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위안부2014. 11. 30. 21:16

기사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30/2014113000439.html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원고 측 주장에 대해 공식 반박



나눔의 집에 기거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위안부를 '매춘부'나 '일본군 협력자'로 매도했다며 관련 서적을 출판한 저자 등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데 대해 저자가 공식적으로 반박에 나섰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는 강일출 할머니 등 9명은 지난 6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57·여)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뿌리와이파리 출판사 정종주 대표(51)를 고소하고, 출판·광고 등을 금지하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21부(부장판사 고충정)에서 7월 9일과 10월 22일 2차례 가처분신청에 대한 심리가 이루어졌다.

원고들은 당초 "책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이나 일본군의 협력자로 매도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잊고 스스로 피해자라고만 주장하면서 한일 간 역사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기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내가 비판한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니라 지원단체이다. 매춘이라는 단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단순히 매춘부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을 비판한 부분에서 쓴 것인데, 나눔의집 소장과 고문변호사 등 주변인들이 이런 문맥을 왜곡 전달해 사회적 지탄을 받도록 만들었다”면서, 원고 측 주장을 확인 없이 실은 언론사들에 대해 10월20일자로 언론중재위윈회를 통한 정정보도와 반론보도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박유하 교수는 “이 고발은 나눔의집 고문변호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한 초급수준의 분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며 “첫 고발장에서 원고 측은 내 책이 허위라고 비난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슬그머니 고발 취지를 바꾸어 인식문제로 들고 나왔고, 이 책이 일본의 위안부문제 ‘부정파’들을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위안부 할머니를 비판한 책인 것처럼 호도했다. 도중에 고발 취지를 바꾼 것은 고발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이제까지 단순히 ‘전쟁범죄’로 취급되어온 위안부 문제를 ‘제국주의 통치기술의 일부’로 파악하고자 한 시도라고 말한다. 그러한 시도가 오히려 ‘배상은 끝났다’고 말하는 일본을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제시 되었던 ‘동지’와 ‘매춘’이라는 단어는 위안부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그들이 ‘제국 일본의 통치 속에서 전쟁 수행에 동원된 집단’이라는 틀로 바라보기 위한 논리적 장치이고, 일본과 싸운 다른 나라의 위안부와는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위안부들과 군인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임금노동이었으며,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다고 해서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연행’이나 ‘매춘’ 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에 책임이 있음을 일본에 말하고자 쓴 책인데, 이에 대한 지원 단체의 반발은 그들이 유포한 인식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데 대한 두려움 탓으로 이해한다”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할머니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했다가 지원 단체에게 비난받아 할머니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일”이라고 말했다.

고발 이후 ‘제국의 위안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들이 다수 나왔다. 가처분신청 직후에는 김철(연세대)·박삼헌(건국대) 교수 등이 주도한 기각 요청 탄원서에 라종일(전 주일 대사)-문정인(연세대) 교수, 김원우, 장정일씨 등의 작가, 김규항씨(‘고래가 그랬어’ 대표)를 비롯한 200여 명의 지식인과 시민이 서명했다. 특히 페이스북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김관기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자청하고 나섰고, 노혜경(시인) 등 문화인들과 시민들의 옹호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김미영(오스틴 대학) 교수의 제안으로 미국-호주-한국을 잇는 지원연대도 만들어졌다. 박유하 교수는 이에 대해 “SNS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본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한국사회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온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과 함께 한국사회의 문제적인 부분을 바꿔나가고 싶다” 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한 “유엔 산하 인권위원회나 미국 의회의 위안부 문제 인식에는 네덜란드나 중국의 경우가 조선에서도 똑같이 행해진 것처럼 오해한 부분이 있다. 지난 8월, 위안부 문제를 20년 넘게 가장 진지한 자세로 보도해왔던 아사히신문이 한반도에서의 강제연행설을 퍼뜨린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허위였음을 밝힌 이후, 일본정부는 유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알리며 수정을 요구 중이다. 이러한 상황을 한국이 신속히 들여다보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면서 “이 문제를 지원 단체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지원 단체는 내 책을 허위라고 말하더니 이번에는 내가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고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있다며 또 다른 마녀사냥을 시작했다”면서 “이 책은 출간 직후 다수의 서평과 인터뷰를 받았던 책이다. 정작 관계자들은 10개월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고발한 것은 불통사회가 된 현대 한국사회를 상징한 사건으로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비판을 입막음하려는 시도로 이해하고 있고 지원자들과 함께 잘 대처해 나가겠다”고 한다.

이어 이 책은 원래 일본을 향해 이 문제에 관한 일본인들의 생각을 비판하고 다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매체에 연재하다가, 한국도 알아야 할 부분이 많다고 여겨 한국어판을 먼저 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최근에 나온 일본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사죄 의식을 담은 일본 국회 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기존 지원 단체와는 내용도 논리도 말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나의 논지가 이 문제를 부정해온 일본인들을 움직여 꽉 막힌 위안부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책 ‘제국의 위안부’ 판매금지 등 가처분 신청 3차 심리는 오는 26일 오후 2시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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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4. 11. 29. 20:27


아사히신문,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서평 게재


기사출처 http://www.hankookilbo.com/v/eef4cd72da6e49a7a160e3c223618ab1



지난해 국내에서 출간돼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까지 당한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자 조간에 이례적으로 긴 서평을 실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은 번역돼 최근 일본어판이 출간됐다.

서평을 쓴 사람은 일본 소설가이자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 교수인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郞). 글은 오피니언 페이지에 해당하는 ‘논단시평’에 메인으로 실렸다. 모양새는 ‘제국의 위안부’를 ‘일한 역사인식문제란 무엇인가’(기무라 간 지음) ‘과거는 죽지 않는다’(테사 모리스스즈키)와 함께 독후 감상의 형태로 정리한 것이지만 내용의 대부분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평가다. ‘고독한 책…기억의 주인이 되기 위해’라는 제목의 서평 중 ‘제국의 위안부’ 관련 부분을 번역해 소개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출판돼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제소ㆍ고소당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이 드디어 출간됐다. 감명 받았다고 쓰기도 망설여질 정도로 준엄함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이후로 쓰여질 모든 ‘위안부’에 관한 말에서, 공감하든 반발하든 부동의 항성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저자의 마음을 생각하며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회복불가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균열을 만들어냈다. 한쪽에는 “위안부는 단순한 매춘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위안부들은 강제로 끌려온 성노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국가의 책임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거듭해왔다.

박유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위안부들은 경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제각각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어왔다. 그것은 위안부문제를 부정해온 사람에게도, 위안부들을 지원해온 사람들에게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양한 상황을 말한 증언 가운데에서 각각 갖고 있던 대일본제국의 이미지에 맞춰 위안부들의 ‘기억’을 취사선택해온 것이다.”

박유하가 하려고 한 것은 위안부들 한사람 한사람의 다양하고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거기서 박유하가 귀에 담아낸 이야기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는 것이었다.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전장에 끌고 간 ‘책임’과 ‘죄’의 주체는 제국일본이라면서, 동시에 실제로 그들을 끌고 간 조선인 동포업자와 그것을 허락한 ‘여자의 인생을 지배 아래 두는 가부장제’(일본인의 경우도 같다)를 강하게 비판한다.

‘사죄’해야 하는 것은 제국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또 북한)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졌다. 왜일까. 식민지에서 살았던 사람은 때로는 본국민보다도 더 열렬히 그 종주국에 사랑과 충성과 협력을 맹세했다. 그것이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은 잊혀져야 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위안부’의 대체물로서 전장에 보내진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인 병사는 때로 (몸과 마음을 유린하는)치떨리는 증오의 대상이고, 때로는 (똑같이 전장에서 ‘물건’으로 취급 받는)동지일 수도 있었다. 그 모순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됐던 그들의 진실한 목소리는 일본과 한국 어느 쪽의 공적인 ‘기억’에서도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노예’는 성적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은폐해버리는 말이다. 위안부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측면만 주목해서 ‘피해자’로서 기억 이외를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과거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인 것을 허락 받지 못했던 위안부들은 지금은 자기자신의 ‘기억’의 주인인 것을 거부당하고 있다. 그 비애가 박유하의 책을 깊은 고독의 색깔로 물들이고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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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4. 9. 15. 17:59

안병직 "日잡지, 軍위안부 관련 왜곡보도…법적대응"

입력 : 2014.09.15 14:47|수정 : 2014.09.15 14:48

원로 경제사학자 안병직(78)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한 주간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자신과의 인터뷰라며 실은 기사가 왜곡·날조됐다며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오늘(15일) 밝혔습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일본 주간지 주간문춘 지난 4월10일자에 '위안부 '조사담당' 한국인 교수가 전면자공(자백)!'이라는 제목 아래 안 교수와 저널리스트 오다카 미키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안 교수는 "오다카씨가 '위안부' 관련 연구 목적에서 만나고 싶다고 작년 말부터 어떤 한국인을 통해 집요하게 요청해 와 거절하다 지난 1월 비보도를 전제로 만났다"며 "주간문춘에 인터뷰 기사가 실린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오다카씨는 1990년대 군 위안부 문제 실태조사에 참여한 안 교수가 '당시의 조사방법은 잘못됐다' '실질적인 조사 실패' '고노 담화는 이상하다' 등 발언을 했다고 기사에서 주장했습니다.

안 교수는 "조사에 관한 부분은 전적으로 오다카씨의 창작"이라며 "조사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인지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고 당시 조사에도 여러 문제가 있었다고는 했지만 '실질적인 조사 실패'를 말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오다카씨는 내가 '고노담화가 단지 조선인 위안부 청취조사에만 근거해 작성됐다면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라고 말했다며 이를 내가 '신빙성 없는 청취조사를 근거로 발표된 고노담화는 이상하다'는 뜻으로 말한 양 해석했다"면서 이 역시 '날조'라고 지적했습니다.

안 교수는 "이는 오다카씨가 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얼마나 무지한지 자백한 꼴"이라며 "지난 6월 일본 정부가 발표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 교섭경위'에서도 고노담화는 청취조사가 정리되기 전 기존 연구를 참고로 한 일본 정부의 조사에 근거해 발표됐음을 확인하고 있으며 내 주장도 그와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밖에도 내가 하지 않은 말을 교묘하게 덧붙인다든지 오다카씨의 질문 뒤에 상이한 문맥으로 내가 한 말을 연결하는 수법으로 내 주장을 왜곡한 부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안 교수는 "확인도 없이 보도한 데 대해 주간문춘 측에 항의하고 반론문 게재를 요구했으나 아무 답이 없는 상태"라며 "또 다른 일본 주간지에 반론문을 실었고 한국과 일본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민·형사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안 교수는 "군 위안소는 일본군의 후방시설이었고 위안부 동원은 일본군의 동원계획에 따른 사실상의 전시동원이었다"며 "일본군이 당시 군 위안소 설치·관리와 군 위안부 징집을 담당했으며 피해자들의 증언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내 인식"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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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4. 8. 14. 23:53

필리핀 대법원, 일본군 위안부 청구권 관련 소송 기각

(하노이=연합뉴스) 김권용 특파원 =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과 관련해 필리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려던 현지 위안부 출신 여성들의 법적 투쟁이 무위로 끝났다.  

교도통신은 13일 필리핀 대법원이 전날 위안부 피해자 단체 '말라야 롤라스' 회원들이 대(對) 일본 청구권 행사를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정부의 손을 들어준 종전의 판결에 불복, 제기한 재심 신청을 다시 기각했다고 보도했다.

대법원은 이날 외국 정부에 대한 자국민의 청구권 행사 요구를 수용할지는 행정부가 다뤄야 하는 외교적 사안이라는 종전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와 관련해 테오도어 테 대법원 대변인은 2010년 판결에 이은 이날 재심 판결로 말라야 롤라스 측이 제기한 위안부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종결됐다고 선언했다.  

이에 앞서 말라야 롤라스 회원 70여 명은 지난 2004년 3월 일부 공무원들이 위안부 강제동원을 반인륜범죄로 규정, 대응해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재량권을 남용했다며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된 바 있다.

이들은 당시 소장에서 필리핀 정부가 일본이 지원하는 '아시아여성기금'의 배상을 수용하고 사과를 받아들인 것은 국제법에 어긋난 것이라면서 특히 1951년 일본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시 청구권을 전면 포기하기로 한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말라야 롤라스 측의 주장을 수용하면 외교정책상의 이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일본과의 관계 역시 와해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필리핀 대법원은 지난 2010년 정부가 외국 정부에 대한 자국민의 청구권 행사 요구를 수용할지는 대법원이 아니라 행정부가 결정해야 하는 외교적 사안이라며 관련 소송을 기각했다.  

이날 대법원의 결정과 관련해 말라야 롤라스의 변호인 측은 필리핀이 전시에 강간을 절대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며 강력한 유감을 표시했다.

1997년 출범한 말라야 롤라스에는 당초 마닐라 북부 팜팡가 주의 위안부 출신 여성 약 90명이 회원으로 참여했으나 상당수 회원이 고령으로 사망하면서 현재는 약 30명 만이 남아있다. 

kky@yna.co.kr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8/13/0200000000AKR20140813088600084.HTML?input=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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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4. 8. 6. 23:59

<아사히 '군위안부 보도'에 日보수·우익지 '파상공세'>

'군 위안부 보도' 아사히신문·산케이신문
'군 위안부 보도' 아사히신문·산케이신문(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아사히(朝日)신문은 5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라는 칼럼과 특집 기사를 실어 여성의 자유를 박탈하고 존엄을 짓밟은 것이 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아사히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과거 보도 가운데 일부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한 것과 관련해 산케이(産經)신문은 위안부가 강제연행됐다는 주장의 근거가 붕괴됐다고 6일 주장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을 다룬 5일자 아사히신문 1면과 6일자 산케이신문 1면의 모습.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아사히(朝日)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특집기사를 내고 "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라"고 제언하면서 과거 기사의 일부에 오류가 있었다며 취소하자 일본 보수·우익 신문이 파상적인 공세를 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의 검증·철회를 주장해 온 극우 성향의 산케이(産經)신문은 6일 사설에서 "근거없이 작문된 1993년 고노담화 등에서의 위안부가 강제연행됐다는 주장의 근거는 이미 붕괴됐다"고 규정했다. 

이 신문은 기사를 취소한다는 표현이 특집 기사에 들어 있지만 1면 기사나 제목에는 없다며 삭제대상 기사 정도는 명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아사히신문의 보도가 한일 관계 악화의 발단이 됐음에도 전문가의 연구 부족 등으로 책임을 떠넘겼다고 비난했다. 

산케이신문은 그동안 자사가 "고노담화가 허구적"이라고 주장하고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 씨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밝힌 것은 사실이 쌓여 역사 인식이 바르게 전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며 자사의 취재·보도를 부각했다.

앞서 아사히신문은 5일 특집기사를 내면서 '요시다가 제주도에서 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고 증언한 것이 거짓이라고 판단해 1980∼90년대에 게재한 관련 기사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산케이신문은 '아사히신문이 잘못을 인정하고 기사를 취소하는 데 30년이나 걸린 탓에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었고 일본의 명예가 손상당했다'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도쿄기독교대 교수의 견해를 함께 실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본질 직시하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본질 직시하라"(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아사히(朝日)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자는 취지로 5일 실은 특집 기사.

요미우리(讀賣)신문은 문제가 된 아사히신문의 보도가 한국의 반일 여론은 물론 일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세계에 심는 근거 중 하나였으며 좀 더 일찍 정정했어야 했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일본 정부의 고노담화 검증에 참여한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씨가 1992년 요시다 씨의 증언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기사가 수정되지 않았다고 문제 삼았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이나 문제점을 물리적인 강제연행의 문제로 좁게 해석하고서 '정부 자료에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기술이 없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해온 일본 우익세력은 아사히신문의 기사 취소를 계기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언동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자민당 간사장이 아사히신문 관계자를 국회에 소환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을 신호탄으로 이런 시도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 내 군 위안부 문제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 교수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짓밟힌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5일자 아사히신문 보도에 관해 "여성들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로 삼았다는 강제성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고 평가했다.

군 위안부 동원에 관해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해 온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학자 등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열린 BC급 전범 군사재판 기록에서 강제 연행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을 누차 밝혀왔다.

또 여성에 대한 전시 성폭력·성노에 문제인 군 위안부 제도를 강제 연행 여부에 국한해 접근하는 것은 사안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저해할 수 있다며 경계해 왔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8/06 09:58 송고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8/06/0200000000AKR20140806052600073.HTML?input=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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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4. 7. 18. 22:29

[책과 삶]‘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펴낸 우에노 지즈코 e메일 인터뷰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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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4. 7. 7. 11:44

"인신매매 당한 뒤 매일 밤 울면서 미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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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지촌 여성 김정자의 증언


▶ ‘우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할 때 가장 큰 고민이 이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가 미군을 위한 위안시설과 여성들을 관리했다고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몰랐던 미군 기지촌의 불편한 비밀들. 김정자씨의 증언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김정자(가명)입니다. 올해 예순넷입니다. 큰 지병은 없지만 요즘 무릎관절이 좀 아픕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오늘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이렇게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저는 미군 위안부였습니다. 기지촌으로 인신매매되어 평생을 미군한테 당하면서 억울하게 살아왔지만 아무도 저와 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일한 거 아니냐는 색안경만 끼었어요.

우리가 미군한테서 벌어들인 달러로 나라를 이렇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때는 우리더러 ‘애국자’라 그러더니 국가는 우리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있어요. 우리는 늙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언니들(기지촌 동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더는 못 보겠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왜 국가에 이런 싸움을 시작하는지 저의 인생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송에 참여한 여성 122명이 다 김정자씨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피해의 구조가 비슷한 여성들이 상당하다. 김정자씨의 증언을 대표적으로 살펴보되, 기지촌에서의 경험은 여성마다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

미군 기지촌에서 미군과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특수업태부, 양공주 등으로 불려왔다. 정부는 위안부와 특수업태부를 혼용해 사용해왔다. 1957년 제정된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 제4조에서 규정한 ‘위안부’는 1969년의 개정 법률에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1977년 개정 시 삭제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도 시·군 공무원들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한국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여성과 구분해 위안부라고 불렀다.(<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39쪽)


1950년대 전쟁통에 아버지 잃고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하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 꾐에 
열여섯에 집을 나와 찾아간 
그곳에서 지옥은 시작되었다 


“그 시절에도 성매매는 불법
미군 기지촌만 합법이었어요
공무원들은 한달에 한번씩
‘미군한테 서비스 잘하라’며
애국자라 치켜세워줬어요”

스무살로 위장시키는 포주…하루 서너명씩 받아

“저는 1950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때 천안에서 살았어요. 친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전쟁통에 저를 보러 왔다가 탈영병이 되어서 헌병한테 잡혀갔어요. 그냥 맞아서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재혼했어요.

제가 열두살 때쯤부터인가 제 의붓아버지는 어머니만 없으면 저를 겁탈했어요. 의붓오빠들도 저를 건드렸어요. 그걸 어머니께 말도 못 하고 꾹 참다가 열여섯살 때(1965년께) 집을 나와버렸어요. 제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어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방직공장이라고 했어요. 걔를 따라 서울역까지 기차 타고 왔어요.

서울역에서 친구 따라 또 어딘가로 갔는데 뭔가 이상한 거예요. 방직공장은 안 보이고 미군들만 길에서 ‘쌀라쌀라’ 거리면서 돌아다니더라고요. 어떤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에 ‘남바’가 붙어 있었어요. 1호실, 2호실, 3호실 이렇게. 저는 여관인 줄 알고 잤어요. 제 친구는 다음날 잠깐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하더니 안 왔어요.

(50대로 보이는) 어떤 아줌마가 나타났어요. 나보고 따라오래요. 공장에 데려다 주려나 보다 싶어 따라갔어요. 그런데 저더러 하는 얘기가 ‘네 친구가 빚을 안 갚고 도망갔으니 네가 갚아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인지는 얘기도 안 해주고, 친구 대신 돈을 갚아야 제가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 돈을 버냐고 물었어요. 밤에 언니들 따라가 보면 안다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가 간 곳은 파주 용주골(연풍리)이라는 데였어요. 미군기지 주변에서 여자들이 몸 파는 곳이었어요. 제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해 저를 팔아넘긴 거였어요.”

김정자씨는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김정자씨의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렸다. 친구의 행동이 원망스러웠지만 김씨는 하는 수 없이 친구의 빚을 갚기로 결심했다.

“아줌마(포주)는 저더러 클럽 나가서 손님(미군) 데려오라고 했어요. 저는 3일인가 있다가 그 포주집에서 도망갔어요. 근데 골목에서 잡혀버렸어요. ‘뒤지게’ 맞았어요. 한번만 더 도망가면 섬으로 끌고 가서 죽여버린다고 했어요.

(포주가) 파스 갖다 붙여주고 세코날(진정제)을 줬어요. 기분 좋게 해주는 거라면서 줬어요. 하나 먹으면 (중독되어서) 두개 먹어야 하고, 세개 먹으면 네개 먹게 돼요. 손님 데리고 오라고 내보내면 제가 무서워서 말을 못 붙였어요. 맨정신으로는 창피해서 손님 못 끌어요. 저는 그 약이 뭔지도 모르고 계속 먹었어요.”

김씨는 나중에 이것이 마약인 것을 알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약을 먹어야만 히파리(호객행위)를 하러 나갈 수 있었다. 김씨가 미군을 데리고 올 때까지 집(숙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한두달 일하면 빚을 갚을 줄 알고 김씨는 그냥 눈을 질끈 감고 기지촌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거기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빚은 계속 늘었어요. 방값이랑 화장품·미장원비랑 세코날비랑 내야 하는데 아무리 일해도 못 갚는 거예요. 이자는 계속 붙었어요.”

보통 기지촌에는 위안부 여성들의 자치조직이 있다. 자매회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기지촌에서 일을 하려면 이곳의 회원으로 등록해야 한다. 자매회에서는 뻔히 미성년자인 것을 알면서 회원증을 주고 검진증(성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증)을 발급해 주었다는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이 많다. 보통 포주들은 십대 아이들에게 스무살이라고 말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김정자씨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보통 기지촌 여성들은 하룻밤에 미군을 서너명씩 받아야 하는 경우가 예사였다.

“그러면 거기(음부)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긴밤·짧은밤(성매매 시간 단위) 아무리 해도 끝이 없었어요. 긴밤은 제 방에서 밤새 자고 아침에 일찍 가는 거고 10달러 받아요. 짧은밤은 제 방에서 30분에서 1시간 있다 가는 거예요. 돈은 모두 아줌마가 가져가 버려요. 제가 직접 못 받아요. 아줌마는 한달 계산해 준다면서 다 뺏었어요. 1~2개월이면 빚 다 갚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돼요.”

기지촌의 10대 아이들은 셈법에 밝지 못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포주는 공포의 대상이라, 장부에 무엇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아니 10대의 아이들은, 밤새 울고 밤새 미군의 노리개가 되어 고통의 몸부림을 쳤다.

“도망을 갈 수가 없었어요. 일하러 갈 때 늘 남자(포주집에서 일하는 건달)들을 붙여 감시해요. 목욕을 가면 자기네(포주집)에서 제일 오래 있는 년, 주인한테 아부하는 년이랑 같이 목욕을 보내요.

경찰한테 신고할 수도 없어요. 주인집에 경찰이 낮에 놀러 와요. 주인아줌마한테 누나라 그러면서 들어와요. 그러면 아줌마는 담배도 싸서 주고 그래요. 처음에 저는 아줌마 남동생인 줄 알았는데 옆의 언니들이 형사라고 귓속말해주는 거예요. 주인이 다 돈 먹이는 거라고. ‘경찰에 신고해도 내가 못 나가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죠. 내가 죽어서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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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하기로 했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건물 4층에서 열린 소송 기자회견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왜 그토록 미군과 결혼하려고 했는가

“한번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서 도망갔어요. 용주골에 인신매매되고 몇개월 뒤였어요. 파출소로 들어갔어요. 40대쯤 되어 보이는 경찰이 ‘왜 남의 빚 져놓고 도망가냐. 안 갚으면 영창 간다’고 하는 거예요. 포주들이 경찰서에 다 돈을 집어주던 시대였어요. 하는 수 없이 다시 포주집으로 돌아갔지요. 골방에 갇혀 또 뒤지게 맞았어요.”

김정자씨는 죽어서 절대 산에 묻히고 싶지 않다. 그가 산에서 겪은 고통스런 경험 때문이다.

“산에 가서 미군을 받아야 할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부대에서 훈련을 나가면 저희도 따라가야 했어요. 밤에 컴컴해지면 담요 하나 들고 아줌마 따라서 가요. 아줌마가 보초 서는 미군이랑 솰라솰라 말해요. 그럼 훈련 장소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총 들고 서 있던 놈들이 막사에 가서 여자들하고 잘 사람 나오라고 말해요. 이식스, 세븐(E-6는 하사, E-7은 중사)들도 다 했어요. 장교들은 특별히 막사 안에서 해요. 일반 병사들은 훈련장 안에 나무 있는 데에 담요 깔아놓고 하거나 구덩이를 파놓고 해요. 미군들이 파놓은 구덩이지요.”

기지촌 여성들은 그렇게 훈련장에까지 불려 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담요로 삼고’ 미군을 받았다. 제대로 씻을 시간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내려가야만 포주가 혼을 내지 않는다. 어떤 미군은 돈 대신 자신들이 먹는 말라붙은 밥을 던져주어 여성들을 애타게 했다. 여성들은 한번 훈련장에 가면 그곳에서 새벽까지 보내다 돌아왔다고 한다.

안전한 성관계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보장되기 어려웠다. “어떤 미군은 콘돔을 안 끼고 해요. 우리는 거절을 못 해요. 그래서 낙태도 참 많이 했어요. 뗀 애만 열일곱이에요.”

보건소는 포주들이 끌고 갔다. 강제로 낙태시키는 것이다. 창자까지 다 빠져나오는 고통을 견디며 여성들은 낙태 수술을 견뎠다. 낙태 이후에는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도 또 일하러 가야 했다. 포주들은 낙태 수술로 상한 몸을 보살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약과 찬물 한컵 정도 들이켜고 다시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루 그냥 쉬면 빚이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이러고 살아야 하니 죽고 싶은 생각만 들지요. 기지촌에서는 한달이면 두세번은 장례를 치러야 했어요. 철길로도 뛰어들고 연탄불 피워놓고 그 가스도 먹고. 저도 세번 죽으려고 시도했어요. 그런데 무슨 놈의 팔자인지 다 깨어났어요.”

김정자씨는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다. 공동묘지에서 자살을 기도하면 묘지 관리인이 발견하고, 집에서 동맥을 끊으면 자신을 보러 온 미군이 발견하곤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왜 죽으려 하느냐’고 묻곤 했다. 김씨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왜 우리들이 미군하고 그렇게 기를 쓰고 결혼하려 했는지 알아요? 그게 아니면 여기를 탈출할 방법이 없었어요.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요. 도망가려 해도 경찰 누구도 안 도와주고. 우리에겐 국가가 없었어요.”

아니, 국가는 있었다. 미군한테 성접대 잘하라고 교육하는 국가는 있었다. 자매회 회의가 한달에 한번씩 열리면 여성들은 참석해서 교육받아야 했다. 안 그러면 영업을 못 했다. 회의에 가면 헌병, 시아이디(C.I.D. 미군부대 범죄수사과), 보건소 직원, 경찰서장, 군청 공무원들이 모두 와 있있다. 미군은 슬라이드(필름)를 이용해 성병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할 일이라고 이해할 법하다.


파주 용주골에 팔려간 뒤 
동두천·군산·평택 전전 
40대 중반에 기지촌 빠져나와 
도망가고 싶어도 붙잡힐까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훈련 나가면 
저희도 산에 따라가야 했어요 
그때가 가장 무서웠어요 
산에서 안한다고 반항하다가 
죽은 아가씨들도 있어요”

‘토벌’당한 성병 의심자들, 언덕 위 하얀 집으로

하지만 공무원들은 이상한 교육을 더 했다.

“나와서 늘 하는 말이 이거예요. ‘아가씨들이 서비스 좀 많이 해주십시오. 미군한테 절대 욕하지 마십시오. 바이 미 드링크(Buy me drink. 술 사주세요) 하세요. 그래야 동두천에 미군들이 많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부자로 한번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수는 저희더러 달러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웠어요. 그러면 저희는 그래야 되나 보다 하는 거예요.”

일종의 정신교육 같은 것이었다. 여성들은 왜 이런 교육을 받아야 되는가 싶었지만 국가가 노후를 책임져준다고 하니까 그런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턱걸이(동두천시 광암동 일대)에다가 공장을 짓고 아래층에는 가발공장, 위에는 기숙사로 만든다고 공무원들이 설명했어요. 나이 먹으면 여기에 우리가 살 수 있다고 군수가 그랬어요. 땅을 다 사뒀다고. 그러니 열심히 달러 벌라고. 우리는 늙어도 갈 데가 있구나 하고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건 하나도 없지요. 포주들은 저희가 벌어온 돈으로 집도 사고 땅도 샀는데. 어떤 악명 높은 포주는 나중에 경기도의원이 되더군요.”

경찰은 인신매매되어 팔려온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성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잡아가는 것도 비인간적이었다.

“성병 걸린 미군이 찾아와 칸택(contact·미군 성병환자에게 성병을 감염시켰을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찍는 것)을 하면 그냥 끌려가요. 찍히면 가는 거예요. 그 미군이 어디서 성병 옮아갖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걸 토벌당한다고 불렀어요.”

‘토벌당해’ 파출소에 끌려가면 유치장에서 머문 뒤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성병이 있거나 없거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병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환자일 뿐인데 죄인처럼 다루어졌다.

“하얀 집(동두천시 소요산 아래 낙검자 수용소를 기지촌 여성들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불렀다.) 가면 운동장이 크게 있는데 토벌당한 여자들 실려 오면 (건물 문을) 철커덕 잠그고 꼭 교도소 같았어요. 나갈 수 없어요. 화장실만 갈 수 있게 했어요. 유치장 같은 데서 다섯명씩 자야 해요. 바깥 창문은 쇠창살이 설치돼 있고 면회 와도 쇠창살 사이로 얼굴 보면서 얘기해야 했어요. 아니, 우리가 죄인이에요? 환자를 왜 죄인 취급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성병에 걸린 미군에게 무슨 조처를 했는지는 여성들에게 통보되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의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비쳤다.

“우리는 페니실린을 맞았어요. 그거 맞고 쇼크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어요. 맞으면 걸음을 못 걸어요. 엉덩이 근육이 뭉치고 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거 같아요. 그걸 이틀에 한번 맞아요. 괴로운 언니들은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죽거나 반병신 되고 그랬어요. 저는 하얀 집에 (1982년께) 2주 동안 붙잡혀 있다 나왔어요.”

김정자씨는 (1965년께) 파주 용주골에 팔려 간 뒤 동두천, 용산, 군산, 평택과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40대 중반(1990년대 중반)에야 기지촌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스물다섯 때(1974년께) 기지촌에서 한번 도망 나왔지만 다시 동두천 기지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어디를 도망가더라도 깡패를 보내 저를 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어디 공장에 취직하려면 제 신분증을 제출해야 하는데 제가 동사무소 가서 주민등록증 발급받으면 포주집에 진 빚 때문에 경찰이 저를 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씨는 ‘스스로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니네들이 좋아서 (기지촌 생활) 했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들어요. 한국 정부가 미국 안 끌어들였으면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어요? 알고 봤더니 그 시절에도 성매매 행위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더라고요. 미군 기지촌만 성매매가 합법이었어요. 박정희 정부가 왜 그런 법을 만든 걸까요. 저는 잘 모르지만 미군 붙잡아 두려고 그렇게 한 거 아니겠어요? 우리더러 달러 벌게 하려고.”

미군 기지촌의 형성 과정에 국가의 어떤 정책이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옳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무살도 안 된 소녀들이 기지촌에 팔려 오고,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국가가 계속 방치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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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 자리’ 알아봐준다고 따라가면 기지촌

“억울해 죽겠어요. 저같이 거기 인신매매되어 간 사람이 너무 많아요. 직업소개소에서 식모 자리 알아봐준다고 해 따라가고, 밥 준다고 따라가고 해서 가 보니 기지촌인 경우들이 너무 많았어요. 미군 위안부로 살 줄 알았다면 누가 거기 따라갔겠어요.

일본군 위안부도 인신매매되어 간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요. 일본군 위안부는 피해자로 인정하는데 왜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국가가 눈감고 있는 건가요. 당한 사람은 있는데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냐고요. 당신 딸들이 붙잡혀 간 거라면 가만히 있겠어요? 언니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어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다가 벌써 세분이나 돌아가셨어요. 저는 사과를 원해요. 늙고 병든 우리 몸뚱어리를 국가에서 책임져주기를 바라요. 그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어요.

하늘에 있는 우리 (기지촌) 언니들을 위해서 제가 이렇게 나섰어요. 누군가는 증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용기를 냈어요.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잘 좀 보도해 주세요.”

김정자씨는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난달 20일 약 4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할 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30분 증언하다 10분 울고, 30분 증언하다 다시 10분 우는 것이 반복됐다. 낙검자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고백할 때는 구토를 하기도 했다.

인생 전체가 국가가 간섭한 성폭력으로 얼룩져 있던 그에게 이번 인터뷰는 그렇게 힘든 과정이었다. 따라서 인터뷰 때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고 최소한의 질문만 하려고 노력했다. 대신 김씨와 진행한 인터뷰와 그의 증언록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2013)의 내용을 종합해 이 글을 썼다.

김정자씨는 인터뷰 뒤 바닷가로 가 새움터(기지촌 여성 지원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음날까지 통곡했다고 한다. 힘든 인터뷰를 결심해준 김씨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김정자씨는 현재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번다. 그를 부양하는 가족은 없다. 대신 새움터의 도움을 받고 있다.


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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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3. 8. 18. 01:31
역사 아픔 잊으면 미래도 없다
광복절 맞아 서점가 주목
위안부 할머니 다룬 도서
민족의 뼈아픈 과거 담아
 등록 : 2013년 08월 16일 (금) 13:05:32 | 승인 : 2013년 08월 16일 (금) 13:33:20
최종수정 : 2013년 08월 16일 (금) 19:13:13
고혜아 기자  kha49@jemin.com 
  
 
 ▲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리고 싶은 것'의 한 장면. 
 
  
 
   
 
제주 출신의 권 효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싶은 것'이 광복절인 15일 개봉과 함께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 피해 여성인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는 과거를 부정하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있는 일본의 변화를 적극 촉구하며 보는 이들에게 묵직한 무언가를 남겼다.
 
매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과 함께 아픔을 달래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 대한 마음이 교차된다.
 
광복절에 맞춰 위안부 할머니들을 주제로 한 도서들이 주목받고 있다.
 
한·일 관계에서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한 박유하씨는「제국의 위안부」(1만8000원·뿌리와이파리)를 통해 위안부 실체에 접근했다.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범죄 차원에서 바라보며 위안부 지원단체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번역하고 해제를 단「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2만5000원)는 일제강점기,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2년 4개월 동안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로 일했던 조선인의 일기이다. 당시 일본 군부가 조선인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는 자료로, 위안부를 성노예로 삼으며 철저히 관리·통제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한다.
 
안세홍 사진작가는 '사진의 기록'으로 위안부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사진으로 기록한「겹겹」(서해문집·1만6000원)이다. 할머니들과 나눈 짧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80여년 세월의 아픔과 한을 느끼며, 그 내면에 담긴 고통을 사진에 담았다.
 
이 밖에도 지난 2010년 영화 '그리고 싶은 것'의 증언으로 나선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어린이 동화책「꽃할머니」(사계절·1만500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꽃다운 처녀 시절을 빼앗긴 황금주 할머니의 실제 이야기를 김은비라는 12살 소녀의 이야기와 엮어 액자 형식으로 쓴 장편 창작동화「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네버엔딩스토리·6800원)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고혜아 기자


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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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3. 8. 10. 12:46

심포지엄 웹자보_HP.jpg


제1회 일본군‘위안부’ 기림일(김학순의 날 ) 기념 국제심포지엄
-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실, 정의, 배상실현과 재발방지를 위하여
 
일시ㅣ2013. 8.13.(화) 10:00 ~
장소ㅣ아산정책연구원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 1-176)
주최ㅣ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참가비ㅣ1만원 (자료집 및 점심식사 제공) 현장접수
※ 참가를 희망하는 분들은 원할한 진행을 위해 사전 신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일 war_women@naver.com 전화 02-365-4016
 
[초대글]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정부가 그 진실을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맞서, 최초로 공개증언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범죄를 고발했습니다. 긴 침묵을 깬 피해자의 목소리는 다른 피해자들이 한걸음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주었고, 비단 한국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각 피해국과 세계를 향해 은폐되었던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커다란 외침이 되었습니다. 용기 있는 고백이 다시 역사 속으로 묻히지 않도록, 또한 피해자들이 명예와 인권회복을 이룰 수 있도록 각지의 여성들과 시민들은 지난 20여 년간 그 외침을 이어 받아 더 큰 함성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정의실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계 각지에서는 무력 갈등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국제 심포지엄은 지난 2012년 제11차「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이룬 결의에 따라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로 선포한 후 그 첫 번째 기림일을 맞이하여 22년 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침묵을 깨트렸던 용기를 다시 기억하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연된 정의실현을 앞당기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전시여성폭력의 불처벌이 계속되고 있는 불의의 벽을 깨트리는 의미있는 걸음이 될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로 이 걸음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심포지엄 프로그램]
09:30-10:00 ㅣ심포지엄 참가 등록
10:00-10:10 ㅣ기조연설 : 윤미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10:10-10:25 ㅣ다큐 영화 「Within Every Woman」 트레일러 상영
10:25-10:45 ㅣ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발언 : 하상숙(중국 거주 한국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한국 피해자)
10:45-11:00 ㅣ특별 발언 : 다나카 노부유키(평화활동가, 전 일본군 2세) 
 
Session 1 “실현되지 못한 정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
11:00-12:00 ㅣ발표 1. 22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좌절과 희망
■ 가해국에서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 양징자(일본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 공동대표)
■ 피해자와 함께 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 김선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노력과 생존자들의 상황 : 강지안(중국 변호사)
 
12:00-13:00 ㅣ점심식사
13:00-14:00 ㅣ발표 2. 국가책임 규명과 피해자들을 위한 법적 구제 노력
■ 일본의 국가책임 부정과 오늘의 일본 : 니시노 루미코(일본 VAWW-RAC 공동대표)
■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과 최근 경과 : 아이타니 쿠니오(일본변호사협회)
■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법적 구조 : 김창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4:00-14:30 ㅣ Special Session
■ "콩고로부터의 영상 메시지"
■ 콩고 내전 강간 피해여성들의 상황과 국제사회의 지원 현황 : 니마 나마다무, Synergy of Congolese Women’s Associations 상임이사
 
14:30-15:10 ㅣ Session 2 “정의실현을 위한 새로운 도약” - 전시여성폭력의 근절을 위하여
■ 남아있는 법적 선택지(options)와 피해 회복의 길 : 양현아(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세계 전시여성폭력의 현황과 여성연대의 과제 : 캐서린 바라클러프(국제 앰네스티 동아시아 캠페이너)
 
15:10-15:25 ㅣ휴식
15:25-15:35 ㅣ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서면 연대 메시지 : 라쉬다 만주(유엔여성폭력특별보고관)
15:35-16:30 ㅣ종합토론 
 
[심포지엄 장소]
아산정책연구원 강당(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 1-176) 전화 02.730.5842
 
[안내 및 요청사항]
■8월 13일 국제심포지엄  - 심포지엄은 한국어/영어/일어 동시 통역으로 진행됩니다(중국어 일부 지원). - 참가비는 1만원이며, 행사장에서 점심식사 및 다과가 제공됩니다. - 심포지엄 참가 현장접수 등록시간은 09:30-10:00 입니다.  
 

■8월 14일 세계연대집회 - 심포지엄 다음 날인, 8월 14일 제1087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열립니다. 일본군‘위안부’  기림일(고 김학순할머니 최초 공개증언일)을 맞이하여 서울 및 각지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연대집회 등 세계연대행동이 펼쳐질 것입니다.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수요시위에 많은 관심과 참가를 부탁드립니다. * 일시: 8월 14일(수) 12:00-2:00PM, 장소: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 *  



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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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3. 8. 10. 00:21

▲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328쪽 | 1만8000원

2011년 12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한복, 단발머리, 맨발의 소녀는 움켜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많은 한국인들이 간직한 군위안부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는 이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는 대부분 20대였고, 정규교육을 받을 만큼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기에 학생에게 어울리는 단발머리를 할 가능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 교수는 단지 조각상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조각상은 제국과 식민지, 계급 격차 등 군위안부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모두 삭제한 채, 오직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강간당한 뒤 버려진 가련한 소녀만을 기린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의 뒤에는 ‘정의의 독점’을 꾀하는 한국, 일본의 강경파들이 있고, 이들이 문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는 분명 논쟁적이다. 앞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작 <화해를 위해서>(2005) 역시 그랬다. 한국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는 여전히 뜨겁다. 일본엔 혐한 분위기가 일고 있고, 보수 정권은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입지는 더욱 취약해졌을 수도 있다. 박 교수도 <제국의 위안부> 서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화해를 위해서> 출간 시)보다 훨씬 나빠졌다”고 말한다.<제국의 위안부>가 말하는 위안부란 어떤 사람들인가. 일찌감치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했던 일본은 식민지로 떠난 자국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불편’을 호소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라유키상’을 파견했다. 가라유키상이란 해외에 돈을 벌러 떠나는 여성을 일컫는 말로, 사실상 해외 일본인 거주지에 있는 공창의 유녀를 뜻한다. 가라유키상은 강력한 국가권력, 가부장제 아래 있는 가난한 여성의 고난을 보여준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기원은 가라유키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전쟁을 하던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일본 여성만으로는 그 수를 감당할 수 없자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집의 주체와 방법에서 논란이 있다. 한국에서의 인식과 달리, 조선인 군위안부는 일본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기보다는 조선의 지방관료, 매춘업자들이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쌀밥을 먹게 해준다는 꼬드김으로 데려갔다는 증언이 많다. 물론 박 교수가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이 이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강제성’을 만든 일본 정부를 면책하지 않는다.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설령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매매춘에 나섰다 하더라도, 세상이 멸시하는 일을 선택한 것은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남성, 군대, 국가 그리고 일본 제국에 최종 책임이 있다. 다만, ‘현실적 강제성’을 따져묻기 시작하면, ‘우리 안의 협력자들’까지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는 오늘날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중국,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와 조금 달랐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라는 말에서 ‘조선’이란 국적이 아닌 출신지일 뿐, 이들은 서류상 일본인이었다. 국적이 조선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성을 착취당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겠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적의 여자’가 아니었기에 일본군의 가족, 연인의 역할까지 하도록 요구받았다. 조선 출신 일본 군속이 그러했듯, 조선인 위안부들은 중국, 인도네시아 등 현지인들에게 ‘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없었다는 한국인의 인식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절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박 교수는 1993년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명의로 발표된 ‘고노 담화’와 이후 만들어진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한다. 고노 담화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이 위안부 본인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고 참혹했다는 점도 적시했다.

사회당수인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이끌던 일본 내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자민당 의석수가 사회당의 세 배였던 당시 의회에서는 관련 법제를 만들기 불가능했다. 일본에서는 과거청산 문제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내각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기금을 마련해 보상금과 함께 무라야마 총리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보상금을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한국의 여론은 이것을 받아들이면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 보상사업에는 52억엔의 돈이 들어갔고, 이 중 90%가 정부 예산이었다. 그리고 보상금과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인 위안부도 61명이 있었다. 여전히 수요집회에 나가는 ‘투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서 위안부는 당사자인가. 박 교수는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지원 단체를 비판한다. 그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으로 응원받고 있는 위안부 지원운동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일본의 위안부 지원운동은 피해 여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일본의 보수적 정치 구도를 혁파하려는 좌파 진영의 수단에 그친다고 본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 위안부 문제의 해결 책임은 여전히 일본 정부에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전쟁 후 처리에 대한 것일 뿐 식민지 지배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전(前) 제국 국가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이 한일협정의 시대적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해 반성한다면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

1990년대의 사죄와 보상도 아쉽다. 박 교수는 당시의 문제는 보상 주체가 아니라 보상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상에 가까웠는데도 정부의 관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고, 인도네시아, 중국, 조선 출신 위안부에 대한 구분도 섬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20세기는 인권이 세계 각지에서 침해당한 세기였는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넓은 의미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좁은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아베 신조)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다시금 고조되는 지금 상황에서 일본은 외부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고 박 교수는 제안한다. 일본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많다는 점을 피해자와 국제사회가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의 문제이자 자본의 문제였다. 돌아보면 제국주의 일본만이 위안부를 동원했던 건 아니다. 위안부는 “일본의 천황제나 일본의 군사주의가 아니라 국가세력을 유지/확장시키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는 국가 시스템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 이후 한국, 일본에 기지를 둔 미군 기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 이곳 기지촌에는 한국인 여성 대신 조선족, 러시아, 페루, 필리핀 여성이 대거 들어왔다. 조선인 군위안부뿐 아니라 이들 모두가 피해자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가로막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도덕적 오만을 경계하자고 제안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의 ‘피해자’로 박제화해 ‘투사’나 ‘민족의 딸’로 만들기보다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박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친일파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실제 인터넷에서는 그를 두고 ‘위장한 일본 우익’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된 대담하고 논쟁적인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092100545&code=900308

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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