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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이주노동의 현실과 이주노동자운동의 과제



지난 2005년 11월 9~10일 고려대학교 제2학생회관에서 “비정규직 권리보장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의 일환으로 “이주노동자의 노동기본권” 워크샵이 개최되었다. 1부에서는 이주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적 측면을 다룬 ILO와 민변 황필규 변호사의 발표가 있었고, 2부에서는 국제건설목공노련의 이주노동자 관련 활동 소개와 한국, 일본, 홍콩, 네팔 등 4개국 이주노동자운동 활동가들의 발표가 있었다. 특히 2부의 발표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단초를 던져주었다. 다만 각각의 발표들이 주로 자신들의 구체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아시아 지역의 전반적인 이주노동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거나 공동의 과제를 확인하기에는 조금 미흡한 면이 있었다.

이 글은 작년 워크샵의 발표를 조금이나마 보충하려는 시도이다. 아시아 지역 이주노동과 이주노동자운동의 현실을 보다 포괄적으로 살펴보면서 각 국 사례들의 교훈을 분명히 하고 공동의 전망을 모색하려 한다. 각 국의 구체적인 운동 사례는 주로 워크샵의 발표를 참고했다. 당시 워크샵 기획단 일원으로서 이 지면을 빌어 발표를 맡아주신 활동가들에게 감사와 연대의 말을 전한다.

아시아 이주노동의 전반적 현황

2차대전 이후 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로 노동력을 송출해 왔다. 이는 당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이전과는 다른 조건 속에서 경제성장을 도모해야 했던 많은 국가들이 자본의 부족과 노동력의 과잉이라는 상황에서 택한(혹은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략일 것이다. 즉 이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노동력을 수출하여 국내의 노동력 과잉을 해소하고 이를 통한 외화획득으로 부족한 자본을 보충했다. 당시 노동력 이동은 주로 북아메리카, 서유럽, 중동지역 등을 향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이러한 흐름이 변화한다. 우선 노동력 이동 방향이 변화하는데, 특히 아시아 내부에서의 노동력 이동이 두드러지게 증가한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방향 변화를 넘어선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동력 이동의 전반적인 양상이 변화하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자본주의 위기와 이에 따른 금융세계화,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밀접히 연관된다.
한편으로 중심부 및 중동 등 전통적인 노동력 수입국의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외국인 저임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이민이나 이주노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호황을 구가하던 아시아의 주요 산업국가인 일본, 한국, 대만 등에서 저임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대했다. 다른 한편으로 개방의 가속화로 인한 농촌의 몰락, 산업의 침체 등으로 주변부 국가에서의 노동자들의 이주가 확대되고 자연스럽게 이들 사이의 경쟁이 강화된다. 이로 인하여 저임금 노동력의 이동 방향이 변화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 수입국에서의 규제강화에 따른 불법체류 혹은 불법취업이 증가하고 이주를 둘러싼 각종 중개업체의 개입과 송출비리가 심화된다. 이것이 주로 저임금·미숙련 노동력의 경우라면, 고부가가치 산업과 연관된 고임금·숙련 노동력의 이동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후자의 중심부, 특히 미국 유입은 오히려 증가하고 반주변부나 다른 국가에서 이들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요컨대 노동력 이동에서 이중적 흐름이 형성되고 각 국가는 선별적으로 이들을 관리하는 정책을 채택한다.1)
다음으로 전통적인 건설업이나 제조업에서의 노동력 이동 이외에 시설관리, 서비스 등의 업종에서의 노동력 이동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다. 금융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각종 서비스 업종에서의 일자리, 이른바 ‘하인노동’이 팽창하는데 이러한 일자리의 상당수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한편 ‘이주의 여성화’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이주노동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증가한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 확대, 전통적 성별 분업이데올로기의 존속, 성산업의 유례없는 팽창, 국제결혼의 증가 등 신자유주의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 성산업, 가족제도의 변화가 맞물려 여성의 이주가 확대되고 있다.2) 아시아의 경우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주요 송출국에서의 여성 비중 증가3), 홍콩 등지의 가사노동자에서 이주여성의 비중 증대, 한국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국제결혼(1990년대 600여명에서 2004년에는 연간 25,500명으로 확대되었다) 등에서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주요 국가별 이주노동의 상황 및 관련 제도 : 노동력 유입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개별 국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책은 노동력에 대한 관리의 문제와 국가의 구성원을 관리하는 문제에 대한 대응의 결합물이다. 근대국가는 국경의 출입을 관리·통제하고 자국 시민의 자격을 결정·부여한다. 19세기를 거치며 일반화된 민족국가는 민족적·인종적 동일성을 이러한 결정의 일차적 기준으로 삼는다. 근대국가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이러한 동일성이 권리의 차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금지하고 시민의 자격 여부를 가르는 기준 면에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민족적·인종적 동일성이 끊임없이 1차적인 기준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책과 제도는 자본축적의 요구에서 비롯되는 노동력의 공급에 대한 관리와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국경·시민권에 대한 관리 간의 모순과 긴장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혈연공동체에 기반하여 시민권 자격을 부여하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책도 시장의 필요에 부응하는 노동력을 제한적으로 수입하되 사회적·정치적 영역으로의 진입은 철저하게 가로막는 특성을 보인다. 이와 유사한 제도를 가지는 국가로 독일을 꼽을 수 있다.4) 독일의 이주노동력 관리 제도인 ‘노동허가제도’는 정부가 이주노동의 모집과 직업소개를 독점하여 관리하고 이주노동자가 취업할 수 있는 지역·직종을 제한하는 한편 이주노동자의 장기거주를 차단하는 ‘교체순환정책’을 표방한다. 이는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의 이주노동자 수입 정책 모델이 된다. 다만 이들 나라는 독일의 노동허가제도가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주노동자들의 정착을 막지 못했음에 주목하면서, 독일식 제도를 변형하여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봉쇄하는 ‘고용허가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고임금 노동자에 대해서는 사실상 이민자로 대우하지만, 저임금 노동자에 대해서는 외국인노동자취업법에 따라 사업장 이동의 권리 등을 엄격히 제한한다. 대만 역시 비슷하나 허가를 받은 고용주만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 다르다. 홍콩은 외국인력의 도입에 관한 별도의 법률을 갖고 있지 않아 정부의 특별조치나 행정 집행에 의해서 인력의 도입과 관리가 결정된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취업사증을 받은 노동자는 단기간 체류만이 허용되고, 사업장 이동이 금지되며, 영주권을 신청하거나 가족과 동거할 수 없다.
한편 일본은 단순·미숙련 노동자를 원칙적으로 수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정책방향이다. 따라서 ‘기능실습제도’라는 연수생제도가 노동력을 수입하는 유일한 공식 제도다. 여기서는 한국의 ‘산업연수제도’와는 달리 연수 후 기능실습 기간에 노동자 신분이 인정되기 때문에 노동관계법, 각종 사회 보장 관련 법령이 적용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연수생, 실습생이라는 미명 하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가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전체 이주노동자 중 실습생은 겨우 1.4%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정주자 사증을 받은 일본계외국인, 유학생들의 파트타임 취업, 미등록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미등록노동자의 비율이 거의 40%에 달할 정도이다.
한국의 경우 음성적으로 이주노동자의 도입이 이루어지다가 1991년 일본과 유사한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이주노동력의 수입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세계 1위의 미등록노동자의 비율(2003년 기준, 2위인 일본보다 무려 20%가 높은 60%)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이는 다량의 미등록노동자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심각한 인권탄압, 초과착취를 조장했다. 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반발과 투쟁이 거세지자 정부는 2004년 대만과 유사한 ‘고용허가제’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를 비판하면서 노동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노동허가제’ 도입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각 국별 투쟁 사례의 시사점

1) 홍콩노총 인도네시아 이주지부(IMWU-HKCTU)
홍콩노총 인도네시아 이주지부는 홍콩 내 인도네시아인 단체(IGHK)를 기반으로 1993년에 만들어져 1996년 정식노동조합으로 등록되었고 현재는 200명이 넘는 조합원이 있다. 홍콩에는 22,800명의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12,420명이 필리핀, 9,170명이 인도네시아 출신이다.
워크샵의 발표자인 릭 키즈마와티 수트리스노씨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여성 노동자들은 순종적이고 유순하며 가장 비천한 업무조차 기꺼이 견디는 존재처럼 인식되고 있어 홍콩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 가사노동자로 선호된다고 한다. 유순한 노동력으로 여겨지는 그녀들이 견뎌야 할 노동조건은 극히 열악하다. 홍콩 인도네시아 이주지부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가사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47%), 고용계약 외의 의무이행(25%), 폭력(6%), 심지어 성폭력(3%)까지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네시아 전체 이주노동자 차원에서 보면 2002년에만 1,308,765건의 살인, 강간, 육체적 폭력, 사기, 강제추방이 있었으며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35만 명의 귀국한 이주노동자 중 12%가 질병에 걸린 채 귀국한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정확히 최저임금만큼의 임금을 받고 있는데 그마저도 97년 외환위기 이후 삭감되고 있는 실정이다.5) 또한 최근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새로운 관리지침인 NCS(New Conditions of Stay)는 실직시 2주 이내 추방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많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와 본국에 돌아가도 일자리가 없다는 현실로 인해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감내하면서 꾸준히 이주노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맞서 홍콩노총 인도네시아 이주지부는 NCS 등의 홍콩정부 정책에 대한 개입, 임금인상을 비롯한 노동조건 개선, 인도네시아 정부 및 취업알선업체를 상대로 한 알선료 인하 등의 투쟁을 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조합원을 상대로 한 대중교육사업을 강조한다. 그 일환으로 이들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고, 다른 시민단체,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이 사회운동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인권교육, 기술교육, 젠더관련 교육 등을 통해 소속 조합원들의 자활력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은 이주노동조합들이 공동으로 처해 있는 문제들, 예컨대 잦은 성원교체로 인한 조직의 안정적 토대의 취약성, 의사소통의 어려움, 사용주의 장시간 노동요구 등으로 인한 조합원들의 조합활동 시간 부족, 인적·재정적 자원의 부족 등을 극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각 국의 이주노동자운동 역시 이러한 시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일본 전통일노조 /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 노조
’04년 기준으로 일본의 이주노동자는 1,973,747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1.55% 규모다. 제국주의 침략시절의 식민지에서 이주한 이들(약 46만 명)을 제외하면 이들 대부분은 라틴계 이민 2세들이다(56%). 공식적인 노동력 수입 제도가 없는 일본제도의 특성상 미등록노동자가 많은데 ’03년에는 그 수가 29만 명까지 이르다, 강력한 단속으로 인해 ’05년에는 20만 명 정도로 약간 줄어든 상태다. 한편 유일한 합법적 이주노동자 수입 제도인 기능실습제도는 사실상 기계, 금속, 섬유 등 제조업 분야의 저임금 노동력(일본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의 1/5, 심지어 1/10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을 충원하는 통로로 활용되고 있는데 그 수가 전체 규모에 비해서는 적으나 최근에는 중국인,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출신들이 이 제도를 통해 많이 유입되면서 그 수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거대 산별노조가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지 않은 반면, 지역에 기반한 일반노조는 조직화에 적극적이다. 이주노동자가 속한 노동조합은 크게 2개가 있는데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은 라틴계 이민 2세와 한국인들이 많고, 전통일노조에는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주노동자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93년 3월 8일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과 심각한 인권침해를 폭로한 이 날의 투쟁은 일본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이른바 ‘외국인 춘투’라고 불리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93년 당시 20명으로 출발한 조합원의 수도 현재 2000명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봄 지방자치단체, 노동부, 기업 등을 상대로 투쟁과 교섭을 하고 있다. 일본 이주노동자운동의 특징은 일반노조라는 조직 특성상 조합의 기반이 비교적 탄탄하고, 지역을 기반으로 이주노동자들과 일본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상적인 연대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카나가와 씨티 유니온은 지역기반 노조의 이점을 활용, 집중행동의 날을 선정하여 지역 조합원들이 함께 여러 사업장과 지역자치단체 등을 다니며 공동의 투쟁을 만드는 등, 소속 조합원들이 자연스럽게 연대감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또한 워크샵에 참석한 전통일노조의 토리 잇페이씨는 일차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활동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운동들의 연대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주노동자 관련 연대단위는 산업재해, 부당해고, 임금체불 등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상적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일본 사회의 변화를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주노동자가 처한 노동조건의 특성상 건강과 관련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데 연대단위에 소속되어 있는 의료 네트워크의 연대와 지원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한편 최근 일본사회가 우경화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외국인혐오증을 활용하여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아가는 캠페인을 한다거나 미등록노동자들을 일반 시민들이 신고하도록 하여 대중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토리 잇페이씨는 이런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의 노동자로서의 권리, 지역의 일원으로서의 시민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투쟁이 절실함을 주장하였다.

3) 국제건설목공노련(IFWBB)
국제건설목공노련(IFWBB)의 아태지역 사무국의 이진숙씨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건설업을 비롯한 기업들이 구조조정, 하청, 비정규직노동자 및 이주노동자 등을 이용, 유연한 노동력을 값싸게 부리는 경향이 증가하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과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대한 일국적·국제적 대응이 중요함을 주장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한정된 일자리를 둘러싼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업체들이 이러한 갈등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입국가의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이주노동자들의 동등한 노동권과 노조가입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대만의 전국중국인건설연맹(NFCCWU)의 사례는 눈여겨 볼만하다. 2000년 이주노동자의 고용시 노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채택하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차단하는데 머물렀던 대만 전국중국인건설연맹은 2005년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노조가 인력의 공급을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합의안을 체결하고, 이주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조합원 교육, 조직의 재편 등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대만의 시도가 이주노동자들과 대만노동자들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조직되어 있는 조합원들만의 이해를 대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열린 문제다. 그 열쇠는 기존 노조가 얼마나 실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 일상적 활동을 통해서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성을 얼마나 강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아시아 지역 이주노동자운동의 연대 전망

한편 이번 워크샵에서는 개별 국가 차원을 넘어서는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고민도 발표되었다. 이주노동 자체가 개별 국가를 넘나드는 현상이니만큼 이에 걸맞은 대응이 필수적이거니와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원리, 제도의 모색이 기존 민족국가의 틀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고민은 매우 중요하다.
워크샵에서는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조직화 문제, 이주노동자들이 귀국 후에 겪게 되는 건강상의 문제, 취업알선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알선업자들의 경제적 착취와 물리적 폭력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송출국과 수입국 노동조합 및 사회운동의 연대가 제기되었다.
매년 10만명의 사람들이 해외 취업을 위해 이주하는 네팔의 노동조합총연맹(GEFONT)은 노동력이 유입되는 국가에서 노총 산하 지원단체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운동을 지원하고자 하는데 현재 홍콩, 남한, 일본, 인도, 몇몇 중동국가들에 지원단체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지원단체 대표들은 네팔노총 전체총회에 참가할 권한을 가지는 등 네팔노총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움직이고 있다. 국제건설목공노련 아시아-태평양 지역사무소는 각 국 산하단체들(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대만 등의 건설노조들)이 참가하는 이주노동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국제적 수준에서 이주노동자운동, 개별 운동들의 연대는 매우 초보적인 단계다. 이번 워크샵과 비슷한 행사가 지난 몇 년간 수차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구체적인 공동의 행동계획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는 일단 개별 국가의 이주노동자운동 자체의 역량이 여전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적 틀 내에서의 운동이 잘 되어야 국제적 연대의 운동이 가능한 것만은 아니고 역으로 후자의 운동이 전자의 역량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각 운동들의 역량과 상황에 맞는 적절한 공동 행동을 모색하는 것을 하나의 계기로 삼아볼 수 있다. 특히 취업알선과정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를 위한 상호 연계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중점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주노동자운동, 우리 모두의 과제

앞서 살펴보았듯 오늘날 금융세계화의 진전은 이윤율 하락에 직면한 기업들의 저임금 노동력에 대한 수요 증가, 서비스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하인노동’ 확대, 주변부 경제의 파탄에 따른 반주변부/중심부로의 노동력 이동 증가 등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요인들 각각은 노동력의 이주를 추동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민족국가의 틀 내에서 이들을 관리하려는 개별 국가들의 정책은 대부분 미등록노동자 양산, 노동력 송출과 수입과정에서의 비리 증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탄압 증대로 귀결되었으며, 이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 동시에 불안정한 일자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경쟁이 심화되거나 경제위기에 대한 대중적 불만들이 민족적·인종적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각 국의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인 체제 위협 요소로 간주하며 이러한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각 국의 이주노동자운동은 미등록노동자에 대한 단속과 추방을 막아내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며 국가의 노동력 관리 정책을 변화시키고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공통적인 과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각 국의 사회운동 및 세계사회운동은 이주노동자의 운동, 이주노동의 문제에 주목하고 외국인/내국인이라는 분할을 넘어 노동자들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맞선 공동의 투쟁을 활성화하며 나아가 민족국가의 한계를 넘어서 대안적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아직까지는 각 국의 운동들이 이러한 과제를 충분히 달성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현실 속에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운동은 정부의 폭력적인 단속과 추방, 노동현장에서의 기업주에 의한 심각한 차별이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명동성당에서의 선도적인 농성투쟁을 거치며 2005년 4월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주노조는 미등록노동자에 대해 가해지는 일상적 단속추방의 폭력과 이로 인한 조합원의 사기저하, 노동조합운동의 안정적 기반의 부족 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특히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은 미등록노동자, 정부의 폭력적 단속과 추방으로 인한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적 공포가 운동의 기본적인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현실에서, 남한의 사회운동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은 홍콩이나 일본의 예처럼 이주노동자운동에 적극 나서야 하며 특히 이주노조의 등록이나 민주노총 가입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지역의 각종 상담, 지원 단체나 다른 사회운동단체들은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으로서 이주노조의 강화를 자신의 활동의 중요한 목표로 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노조와 함께 사회운동들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후자를 위해서는 기존의 상담, 지원단체 이외에도 보건의료, 교육, 지역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이주노동자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공동의 사업을 기획하고 제안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민족국가의 한계를 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그 한계 너머로 민주주의와 권리의 경계를 확장시키기 위한 투쟁은 비단 이주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1) 이러한 노동력 이동에서의 이중적 흐름의 형성과 선별적 관리는 싱가포르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싱가포르는 이민으로 구성된 신생 도시국가인데 월 기본임금 2,000 싱가포르 달러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는 취업사증을 발행하여 사실상 이민자로서 대우를 하는 반면, 기준금액 미만의 임금 노동자에게는 취업허가를 발급하여 사업장 이동 등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본문으로
2) 자세한 내용은 이진숙,「여성 이주의 현황과 쟁점 :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를 중심으로」,『사회운동』2005. 9월호를 참고하시오. 본문으로
3) 인도네시아 이주/인력부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출국한 480,393명의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 중 76%가 여성이었으며 그 중 94%가 중동,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가사노동자들이었다고 보고했다. 본문으로
4) 이하 내용은 설동훈,「아시아 각국의 외국인 노동자 정책과 노동권」, 2003 참조. 본문으로
5) 1999년 5%가 삭감되었고, 2003년에는 11%(400홍콩 달러)가 삭감되었다. 현재의 최저임금은 월 3,270홍콩달러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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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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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하인들
여성, 이주, 가사노동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저 | 문현아 역 | 여이연 | 2009년 04월






출판사 리뷰

이 책은 부제로 달려있는 여성, 이주, 가사노동을 심도 있게 다룬 책이다. 심층면접 방법을 통해 미국의 로스앤젤리스와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일하는 필리핀계 여성이주가사노동자들의 현실을 다층적인 각도에서 서술하며 분석한 글이다. 한국사회에는 21세기와 더불어 ‘다문화사회’가 새로운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지만 그에 관한 심층연구는 아직 희박한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도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탄탄하게 분석한 이 책은 한국사회의 이주연구나 국제결혼을 포함하는 다문화사회 연구에 기여하는 바가 크리라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다문화사회라는 코드와 더불어 하나의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서 국제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조망해야 하는 현실과 조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적 가족의 구성, 여성의 이주노동, 국제결혼 등의 쟁점은 이제 현실에 기반하여 연구되어야 함과 동시에 거시적인 정치경제적 맥락과 연결되어 분석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상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현실의 사례를 서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주제별, 쟁점별로 묶어 분석함과 동시에 국제적인 정치, 경제적 맥락도 아울러 고려하여 분석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덧붙여 저자도 인류학, 사회학, 여성학, 에스닉연구분야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국제이주, 여성노동, 가족의 변화 등의 쟁점도 이런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서 종합적으로 조망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여성학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이론서이자 사례분석에 대한 연구서로 활용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 및 특징

이 책은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이 이주하고 정착하면서 당면하는 경험을 탈구위치라는 렌즈를 통해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런 탈구위치가 만들어지는 제도화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론적 개괄을 시도하는 1장에서는 이주의 탈구위치를 규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분석적 접근을 서술한다. 세 가지 이론적 접근법을 사용하는데 그 중 둘은 이주연구에서 흔히 활용되는 접근법으로, 이주절차 연구에 관한 거시구조적 분석과 중범위 수준의 분석이다. 세 번째 접근법은 인문학에서 후기구조적 이론을 활용하는 것으로서, 저자는 주체수준에서 이주를 분석하는 것이라 이름 짓고 있다.

2장과 3장에서는 이주흐름의 사회적 과정을 분석한다. 2장에서는 불완전한 시민권의 탈구위치가 검토된다. 이는 이주라는 스펙트럼의 양쪽 끝으로서 민족국가에 대한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주체형성을 다룬다. 3장에서는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문제의 틀을 ‘이들은 왜 이주하는가?’ 로 바꾸어 접근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이 이론의 여지없이 이주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서 혼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는 이주를 받아들이는 나라와 보내는 나라 양편의 젠더불평등 역시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의 이주를 통제하는데 개입한다는 것을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낸다. 더불어 이들의 이주가 재생산노동의 국제적 분업을 구성한다는 점도 논의한다. 재생산노동의 국제적 분업은 이주를 받아들이고/보내는 나라 모두에서 여성들 사이의 재생산노동을 둘러싼 3단계 이전(three-tier transfer)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4장과 5장은 글로벌 재구조화에서 초국적 가족의 형성과 유지를 살펴본다. 4장은 가족을 탈구위치가 진행되는 주변상황으로 설정하여 살펴보면서, 특히 가족별거의 고통을 다룬다. 5장은 어떻게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이 이 탈구위치에 맞대응하는지를 살펴본다. 6장은 가사노동으로 진입하는 사회적 과정과 가사노동 수행을 살펴보면서 가사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개인적인 것과 개인적이지 않은 것 간의 권력관계에 대한 지형을 검토한다. 권력관계의 해체는 모순적인 계급이동의 탈구위치를 드러낸다.
7장은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의 필리핀 이주민공동체를 검토한다. 이 장에서는 두 도시의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이 무소속이라는 지역화된 탈구위치를 공유함을 드러낸다. 로마에 사는 여성에게 무소속은 이들이 사회적, 물리적, 경제적으로 이탈리아 사회의 구속 하에서 편입되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리스의 여성이 느끼는 무소속감은 수용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거주공동체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특히 로스앤젤리스의 필리핀 이주민공동체의 중간계급 중심성으로 인한 계급불균등의 결과 때문이다.
결론에서는 처음의 연구주제로 돌아가 이주의 거시구조적 결정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마지막 장에서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의 필리핀 가사노동자들 사이에 어떻게 유사성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역자 후기 중에서

이 책은 내용이 풍성하다. 이론적인 접근과 더불어 필리핀 이주여성가사노동자들의 일상을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살피고 있다. 풍부한 현지조사와 분석력을 통해 현실에서 여성이, 이주한 여성들이 노동을 하면서 ‘주체’로 살아가는 것의 힘겨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교적 최근 들어 한국사회는 ‘다문화’ 사회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책이 담아내는 내용들이 다방면에서 다차원적으로 접근되는 이주여성 쟁점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틀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번역을 하게 되었다.

세계화와 더불어, 특히 신자유주의의 맹공으로 노동자 여성, 가난한 여성들은 점점 더 힘겨운 삶을 버텨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 속에서 가부장제라는 제도의 압박 역시 쉽게 완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오늘을 일구는 여성들의 결단과 실천, 그리고 미약한 소수이나마 이를 지지하는 가족과 주변의 남성들의 노력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속에서 저항의 지점을 어떻게 연결하여 세상의 변혁으로 이끌어갈지는 현실을 살아가는, 그것도 힘겹게 살아가는 주체들의 움직임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책은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개인의 일상과 사회경제적 구조를 더불어 고민하게 하는 기회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속에서 내가 라셀 파레냐스의 의도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좀 더 분명하게 전달해서 새로운 논의의 장을 펼치는데 기여했기를 바랄 뿐이다. 라셀 파레냐스 역시 어머니가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경험을 통해 이런 현실을 연구주제로 삼았다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이주여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여성들, 초국적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경험을 하는 모두가 공감하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소개

저자 :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

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에스닉 연구분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교 조교수, 일본 오차노미즈 방문연구교수, 데이비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브라운대학교의 미국문명과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여성노동, 이주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여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에서도 독자층을 끌어들이고 있다.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분야는 젠더, 페미니즘연구, 가족, 이주, 국제개발, 노동 등이다.
주요 저술로는 Children of Global Migration (2005), Asian Diasporas: New Formations, New Conceptions (2007, 공저), The Force of Domesticity (2008) 등이 있다. 곧 Intimate Labors: Care, Domestic and Sex Work (2009)를 공저로 펴낼 예정이기도 하다.

역자 : 문현아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성공회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젠더, 가족분야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연구활동과 실천활동을 함께 하려고 노력하며 최근 활동가들과 함께 할 글로컬 액티비즘 공간을 꾸릴 고민을 하고 있다. 가부장제를 바꿔낼 기반으로 가족을 주요한 축으로 고려하여 한편으로 변화의 관점에서 동서양 가족사를 검토, 이론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가사노동자들의 조직, 연대의 움직임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가족과 연관된 주제로『여/성이론』에 글을 쓰고 있으며, 공저로『성?노?동』(여이연),『박정희시대 연구』(백산서당), 번역서로『경계없는 페미니즘』(여이연),『두 개의 미국』(책갈피),『제국의 지배자들』(책벌레), 『역사사회학이론』(학문과 사상사) 등이 있다.



목차

서론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의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

1. 필리핀 여성 이주가사노동자들의 탈구위치

2. 필리핀과 노동유출

3. 재생산 노동의 국제적 분업

4. 초국적 가족: 전산업적 가치와 함께 가는 후기산업적 집안구성

5. 초국적 가족의 상호세대관계와 젠더관계

6. 모순적인 계급이동 : 세계화 속 가사노동의 정치학

7. 무소속의 탈구위치 :
로마와 로스앤젤리스에 있는 필리핀이주민공동체의 가사노동자

결론 세계화의 하인들: 서로 다른 배경, 비슷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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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40


[한겨레21] 기사원문보기 >>




‘스위트 홈’ 만드는 가사도우미의 쓰디쓴 노동
[우리 곁의 오지] ‘우리 곁의 오지’ 여섯 번째 이야기…
4대 보험 안 되고 감정노동과 인간적 모멸 속에서
끝없는 집안일 해나가는 가사도우미 노동자들의 고단한 부엌






세탁실-거실-부엌-서재-안방-옷방-거실-세탁실-화장실-부엌-재활용·쓰레기수거장. 최명선(49·가명)씨의 하루는 세탁실에서 시작해 쓰레기 수거장에서 끝난다. 아파트가 작업장이고, 앞치마가 작업복인 그의 직업은 가사도우미다.
오전 9시. 최씨는 매주 화요일에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한 아파트로 출근한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출근하고 난 빈집에 들어온 최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서둘러 부엌 옆에 딸린 세탁실로 들어가 소매를 걷어올린다. 세탁실에 앉아 바구니에 담긴 옷가지를 물에 담가 불려놓고 애벌빨래를 한다.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나머지는 손빨래로 세탁한다. 그다음 거실과 부엌 등에 어질러진 물건 등을 눈에 띄는 대로 정리해놓고 부엌으로 향한다. 설거지대에 서서 수세미를 들고 그릇·컵·냄비 등을 싹 닦아 찬장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그다음에는 쓰레기를 분류한다. 재활용할 것과 버릴 것, 음식물로 처리할 것을 나눈다.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쉴 곳도 없는 점심시간

»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한 아파트에서 가사도우미 최명선(가명)씨가 일하고 있다. 최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7시간 일하고 5만원을 받는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빨래와 설거지, 쓰레기 분류까지 마치면 오전이 금세 지나가요. 이 집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데, 부부 둘만 사는 집이라 양이 많지는 않지만 그동안 밀린 설거지나 빨래를 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려요. 집에서도 집안일을 하지만 여기는 직장이잖아요. 빨래나 설거지도 집에서 하는 것과는 다르죠. 더 신경 써서 해야 하고 더 깨끗하게 해야 하니까요. 이 집 ‘새댁’은 꼭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메모를 해놓아요. 메모에 따라 필요한 일을 추가로 해요.”

낮 12시. 12시부터 1시간은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이다. 일하는 집에 반찬 등이 있으면 집에서 점심을 먹지만 그렇지 않으면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거나 나가서 사먹는다. 이 집처럼 빈집에서 일할 때는 식사나 휴식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낮에도 사람들이 있는 집에서는 그마저 쉽지 않다. 최씨는 “일을 하러 온 건데, 그 집 식구들이 먹고 남은 국을 먹으라고 하거나 자기들이 먹지 않는 음식을 들이미는 경우도 있다”며 “그럴 때는 보통 초반에는 말을 못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넌지시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또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쉴 공간이 없다. 빈방에 혼자 들어가 있는 것도, 사람들이 거실에 앉아 있는데 거실과 트인 부엌 식탁에 잠시 앉아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오후 1시. 최씨는 다용도실에서 청소기를 꺼낸다. ‘윙~’ 청소기 소리가 요란하다. 청소기는 서재와 안방, 옷방, 거실 순서로 돌아다니며 먼지를 빨아들인다. 청소기를 다 돌리고 나면 빨래건조대에 널어놓은 걸레를 걷는다. 마른걸레를 들고 서재로 들어가 책장과 책상에 앉은 먼지를 떨어낸다. 거실에 있는 TV와 노트북, 오디오 위에도 마른걸레가 지나간다. 마른걸레 다음은 물걸레 차례다. 물걸레 여섯 개가 들어 있는 빨간색 고무대야를 들고 거실로 나온다. 최씨는 양손에 물걸레 하나씩을 들고 두 손으로 걸레질을 시작한다. 그렇게 2시간 동안 30평이 넘는 아파트 바닥을 모두 닦는다. 일반적으로 가사도우미들은 대걸레 등을 이용해 바닥을 닦거나 일부만 걸레로 닦는다. ‘바닥을 모두 걸레질해달라’는 요구는 무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씨는 왜 힘들여 걸레로 바닥을 닦을까.

“아유, 힘들죠. 어깨가 아파요. 오십견이 왔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서 온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걸레질을 해야 깔끔하게 청소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고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 건데, 이렇게 하면 마음이 편해요.”


가사도우미는 50대 초·중반이 가장 많다. 최씨는 젊은 축에 속한다. 그래서 걸레질도 다른 가사도우미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그런 최씨에게도 몸이 버텨내기 힘든 일들이 있다. 세탁소에 맡기면 되는 카펫이나 커튼 빨래 같은 묵직한 일이 그렇다. 일거리가 많지 않은 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어서 시킨다는 인상을 받을 때나 몸살 기운이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감정노동,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든

» 최씨는 “빨래·청소·다림질·식사 준비까지 시간 내에 마치려면 좀처럼 쉴 틈이 없다”고 말한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오후 4시. 최씨는 다리미와 다리미대를 들고 거실로 나온다. 빨래건조대에 걸려 있는 셔츠 등을 다린다. 다림질이 끝나면 화장실 청소에 들어간다. 고무장갑을 끼고 고무대야에 세제와 청소용 솔을 넣어 화장실로 들어간다. 물이 튀지 않게 바지를 걷어올린다. 세제와 락스를 이용해 세면대와 욕조, 변기를 솔로 닦는다. 거울도 빼놓지 않는다. 화장실 청소 역시 걸레질처럼 몸을 굽히고 팔에 힘을 줘서 해야 한다. 화장실 청소까지 마치고 나면 집안일 마무리에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집안을 점검하면서 쓰레기봉지에 쓰레기를 채운다. 그러다 보면 벌써 오후 5시다. 앞치마를 벗어놓고 집에 가는 길에 쓰레기를 버린다. 그렇게 이 집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난다.

맞벌이 부부가 모두 늦게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편이라 이 집에서는 식사 준비를 하지 않지만, 다른 집에서는 식사 준비까지 해야 일이 끝난다. 식사는 보통 밥과 국·찌개 한 종류, 나물 반찬 두 종류, 찜 한 종류로 준비한다. 가사도우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게 식사 준비다. 집집마다 입맛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미료다. 조미료 없이 요리를 하면 아무래도 ‘맛있다’는 인상을 주기 어렵다. 게다가 집안 사람들의 입맛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문제가 커진다. 최씨는 “한 사람은 짠 음식을 좋아하고, 한 사람은 싱거운 음식을 좋아할 때는 두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며 “만들어놓은 음식이 ‘맛없다’고 할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최명선씨는 2007년부터 가사도우미로 일해왔다. 아이들이 대학에 다니고 있어 남편 벌이만으로는 가계를 꾸리기가 벅차 “반찬값이라도 벌 생각으로” 가사도우미를 선택했다. 복지관에서 2주 동안 세탁·청소·요리·다림질 등 ‘살림의 기술’과 응대법 등 가사서비스 교육을 받았다. 복지관에 회원으로 가입해 연회비를 내면 가사서비스일을 연결해준다. 처음에는 3개월 동안 산후조리 도우미를 했고, 그다음부터는 가사도우미를 쭉 해오고 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창전동 아파트에 나가고, 일주일에 세 번 양천구의 한 아파트에 나간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종일 근로 수당은 5만원이다. 한 달에 80만원을 번다.

최씨는 이전에 했던 공공근로나 식당일에 비해 가사도우미는 시간을 조금 더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감정노동 부분은 여전히 어렵다고 말한다. 몸보다 마음이 힘들 때가 더 많다.

“복지관에서 연결해준 집에 처음 갈 때는 그쪽에서 어떤 걸 원하는지 먼저 파악해요. 그렇게 맞춰가야지 정기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서로 마음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꾸준히 일을 하게 되죠. 창전동 아파트의 경우 3년째 일을 하고 있어요. 믿음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멀게 느껴질 때도 있죠. 예전에 일했던 집에서는 집에 늘 있던 할머니가 한 번 집을 비울 일이 생겼는데 귀중품이 들어 있는 문을 다 잠가놓았더라고요.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래 일했는데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나’ 싶었어요.”

4대 보험 적용 안 되는 24만 ‘도우미들’

» 최씨는 “빨래·청소·다림질·식사 준비까지 시간 내에 마치려면 좀처럼 쉴 틈이 없다”고 말한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하루 종일 종종걸음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일해도 퇴근 시간인 오후 5시에서 30분이나 1시간을 넘기는 일이 잦다. 일하는 시간에 따라 요금을 받기 때문에 시간이 돈인데, 초과된 시간에 대한 수당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가사도우미들은 하루 일당을 그날 일이 끝나면 사용자에게 직접 받는다. 그럴 때 초과된 만큼 5천원이나 1만원을 더 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알아서 챙겨주면 ‘고맙다’. 최씨가 일하는 다른 집에서는 식사 준비로 근무시간을 넘기는 일이 반복되자 1시간 더 일하고 1만원을 더 받기로 합의했다.

‘보험’ 얘기가 나오자 최씨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신원보증에 주민등록등본, 건강진단서까지 내고 복지관에 회원으로 가입해 연회비도 내는데 4대 보험 적용이 안 돼요. 복지관 선생님에게 ‘왜 안 되느냐’고 물어도 ‘머지않아 될 거예요’라는 대답밖에는 들을 수 없어요. 3년 넘게 일했고 앞으로 적어도 5~6년은 더 일할 계획인데 언제까지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상태로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사도우미 시장은 매년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가사도우미 시장 규모는 2007년 5조원을 넘어섰고 매년 약 10%씩 느는 추세다. 통계청은 올해 3분기 맞벌이 가구의 월평균 가사서비스 지출이 2만6684원으로, 지난해 3분기에 비해 24.4%, 2005년 3분기에 비해 188% 늘어났다고 밝혔다. 가사서비스 지출이 대부분 가사도우미 비용임을 감안하면 맞벌이 가구의 가사도우미 비용이 5년 동안 3배 가까이 급증했다는 의미다.

시장은 커졌지만 여전히 불안정하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가사도우미 종사자 수는 약 10만5천 명이다. 현장에서는 실제 가사도우미 종사자가 15만 명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본다. 이들의 월평균 소득은 63만원이고, 평균연령은 52.8살이다. 가사도우미는 주로 비영리 사회단체·기관이나 유료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구한다. 유료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하는 가사도우미 중에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이가 다수다. 15만 명이 넘는 가사도우미에게 4대 보험은 ‘그림의 떡’이다. 이는 비단 가사도우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사·간병·보육도우미 종사자 24만 명이 같은 처지다.

이들이 사회적 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은 이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가족의 일부인 ‘가사사용인’이기 때문이다. 1954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가사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사사용인’으로 분류해 법 적용에서 제외했다. 56년이 지난 지금,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달라졌고 이들은 ‘돌봄노동자’로 사회적 역할을 해나가고 있지만 이들의 법적 지위만은 여전히 그대로다.

54년에 고착된 법적 지위

문제는 이를 대하는 정부의 이중적 태도다. 정부는 가사·간병·보육도우미 등 사회서비스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을 통해 고용된 4만 명에게는 4대 보험이 적용된다.

사회적·법적 지위 보장이 요원한 이상 이들의 열악한 노동조건 역시 개선의 여지가 없다. 가사도우미들이 휴식 시간·공간 보장이나 정당한 추가 임금 등을 요구하기보다 눈치를 먼저 보고, 일하면서 불필요한 감정노동에 시달리게 되는 데는 여전히 가사도우미를 노동자가 아닌 ‘집안일을 도와주는 파출부’로 보는 인식이 한몫한다.

서울YWCA 관계자는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 만나는데다 사용자와 일대일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는 경우가 종종 접수된다”며 “청소기 등 청소 도구를 쓰지 못하게 하고 모든 일을 맨손으로 하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이럴 때는 연결해준 단체가 중재에 나선다.

가사도우미 서비스 사용자들도 할 말이 있다. 광주대 가족복지 전공 김선미 교수는 ‘가사도우미에 의한 가사노동대체, 문화기술적 사례 연구’(2009) 논문을 통해 사용자의 관점에서 가사도우미 고용의 문제를 “가사도우미의 서비스 질에 대한 고용 전 정보 부족, 신분의 불확실성에 의한 불안 (중략) 원하는 기간 동안의 안정적인 고용 보장의 결여, 적절한 보수 수준과 인상 시기의 모호성”이라고 분석했다. 이 논문에서 지적한 문제는 유료 직업소개소를 통해 가사도우미를 중개받았을 때 주로 나타난다.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은 지난 11월22일 한국비정규노동센터·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함께 발표한 ‘민간 노동력 중개기구의 수수료 및 노동 실태와 개선 방안’ 보고서에서 유료 직업소개소로 인해 가사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거나 중간에서 중개수수료를 착취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비영리 사회단체·기관은 신원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고, 가사도우미의 교육은 적어도 이틀 이상 진행한다. 교육을 통해 고객 응대법,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 직업의식 등을 익히도록 한다. 유료 직업소개소는 이러한 교육이 전무하다. 가사도우미 구직자들로부터 받는 중개수수료 역시 유료 직업소개소는 월 6만5천원으로 사회단체에 비해 2배 이상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안’의 오지

실제 유료 직업소개소에 구직을 문의해봤다. 세 곳 모두 첫 달에는 7만원 이상의 회원비를 요구했다. 업체 홈페이지에는 가사도우미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한다고 나와 있지만, 교육은 30분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안내 정도라고 답했다. 신원 확인 역시 허술했다. “주민등록증만 가지고 회사로 나오시면 바로 가사도우미 나가실 수 있어요.” 세 업체에서 받은 공통 질문도 있다. “한국분이세요?” 한 업체에는 중국 동포라고 소개했다. 대답은 역시 똑같았다. “신분증만 가지고 회사로 나오세요.” 유료 직업소개소의 중개 행태는 서비스 이용자들의 불만과 맞닿는다.

가사도우미의 노동 환경은 ‘우리 곁의 오지’가 아닌 ‘우리 안의 오지’다. 가사도우미가 돌봄노동자라는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가사사용인’으로 분류되는 이상 제아무리 고급 아파트라고 해도 별수 없다.

최명선씨가 인터뷰 말미에 가방에서 꺼낸 수첩이 잊혀지지 않는다. 복지관에서 나눠준 가사도우미 수첩 사이사이에는 ‘생선 잘 굽는 법’ ‘세탁 깨끗이 하는 법’ 등이 빼곡히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최씨와 깔끔한 아파트 부엌의 깨끗한 식탁에서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곳은 ‘누구네 집 부엌’이 아니라 그의 일터라고, 그 수첩은 말하고 있었다.




가사도우미 처우 개선 움직임
이제 ‘가정관리사’라 불러주세요~


전국가정관리사협회 등 15개 단체가 함께하는 ‘돌봄서비스 노동자 법적 보호를 위한 연대’(돌봄연대)와 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지난 9월 돌봄노동자 보호 법률개정안을 발의했다. 법률개정안은 △가사사용인 근로기준법 적용 제외 삭제 △고용·산재보험 조항 신설 △사업주가 아닌 국가가 부담하는 보험료 징수법 개정 등을 골자로 한다. 보험 조항 신설을 4대 보험이 아닌 2대 보험으로 한정한 것에 대해 돌봄연대는 “당초에는 4대 보험의 전면 적용을 목표로 했으나, 현실의 벽을 감안해 가장 시급한 문제인 고용 불안과 산업재해로부터 우선 보호하고자 고용보험법과 산재보험법에 특례조항을 신설해 2대 보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유료 직업소개소 등 중개기구의 역할과 책임 규정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된다. ‘민간 노동력 중개기구의 수수료 및 노동 실태와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99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 ‘가사노동자를 위한 괜찮은 일자리협약’ 초안이 채택됐다. 초안은 가사노동자가 다른 임금 노동자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근로관계에서 노동관계법상 보호 조처를 적용하고, 이주 가사노동자에 관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 중개기구에 대해서는 △등록·면허 기준 마련 △위반사항에 대한 처벌 제도화 △정기적인 조사 △중개수수료로 인한 임금 축소 방지 등을 명시했다. 보고서는 “가사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국제적 흐름을 우리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국가정관리사협회는 지난 6월 ‘아줌마가 아니라 가정관리사라 불러주세요’라는 내용의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가정관리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였다. 김경희 회장은 “여전히 드라마에서는 가정관리사(가사도우미)를 ‘파출부’나 ‘아줌마’로 부르며 이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며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법률개정안이 통과되면 돌봄노동이 괜찮은 일자리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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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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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슈퍼우먼’ 농촌여성들
[기획연재] 여성농민의 지위가 곧 평등사회의 잣대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형주 
<일다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사회적으로 묻혀져 있던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필자 김형주님은 경기도 여주에서 논농사 짓는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주군 여성농민회 사무국장과 경기여주여성농업인센터 방과후공부방 별님반 교사로 일해왔으며, 현재는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을 쉬고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더 이상 내일을 꿈꾸지 못하고 사회 속에서 할 일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제일 슬펐다는 김형주씨는, 그러나 “혼자만 꾸는 꿈이 아니라면 계속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며, 가부장적 농촌사회 속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기고해주셨습니다. - 편집자 주>
 
환갑 여성농민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출’
 
▲ 여성농민들은 가부장적 농촌사회에서 고된 농사 일에, 가사노동, 돌봄노동까지 맡으며 '이름 없는 슈퍼우먼'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고구마 공동농사를 짓는 모습  ©김형주
순자 언니가 자궁을 드러냈습니다. 허리가 아파 고생고생 했더랬습니다. 농사일에 집안일에 그리고 마을 구판장 일까지 손 걷어 부치고 해내고, 남편과 두 아이 뒷바라지까지 깔끔하게 거두던 언니. 이제 좀 살만하니 여기저기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하고, 결국은 자궁을 드러냈습니다. 해서 무거운 짐은 못 든다면서도 올 가을도 남편 컴바인 일 조수로 나섰습니다.

 
정원 언니는 허리 디스크라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고, 허리에 복대를 하고서도 가지 하우스, 호박 하우스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땅을 설설 깁니다. 그만 좀 쉬시라는 동네사람들 말에, 일을 안 하면 더 아프답니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이기순 회장님. 당신도 며느리 사위 다 보고서도, 팔순이 넘는 시어머니 시집살이 고되어 지난 여름 가출을 했습니다. 허나 가출을 해봐야 환갑 다된 할머니, 친정도 없고 어디 혼자 들어가 볼 만한 곳도 없어서 괜히 버스만 타고 왔다 갔다 하고서는 그 누구도 몰라주는 가출마저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선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배 과수원 배 봉지를 싸고 시어머니 밥을 차립니다. 기껏해야 동네아줌마 만나 시어머니와 남편 흉 보는 게 다였는데, 남편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턴 그것도 수월치 않습니다.
 
젖소를 키우는 영미씨는 하루도 빼지 않고 젖을 짜고 소 사료 푸대 나릅니다. 그런데 하필 남편 집에 없을 때 우리를 뚫고 나온 소 두 마리, 그 놈들 잡으러 마을을 동동거리며 쫓아다니다 논두렁에 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성질 나쁜 소들이 깔아뭉갠 남의 집 논과 밭도 걱정이지만, 에이쉬 이 놈의 소들도 여자라고 깔보는가 싶어 속에선 천불이 일었답니다.
 
오이 상추 하우스 일에 뼈가 다 녹는다는 윤경씨는 올 여름 몸 건강도 안 좋아졌지만 우울증까지 생겼었답니다. 농사일을 줄이고 싶어도 아이들은 커가는데 농산물 값은 떨어지니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하우스를 줄일 수 없답니다.
 
미숙 언니는 이혼하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새색시로 들어온 농촌. 아이 셋 낳고 키우는 동안 남들은 모두 호인이라는 남편의 손찌검에, 남편이 술만 먹는 기색이 보이면 남편을 피해 도망가는 버릇이 생겼고, 결국 그 아저씨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던 밤 야반도주를 해버렸습니다.
 
농사도 가사일도 봉사활동도…슈퍼우먼 여성농민 몫
 
▲경북 봉강 꾸러미(생산자 조직)를 방문, 견학한 안동-의성 여성농민회 분들 ©<행복을 담는 장바구니> 까페 제공
이 땅에 여성농민이 삽니다. 농사를 짓는 여성, 여성농민이 삽니다. 남녀평등의 사회, 여성들도 장관을 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너희 나라’ 같습니다. 논일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고, 밭일은 여자가 합니다. 농사일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고, 집안일은 여자가 합니다. 사회적 관계는 남자가 맺고, 여자는 그 빈 자리를 메꿉니다.

 
예전에는 큰 기계 일은 남자가 하고 소소한(?!) 일상의 노동은 모두 여성농민들의 노동으로 메꾸어 왔습니다. 남편이 경운기로 밭을 갈고 고랑을 타주면, 고추 모종을 심고 고추순 따고 말뚝 박고 줄 메고 고추 따고 말리며 중간중간 잡초를 메는 매일의 계속되는 노동을 담당하는 몫이 여자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는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농사규모가 커지면서 여자들도 이젠 1톤 트럭과 트렉터 운전 정도는 필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편이 이앙기로 모를 심고 아내가 트렉터로 논을 갑니다. 남편이 컴바인으로 벼를 베고, 아내는 1톤 트럭으로 벼를 실어 나릅니다. 남편과 같이 비료살포기를 메고 이삭거름을 주고 농약 줄을 잡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같이 하면서 ‘노동의 장’과 ‘생활의 장’이 분리되지 못하여, 출근도 퇴근도 없는 여성농민. 밖에서 똑같이 흙투성이 일을 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남편은 리모콘을 쥐고 아내는 부엌칼을 쥡니다. 사회적 활동은 남편의 몫이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는 이제 스스로 농기계도 운전하는 수퍼우먼 여성농민이 메꿉니다.
 
남편이 면사무소로 영농교육을 받으러 간 사이 혼자서 감자를 심습니다. 남편이 지역발전협의회 회의 나가 낮술에 얼큰히 취해 돌아올 때, 혼자서 고추 말뚝을 박고 오이줄을 올립니다. 남편이 친구 부모님상에 조문 간 사이, 들깨를 심고 참깨밭을 맵니다. 남편이 마을회관에 대동회의를 가면,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음식 준비 하다가 회의 끝나면 밥 차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마을 이장도 여자가 한다지만, 아직도 대동회의장에 여자가 들어가지도 못하는 마을도 많습니다. 아이들 챙겨 학교 보내고 시부모 뒷바라지야 물론이고, 농한기 동네 어른들 마을회관에 돌아가며 반찬 해 나르는 일에, 부녀회장이라도 맡을라치면 면사무소에 모여 독거노인 김장에 빨래봉사까지, 농업노동에 가사노동 그리고 돌봄 노동까지 모두 여성농민의 몫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정신 없이 수퍼우먼으로 돌아 치는 여성농민들, 그녀들이 이 땅에 삽니다.
 
13년 전, 내가 여성농민이 되던 때
 
▲ 여성농민회의 진행하고 있는 <천연 치약, 천연 샴푸 만들기> 강좌. 화장품과 세제, 비누 만들기에 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처음으로 제가 여성농민이 되던 때가 생각납니다. 13년 전 도시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내려올 때는 날 선 사명감 내지는 결기 그런 것들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민단체를 찾아가 8년이 넘게 실무자 일을 보면서, 언젠가는 이 생활을 접고 농민이 되리라고 되뇌던 일을 실행에 옮기던 때이니, 설렌다기보다 사실은 걱정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은 ‘귀농’이라는 말만 하면 왜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왔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어 참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군 전체에서 귀농한 사람이 손에 꼽을 지경이었고, 지역사람들 중에는 ‘타지 것들’이 도대체 왜 여기까지 내려왔는지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 이름 석자보다 누구 마누라, 누구 엄마로 통하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여성과 아이가 행복해야 행복한 사회이며, 농촌이 평등해야 정말 평등한 사회’라는,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여성농민들을 만났습니다.
 
‘여성농민회’는 여성농민 스스로 현실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 좀더 행복한 여성농민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땅콩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콩도 심어 마련한 돈으로, 스스로 교육사업도 만들고, 농사일에 엄마를 빼앗기고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농번기 탁아사업도 해왔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활동이 2002년 농림부 시범사업으로 여성농업인센터 사업에 선정되자, 어린이집과 초등학생 방과후 공부방도 운영하고, 스스로 벌여오던 교육사업도 더 체계 있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벌여낸 사업으로 더 많은 여성농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농업문제와 세상읽기라는 주제로부터 시작해서, 미래와 깨끗한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의 하나인 ‘천연세제 만들기’ 같은 교육도 마을로 들어가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면에 하나밖에 없는 복지회관 목욕탕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을 모시고 가는 일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정작 센터에서 일하는 회원들은 마음고생도 많고 몸 고생도 많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아니면 그 일들을 누가 할까 합니다.
 
조금 더 나은 세상, 평등한 삶 위해 함께 꾸는 꿈
 
▲ 여성농업인센터 부설 알곡 어린이집 아이들이 토종수수 씨앗으로 모종을 키워, 작은 꽃밭에 심고 거두어 직접 수확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에서도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학교담장을 둘러싸고 육상골재채취 사업이 신청되어 학교 바로 옆에서 모래산이 쌓이고 물웅덩이가 파이는 상황이 예상되자, 순하고 세상 모르는 것 같던 엄마들이 변했습니다. 아니, 원래 그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아이들 건강과 교육문제 앞에서는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건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남성들보다 지역의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서 자유로운 여성들은 옳은 것은 옳다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눈치 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사실 전 제가 엄마라는 사실이,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엄마에게 요구되는 많은 신화들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농민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함께 살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꿈을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10명이 넘는 여성농민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삭발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바로 다음 달 딸을 시집 보내야 하는 친정엄마도 있었답니다. 삶의 무게보다 더 치열하게 싸우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밥 한 공기 값이 적어도 커피 한 잔 값은 되는 세상’을 꿈꾸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노동의 강도가 세지고 여성들이 차지한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육아와 가사를 남녀가 분담하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꿈을 꾸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함께 꾸는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임을 믿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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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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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부엌’


고립되고 비가시화되는 노동공간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부엌은 마루를 내려간 다음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는 별도의 공간이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식의 관련 금기들도 많았다. 가옥 구조가 변하면서 현재 대부분 가정에서 부엌은 밥을 먹는 공간을 포함하며 실내로 들어왔다. 부엌 공간은 이제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소개된다. 그리하여 때때로 부엌이 식사와 휴식공간일 뿐 아니라 그 식사를 준비하는 작업공간이라는 사실은 망각되곤 한다.

일상문화연구회의 <한국인의 일상문화>에 따르면, 부엌의 사정과 식탁의 사정은 다르게 이해된다며 ‘칼국수’의 예를 든다. 칼국수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당시 ‘간단하고 서민적인 음식’으로 소개될 때 사람들은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칼국수가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데는 상당한 노동력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보지 않고서, 식탁에 앉아 자신이 칼국수를 먹기 쉽다고 ‘간단한 음식’ 운운했다는 것이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도 끓인다’는데 그 부엌의 코앞에서 매일 먹고 자는 사람들이 간단한 음식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것은 부엌이 여전히 집에서 홀로 떠 있는 섬과도 같고, 부엌에서 노동을 하는 주부 역시 ‘나 홀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 구조에 있어서 부엌이라는 공간은 주부의 노동이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집안 구조상 문을 열었을 때 부엌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보통 부엌은 집에서 가장 깊은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평수가 넓어질수록 부엌과 식탁 사이에는 전통가옥 뺨치는 경계선이 생긴다. 공간의 여유가 생기면 부엌은 유리문을 달고 커튼을 드리우며 ‘가족들의 공동공간’이라기보단 점점 더 ‘주부의 개인작업공간’이 되어 숨어 들어간다. 

음식냄새나 조리기구가 내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누굴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식사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 작업 동선을 길어지게 하고 노동시간 동안 가족들로부터 고립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주부 K씨(54세)는 “식사준비를 할 때 옆에 사람이 있으면 필요할 때 시키게 되지만 혼자 있으면 그냥 혼자 한다”고 말한다. 다른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함께 준비를 하려고 해도, 각자의 혹은 공동의 휴식공간에 있는 식구들을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번거로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집은 부엌을 마음 편하게 ‘외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가족들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있을 수 있다. 부엌은 일부러 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고, 부엌에 있는 사람은 일을 하는 동안 ‘공동공간’인 거실에 있는 가족들을 보거나 텔레비전 등을 볼 수 없다. 식구들이 보는 것은 일하고 있는 주부의 ‘뒷모습’이다. 일반적인 가족들에게 부엌은 먹을 때만 공동공간이 되는 ‘식탁이 있는 곳’이지 공동작업공간은 아닌 것이다.

직장인 M씨(28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부엌에서 엄마가 불러도 못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통 부엌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주부 L씨(55세)는 “평생 음식 장만을 혼자 하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 만했어도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TV를 보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 땐 화가 나고 미웠다”라고 말했다.

한편 다용도실은 대부분 부엌과 연결되어 있거나 부엌과 가깝고, 집의 깊은 곳에 숨어있어 가사노동을 비가시화하는 데 일조한다. 양파, 감자, 통마늘 등의 다듬어야 하는 재료들, 관리를 요하는 장기저장 식품 등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세탁 관련 기기들까지 위치하고 있다. 걸레, 손빨래, 세탁기 빨래 등 일거리들이 쌓여 있는 이 곳에 주부를 제외한 가족들은 ‘빨래를 가져다 놓으러’ 간헐적으로 방문할 뿐이다. 게다가 세탁기는 집의 후면에 위치한 다용도실 있는데 건조대는 주로 집의 전면(테라스)에 위치하고 있다. 세탁기와 건조대까지의 동선이 길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미관상’이다.

가정은 사회적 임금노동으로부터 혹은 학교로부터의 휴식처라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고 조용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하며, 세탁기 소리도, 음식 냄새도 맡지 않고 ‘쉰다.’ 그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성된 공간에서 막상 어떠한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는 비가시화 되며, 그러한 노동은 고립되고 평가 절하된다. 이로써 우리의 부엌은 ‘집은 쉬는 곳’, ‘가정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 ‘집안 일은 엄마일’이라는 통념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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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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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적 삶을 위한 ‘필요노동’, 집안일
가사노동의 일로서의 가치를 찾아서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경신 
아침나절부터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할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현관에 흩어져 있는 신발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 청소를 하고 걸레로 훔치는 일, 빨래를 분류하고 세탁기를 돌리거나 손 세탁을 하거나 삶는 일, 빨래를 널고 걷고 정돈하는 일,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고 남은 음식물을 정돈하는 일, 음식물 쓰레기, 폐지, 플라스틱, 유리병 등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리는 일 등.
 
정말 쉴새 없이 일해도 별로 표 나지 않는 일들이다. 누가 “오전에 뭘 했어?”하고 물어보면 “집안일 했지”하고 대답할 뿐, 세세하게 한 일을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다.
 
놀고 있다?
 
 가사노동은 누구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이다.
그런데 그 말로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다양한 ‘집안일’이 흔히 ‘노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하다. 주변에서 종종 주부들 스스로가 ‘어떤 일 하나?’는 물음에 ‘놀고 있다’고 대답해 의아해하곤 한다. 집안일 하는 자신을 ‘노는 사람’으로 일컫는 마당에야, 그 자녀들이 “우리 엄마는 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집안일의 가짓수와 일의 경중은 개인차가 있겠다. 모든 빨래를 손으로 하는 사람, 세탁기와 손을 적절히 사용해 빨래하는 사람, 빨래는 오직 세탁기로만 하는 사람, 심지어 건조기까지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분명 빨래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유리창을 닦는 사람에게는 유리창 닦기가 집안일의 한 가지겠지만, 절대 유리창을 닦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아무튼 집안일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 차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집안일 자체는 ‘일’임에 분명하다. 부지런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의 하루 일과를 회고해보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의 일 이상으로 어머니의 집안일 노동강도가 높았던 것 같다.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었고 외출하는 일도 드물었던 어머니는 그야말로 온종일 집안일에만 매달려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집안일이 ‘노는 것’으로 간주되었을까? 그것은 그 일이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집안일을 잘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부터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일은 노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고, 운동을 하는 등의 취미활동이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 집안일과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된 것은 참 억지다.
 
집안일은 안 할수록 좋은가?
 
놀고 있다고 매도될 만큼 일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집안일’이다 보니, 그야말로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팽배한 생각인 듯하다. 열심히 해봐야 몸만 힘들고, 표도 나지 않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는 그 ‘별볼일 없는 일’이 아직까지도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라, 돈 잘 버는 여성이라면 가족 중 또 다른 여성(어머니, 자매, 며느리, 시어머니 등)에게 집안일을 떠넘기거나,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안일을 벗어나려 한다.
 
반면, 돈 못 버는 여성은 가정경제가 허락하는 한에서 편리한 가전제품을 집안에 갖춰놓거나 식당이나 세탁소 등의 서비스를 이용함으로써 몸수고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렇다 보니, 형편이 어려워 집안일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이 있다면, 자기 처지를 한탄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남성이나, 그 일을 떠안은 여성이나, 될수록 그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즉, 돈을 지불해서라도 가사일의 사회적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기계일꾼이나 사람일꾼을 부려 집안일로부터 해방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성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자립, 집안일을 타인에게 전가해선 안돼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미토,2005)
그런데 과연 집안일은 누군가에게 전가시켜야 하고, 가능하면 회피해야 하는 무가치한 일일까? 뭔가 고상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일일까? 사적 영역에서 퇴출시키고 사회화해서 극복해내야 하는 일일까? 기술혁신을 통해 우리의 육체를 해방시켜야 하는 노예노동일까?

 
유학시절. 혼자 밥을 챙겨먹고 살면서 난 집안일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좀더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 즉 연구에 받쳐야 할 시간과 노력을 집안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하지만 남에게 미루면 귀찮은 일이 되는 것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 누군가가 내게 그의 몫의 일을 떠넘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돈으로 손쉽게 해결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 까닭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기 몫의 필요노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안일 속에서 그 필요노동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록 100% 자급자족을 할 수는 없지만,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소박한 삶에 대한 지향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 속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도시 자체도 자립적이지 못하고 지극히 의존적인 공간이지만,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의존적 삶을 오히려 돈에 의해 보장받는 자립적 삶으로 착각하고 지낸다. 그래서 돈 버는 일은 생산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집안일은 돈 버는 일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그림자노동으로 전락하고, 소비는 그 일의 핵심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자립은 돈을 버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사람이나 도구를 돈으로 사서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안일이 소비에 집중하는 그림자노동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필요노동으로서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고민과 더불어, 자기 몫의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데서 자립적 삶이 출발해야 한다(집안일을 공유하고 분배하고자 할 때조차 자기 몫의 집안일에 대한 분명한 인식 위에서만이 가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삶의 간소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어쨌거나,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켜도 될 만큼 고귀하고 값진 일이 있다는 그릇된 믿음과 허위의식을 떨쳐내기 위해 난 하루 몇 시간씩 집안일을 하며 수양 중이다.
 
*함께 읽자.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미토,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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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관련자료/위안부2012. 3. 14. 14:01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일제말 트럭군도 근무자 “위안부, 하루 10시간 15명 상대”
 
“일본군 외출 때 콘돔 주며 출입 부추겨…90%가 한국처녀”



<한겨레>가 일본 뉴스 전문 포털사이트 <제이피뉴스>(JPnews.kr)와 제휴해 일본 소식을 전달합니다. 전여옥 의원과 ‘일본은 없다’ 재판을 벌여 지난 1월13일 2심에서 승소한 재일 언론인 유재순씨가 <제이피뉴스>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제이피뉴스>는 전 일본인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로부터 일제시기 종군위안부와 관련한 생생한 증언을 얻었습니다. 원문을 보시고자 하시는 분은 아래에 있는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제이피뉴스>의 해당 기사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제이피뉴스> 바로가기


일제 때 종군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직접 운영됐다는 증언이 전 일본인 군속에게서 나왔다. <제이피뉴스>는 23일 일제시대 때 트럭제도에서 근무했던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군 위안소 두곳을 군 부대에서 직접 관할했다고 보도했다. 지바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인 1943년 11월부터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었다.

마쓰바라는 그 증거로 당시 부대에서 발급한 출입증을 제시했다. “군 위안소 출입증”은 가로 5.8cm 세로 10.8cm 증명서로 ‘남국료출입증(南國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이 ‘남국료위안소’는 해군용이었으며, 이외에 육군이 이용하던 ‘남성료(南星寮)위안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마쓰바라는 특히 대부분 위안부는 거짓광고에 속아서 왔다고 증언했다. 모집공고에 위안부 모집이라는 것은 없고 장교 메이드(하녀) 구함 등의 거짓내용만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존재했더라도 민간이 운영한 공창제도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 증언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한일 평화단체들의 활동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쓰바라는 당시 트럭군도에는 평균 3만-4만명 가량의 육군과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운용하던 두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위안부 규모는 한 군데에 50-60명씩 120명이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서 각각 7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안부들이는 집단적으로 막사에서 생활하며 낮 12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근무'했으며, 하루 14-15명의 군인들을 상대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한달에 딱 한번 성병 검사를 할 때만 막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마쓰바라는 일본 군대가 모집한 위안부들을 돌려보낼 의도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안소를 작전지역에 설치한 뒤 작전이 끝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부대만 옮기고 위안부들은 내팽개친 채 가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겨진 위안부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마쓰바라는 평화운동을 해오면서 위안소 문제를 고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제이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라며 당시 종군위안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아래는 마쓰바라의 증언을 토대로 트럭 군도 종군위안소인 남국료위안소의 24시를 재구성한 것이다.

■ 위치

남태평양 트럭제도는 총 11개의 큰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제도의 오른쪽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나쓰시마(夏島), 아키시마(秋島), 후유시마(冬島)에는 군 부대와 그 부대를 위한 후방보급기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개의 위안소는 후방보급기지들이 모여 있던 나쓰시마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쓰시마는 위안소 이외에도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 군부대의 위안소 관할

이 두 위안소는 모두 군대가 관할했다. 이 가운데 남국료위안소는 그가 배속된 제4함대 시설부대인 하기와라 간이치 부대가 관할했다. 시설부대인 탓에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 공사들을 진행했지만, 위안소 관리업무도 맡았다.


마쓰바라 씨가 발급되었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되었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위안소 건물과 위안부의 방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였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철책 같은 게 쳐져 있었다.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었다. 외부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경비원이 철책 주변을 계속 돌았다.

막사의 각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각 방마다 몇호인지 적혀 있었다. 복도 끝은 공동으로 쓰는 세면장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방 크기는 하나당 약 2평 정도이고,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 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도 있었다.

■ 위안부

위안부는 주로 18~25살 정도의 젊은 여성들로, 90%는 조선인, 10% 정도는 일본인이었다.

1943년 당시에는 두 위안소에 각 50~60명 정도씩 배채됐다. 하지만, 44년부터는 각각 70명 정도씩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든가, 병원에서 사무볼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의 모집공고에 속아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모집광고에는 월급이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30엔으로 제시됐으며,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유혹했다. 숙박료, 식대기 다 무료니까 아, 이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한 것이었다.

■ 성적 착취

위안부들의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낮 12시부터 22시까지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나는데, 일반 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배를 타고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사관이나 장교,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가는 것도 허용이 됐다.

공휴일도 없었고, 한달에 한번씩 성병 검진이 있었다. 위안부 여성들은 이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라는 것이었다.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 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한다고 즐거워했다.

훈련이 없을 땐 군인 수가 늘어나고,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었지만, 평균적으로 한명의 위안부가 하루 14-15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 군인 외출 때 의무적으로 콘돔 지급

위안소 앞은 언제나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하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는데, 언제 출전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기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군인들은 주로 하루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등에 주둔했는데, 조그만 배를 이용해 자주 나쓰시마를 방문했다.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군인들이 외출할 때 꼭 콘돔을 2개씩 의무적으로 지급했다. 마치 위안소에 가라고 장려하는 듯했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군인들의 위안소 이용

군인들은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1엔의 이용요금을 내고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는다.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이다. 그 번호표를 들고 해당 번호가 적힌 위안부의 방을 찾아갔다.

■ 위안부의 운명

일본 군부는 위안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모집공고가 거짓말인 것이 드러난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든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한다. 그런데 작전이 끝나 후퇴를 해야 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간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간다.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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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매춘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읽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스템에 불만족스럽다면, 이 시스템을 제거하자.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성노동자만을 찝어내지 말라. 그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노동을 판매하고 있다.


희생자인가, 노동자인가?- 성노동과 노동조합

아나 로페즈 (Ana Lopes)


나는 이스트 런던대학(University of East London: UEL)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 그곳에서 나는 문화의 기원에 관한 매우 흥미롭고 논쟁적인 이론을 배웠다 - 섹스와 경제 사이의 관계가 매우 오래된 것이고, 첫번째 인간 혁명과 인간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이론. 

나는 멘스(월경, menstruation)가 어떻게 출산력에 대한 여성의 가장 훌륭한 광고가 되었었는지, 그리고, 남자들이 가장 매력적인 여자를 간단히 골라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주기를 동시화해서 동시에 멘스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냥하도록 만들기 위해 섹스 스트라이크를 벌였던가를 배웠다. 음식이 준비되어 오면 그들은 그것을 모두 공유했다. 

물론 여자들은 실제로 모두 동시에 멘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멘스 시그널을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임신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지만 특정한 시간에 임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적 신호(signal)를 집단적으로 전유했고, 이것이 인간 혁명을 생산했다. 

나의 배경은 인류학이다. 그렇지만 학위를 마쳤을 때 나는 길을 잃었다. 이 이론이 현재의 관행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몰랐다. 우리 시대에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크리스 나이트(Chris Knight)의 급진적인 인류학 단체에 소개받았을 당시 나는 인류학을 완전히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이 단체는 내게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의 논문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에서 그녀는 '멘스 기간의 피를 숨기려' 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러한 네트워크가 현대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피를 흘린다. 우리는 모두 멘스한다. 우리는 모두 섹슈얼한 존재다.” 그녀는 성산업을 지칭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게 위대한 계시였다.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 혁명이 실제로 작동했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혁명적이다 - 나는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시스템과 방식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을 원한다 -.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의 이론을 테스트하기 위해 나는 성산업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인류학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워진 열정을 갖고 연구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성산업에 집중했다.


성산업

성산업은 단순한 매춘보다 훨씬, 훨씬 더 크다. 이것은 우리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마주치는 거대한 세계적 산업이다. 우리는 매춘과 포르노그래피만이 아니라 전체 모델 산업과 전체 뮤직 비디오 산업까지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성적 신호를 이용한다. 

막대한 이윤이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윤)은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 성적 신호를 실제로 생산하는 사람보다는 소수 사람들의 손으로 간다. 우리는 대개 여자를 고용하는 산업으로 생각하지만, 성산업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 일한다. 

성산업은 나라마다 다르고 그래서 그것을 통제하는 법률 역시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곳에 은밀하고 지하화된 부분이 적어도 조금씩은 항상 있다. 이것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불러온다. 이것은 다른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향유하는 동일한 보호 메카니즘에 의해 포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성산업의 지위와 성적 호의를 파는 사람들의 지위가 시간에 따라 변해왔고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성산업의 노동자들은 대개 사회에서 낮은 지위를 갖는다. - 그들은 주변화되고 낙인화된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 바빌로니아의 신성한 매춘부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내 생각에 페미니즘이 20세기에 힘을 얻어가기 전까지 성노동자들은 다른 여자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졌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아버지의 재산이던 것에서 남편의 재산인 것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경제적 독립과 - 성교육을 포함해서 - 교육에 대한 접근권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리비도를 갖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노동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가졌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고, 실제 활동을 통해 다른 여자들은 갖지 못했던 성교육에 대한 접근권을 가졌다. 

이러한 거대 산업에 대해 혁명가들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폐쇄하는 캠페인을 벌여야하는가? 이것이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여타의 사람들이 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성산업은 모든 곳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산업을 폐쇄하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실상 성노동자들의 권리에 해악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내가 보기에 이 전략은 작동하지 않았고,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성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폭력과 감염 등의 위협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권리를 가져야 한다.


행동 연구

성산업은 분명히 나의 연구 대상이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종류의 연구를 수행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진정한 연구자들은 - 자신의 연구가 유용하려면, 말이 되려면 - 자신의 연구가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되돌려줄 책임이 있었다. 이 주제(topic)의 논쟁적 성격을 감안했을 때 객관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이론적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나는 실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했다 - 성노동자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 나는 그것을 변화시킬 어떤 것을 하고 싶었다.

나는 '행동 연구(action research)'라고 불리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이것은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단지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작업해나가는 것이었다. 나의 접근법에서 그들은 정보제공자가 아니라 - 참가자였다. 이것은 거리를 두고 수행되는 연구보다 훨씬 더 평등주의적인 연구였다. 나는 자원(resource)을 제공하는 사람이었고 -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성산업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그것은 인류학자들이 '참여 관찰법(participant observ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챗’(채팅)라인에서 5년간 일했고, 마침내 성산업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다. 조건이 절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에 나는 대개 특정한 영역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래서 일하도록 강제된 조건들이 문제였다. 성산업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아래서 일하도록 강제되는 조건들. 

동시에 나는 런던의 여러 지역에서 일하는 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시범 연구에 참여했다 - 이것은 나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요청하는 눈덩이 굴리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를 통해 나는 대규모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대화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문제를 겪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매춘이 되었건 스트립티즈가 되었건, 혹은 그 무엇이 되었건 돈을 위해 성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건에 대해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들은 왜 계약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연금이나 혹은 다른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것들을 왜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그들 역시 일반인들이 현실에 대해 매우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성노동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생각을 갖는다. 미디어는 선정적인(sensational) 스토리를 팔고 두 가지 극단 가운데 하나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는 돈을 많이 벌어서 권한을 가진 여자들 혹은 노예제와 가까운 끔찍한 상황에 놓인 불쌍한 희생자 가운데 하나를 묘사한다. 내가 대화했던 성노동자들은 현실에 관해 공중(public)에게 말할 수 있는 조직화된 집단적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제 성노동자 연대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을 미팅에 초대했다. 이 미팅에는 UEL 인류학과의 사람들과 성적자유동맹(Sexual Freedom Coalition)과 같은 공감하는 단체의 사람들도 참여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부족하다고 말한 집단화된 세력을 진정으로 만들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답변은 “그렇다. 우리 함께 그렇게 하자”였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운동이 탄생했다. 우리는 매우 비공식적인 단체를 결성했고, 이것을 국제성노동자연대(the International Union of Sex Workers)라고 불렀다.

왜 '국제(international)'인가? 왜냐하면 산업이 세계적이고, 따라서 문제 역시 세계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신매매 관련 문제들은 일국가적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세계적 수준에서 조직화해야 한다. 왜 ‘노동조합(union)’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는 노동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이 우리이다. 성산업에서 일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람들이 특별한 부문에 진입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많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매월 말에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일한다. 왜 ‘성노동자(sex workers)’인가? 왜냐하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직업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번째 행동은 2000년 3월에 있었다. 우리는 소호 거리(Soho Street: 런던)로 나섰다. 전 세계의 여러 장소에서 성노동자들이 세계 여성 스트라이크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 행동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태기를 원했고, 성노동자들의 친구와 동맹자들이 그 날 저녁에 지지의 뜻을 보이기 위해 소호에 왔다.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체 일을 계속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한 우리 단체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사항들 - 가령, 자신의 삶과 일이 사회에서 묘사되는 방식들. 그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 을 다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미디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존중(Respect)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했다. 성노동자들이 기사를 쓰고 잡지가 성노동자들 사이에 배포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단체의 에너지를 모으는 것에 정말로 유용했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우리의 웹사이트와 인터넷 포럼에 집중했기 때문에 존중(Respect)을 계속 출판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는 인쇄매체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인터넷 포럼은 권한확대의 수단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 성노동자가 다른 나라로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들은 포럼에 글을 올려서 그곳의 상황이 어떠한지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 나라에 있는 성노동자로부터 정보를 얻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쉽게 착취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포럼을 통해 어느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동료들과 접촉할 수 있다. 등등.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여러 이슈에 대해 의견을 가진 시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 예를 들어 우리는 반전 집회에 참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부심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노동자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한다”라고 말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권한을 확대해갔다. 그들은 조직화할 수 있고, 결집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조건(기존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GMB 지회
(*BRITAIN'S GENERAL TRADE UNION: 영국일반노조)

이 기간 동안 우리의 목표는 TUC(Trades Union Congress: 영국노조회의)로부터 우리의 노동조합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노동조합이라고 불렀지만, 몇몇 사람이 모인 비공식적 단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2년에 정말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 10년 내지 15년 사이에는 아마도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기존의 매우 잘 확립된 노동조합 단체인 GMB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그 전에 몇몇 노동조합에 접근했었다. 그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우연히 GMB의 대표를 만났고, 그에게 그냥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노동자예요, 여러분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몰래 카메라(Candid Camera)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매우 전문적이었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 GMB 지회를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산업에 관여한 성노동자들과 여타 사람들을 포럼에 초대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GMB의 성노동자 지회로 나타났고, 이 나라에서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 

우리가 GMB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TUC’로부터도 승인받았다. 성노동이 노동이라는 것을 확립하고, 이 나라의 모든 성노동자들이 공식적 노동조합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공식적 노동조합에 속하게 된 것은 위대한 성취였다.

이것 외에 가장 기본적인 이 노동권으로부터, GMB에 속하게 된 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혜택을 얻게 되었는가? 작고 분리된 단체로서는 성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던 많은 이점들이 있었다. 법률적 대표가 아마도 노동조합을 통해 성노동자들이 바라던 가장 중대한 자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산업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호하는 법률은 매우 모호하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합법인지 혹은 그 결과로 곤란에 빠져들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료 법률 대변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노동조합은 또한 정신적 지원과 실제적 지원도 제공했다. 한 달에 한번씩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들, 대개 동일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심판받지 않고 여러분의 일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권한 확대의 감각을 주는 중대한 일부이다.

훈련은 또 다른 중요한 사안이고,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산업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훈련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로 사람들이 비난받고 비판받으면서도, 그것을 그만두고 싶어할 때 그들에 대한 문이 모두 폐쇄되어버리고 성산업에 갇히게 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노동조합은 -이력서를 쓰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방법 등에 관한 실제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산업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들, 더 낫고 더 안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훈련도 있다. 예를 들어 호신술에 관한 코스도 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폭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곤란한 손님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보다 폭넓은 코스도 있다. 또한 회계와 세금 등을 관리하는 것에 관한 코스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인기있는 것은 스트립티즈 코스일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이 산업에 남아있는 동안 다른 일을 해보기를 원하는 매춘여성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이미 전문적인 스트리퍼인 여자들이 승인받기 위해, 즉, 코스가 제공하는 자격증을 받기 위해 코스를 이수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학위를 따는 것이건, 자격증 혹은 그냥 직업으로서건, 승인을 얻게되는 순간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 성노동자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승인을 부여받을 자격이 부여되어 있다. 

성노동자들은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스트립티즈에서 그것은 단순히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것만이 아니다: 매우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다루어야 한다 - 예를 들어 그 가운데 일부는 술 취한 사람이다 - 그리고 자신의 직업의 낙인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잘 하는 것, 자신들의 알고 있는 바에 대해 승인받는 이러한 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그래서 훈련, 자격증은 사람들의 자기 존중감을 개발하는 활동의 일부분이다. 자신에 대한 존중감 없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조합은 또한 몇몇 테이블 댄싱 클럽에서 승인되었고, 이곳에서 노동조합은 다른 작업장에서와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미팅을 갖고, 노동조합 대표를 선출한다. 이것은 대다수의 다른 노동에서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기본적인 성취였지만, 성산업에서는 이전까지 쟁취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클럽들에서 노동조건은 향상되기 시작했고 - 노동조합화는 다른 산업들에서 결과를 만들어내었고, 성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이는 자연스럽게 매춘 탈범죄화(=비범죄화) 논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클럽들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들을 매춘업소 내에서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매춘이 기술적으로는 불법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범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춘이 탈범죄화된다면 노동조합은 매춘여성들의 조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Initiative)의 성공은 다른 나라들에서 동일한 길을 따르거나 혹은 노동조합화가 아닌 다른 형태의 집단적 행동을 개발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환상적인(절대적으로) 현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화가 구체적인 전략으로 채택된 나라들에서는 노동조합 네트워크를 개발할 수 있었다. 2007년 3월에 인도에서 성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국제 미팅이 있을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매춘인

성노동에 관한 대규모 논쟁이 있고, 특히 페미니즘 내에서 크게 싸움이 일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주의 사상가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매춘에 관해 말한 것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방식 때문이다. 엥겔스는 별로 일관적이지 않다. 그는 매춘이 "희생자가 된 불운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깨뜨린다"고 말하고(이것마저 공통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는 아니다),  콜론타이(Kollotai)는 "자본주의 내에서는 모든 것이 판매된다"고 지적했지만 분명히 매춘을 철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매춘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매춘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읽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스템에 불만족스럽다면, 이 시스템을 제거하자.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성노동자만을 찝어내지 말라. 그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노동을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팔기“ 때문에 성노동은 다르고 훨씬 더 충격적이라고 종종 말해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팔지 않는다. 성노동자들은 서비스 - 아마도 시간 혹은 특별한 성서비스 -를 팔지만, 거래가 끝난 후 몸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몸은 팔리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이런 방식으로 읽힌다면 노동조합화에 관한 전체 개념이 훨씬 더 잘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접근법 -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노동이고, 성노동자들에게는 완전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 은 결과(긍정적인)를 획득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적 관점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페미니스트 논쟁은 실제로 성노동자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매춘 철폐를 위해 사람들이 싸우든 혹은 그것에 참여하기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든, 성노동자 자신들의 웰빙을 위해 실제로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거대한 산업이 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중요한 일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노동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만약 선택한다면 그것을 떠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다.

나의 전망, 그리고 내가 노동조합화 과정에 참여한 이유는 성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요한 도구가 그들 자신의 몸인 곳에서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명령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비즈니스이고,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고립화된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통제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지하화된 산업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산업 내에서 노동조합화된 그리고 집단화된 단체를 창출할 수 있다면, 조직화할 수 없는 산업은 한군데도 없을 것이다.

만약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노동자들이 그러한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성노동자들이 이 혁명을 쟁취하고,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립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곳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안 좋은 시대가 물려준 관료적 찌꺼기인 사람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망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착한 여자(good women)'과 '나쁜 여자(bad women)' 사이의 구분은 없을 것이다. 성노동자 낙인화의 문제는 단지 우리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 이것은 모든 여자들의 문제이다. 내가 만약 창녀라고 불릴 수 있다면 어떤 여자건 창녀라고 불릴 수 있다 - 모든 여자들이 그러한 낙인에 시달릴 수 있다. 

이것이 권리를 주장하는 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모든 여성의 관심이 되는 이유이다.


▒ 본문은 진보적 매거진 ‘위크리 워커’(Weekly Worker 645. 2006년 10월호)에 게재된 아나 로페즈의 기고문 “희생자인가 노동자인가”(Victims or workers? ) 전문이다. 지난 문건이지만 향후 한국 성노동운동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올린다. 번역문에서 영문 약자 등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편집부에서 추가했음을 양해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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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


단체 소개가 따로 나와 있지는 않고 블로그 운영만 하고 있어서 아직 실체(ㅋㅋ)를 더 파악해야 하지만...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모임을 올해 9월에 했었네요.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것이고 주도자가 있겠죠? 주도자를 찾아야지.
9월의 모임 홍보글 번역해 봤어요.

가난해도 안심 여성으로 안심

여자는 옛날부터 가난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욱 가난해졌다.
싸고 불안정한 비정규직은, 지금 일하는 여성의 다수를 차지한다.
연수 200만엔 이하는 여성의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빈곤은 좀처럼 이야기 되지 않는다. 그것은 왜?
여자는 남자가 먹여 살려 주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안심?
여성이라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가난해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지금 여성들의 빈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빈곤의 진짜 해결책에, 목소리를 높이자!

赤石千衣子(しんぐるまざあず・ふぉーらむ)、鈴木純子(元福祉事務所相談員)
伊藤みどり(働く女性の全国センター)、栗田隆子(フリーターズフリー)
藤井豊味(女性ユニオン東京)、山口静子(パート・未組織労働者)
いちむらみさこ(ノラ)、池田幸代(新宿野宿者女性の会「心を開く輪」)
柏原登希子(ふぇみん)、丸山理絵(反貧困ネットワーク)他…

싱글마더포럼의 아카이시 치에코씨,
전 복지사무소상담원 스즈키 쥰코씨,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의 이토 미도리씨,
freeter's free의 쿠리다 료코씨,
파트타임 노동자인 야마구치 시즈코씨,
노라의 이치무라 미사코씨,
신쥬쿠노숙자여성의 모임 '마음을 여는 바퀴'의 이케다씨,
그 외 여성 유니온 도쿄, 페민, 반빈곤 네트워크의 활동가들

추측하기로는 반빈곤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여성들이 여성의 기치(!) 아래에 또 만든 네트워크가 아닌가 싶어요.
이 중에 관심 가는 인물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길.

일하는 여성들 중, 파트타임과 파견 등,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과반수인 지금, 빈곤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이 새롭게 발족, 처우개선을 목표로 하여 활동을 해 갈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라고 이름 붙인 이 조직은, NPO와 노동조합 등이 만든 것으로, 도쿄에서 열린 발족집회에는, 일하는 여성과 지원자 등이 약 80명 참가하였습니다. 이 중, 하루 고용 파견(핸드폰으로 연락하여 일하는 것. 아무런 보증이 없음)을 경험한 후, 현재는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는 여성은 「하루 고용 파견으로는 낮은 임금으로 내일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가난해졌다. 아무리 분발해도 가난으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고 호소했습니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일하는 여성들 중, 파트타임과 파견 등 비정규노동의 비율은 해마다 계속 증가하여, 53% 남짓 올라가 있는 한편, 모자가정의 연간 노동수입은 평균 약 170만엔에 그칩니다. 집회의 참가자로부터는「연수입이 낮은 싱글마더에게 국가의 지원이 불충분하다」「여성의 노동시간은 길어져 왔는데, 남성과의 임금격차가 크다」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토 미도리 씨는「물가 상승 등을 배경으로 여성으로부터의 빈곤 상담은, 최근 몇 년, 심각함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집회와 상담활동을 통해 여성의 처우 개선을 호소해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Posted by 빨간경순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산다
자립해서 산다
차별도 폭력도, 싫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 된다

'여자'가 그것을 구하는 게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으로서, 누구보다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을 힘의 바탕으로 해서 살아 가기 위해, 우리들은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를 창립했습니다.

 

목적
1) 우리들은 여성이 건강하게 일을 지속하기 위해 활동합니다.
2) 우리들은 혼자라도 풍요롭게 생활 할 수 있는 임금을 목표합니다.
3) 우리들은 여성이 대한 차별과 폭력의 근절을 목표합니다.
4) 우리들은 여성 한 명 한 명이 존중되고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목표합니다.


住所  151-0053 東京都渋谷区代々木1-19-7横山ビル
電話  03-5304-7383
Fax   03-5304-7379
e-mail   office@acw2.org




이 곳도 누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봐서는 알 수 없음.
다만 사무소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니 상근하는 활동가가 있지 않나 싶음.

여성 비정규직 문제(일본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보다는 파트 타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듯)와
노동 차별에서 오는 여성 빈곤 문제 등을 이슈로 하고 있고
사회 운동을 한다는 정체성이 크게 느껴진다.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