨는 이런 가게와 같은 활동에 많은 관심이 있어 알바는 최소한으로 하고 나머지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늘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에는 어떤 도움이 될지 불안하기도 하다고 했다. 요요 씨를 촬영하는 것에 더욱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는 요요 씨가 늘 예술이나 독립적인 문화 활동을 해오던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시점에서 이런 문화를 접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활동을 찾아서 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요요 씨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그날 저녁 요요기 공원에서 하룻밤 자기로 이치무라 상과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곧 만날 것을 기약하고 가게 12호점(素人の乱 12戶店 -이 곳은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작은 물건들이나 헌 옷을 이용해 만든 옷 등을 파는 가게였는데 오는 토요일에 이 곳을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다)에 들러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잠시 인사를 나눈 뒤 요요기 공원으로 향했다.

요요기 공원으로 갔을 때는 10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는데 공원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평소 조용한 낮보다도 훨씬(!) 더 조용한 밤인데다 날씨도 찼다. 경은과 경순은 요요기 밤풍경 스케치를 하고 늦게 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공원 관리 사무소에서 텐트촌과 주변에 거주하는 노숙인들을 점검하러 나온다고 했다. 특히 텐트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텐트를 일시적으로 철거해야 했는데 계속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 체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촬영이 허가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관리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촬영하는 것 때문에 이리 저리 망을 보고 피해 있다가 다시 촬영을 해야 했다.  관리소의 점검이 끝난 뒤 사람들은 다시 텐트를 세우기 시작했다. 짐을 몇 개 빼놓고 텐트의 지지대를 빼놓았기 때문에 텐트를 철거했던 것만큼 세우는 것도 금방 끝났다.

목요일은 '노라'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것까지 촬영하고 가기로 했었는데 이곳에 있던 몇몇 분들이 불편해 하셨기 때문에 생각보다 촬영을 금방 접어야 했다. 늘 나 스스로도 간과하고 있었던 문제이기도 한데 블루텐트촌은 공공장소인 요요기 공원 안에 있지만 엄연히 말해서는 또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이곳에서 촬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게 많다. 다른 일본인들이 자신의 집안을 촬영하는 것을 극히 부담스러워 하는 것만큼 이치무라 상과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불편하게 여겨졌을 일이다. 이날 이치무라 상은 메디아르(MediR) 사람들과 함께하는 촬영자와 피촬영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모임을 제안했다. 그리고 우리도 21일 날 있을 모임에 참석하기로 하고 일찍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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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9일 월요일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 다과회의(이치무라 상)>

한 달에 한번 페민 사무실에서 열리는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가 9일에 다시 열렸다. 7시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20여 명 정도가 작은 사무실에 꽉 차게 들어왔다. 네트워크 모임이라기에 딱딱한 회의 분위기를 상상했던 우리는 한쪽에서는 음식을 준비하고 한참 서로들 이야기를 하느라 부산한 모습들에 놀라웠다. 사람들이 다 모였을 즈음 우리는 우리들의 영화를 소개하고 촬영허가를 받았다.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승낙해주었다.

변호사, NGO 활동가, 싱글맘, 가나에서 이주한 여성, 레즈비언, 파견노동자, 교수, 홈리스. 다양한 위치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모인 자리였다. 이날은 도쿄에서 먼 지방에서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그 전날 올라온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나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위치에서 참석했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으며 같은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이날 자리에서 ‘여성의 빈곤화’에 대한 이슈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문제의식이었다.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이어서 각자 자리를 만들어 또 다시 시끌벅적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사실 일본에서의 어떤 모임이라고 하면 정리된 조용한 모습만 그동안 봐와서 이런 시끌벅적한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이치무라 상의 홈리스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노라의 면생리대를 팔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입했고 네트워크 모임을 위한 기부금을 모을 때 조그만 비닐봉지를 돌리자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빈곤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임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여성에게는 특히나 현재 신자유주의의 흐름 이전부터의 구조적인 문제가 작용해왔다. 그것은 여성의 빈곤화를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이는 우리가 첫날 찍었던 ‘일하는 여성의 전국 네트워크 모임’ 때부터도 이어져왔던 이야기이다.

이날 쿠리타 상으로부터 취재정보를 듣고, 영란이 오랜만에 만났다던 영화쪽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나 번역 테입을 부탁하고 저녁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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