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처음으로 인권영화제를 연다고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초청을 해준 전화속의 목소리를 듣고는 안갈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뵈니 정말 처음 시작하는 마음이 느껴질 만큼 모두들 다소 긴장되어 있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잘 된 영화제가 될지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물론 이틀간의 짧은 영화제고 영화편수도 많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이 하루반동안 진행되는 영화제를 위해 세달간 서로다른 단체의 실무자들이 모여
매주 회의를 열면서 머리를 맞대고 이 영화제를 준비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목포에 인권영화제가 열린다는데도 관심이 갔지만 보다 관심이 간곳은 목포 그자체였다.
몇 년전 제주도에 가는 배를 타기위해 잠시 들렸었고 그전에는 촬영차 지나쳤던 곳이었던거 같고
그 이전은 그저 노래의 제목에서나 귀가 따갑게 들었던 곳.
한때 유행했던 유행가로만 치부하기에는 노래가사가 절절한 목포의 눈물이나 목포는 항구다 라는 노래는
막연히 목포에 대한 묘한 향수와 낭만을 느끼게 한다.
나같은 사람이 그러니 보다 연배가 높은 이들은 오즉할까 싶다.
그렇게 영화제를 인연으로 나는 목포를 잠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역시 제일 처음 느낀건 역시 사람을 통해서인데 그들을 통해 목포가 무안군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도시였는데
지금은 무안군보다 큰도시가 됐다는거.그래서 무안군을 다시 목포시로 영입하고자 하나
무안군과의 관계가 계속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거.
그리고 영화제가 열리는 소위 목포의 신도시라 일컬어지는 하동 상동 지역이 모두 매립지라는 거.
헉...그니까 내가 바다위의 땅에서 지금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하고 있었군요.라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알고보니 목포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매립지 공사를 진행했고 현재 목포시의 1/3이 정도가 매립된 땅이라고 한다.
거대한 매립지는 신천지가 됐고 시에서는 비싼 값으로 불하를 해서 현재 수많은 아파트와 상가가 이곳에 형성되어 있다.
일제하에 목포항을 통해 일본의 수많은 물자가 오가고 전국의 6대항에 들어갈 만큼 이름난 곳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목포는 한때 광주보다 더 잘나가는 도시였다고 한다.
작은 땅에 사람이 몰리니 거대한 뻘이 매립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마어마한 목포시의 중심지가 된것이다.
근데 무서운건 이 매립지가 조금씩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해 현재 한뼘 정도가 수심이 상승해서 2050년에는
도시가 물에 잠길거라고 한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정부나 목포시에서는 그냥두지는 않겠고
다시 물을 막는 공사를 진행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듣기만 해도 끔직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다를 메우면서까지 사람이 들어와 살고 신도시가 된데는
목포에 들어서있는 현대삼호조선소를 비롯한 삼성,한진 등 수많은 조선소와 관련업체들과 연관이 있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목포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들을 수용할 많은 집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울산만큼은 아니어도 전남에서는 그래도 돈이 꽤 잘도는 곳이 됐고
그 댓가로 지도가 바뀔만큼의 간척지 개발이 용인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는지 잼다큐 강정을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할때 전국에 강정과 같은 문제가 있고
그래서 강정은 어디에나 있다는 이야기에 많은 관객들이 공감을 하는듯 싶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와 함께 남성중심의 도시 그것도 지역의 가부장문화가 거센 지역에서 일하는
여성활동가들의 이야기도 재밌었다.
해결할 사안들이 이곳에도 많지만 여성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더 많다는 거.
그래서 목포에서 대학을 나와 이후 거의 25년을 이곳에서 활동하고 살았음에도
이곳 토착민 출신의 운동가의 아내라는 직함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남일 같지 않았다.
내로라 하는 지역의 진보적인 남성운동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여성평등에 대한 교육을 3개월이나 받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마치 여성문제에 해박한 사람인냥 말하기도 한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다가 목포항이 있는 유달산 주변에 모여있는 달동네가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는
아침일찍 찜질방에서 나와 그곳을 찾아가보았다.
서울의 아현동과도 비슷하고 부산의 산동네와도 비슷한 그곳.
오래전 이동네는 목포항을 오가며 일했던 많은 사람들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뱃사람도 있었을것이고 어부도 있었을 것이고 목포항을 통해 장사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중심지였을 이곳.
문든 프랑스 남부에서 보았던 구도시가 생각났다.
천년가까이 되는 그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던건 사람이 살고 있는 집들을 부수지 않고
도로와 상하수도 등을 끊임없이 보수공사를 통해 살만하게 만들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달산 주변의 동네를 가보니 도로도 부서진채 그대로고 하수도도 몇십년전 그대로
겉만 땜빵해서 무너져내리고 있어 정말 사람이 살기도 힘들게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살고 있는 사람들.
이곳을 떠나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화창했던 그날 여기저기 빨래를 널어놓았고
그 풍경은 묘한 감상과 더블어 마음을 흔들었다.
전날 만났던 여성의 전화 황유란 대표는 시민단체에서 그곳에 기거하는 노인들에게 도시락배달 사업을 하고 있는데
정말 동네가 심각하게 훼손이 된건 사실이라고.
그래서 그분들이 살만한 곳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는 동네로 개발이 되게끔 방향을 바꾸고자 설문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란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매립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쩌면 목포에서 이곳이 가장 안전한 동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찹찹한 웃음이 났다.
그렇게 달동네를 한바퀴돌고 내려오니 목포에서 유명한 식당이라던 장터식당이 눈앞에 있다.
서울에서는 이제야 겨우 일어날 시간이었을텐데 찜질방에서 잠안자고 꼭두새벽부터 돌아다녔더니
아침부터 여는 식당이 없어서 창자가 한참이나 꼬였다.
게살비빔밥도 이곳이 항구주변이라 가능햇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어찌나 빨리 먹었는지 10분도 채안걸린듯.
밥을 먹고 한번 더 돌아다니고 싶었으니 피곤이 급습해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15시간을 내리자고서야.....ㅎ
돌아와서 정신 차리고 보니 이번에는 사진을 제대로 많이 찍지 못했다.
유달산 동네 사진만 아쉬운데로.^^
잼다큐 강정이 폐막작으로 상영이 되었고 극장의 다음 상영이 있어 엄청 짧은 관객과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폐막식이 초고속으로 이어졌다.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하지만 황유란 집행위원장의 말대로 성공적이라고 믿는다.왜냐면 이 영화제를 위해 열심히 뛰었고 고민했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으니까.수고하셨습니다.^^
아침일찍 유달산으로 향했고 노적봉 앞에 벌써부터 관광객들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지나갈때 남자둘이서 열심히 뭔가를 찍고 있어서 뭔가하고 봤더니 다산나무라 한다. 아기를 많이 낳게 해달라고 이 나무에 와서 기도를 드리고 갔다는데 웬지 좋아보이지가 않는다.여성은 없고 다리만 벌리고 있는 이나무에 무슨 다산기원을...앞선 사진을 찍던 남자들이 너무 심혈을 기울여서 찍는데 그것도 좀 볼썽 사나운 풍경이었다.
유달산은 300미터가 채안되는 얕은 산이지만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있는데다 목포의 전후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좀 더 높이 올라가면 다도해를 볼 수 있었는데 나는 산동네를 보고싶어 방향을 동네로 틀었다.
예전에 어릴적 내가 살던 연희동에도 대문이 없는 집들이 꽤 있었다.늘 동네사람이 왔다갔다하며 수다를 떨고 동네소식을 한번에 파악 할 수 있었는데.
골목 군데군데 보이는 외부 화장실이다.이미 사람이 살지 않은 집들도 많아 문앞에 잡초가 무성하다.
좁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다보면 어느새 눈에 보이는 바다풍경. 이곳에서 뱃일을 나간 사람들이 돌아오는 모습도 확인하고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쌓인 눈물을 훔치기도 했으리라. 지금도 어울리지 않게 시야를 가리는 저 아파트가 눈에 거슬리는데 이곳을 개발해서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면 얼마나 가관일까. 일본에서 배타고 부산앞바다에 들어설때 보이는 아파트의 행렬이 얼마나 흉측하지 관계자들만 모르고 있는걸까.
이 골목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라고 놀고 태어났다. 돌보지 않는 곳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이곳이 이쁜 도로로 다시 태어나고 이곳을 다시 많은 사람들이 거닐고 놀고 태어나는 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무리한걸까.여성단체에서 하고자 하는 개발도 이런 곳을 고치고 새롭게 살만한 지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정말 그들의 계획이 잘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릴때 친구들이 저녁을 먹고 창문에 와서 불러댔다.그렇게 멀려나가 다방구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칼싸움도 했었다. 전화기보다 빠르게 달려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밥을 먹고 수다를 떨었는데 이제는 창문으로 누가 쳐다보는 것도 싫고 낮은 창문에는 다들 사람보는게 무서워 문을 걸어 잠궈둔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도 사람만나기가 힘든 세상.
밖에 나와서 수다떠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라졌다.마침 날씨가 화창해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듯이 빨래를 널었다.그리고 지금쯤 낮잠을 즐기고 있는걸까. 개발이야기로 이곳도 이미 많이 인심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낯선사람이 지나가며 사진을 찍는 것도 곱게 보이지 않을것이다.그래서인지 사람은 못보고 개집는 소리만 엄청 듣다 내려왔다.
산동네를 내려오니 바로 보이는 분식집.한때는 이곳도 꽤나 북적되는 장사를 했을텐데 찾는 이가 없으니 으뜸은 개뿔.
항구뒷편의 구도시도 일요일이라 그런건지 조용하다. 그나마 목포의 냄새가 나는 동네인데 이제는 신도시에 밀려 사람사는 냄새보다는 항구와 관련된 가게들만 겨우 남아있는거 같다. 신도시는 구지 사진을 찍을 것도 없이 일산이나 분당과 거의 똑같다.목포시민의 60%가 아파트에 산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아파트가 있겠나. 영화제가 열린곳도 신도시에 있는 CGV극장이 이었는데 밤거리를 걷다가 이곳이 목포인지 서울인지 분간이 안갔다.그래서인지 이 조용한 거리가 오히려 좋았는데 마음 한구석은 왜이리 짠하던지.
잼다큐 강정을 만든다고 한여름을 보내고 다시 배급을 하면서 겨울이 됐다.그리고 벌써 새해도 중순이다. 여름에 멈춰진 편집본을 사이사이 손보면서 작년 9월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106분짜리 편집본을 선 보인후 다시 최종편집을 하여 12월 서독제에서 98분짜리 완성본으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일년을 필리핀에서 보내며 기획하고 2008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이래 5년만의 결실이다. 물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쉽게 한줄로 거론하기 쉽지 않을만큼 다사다난했다. 그 다사다난함은 고스란히 제작비의 압박이 됐고 레드마리아는 독립영화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됐다. 하지만 그뿐이다. 작업이 길어졌던 그 수많은 일들은 쏙 빠지고 영화만 귀찮은 늦둥이가 되어버린 느낌. 그 느낌 때문에 작년은 좀 힘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안그런 영화가 어딨겠나. 이 척박한 독립영화의 거친 토양을 자양분 삼아 영화를 만든다는 모든 사람들의 비슷한 과정일 뿐. 그래도 다행인건 이들에겐 오기와 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살아있다는 것이 다시 그길로 또 걸어가게 하는 힘인 것을. 나도 그렇게 아직 심장이 식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최종본을 끝낼 수 있었겠지. 그래서 흐믓하다. 2년전 여성영화제를 앞두고 수술을 받을때는 소원이 그래서 레드마리아를 완성하는거였는데 막상 완성을 하고보니 10편은 더 만들어야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하하하
우자지간 그 끝을 잔소리 한마디 없이 기다려준 영재와 지금은 다들 곁에 없지만 함께 해준 스텝 경은,아람,영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늘 힘들때마다 이들이 있어 한 산 한 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며 사운드며 색보정이며 몇 번의 수정을 마다않고 작업해준 지은이,용수,재원에게도 너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친구는 애니메이션을 해준 성애다. 물론 편집이 길어지는데 공을 세운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기다린만큼의 보람이 있어 아주 흐믓했다. 이렇게 작업을 같이 하고 진행을 하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제작비. 일본 촬영을 고민하다 꾸리게 된 제작위원회의 후원은 새롭게 시도해본 소중한 경험이었다.
보통 후원금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크게 부탁을 하고 받았기 때문이다. 50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기꺼이 내주신 제작위원들께 너무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담스럽다면서도 직접 제작위원장을 맡아 여기저기 이름을 팔아주신 김은실선생님, 친구라는 죄로 월급쟁이 친구들이 100만원 200만원 투척해준 감동의 순간, 제작위원으로 친구로 수술 후에는 죽까지 끓여서 매달 화학치료가 끝날때마다 먹을것을 챙겨준 박혜경선생님, 그리고 병원갈때마다 덜덜거리는 프라이드를 씽씽몰며 나를 데리고 다녔던 미례, 집이 없어 미례집에서 신세질때 고모가 살던 방을 저렴하게 소개해준 세영이, 그리고 워낭소리의 덕을 왕창 은혜입게 해준 영재의 특별한 지워금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사실 레드마리아 제작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어떻게 그 기간 가장 힘든일과 가장 행복한 일들이 완벽하게 겹칠 수 있었는지. 그 행운이 함께 했기에 필리핀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을 다시 촬영하면서 레드마리아라는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거 같다. 만일 예전처럼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해야 했다면 아마 지금도 영화는 완성되기 힘들었을것이다. 그 많은 번역을 거쳐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으며 그 많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나. 족히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치며 이렇게 레드마리아가 왔다고 생각하니 정말 긴 길을 관통했구나 싶다.
아마 예전 같으면 제작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작업으로 올인했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그렇게 일년쉬자고 작정했지만 그 심심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거 같아 안해보던 일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배급이라도 재밌게 해보자고 맘먹고 있다. 사실 지난달만해도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영화거리를 내지를뻔 했는데 번번히 다음날 일어날때쯤 체력이 딸리는걸 확인하고는 단칼에 단념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여름쯤에 프랑스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갔다 알프스를 등반해보는게 작다면 작은 꿈인데 부디 실현이 되기를. 그곳에 가면 친구가 50에 진입한 기념파티를 해준다고해서 정말 땡빚을 내서라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올해는 연애운도 있단다. 아싸...^^ 혹시 프랑스에서 붕쥬르 하면서 부딪힐 어떤 놈 혹은 년? ㅎㅎ 우자지간 신나게 일년을 또 살아보지 뭐.
영화만들며 놀기<민들레>1999,<애국자게임>2001,<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003,<쇼킹패밀리>2006,<잼다큐 강정>2011,<레드마리아>2011,모든영화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음.
redsnowm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