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위안부2012. 2. 24. 17:23


[일다] 기사원문보기 >>

 
 
 



조명되지 못한 필리핀 ‘위안부’문제 
경계를 넘어 일본군 ‘위안부’문제 생각하기② 

사카모토 치즈코 mygunmo@hanmail.net

  
 
<일다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기획을 연재한다. 그 출발로 우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담론과 논의 지형들을 살핀다. 다음 주에는 생존자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의 ‘해결’이 생존자 할머니들의 현재 삶과 존엄을 고민해야 문제임을 제기하고, 이를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운동과 생존자 할머니들의 복지 문제를 나누어 접근하는 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과 연대를 위해 일본 내에서의 운동의 흐름과 논의의 지형을 살피고, 또 한국 사회와는 다른 점령지의 역사를 가진 필리핀에서의 생존자 경험과 운동의 역사 및 현재 주요 이슈들을 소개할 것이다. -편집자 주>



2006년은 필리핀과 일본이 국교회복 5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전후 책임문제를 해결하도록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목소리는 필리핀 언론 매체에서 찾기 어렵다. 5월 8일은 50년 전 필리핀-일본 배상조양조인 바로 그 날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아무 움직임도 보도도 없이 지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한 피해들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고, 화제조차 되지 않는다.

반복된 외국지배 역사와 빈곤 속 필리핀


그 이유를 외국지배가 반복했던 필리핀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500년대 들어와 스페인인이 자주 필리핀을 찾아와, 1571년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지배 수도를 마닐라에 설치했다. 그 후 필리핀은 300여 년 동안 스페인 지배를 받았고, 1898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파리조약에서 스페인이 필리핀을 미국에 2,000불로 양도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미군 간섭을 받았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본군의 폭력행위나 일본정부의 전쟁/전후 책임에 대해 논의할 때 대표적인 문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필리핀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 점령 하 필리핀 역사 전문가인 필리핀대학교의 한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연구자’가 쓴 논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필리핀에서는 스페인 지배시대, 미국 지배시대에 대한 관심이 더 많고 일본 점령시대는 짧아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자뿐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연구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필리핀학 조교수는 ‘필리핀은 아직 생활이 어려워서 역사 같은 인문계보다 학생들은 취직에 유리한 IT관계를 전공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아직 피해자가 생존함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외국지배의 역사 속에서 혹은 오늘의 빈곤사회 속에서, 일본 점령 시대, 특히 여성이 피해자가 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회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일제 자동차를 타고, 여성들은 해외이주노동자가 되어 일본으로 간다. 그러나 그들이 할머니 세대와 단절된 것은 아니다. 단지 오늘의 글로벌 소비사회를 사는 세대로서 역사에 대한 공감보다 소비욕망이 클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 성폭력, 성착취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필리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 이야기 중 딸이나 며느리가 엔터테이너로서 일본에 가있다는 이야기도 가끔 등장한다. ‘애기 많은 것이 복’이라는 필리핀 문화와 욕망을 위한 섹스를 금하는 카톨릭 문화로 인해 피임과 낙태에 소극적인 필리핀 사회에서는 몸과 섹스, 임신, 출산 등 ‘성과 생식에 관한 건강과 권리’(reproductive health/rights)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권리를 억압당한 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시급한 일로 보인다.

필리핀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삶

전쟁 당시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했으나, 미군과 필리핀 항일 게릴라 때문에 안정된 지배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위안부’를 데려 돌아다니면서 ‘위안소’를 경영하기보다는 무차별로 강간한 ‘현지조달’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증언 중, 필리핀에 연행된 이야기가 가끔 나오지만, 그분들은 ‘위안소’를 경영할 만큼 비교적으로 안정된 지역이나, 혹은 언제 게릴라 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아주 위험한 지역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리핀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을 들면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해서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눈앞에서 학살해, 여성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준 상태로 강간한 사례가 많다. 자매로, 어머니와 함께, 혹은 이모, 고모 등과 함께 강간 피해를 당한 여성도 있다. 여성의 집이 마치 ‘위안소’처럼 되어 일본군인들이 몇 번이나 다녀온 경우도 있고, 일본군이 점령한 학교나 병원에서 그 일부를 위안소로 만들어 현지 여성을 데려온 경우도 있다.

한국 할머니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필리핀 할머니들도 공포감 때문에 ‘도망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대부분의 필리핀 여성들은 자신의 생활지역 동네나 일본군을 피하려고 소개(疎開)한 마을에서 피해를 당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본군에 의해 감금당한 건물에서 자신의 생활지역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탈출을 시도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항일 게릴라가 도와줘서 탈출한 경우도 있고, 탈출 후 그런 게릴라와 결혼한 여성도 있다.

또한 다시 집으로 돌아온 딸의 피해를 듣고, 부모가 시장(市長)에 상의해서 시장이 일본군에 항의문이나 탄원서를 썼거나 직소한 경우도 있다. 그런 편지서류들은 일본군 자료로서 방위청 방위연구소도서관에서 오늘날 발견됐다.

필리핀 생존자 할머니들은 단 한번만 당한 피해라도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해서 피해신고를 했다는 것, 일본군한테서 강간당한 결과 생긴 아들이 현재도 살고 있다는 것, 피해 후 부모가 ‘빨리 잊으라’고 학교에 보낸 결과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직업을 갖게 된 여성도 있다는 것 등이 한국 할머니들 경우와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선 그런 여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존재하지만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 할머니들 피해사례에도 관심을 가져야 될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피해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여성들의 삶의 존엄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다.

생존자의 현재와 日-韓-필리핀의 사회적 과제

할머니들 증언에 대해 ‘사실이냐’, ‘창피하다’, ‘돈을 받고 싶어서 나온 거다’ 등 피해여성들을 다시 모욕하는 말들이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이 부정당할 때, 겨우 열어준 그들의 입을 다시 닫히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그리고 피해여성들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여성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는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인들과 같은 민족인 일본여성도 ‘위안부’로 끌려갔다. 식민조선 여성들은 취직사기나 납치로 끌려갔고, 일본 점령 필리핀에선 여성들이 무차별 살해, 강간, 연행을 당했다. 지금 우리가 집단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피해 및 삶은 각자 다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1년이나 지났는데, 일본은 가해자였던 남성과 피해자였던 여성이 둘 다 존재하는 사회지만, 여전히 피해자가 나타나기 어려운 사회이며, 일본정부는 아직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익적인 기술이 가득한 교과서가 채택되어 그 교과서로 배운 세대가 이제 대학생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가 된 애초부터 요구해온 것 중의 하나가 ‘교육문제’였지만, 일본에서는 피해자들의 요구와 역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피해자들을 ‘민족의 어머니’, ‘역사의 산 증인’으로 그리면서 그들을 역사 속에 묻고 ‘민족’의 행사에서 자주 언급하지만, 그들의 오늘 삶에 얼마나 관심 갖고 있을까. 그런 민족담론 때문에 3.1절이나 8.15 같은 날의 민족적인 행사 때마다 화제가 되지만, 그들은 한 여성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시민단체들의 힘으로 ‘일본군위안부생활안정지원법’을 입법시켜, 시민단체, 기업뿐 아니라 정부차원으로 생존자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할머니들의 마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웃사람의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며, 나이 많은 할머니들의 작은 생활 변화도 놓치지 않는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민족담론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가 관심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회는 언제 올까.

필리핀에서는 가부장적인 여성 멸시가 여전히 강해서 여성의 몸, 성에 대한 의식이 약하다. 일상화된 성폭력, 성착취, 성매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뿌리가 같다는 점, 오늘까지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 함께 제기되어 본격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 한, 가난 속에서 역사적 관심을 갖기 어려운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방치되고 망각되기 쉽다. 그런 위기감으로 지원단체들은 이들을 잊지 말자고 기념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생존자 할머니들도 한 회원으로 지원단체에 소속하며,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생존자 할머니들은 사회적인 관심은 별로 없어도, 할머니들과 함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는 자식이나 며느리들의 모습이 당사자인 할머니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서 받은 큰 돈을 할머니들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고 가족들이 써버려 현재 할머니에게는 의료비, 사후 장례식비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국가는 늘 여성을 ‘이급시민’으로 주변화시켜 왔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피해를 당한 자는 여성이다. 여성은 늘 국가, 전쟁, 성폭력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한국인과 필리핀 생존자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군의 가해성과 폭력성은 거의 비슷해, 이 문제가 분명한 ‘폭력’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차이점은 필리핀과 한국 사회의 차이점과 연결될 듯하다. 가령, 2차 세계전쟁이 끝난 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여유 없이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생존의 위기를 맞아야 했던 한국인 할머니들과 그렇지 않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필리핀 할머니들의 모습은 다르다.

할머니들은 오늘 한 명씩 돌아가신다. 마지막 힘을 다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주시고 ‘이러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는데, 아무 소용도 없이 숨을 잃어버린 모습은 내일의 나의 모습과 겹친다. 언제나 여성은 남성의 대화자가 아니었지만, 어서 빨리 남성을 여성의 대화자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 기사전체보기

Posted by 빨간경순





http://www.k5.dion.ne.jp/~hinky/
(홈페이지)

http://d.hatena.ne.jp/binbowwomen
(블로그)

 

反貧困ネットワークは、日本で初めてできた貧困問題に幅広く取り組むネットワークです。

반빈곤네트워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생긴 빈곤문제에 폭넓게 대처하는 네트워크입니다.
빈곤문제에 대처하는 다양한 시민단체, 노동조합, 법률가, 학자 개인들이 모여, 인간다운 생활과 노동의 보장을 현실화하고, 빈곤문제를 사회적,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2007년 10월에 발족했습니다. 우리들은,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각각의 단체들과의 연대하여 (1) 당사자의 임파워먼트 (2) 학습회, 이벤트, 홈피이지 등을 통한 사회적 문제의식의 환기, (3) 정, 관, 재, 각계에의 활동, (4) 그 외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빈곤문제를 '보이도록'하여, 사회 전체에서 대처하도록, 다함께 목소리를 높여 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団体名:反貧困ネットワーク
連絡先:162-0814 東京都新宿区新小川町7-7 NKBアゼリアビル202
     Tel/Fax:03-6431-0390  メール:
hanhinkon.net@gmail.com


 

대표 우츠노미야 켄지(宇都宮健児)(변호사)

부대표 아카이시 치에코(赤石千衣子) (싱글마더 포럼, 페민)/아마미야 카린(雨宮処凛)(작가)/梶屋大輔(굿 윌 유니온)

사무국장 유아사 마코토(湯浅誠)(자립생활 서포트 센터 모야이自立生活サポートセンター・もやい)
事務局 猪股正(弁護士、生活保護問題対策全国会議)/河添誠(首都圏青年ユニオン)/今野晴貴(POSSE)/志磨村和可(ホームレス総合相談ネットワーク)/丸山理絵(反貧困たすけあいネットワーク)
会計 内山智絵(東京精神医療人権センター)
会計監査 片岡栄子



재미있는 인물들이 모여 있네요. ㅋㅋㅋ
아마미야 카린씨는 우익 활동을 한 적이 있던 사람인데 이 사람 나오는 다큐멘터리 - 새로운 신 - 봤었는데 진짜 재밌더라고요.
이 사람은 이미 꽤 유명인이고....

하여간 참고 하시길.

Posted by 빨간경순


<레드마리아> 이렇게 시작되었다!    by 경순





2년 전 나는 우연히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소개하는 한 친구를 만났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 순간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것도 한창 성매매반대 특별법이 시행되고 있는 시점인지라 ‘성매매에 대한 반대’와 ‘당당하게 성노동자라고 말하는’ 그 사이를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순간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그 두 가지가 내 머릿속에 조합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름 긴 시간 고민을 했던 거 같다.
그러면서 다시금 여성의 역사를 거슬러 보기 시작했고 내 속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그리고 늘 답답하게 생각이 됐던 성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윤간이나 강간이란 말은 왜 사전에 조차 남자들에게 여자가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지.
남녀평등은 쉽게 이야기 하면서 왜 성에 대한 사고는 그리도 결핍증에 가까울 만큼 진도가 안 나가는지.
타고난 여성의 출산 능력은 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묶여야만 하는지.
해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왜 줄어들지 않는지.
그리고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남자들조차 가사노동과 양육에는 왜 늘 꽉 막혀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가부장제가 이런 이데올로기를 유포한 건 알겠는데, 왜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과 그 개방적이고도 성적인 수많은 광고에도 불구하고
사회 속의 이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자본주의는 과연 여성 해방을 원하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이런 물음들이 채 해결되기 전에, 2년 전 본인의 전작 ‘쇼킹패밀리’상영 때문에 일본에 여러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방문하기 전 나의 머릿속에는 한국의 저출산을 우려하면서 보도하는 내용 중 가끔, 일본에는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만나고 이야기해 본 여성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기 발언조차 하기 힘든 이미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에 갇혀 순종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한국의 여성운동을 막연히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 필리핀에서 일 년을 살면서 또다시 내 속에 그려지던 그림 하나가 깨졌는데 이주여성노동자나 베트남 처녀처럼 한국남자와 결혼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단편적인 그림과는 다른 진취적인 사고의 여성들을 만나게 되면서다.
이들은 경제적인 가난에도 불구하고 훨씬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고 사회에서의 활동력도 남성들보다 진취적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육 받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성과 결혼에 있어서는 대단히 보수적이라는 모순적인 상황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을 포함해 세 나라의 여성들을 비교해보면서 나의 고민은 풀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심화되고 확장되었다.
경제대국 일본, 신흥경제발전국 한국, 저개발국 필리핀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겉모양은 다르지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공조 속에 여성들의 삶과 성에 대한 생각은 하나같이 비슷하다는 걸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딸로 태어나면서 부터 시작되는 차별들에 대한 경험, 그리고 차이와 차별에 가장 민감한 여성의 몸에 대한 경험과 사회적 이슈, 너무나 구차해서 말하기도 귀찮을 만큼 뿌리 깊은 가사노동에 대한 이야기부터 성폭력과 성노동자, 그리고 이주여성들까지...
자본주의는 여성의 노동력을 가족과 성산업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에 분리시켜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를 이용해 출산과 쾌락의 귄리를 여전히 보호와 통제 속에 가두어 놓고 있다.


우린 이걸 다시 뒤집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딸로 대표되는 여성성은 남성성보다 약하다는 이미지를 벗지 못하는지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고 갈수록 여성의 빈곤화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국가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하는지
성매매로 발생하는 경제규모가 24조 원대로 국민총생산의 4.1%나 되고 33만 명
    정도가 성매매 종사하고 있음에도 여성의 권리와 성노동자의 권리는 서로 이반이 돼야 하는지
혈연을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 가난한 동남아의 이주여성들이 시집
    (이 현상은 결혼이란 말보다는 시집이란 말이 맞다)오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고 있는 것인지
출산은 그 자체로 인정되지 못하고 결혼과 가족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낸
    온갖 이데올로기에 종속 되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권리조차 제약을 받아야 하는지
경제가 발전한 나라에서 조차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왜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

하지만 솔직히 이런 고민들만큼 내 머리 속에 정리된 결론은 없다. 어떤 이야기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어떤 인물이 가장 정확한 해답이 될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나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런 시각으로 여성과 자본주의 문제를 다룬 연구서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다.
따라서 본 작업은 전작 ‘쇼킹패밀리’가 가족주의를 해부하기 위해 탐구하며 영화를 만들어간 과정이었듯이 '레드마리아’도 그런 과정이 되리라 믿는다.

다만 확실한건 그 문제들을 짚어가는 과정으로서 현재 아시아 여성들, 특히 일본과 필리핀, 한국의 여성들의 삶을 종합적으로 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본의 식민지 시절부터 자본주의화 과정까지 긴밀하게 영향을 받은 한국과 필리핀은 여성문제에 조차 그 영향권 아래에 있어 왔고 지금도 많은 연결점이 있어, 여성과 자본주의라는 주제를 탐구하는데 매우 유의미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시아 세 나라 여성들의 경험의 재구성을 통해 자본주의가 놓치고 간 많은 것들을 확연하게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현재를 사는 여성들의 고민과 실재적 문제 그리고 대안을 모색하는 행보 속에 우리가 시도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역사’로 만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도 탐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2. 1. 21. 17:01

잼다큐 강정을 만든다고 한여름을 보내고 다시 배급을 하면서 겨울이 됐다.그리고 벌써 새해도 중순이다. 여름에 멈춰진 편집본을 사이사이 손보면서 작년 9월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106분짜리 편집본을 선 보인후 다시 최종편집을 하여 12월 서독제에서 98분짜리 완성본으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일년을 필리핀에서 보내며 기획하고 2008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이래 5년만의 결실이다. 물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쉽게 한줄로 거론하기 쉽지 않을만큼 다사다난했다. 그 다사다난함은 고스란히 제작비의 압박이 됐고 레드마리아는 독립영화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됐다. 하지만 그뿐이다. 작업이 길어졌던 그 수많은 일들은 쏙 빠지고 영화만 귀찮은 늦둥이가 되어버린 느낌. 그 느낌 때문에 작년은 좀 힘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안그런 영화가 어딨겠나. 이 척박한 독립영화의 거친 토양을 자양분 삼아 영화를 만든다는 모든 사람들의 비슷한 과정일 뿐. 그래도 다행인건 이들에겐 오기와 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살아있다는 것이 다시 그길로 또 걸어가게 하는 힘인 것을. 나도 그렇게 아직 심장이 식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최종본을 끝낼 수 있었겠지. 그래서 흐믓하다. 2년전 여성영화제를 앞두고 수술을 받을때는 소원이 그래서 레드마리아를 완성하는거였는데 막상 완성을 하고보니 10편은 더 만들어야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하하하

우자지간 그 끝을 잔소리 한마디 없이 기다려준 영재와 지금은 다들 곁에 없지만 함께 해준 스텝 경은,아람,영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늘 힘들때마다 이들이 있어 한 산 한 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며 사운드며 색보정이며 몇 번의 수정을 마다않고 작업해준 지은이,용수,재원에게도 너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친구는 애니메이션을 해준 성애다. 물론 편집이 길어지는데 공을 세운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기다린만큼의 보람이 있어 아주 흐믓했다. 이렇게 작업을 같이 하고 진행을 하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제작비. 일본 촬영을 고민하다 꾸리게 된 제작위원회의 후원은 새롭게 시도해본 소중한 경험이었다.

보통 후원금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크게 부탁을 하고 받았기 때문이다. 50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기꺼이 내주신 제작위원들께 너무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담스럽다면서도 직접 제작위원장을 맡아 여기저기 이름을 팔아주신 김은실선생님, 친구라는 죄로 월급쟁이 친구들이 100만원 200만원 투척해준 감동의 순간, 제작위원으로 친구로 수술 후에는 죽까지 끓여서 매달 화학치료가 끝날때마다 먹을것을 챙겨준 박혜경선생님, 그리고 병원갈때마다 덜덜거리는 프라이드를 씽씽몰며 나를 데리고 다녔던 미례, 집이 없어 미례집에서 신세질때 고모가 살던 방을 저렴하게 소개해준 세영이, 그리고 워낭소리의 덕을 왕창 은혜입게 해준 영재의 특별한 지워금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사실 레드마리아 제작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어떻게 그 기간 가장 힘든일과 가장 행복한 일들이 완벽하게 겹칠 수 있었는지. 그 행운이 함께 했기에 필리핀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을 다시 촬영하면서 레드마리아라는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거 같다. 만일 예전처럼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해야 했다면 아마 지금도 영화는 완성되기 힘들었을것이다. 그 많은 번역을 거쳐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으며 그 많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나. 족히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치며 이렇게 레드마리아가 왔다고 생각하니 정말 긴 길을 관통했구나 싶다.

아마 예전 같으면 제작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작업으로 올인했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그렇게 일년쉬자고 작정했지만 그 심심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거 같아 안해보던 일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배급이라도 재밌게 해보자고 맘먹고 있다. 사실 지난달만해도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영화거리를 내지를뻔 했는데 번번히 다음날 일어날때쯤 체력이 딸리는걸 확인하고는 단칼에 단념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여름쯤에 프랑스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갔다 알프스를 등반해보는게 작다면 작은 꿈인데 부디 실현이 되기를. 그곳에 가면 친구가 50에 진입한 기념파티를 해준다고해서 정말 땡빚을 내서라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올해는 연애운도 있단다. 아싸...^^ 혹시 프랑스에서 붕쥬르 하면서 부딪힐 어떤 놈 혹은 년? ㅎㅎ 우자지간 신나게 일년을 또 살아보지 뭐.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1. 6. 1. 16:59

마음에 내내 걸렸던 강정마을을 다녀왔다. 

봐야 안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절감하며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결국 오는길에 강정마을 영화만들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김포에 도착할 때 쯤 내가 총대를 멜테니 니가 총연출을 맡고
옴니버스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동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말하기전에 녀석도 나만큼 머리속에 많은 생각이 오갔으리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참여할 감독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대충 머리속에 있는 감독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그날 저녁에 우연히 영상자료원에서 만난 조영각에도 이야기를 했다.
불과 하루가 지났는데 벌써 소문이 났는지 많은 친구들이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나서 주니 갑자기 일이 급진전이다.
그렇게 일을 벌여 놨는데 머리한쪽에서는 계속 레드마리아를
한번 더 고칠 구상이 막 돌아가기 시작한다.

한번만 더 해보자고 한게 벌써 세번은 뒤집었는데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영재에게 가편본을 넘겼는데
가슴에 뭔가 언친듯 찝찝한게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하루를 내리 잔후 사무실에 나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 붙이고 나니 결국 쓸 그림들은 쓰게 되는구나 싶다.
구성을 바꿀 때마다 좋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다른 구성으로 넘어가면서 버려지고는 했는데 이제사 비로서
버려졌던 것들이 다 자기자리를 찾아 모인 형국이 됐다.
물론 내보기에 그렇다는 이야기.

수정된 편집본에 따라 추가되는 이야기를 다시 번역을 맡겨야 하는데
응주에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지만 결국 바쁘다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미리미리 말해주면 좋을 것을...'
'감독이란게 다 죽일것들이야 미안해..근데 부탁해 응주야.'
혼자서 바둥거리며 하자니 최근에 내가 괴롭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거 같다.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번역이며 모니터며 심지어 한글감수까지
게다가 이번에는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일본어 감수까지 부탁을 하고
또 수정본을 다시한번 봐달라는 부탁도 했다.

부탁을 하는 일이라는게 늘 성의있는 태도를 요하지만 지눈에 불이 나면
성의 있게 부탁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성의 있으려면 그리고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연락을 안하는게 맞으니까.
사실 그래서 두달전 강정마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던
양윤모선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나 바쁘고 그렇게 거기까지 신경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년이 넘게 성의를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를 위해 싸우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그렇게 성의있게 참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 성의있게 산다는게 무엇일까.
과연 가능은 한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 강정마을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마음먹은건 성의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성의있게 살기 힘든 사회에 사는 마당에
그저 성의없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즐거운 일을 나름'성의있게' 벌일 수 있는지를 한번 시도해 보자는 출발이다.
레드마리아도 역시 성의없는 사회에 던지는 작은 외침일 뿐이고.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1. 4. 20. 16:56

3차 가편을 끝내고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슬슬 몸도 피곤하고 모니터 내용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이정도면 하고싶은 이야기를 대충 알맞게 쏟아냈다 싶었다. 몇군데 거친부분을 다듬고 애니메이션이 완성되면 후반부의 시간과 리듬 조절만 해야지 했었다. 근데 끈적끈적하게 원인도 알 수 없게 그저 뭉실뭉실 끝나지 않은 느낌이 드는건 뭔지. 그렇게 한달을 대충 몸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머리에 그분이 오신 필을 받고 화면을 다시 대면하기 시작했는데 머리가 아득해진다.

그분이 오긴 왔는데 문제는 다 뒤집으라는 계시인 것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닌것이다. 큼직하게 몇구다리로 화면을 이리저리 옮겨보자니 공사도 보통 공사가 아니게 생겼다. 3월말에 끝내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이미 4월 중순이 넘어서 다시 한번 편집을 하겠다하니 영재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누나 제가 보기에는 3차가 최선이라 생각되고요 저도 완성본이 있어야 어떻게 할지 구상도 좀 하는데...어쩌구저쩌구...%^$#*&^(*!!!!??#####! 녀석의 말이 귀에 안들어온다.

이래저래 한참 힘들텐데 내 모냥새가 걱정됐는지 진행비로 쓰라고 카드까지 건네준 녀석을 생각하면 좀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어차피 늦어진거 한번만 더 시간을 주렴...하는 마음으로 편집기를 노려보고 있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붙어보자. 근데 초반부터 널려있는 클립들과 프리뷰를 보는 순간 기가 눌린다. 이런...워쩐디야. 그래 주인공도 많고 사건도 많긴 많구나. 하나를 손댈때마다 덩달아 달라지는 다음씬에 머리를 잡아뜯던 시간들이 새삼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제 정말 막판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지쳐갈 때쯤 다들 이제는 손을 놓고 싶어지는 그때처럼. 어쩌면 지금 나는 그 고비의 순간을 지치지 않고 잘 넘기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시작도 하기전에 미리 없었던 시간으로 조용히 손을 놓고 싶어 질까봐. 그래서 그러지말고 한번 더 그림과 신나게 놀아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설사 그렇게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지라도 이 순간을 놓치면 더 많은 아쉬움으로 가슴을 후려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때는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힘들다. 하긴 한달전 제주도에서 올라온 양윤모선배를 만나 어리광이나 한번 부려볼까 했다가 더 큰 보따리를 내미는 선배에게 어리광은 고사하고 강정마을 소식만 부지기로 머릿속에 쳐넣게 됐었다. 뭐야 나두 힘들거든. 근데 웬일이니.이제는 해군기지반대싸움으로 구속되어 단식까지 하고 있다는 소식마저 듣고 보니 이렇게 편집기를 붙들고 있는 마음이 더 무겁기만 하다. 다들 그렇게 살고있구나. 누구는 그렇게 자신을 던져 해군기지 반대싸움을 하고 누구는 영진위에 맞서 대책을 고심하고 누구는 오늘도 가족문제로 골머리를 썪이며 두통을 앓아가며 하루가 무사히 지나기를 바라고 누구는 다가올 피칭을 준비하며 자신의 새영화를 시작하기 위해 또 밤을 새며 골머리를 싸메고 있는...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편집기를 덮어야 할거 같다. 일단 내일 산에가서 맑은 공기 한번 마셔주고 머릿속에 차있는 잡다한 걱정들을 일단 내머리에서 접어두자. 그리고 정말 화끈하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오케이?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1. 2. 22. 16:56

대충 봄 냄새가 나의 무딘코에까지 전해지는 걸 보면 겨울이 얼추 지나간 거 같다. 한때는 겨울이 그렇게도 좋았는데 그래서 겨울이 다 간거 같은 애매한 2월이 참 싫었는데 언제부턴가 봄이오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뭐 봄이 와도 여전히 나는 레드마리아와 함께 머리가 아프겠지만. 그래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진짜 쑤신다.

레드마리아를 찍으면서 여유있게 글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져 점점 더 글과는 거리가 느껴지는터라 조금씩 다시 회복해 보고자 노력중이다. 그동안 글이라는 건 기획서와 지원서 그리고 섭외하는 내용과 현장에서의 구상등이 전부고 모든 건 머리에서 돌아갔다.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글을 쓸 시간도 없어서 한동안은 머리로 글을 쓰는 습관까지 생겼다. 뭔가 쓰고 싶은 거리들이 생각나면 걸어가면서 차를 타면서 촬영장에 나가면서 머리로 글을썼다. 문장을 써나가면서 지우기도 하고 다시 쓰는 이과정이 끊임없이 반복이 됐는데 결국 그 머리로 썼던 글들을 컴퓨터에 앉아 옮겨야지 생각하고 나면 당근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그렇지. 안그래도 잘까먹는 내가 무슨 수로..우자지간 그런 과정을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글을 쓰는게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글을 쓰는 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편집을 할 때도 이거야 워낙 습관이기는 하지만 영상으로 구성을 하고 바로 편집을 하다보니 구성안이라는 것도 써보지를 못했다. 사람마다 습관이 있겠는데 나는 글로 구성을 하는게 익숙하지 않다. 그림 봐야 상상력이 잘 가동이 되는지라 편집구성안을 먼저 정리하고 편집을 하는게 잘 안된다. 그러다보니 가편을 할때 구성이 휙휙 변한다. 물론 생각이 변하면.

하지만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다.포기할 수 없는 생각.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 시작이 된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던 그리고 그 출발이 여성의 몸이라는 것. 그런데 이게 쉽게 그림으로 연결이 잘 안됐다. 가편 모니터를 하니 누구는 몸과 노동을 분리하라고도 하고 누구는 주인공중 서너명은 과감히 포기하라고 하고 누구는 영화자체를 포기하라는 말도 했지 아마. 그래 그래서 쉽게 끝날 거 같던 이 편집은 길어지고 그만큼 머리도 복잡해 진다.

나의 생각이 틀렸던 걸까. 그게 무리한 시도였던 걸까. 온갖 생각들이 자신을 후벼파기 시작한다. 그런데 누구는 거기다 한술 더떠 이런 걱정까지 해준다. 영화가 완성되면 어디서 틀어줄지 걱정이라고. 왜 그게 걱정이야? 아니 신작도 아닌데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서요...야 뭔소리야 신작이지. 여성영화제 옥랑상 프리미어 상영해야 돼서 완성도 안된걸 무리해서 딱 한번 상영한게 고작인데 그리고 이제 영화를 완성해 보려고 아둥바둥 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 그런 고민까지 떠안고 가야한단 말이야.

내심 가까운 독립영화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게 여간 속상하고 서운한게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날 하루종일 머리에서 뚜껑이 여러번 열렸다 닫혔다 했지만 그리고 영화제서 영화 안틀면 지들 손해지 내손핸가? 라고 큰소리 빵빵쳤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개인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완성되고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라는데 이런정도의 생각이야 가능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속상하다. 의욕도 상실될 위기.

무슨 놈의 팔자인지 이상하게 레드마리아를 만드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엄살 좀 부릴 여유가 없이 뭔가 끊임없이 대처를 하고 또 대처를 하고 대처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거 같다. 뭐 그래서 또 더 애착이 가는 작업인지도 모르겠고.이번주는 3차 가편본 모니터 중이다. 1차 2차는 공개적인 모니터를 했는데 이번에는 개별 모니터를 받고 있다.근데 하나씩 들어오는 의견이 나쁘지 않다. 물론 아직 끝은 아니다. 좀 있으면 도착할 애니메이션 작가와 또 즐거운 설전을 벌여야 하고 군데군데 영상을 정리할 것들도 많다. 역시 영화로 돌아가니 다시 의욕이 불끈불끈.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1. 1. 8. 16:55

극영화를 만들어보지는 않았지만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의 차이에 대한 느낌들이 가끔 생각될때가 있는데 편집을 할때가 그중 하나인듯 하다. 예를 들어 극영화는 사전에 만들어진 대본이 영화전반을 많이 좌우한다면 다큐멘터리영화는 편집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대본을 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많이들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미리 짜여진 구성과 대본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억지로 현장 연출을 감행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원하는 그림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현장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찍는 일은 늘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최초의 기획안은 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지점은 이 영화를 시작했던 시발점 한마디로 왜 나는 이 영화를 시작했는지...그리고 왜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근데 문제는 편집을 하면서 찍혀진 수많은 그림을 보면서 그 고민을 하는 과정이 너무 고되다는 거. 그래서 누구 말대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프레임을 붙여가고 인물을 분석하고 상황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대본 한줄 한줄을 피말리 듯 써내려 가는 것처럼 쉽게 줄줄이 엮이지가 않는다는 거. 물론 줄줄이 잘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됐구나 싶어 막상 모니터를 해보면 그 속에 담긴 건 혼자만의 생각과 욕심과 자만의 결정체일 뿐이라는 걸 아주 빠른속도로 느끼게 된다. 그게 아주 아프고 잔인하고 따겁고 쓰리다. 그런데 신기한건 그 단계를 거치면 아프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빠른속도로 마음을 비우게 된다. 음..이게 아니란 말이지.

지금 내가 그렇단 이야기다. 오늘도 그렇게 1차가편 모니터를 끝내고 다시 어떻게 2차를 시작할까 고민을 하던 중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에 잠도 안오고 그렇다고 이 시간에 누구 불러 놀 사람도 없고 쉽게 볼 수 있는 영화조차 땡기지도 않는다. 왜냐면 오늘 느낀 감정은 단지 모니터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이 영화를 시작할 때 했던 생각,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찍을때 부터 계속 시도하던 건데 숏컷이나 크래쉬 그리고 러브액츄얼리같은 극영화처럼 많은 주인공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처럼 구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이번에도 좌절되는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처음엔 욕심을 내서 편집을 시도했지만 막판에 주인공들이 세명으로 축소됐고 나는 거기에 만족해야 했다.

그 쓰라림을 이번에는 정말 작정을 하고 제대로 시도하고 싶었다. 씨발..근데 그게 왜 이렇게 쉽지가 않냐고. 물론 준비된 배우가 있는것도 아니고 준비된 사건이 있는것도 아니고 준비된 자금과 시간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도 안통하는 세나라의 준비되지 않은 그 많은 주인공들로 그런 욕심을 냈다니 결국 내가 허황된년이었던가 싶어 돌아버리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지금 굉장히 울고 싶다. 현장박치기로 그런 장면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미친년 아니야. 근데 촬영이 끝난 지금까지 왜 그 미련을 못버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이해가 안간다는데도 무슨 미련이 남아 이렇게 심란하냐 이 말이거든.

그래서 화가나고 열받고 허탈하고 한심하고 기분졸라 작렬이다. 좋아..그렇다 말이지. 알았어 알았다고. 바꾸면 될거 아니야. 근데 바꿔야 되는거 알겠는데 그리고 그렇게 가기위해 모니터 한 거 맞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복잡한지 모르겠다. 다시 엎어서 편집을 할거고 결국에는 뭔가 종지부를 찍게 될 모양새가 언젠가는 나오겠지만 오늘 이 기분은 아마 오래 갈거 같다. 하고 싶은 방향대로 영화를 제대로 밀고나가지 못했던 그 한계에 대해서는. 오늘처럼 내가 미워보기는 처음인거 같다. 그래 그냥 속편하게 울자 맘껏.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아까 모니터를 끝내고 모두가 돌아간뒤 한방을 쓰는 수정이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인물을 쭉 옴니버스처럼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 그거말이지 처음에 생각을 안해본건 아닌데 너무 다른 인물들이 쭉 연결되면 주제를 빗나가게 될 공산이 커서 포기했다고 그리고 한 인물을 길게 10분에서 15분을 끌고 가면 지루하지 않을까. 내가 말이지 오래전 봤던 영화중에 꼭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쩝 근데 영화제목이 생각이 안난다. 그렇게 연결되지 않는 인물들의 옴니버스같은 스토리가 욕심이 났지만 쇼킹패밀리를 만들때도 그렇게 의도했다가 결국 막판에 영화에 쓰지말아 달라던 몇몇의 주인공덕에 포기해야 했던 그 구성. 결국 쇼킹패밀리도 세명의 주인공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을 생각하며 그건아니야라고 했던...

글고보니 내가 삼이라는 숫자를 너무 좋아하는 결벽이 있긴하지만 이렇게 만들고 싶은 의도와 벗어나서 두 번씩이나 세명의 주인공으로 끝냈다면 삼은 좀 공포스럽기도 하다.아흐...우자지간 그래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내내 그게 얼마나 힘든일인가를 구구절절 말했지만 이제사 생각하니 그렇게 포기할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가지를 섞으면 되잖아. 왜 안되겠어. 뭐 아니면 나중에 또 뒤집지 뭐...라고 지금 막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내가 울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촌스럽게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그래 안될게 뭐있어 한번 해보는거지. 그리고 또 절망은 해본 다음에 그때 가서 실컷 하자구. 웃긴다. 밤을 골딱새서 도달한 결론이 처음이라니. 우자지간 일단 밀어보자.^^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0. 12. 26. 16:53

다시 편집을 시작한지 벌써 한달반이 지나간다. 지난 일년간 어떤일이 있었는지도 잊을만큼 작년 이맘때랑 거의 똑같은 분위기로 편집에 빠져 살고 있다. 마치 중간이 사라져버린것처럼 말이다. 영화를 편집할때는 단계가 있다. 한참 편집구성을 하고 그림들을 붙여갈때는 종종 다른 영화로 기분전환을 하는데 편집이 점점 촘촘해지기 시작하면 다른 영화들이 나를 매혹시키지 못한다. 그때부터는 내영화가 더 재밌으니까..ㅎㅎ

우자지간 그런 기분으로 그림들과 놀면서 이번달까지 1차 가편을 마무리하겠다는 각오로 임하면서 음악감독인 지은에게 전화를 했다. 올해초 있었던 여성영화제 상영본으로 이미 나의 까탈스런 요구에 한번 홍역을 치른터라 다시 새로운 버전으로 음악에 대한 작업을 요구하니 그녀는 미리부터 엄살이다. 근데 시간은 대충 몇분정도 나올거 같아? 응..대충 두시간이 조금 넘을거 같은데...헉...있잖아...시간을 좀 줄이면 안될까...아니 뭐 나야 레드마리아가 잘 나오기만을 바라지만 웬지 요즘 관객들이 한시간반이 넘어가면 힘들어 하더라고..

마지막 수화기를 놓을때까지 그녀는 내심 그 복잡한 이야기를 다시 볼 생각에 심적부담이 상당했는지 영 목소리의 톤이 무겁다. 전화를 걸기전 그 신나던 내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다. 그래..내맘이 다 똑같은건 아닐테지. 관객들이 보고싶은 영화랑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랑 아구가 늘 맞는건 아닐테니까. 그렇게 작년 이맘때도 턱도 없이 모자라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성영화제에 맞춰보겠다고 거침없이 밀어붙이며 러닝타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여기저기 잘라냈던 기억이 새롭다. 근데 볼만한 영화의 선택기준이 과연 러닝타임에 문제일까.

길게 많은 이야기를 끌고가려면 이야기에 집중할 모티브가 명확해야 한다. 시간을 느끼지 못할만큼 집중하며 불 수 있는 이야기의 연결. 이번편집의 방향을 잡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그거였다. 여성의 몸과 노동을 이야기 하기 위해 그 많은 주인공들의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연결해서 하나의 줄기로 만들어 갈 것인지. 찍었던 테잎들을 구석구석 찾다보면 잊고 있었던 보석들이 하나씩 발견되며 이런 나의 고민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욕심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좋은 장면도 주변을 까먹으면 자체발광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렇게 편집을 하다보니 일년전 무엇을 놓쳤고 무엇에 쫗겼으며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 안달이었는지가 하나씩 생각나며 웃음이 난다. 마치 인생을 먼저산 어른들의 10년전에 들려주던 그 이야기가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를 뒤늦게 알게되고 오래전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의 행동이 이런거였구나 라는걸 한참 시간이 지난후에야 느끼게 되는 그런것처럼. 제아무리 빠른 메모리를 장착해 온갖 정보를 순식간에 파악해도 알고 깨닫고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두뇌회로라는건 얼마나 느리고 갑갑하게 움직이는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지라 안부를 묻고 살기도 힘들어진 요즘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 살자고 하지만 우리 마음의 반은 빠른 메모리에 적응이 돼 기다리는 것도 진의를 아는 것도 빠르게 전달이 안되면 오해와 불신과 실망과 상처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만난 사람들은 그런 조급함에서 조금은 비껴살고 치열하지만 느리게 확인하고 가진건 없지만 관계가 주는 행복함이 무엇인지를 생활속에 실천하며 사는 거 같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 비로서 알게 됐는지도.

편집을 하면서 이런저런 행복한 고민들을 하게 해준 지난 일년이 고맙다. 그런 시간이 있어 느리게 이제사 편집을 하지만 좀 더 다른 시선으로 영화와 다시 만나 고민들을 더 확장하고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행복한 시간들이 언젠가는 끝나고 그 행복한 고민들이 관객과 궁합이 맞을지 안맞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만 분명 이 영화로 나는 많은 이들과 또 다른 대화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왜냐면 우리가 해야만 하고 하게 될 이야기라고 믿고 있으니까.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스케치2010. 12. 24. 13:41

 

 



치우는 사람만큼 찍는 사람도 많았던 이날


 


 


 


 




출처 - 기륭전자분회 카페




'제작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봉기 할머니  (0) 2014.02.10
산다제작팀 수다  (0) 2013.05.04
기륭 컨테이너 철수-1  (0) 2010.12.21
미리 꽃놀이  (0) 2010.03.22
왓 해펀~  (0) 2010.03.04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