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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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슈퍼우먼’ 농촌여성들
[기획연재] 여성농민의 지위가 곧 평등사회의 잣대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형주 
<일다는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사회적으로 묻혀져 있던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필자 김형주님은 경기도 여주에서 논농사 짓는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주군 여성농민회 사무국장과 경기여주여성농업인센터 방과후공부방 별님반 교사로 일해왔으며, 현재는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을 쉬고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더 이상 내일을 꿈꾸지 못하고 사회 속에서 할 일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제일 슬펐다는 김형주씨는, 그러나 “혼자만 꾸는 꿈이 아니라면 계속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며, 가부장적 농촌사회 속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기고해주셨습니다. - 편집자 주>
 
환갑 여성농민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출’
 
▲ 여성농민들은 가부장적 농촌사회에서 고된 농사 일에, 가사노동, 돌봄노동까지 맡으며 '이름 없는 슈퍼우먼'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고구마 공동농사를 짓는 모습  ©김형주
순자 언니가 자궁을 드러냈습니다. 허리가 아파 고생고생 했더랬습니다. 농사일에 집안일에 그리고 마을 구판장 일까지 손 걷어 부치고 해내고, 남편과 두 아이 뒷바라지까지 깔끔하게 거두던 언니. 이제 좀 살만하니 여기저기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하고, 결국은 자궁을 드러냈습니다. 해서 무거운 짐은 못 든다면서도 올 가을도 남편 컴바인 일 조수로 나섰습니다.

 
정원 언니는 허리 디스크라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고, 허리에 복대를 하고서도 가지 하우스, 호박 하우스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땅을 설설 깁니다. 그만 좀 쉬시라는 동네사람들 말에, 일을 안 하면 더 아프답니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이기순 회장님. 당신도 며느리 사위 다 보고서도, 팔순이 넘는 시어머니 시집살이 고되어 지난 여름 가출을 했습니다. 허나 가출을 해봐야 환갑 다된 할머니, 친정도 없고 어디 혼자 들어가 볼 만한 곳도 없어서 괜히 버스만 타고 왔다 갔다 하고서는 그 누구도 몰라주는 가출마저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선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배 과수원 배 봉지를 싸고 시어머니 밥을 차립니다. 기껏해야 동네아줌마 만나 시어머니와 남편 흉 보는 게 다였는데, 남편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턴 그것도 수월치 않습니다.
 
젖소를 키우는 영미씨는 하루도 빼지 않고 젖을 짜고 소 사료 푸대 나릅니다. 그런데 하필 남편 집에 없을 때 우리를 뚫고 나온 소 두 마리, 그 놈들 잡으러 마을을 동동거리며 쫓아다니다 논두렁에 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성질 나쁜 소들이 깔아뭉갠 남의 집 논과 밭도 걱정이지만, 에이쉬 이 놈의 소들도 여자라고 깔보는가 싶어 속에선 천불이 일었답니다.
 
오이 상추 하우스 일에 뼈가 다 녹는다는 윤경씨는 올 여름 몸 건강도 안 좋아졌지만 우울증까지 생겼었답니다. 농사일을 줄이고 싶어도 아이들은 커가는데 농산물 값은 떨어지니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하우스를 줄일 수 없답니다.
 
미숙 언니는 이혼하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새색시로 들어온 농촌. 아이 셋 낳고 키우는 동안 남들은 모두 호인이라는 남편의 손찌검에, 남편이 술만 먹는 기색이 보이면 남편을 피해 도망가는 버릇이 생겼고, 결국 그 아저씨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던 밤 야반도주를 해버렸습니다.
 
농사도 가사일도 봉사활동도…슈퍼우먼 여성농민 몫
 
▲경북 봉강 꾸러미(생산자 조직)를 방문, 견학한 안동-의성 여성농민회 분들 ©<행복을 담는 장바구니> 까페 제공
이 땅에 여성농민이 삽니다. 농사를 짓는 여성, 여성농민이 삽니다. 남녀평등의 사회, 여성들도 장관을 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너희 나라’ 같습니다. 논일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고, 밭일은 여자가 합니다. 농사일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고, 집안일은 여자가 합니다. 사회적 관계는 남자가 맺고, 여자는 그 빈 자리를 메꿉니다.

 
예전에는 큰 기계 일은 남자가 하고 소소한(?!) 일상의 노동은 모두 여성농민들의 노동으로 메꾸어 왔습니다. 남편이 경운기로 밭을 갈고 고랑을 타주면, 고추 모종을 심고 고추순 따고 말뚝 박고 줄 메고 고추 따고 말리며 중간중간 잡초를 메는 매일의 계속되는 노동을 담당하는 몫이 여자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는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농사규모가 커지면서 여자들도 이젠 1톤 트럭과 트렉터 운전 정도는 필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편이 이앙기로 모를 심고 아내가 트렉터로 논을 갑니다. 남편이 컴바인으로 벼를 베고, 아내는 1톤 트럭으로 벼를 실어 나릅니다. 남편과 같이 비료살포기를 메고 이삭거름을 주고 농약 줄을 잡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같이 하면서 ‘노동의 장’과 ‘생활의 장’이 분리되지 못하여, 출근도 퇴근도 없는 여성농민. 밖에서 똑같이 흙투성이 일을 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남편은 리모콘을 쥐고 아내는 부엌칼을 쥡니다. 사회적 활동은 남편의 몫이고, 그렇게 비워진 자리는 이제 스스로 농기계도 운전하는 수퍼우먼 여성농민이 메꿉니다.
 
남편이 면사무소로 영농교육을 받으러 간 사이 혼자서 감자를 심습니다. 남편이 지역발전협의회 회의 나가 낮술에 얼큰히 취해 돌아올 때, 혼자서 고추 말뚝을 박고 오이줄을 올립니다. 남편이 친구 부모님상에 조문 간 사이, 들깨를 심고 참깨밭을 맵니다. 남편이 마을회관에 대동회의를 가면, 회의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음식 준비 하다가 회의 끝나면 밥 차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마을 이장도 여자가 한다지만, 아직도 대동회의장에 여자가 들어가지도 못하는 마을도 많습니다. 아이들 챙겨 학교 보내고 시부모 뒷바라지야 물론이고, 농한기 동네 어른들 마을회관에 돌아가며 반찬 해 나르는 일에, 부녀회장이라도 맡을라치면 면사무소에 모여 독거노인 김장에 빨래봉사까지, 농업노동에 가사노동 그리고 돌봄 노동까지 모두 여성농민의 몫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정신 없이 수퍼우먼으로 돌아 치는 여성농민들, 그녀들이 이 땅에 삽니다.
 
13년 전, 내가 여성농민이 되던 때
 
▲ 여성농민회의 진행하고 있는 <천연 치약, 천연 샴푸 만들기> 강좌. 화장품과 세제, 비누 만들기에 이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처음으로 제가 여성농민이 되던 때가 생각납니다. 13년 전 도시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내려올 때는 날 선 사명감 내지는 결기 그런 것들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민단체를 찾아가 8년이 넘게 실무자 일을 보면서, 언젠가는 이 생활을 접고 농민이 되리라고 되뇌던 일을 실행에 옮기던 때이니, 설렌다기보다 사실은 걱정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은 ‘귀농’이라는 말만 하면 왜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왔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어 참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군 전체에서 귀농한 사람이 손에 꼽을 지경이었고, 지역사람들 중에는 ‘타지 것들’이 도대체 왜 여기까지 내려왔는지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 이름 석자보다 누구 마누라, 누구 엄마로 통하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여성과 아이가 행복해야 행복한 사회이며, 농촌이 평등해야 정말 평등한 사회’라는,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여성농민들을 만났습니다.
 
‘여성농민회’는 여성농민 스스로 현실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 좀더 행복한 여성농민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땅콩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콩도 심어 마련한 돈으로, 스스로 교육사업도 만들고, 농사일에 엄마를 빼앗기고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농번기 탁아사업도 해왔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활동이 2002년 농림부 시범사업으로 여성농업인센터 사업에 선정되자, 어린이집과 초등학생 방과후 공부방도 운영하고, 스스로 벌여오던 교육사업도 더 체계 있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벌여낸 사업으로 더 많은 여성농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농업문제와 세상읽기라는 주제로부터 시작해서, 미래와 깨끗한 환경을 위한 작은 실천의 하나인 ‘천연세제 만들기’ 같은 교육도 마을로 들어가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면에 하나밖에 없는 복지회관 목욕탕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을 모시고 가는 일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정작 센터에서 일하는 회원들은 마음고생도 많고 몸 고생도 많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아니면 그 일들을 누가 할까 합니다.
 
조금 더 나은 세상, 평등한 삶 위해 함께 꾸는 꿈
 
▲ 여성농업인센터 부설 알곡 어린이집 아이들이 토종수수 씨앗으로 모종을 키워, 작은 꽃밭에 심고 거두어 직접 수확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모임에서도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학교담장을 둘러싸고 육상골재채취 사업이 신청되어 학교 바로 옆에서 모래산이 쌓이고 물웅덩이가 파이는 상황이 예상되자, 순하고 세상 모르는 것 같던 엄마들이 변했습니다. 아니, 원래 그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아이들 건강과 교육문제 앞에서는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건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남성들보다 지역의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서 자유로운 여성들은 옳은 것은 옳다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눈치 보지 않고 말했습니다.
 
사실 전 제가 엄마라는 사실이,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엄마에게 요구되는 많은 신화들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농민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함께 살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꿈을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10명이 넘는 여성농민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삭발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바로 다음 달 딸을 시집 보내야 하는 친정엄마도 있었답니다. 삶의 무게보다 더 치열하게 싸우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밥 한 공기 값이 적어도 커피 한 잔 값은 되는 세상’을 꿈꾸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노동의 강도가 세지고 여성들이 차지한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육아와 가사를 남녀가 분담하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꿈을 꾸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함께 꾸는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될 것임을 믿는 여성농민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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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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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부엌’


고립되고 비가시화되는 노동공간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부엌은 마루를 내려간 다음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는 별도의 공간이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식의 관련 금기들도 많았다. 가옥 구조가 변하면서 현재 대부분 가정에서 부엌은 밥을 먹는 공간을 포함하며 실내로 들어왔다. 부엌 공간은 이제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소개된다. 그리하여 때때로 부엌이 식사와 휴식공간일 뿐 아니라 그 식사를 준비하는 작업공간이라는 사실은 망각되곤 한다.

일상문화연구회의 <한국인의 일상문화>에 따르면, 부엌의 사정과 식탁의 사정은 다르게 이해된다며 ‘칼국수’의 예를 든다. 칼국수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당시 ‘간단하고 서민적인 음식’으로 소개될 때 사람들은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칼국수가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데는 상당한 노동력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보지 않고서, 식탁에 앉아 자신이 칼국수를 먹기 쉽다고 ‘간단한 음식’ 운운했다는 것이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도 끓인다’는데 그 부엌의 코앞에서 매일 먹고 자는 사람들이 간단한 음식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것은 부엌이 여전히 집에서 홀로 떠 있는 섬과도 같고, 부엌에서 노동을 하는 주부 역시 ‘나 홀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 구조에 있어서 부엌이라는 공간은 주부의 노동이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집안 구조상 문을 열었을 때 부엌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보통 부엌은 집에서 가장 깊은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평수가 넓어질수록 부엌과 식탁 사이에는 전통가옥 뺨치는 경계선이 생긴다. 공간의 여유가 생기면 부엌은 유리문을 달고 커튼을 드리우며 ‘가족들의 공동공간’이라기보단 점점 더 ‘주부의 개인작업공간’이 되어 숨어 들어간다. 

음식냄새나 조리기구가 내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누굴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식사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 작업 동선을 길어지게 하고 노동시간 동안 가족들로부터 고립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주부 K씨(54세)는 “식사준비를 할 때 옆에 사람이 있으면 필요할 때 시키게 되지만 혼자 있으면 그냥 혼자 한다”고 말한다. 다른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함께 준비를 하려고 해도, 각자의 혹은 공동의 휴식공간에 있는 식구들을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번거로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집은 부엌을 마음 편하게 ‘외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가족들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있을 수 있다. 부엌은 일부러 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고, 부엌에 있는 사람은 일을 하는 동안 ‘공동공간’인 거실에 있는 가족들을 보거나 텔레비전 등을 볼 수 없다. 식구들이 보는 것은 일하고 있는 주부의 ‘뒷모습’이다. 일반적인 가족들에게 부엌은 먹을 때만 공동공간이 되는 ‘식탁이 있는 곳’이지 공동작업공간은 아닌 것이다.

직장인 M씨(28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부엌에서 엄마가 불러도 못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통 부엌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주부 L씨(55세)는 “평생 음식 장만을 혼자 하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 만했어도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TV를 보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 땐 화가 나고 미웠다”라고 말했다.

한편 다용도실은 대부분 부엌과 연결되어 있거나 부엌과 가깝고, 집의 깊은 곳에 숨어있어 가사노동을 비가시화하는 데 일조한다. 양파, 감자, 통마늘 등의 다듬어야 하는 재료들, 관리를 요하는 장기저장 식품 등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세탁 관련 기기들까지 위치하고 있다. 걸레, 손빨래, 세탁기 빨래 등 일거리들이 쌓여 있는 이 곳에 주부를 제외한 가족들은 ‘빨래를 가져다 놓으러’ 간헐적으로 방문할 뿐이다. 게다가 세탁기는 집의 후면에 위치한 다용도실 있는데 건조대는 주로 집의 전면(테라스)에 위치하고 있다. 세탁기와 건조대까지의 동선이 길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미관상’이다.

가정은 사회적 임금노동으로부터 혹은 학교로부터의 휴식처라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고 조용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하며, 세탁기 소리도, 음식 냄새도 맡지 않고 ‘쉰다.’ 그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성된 공간에서 막상 어떠한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는 비가시화 되며, 그러한 노동은 고립되고 평가 절하된다. 이로써 우리의 부엌은 ‘집은 쉬는 곳’, ‘가정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 ‘집안 일은 엄마일’이라는 통념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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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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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적 삶을 위한 ‘필요노동’, 집안일
가사노동의 일로서의 가치를 찾아서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경신 
아침나절부터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할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현관에 흩어져 있는 신발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물건들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 청소를 하고 걸레로 훔치는 일, 빨래를 분류하고 세탁기를 돌리거나 손 세탁을 하거나 삶는 일, 빨래를 널고 걷고 정돈하는 일,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고 남은 음식물을 정돈하는 일, 음식물 쓰레기, 폐지, 플라스틱, 유리병 등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리는 일 등.
 
정말 쉴새 없이 일해도 별로 표 나지 않는 일들이다. 누가 “오전에 뭘 했어?”하고 물어보면 “집안일 했지”하고 대답할 뿐, 세세하게 한 일을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다.
 
놀고 있다?
 
 가사노동은 누구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이다.
그런데 그 말로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다양한 ‘집안일’이 흔히 ‘노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하다. 주변에서 종종 주부들 스스로가 ‘어떤 일 하나?’는 물음에 ‘놀고 있다’고 대답해 의아해하곤 한다. 집안일 하는 자신을 ‘노는 사람’으로 일컫는 마당에야, 그 자녀들이 “우리 엄마는 놀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집안일의 가짓수와 일의 경중은 개인차가 있겠다. 모든 빨래를 손으로 하는 사람, 세탁기와 손을 적절히 사용해 빨래하는 사람, 빨래는 오직 세탁기로만 하는 사람, 심지어 건조기까지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분명 빨래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유리창을 닦는 사람에게는 유리창 닦기가 집안일의 한 가지겠지만, 절대 유리창을 닦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아무튼 집안일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 차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집안일 자체는 ‘일’임에 분명하다. 부지런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의 하루 일과를 회고해보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의 일 이상으로 어머니의 집안일 노동강도가 높았던 것 같다. 별다른 취미생활도 없었고 외출하는 일도 드물었던 어머니는 그야말로 온종일 집안일에만 매달려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집안일이 ‘노는 것’으로 간주되었을까? 그것은 그 일이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집안일을 잘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부터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일은 노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고, 운동을 하는 등의 취미활동이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 집안일과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된 것은 참 억지다.
 
집안일은 안 할수록 좋은가?
 
놀고 있다고 매도될 만큼 일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집안일’이다 보니, 그야말로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팽배한 생각인 듯하다. 열심히 해봐야 몸만 힘들고, 표도 나지 않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 사회에서는 그 ‘별볼일 없는 일’이 아직까지도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라, 돈 잘 버는 여성이라면 가족 중 또 다른 여성(어머니, 자매, 며느리, 시어머니 등)에게 집안일을 떠넘기거나, 아니면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안일을 벗어나려 한다.
 
반면, 돈 못 버는 여성은 가정경제가 허락하는 한에서 편리한 가전제품을 집안에 갖춰놓거나 식당이나 세탁소 등의 서비스를 이용함으로써 몸수고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렇다 보니, 형편이 어려워 집안일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여성이 있다면, 자기 처지를 한탄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남성이나, 그 일을 떠안은 여성이나, 될수록 그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즉, 돈을 지불해서라도 가사일의 사회적 서비스 혜택을 누리고, 기계일꾼이나 사람일꾼을 부려 집안일로부터 해방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성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삶의 진정한 자립, 집안일을 타인에게 전가해선 안돼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미토,2005)
그런데 과연 집안일은 누군가에게 전가시켜야 하고, 가능하면 회피해야 하는 무가치한 일일까? 뭔가 고상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일일까? 사적 영역에서 퇴출시키고 사회화해서 극복해내야 하는 일일까? 기술혁신을 통해 우리의 육체를 해방시켜야 하는 노예노동일까?

 
유학시절. 혼자 밥을 챙겨먹고 살면서 난 집안일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좀더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 즉 연구에 받쳐야 할 시간과 노력을 집안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하지만 남에게 미루면 귀찮은 일이 되는 것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 누군가가 내게 그의 몫의 일을 떠넘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돈으로 손쉽게 해결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 까닭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기 몫의 필요노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안일 속에서 그 필요노동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록 100% 자급자족을 할 수는 없지만,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소박한 삶에 대한 지향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 속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도시 자체도 자립적이지 못하고 지극히 의존적인 공간이지만, 그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의존적 삶을 오히려 돈에 의해 보장받는 자립적 삶으로 착각하고 지낸다. 그래서 돈 버는 일은 생산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집안일은 돈 버는 일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그림자노동으로 전락하고, 소비는 그 일의 핵심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자립은 돈을 버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사람이나 도구를 돈으로 사서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데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안일이 소비에 집중하는 그림자노동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필요노동으로서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고민과 더불어, 자기 몫의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데서 자립적 삶이 출발해야 한다(집안일을 공유하고 분배하고자 할 때조차 자기 몫의 집안일에 대한 분명한 인식 위에서만이 가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삶의 간소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어쨌거나,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켜도 될 만큼 고귀하고 값진 일이 있다는 그릇된 믿음과 허위의식을 떨쳐내기 위해 난 하루 몇 시간씩 집안일을 하며 수양 중이다.
 
*함께 읽자.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미토,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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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위안부2012. 3. 14. 14:01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일제말 트럭군도 근무자 “위안부, 하루 10시간 15명 상대”
 
“일본군 외출 때 콘돔 주며 출입 부추겨…90%가 한국처녀”



<한겨레>가 일본 뉴스 전문 포털사이트 <제이피뉴스>(JPnews.kr)와 제휴해 일본 소식을 전달합니다. 전여옥 의원과 ‘일본은 없다’ 재판을 벌여 지난 1월13일 2심에서 승소한 재일 언론인 유재순씨가 <제이피뉴스>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제이피뉴스>는 전 일본인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로부터 일제시기 종군위안부와 관련한 생생한 증언을 얻었습니다. 원문을 보시고자 하시는 분은 아래에 있는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제이피뉴스>의 해당 기사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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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종군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직접 운영됐다는 증언이 전 일본인 군속에게서 나왔다. <제이피뉴스>는 23일 일제시대 때 트럭제도에서 근무했던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군 위안소 두곳을 군 부대에서 직접 관할했다고 보도했다. 지바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인 1943년 11월부터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었다.

마쓰바라는 그 증거로 당시 부대에서 발급한 출입증을 제시했다. “군 위안소 출입증”은 가로 5.8cm 세로 10.8cm 증명서로 ‘남국료출입증(南國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이 ‘남국료위안소’는 해군용이었으며, 이외에 육군이 이용하던 ‘남성료(南星寮)위안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마쓰바라는 특히 대부분 위안부는 거짓광고에 속아서 왔다고 증언했다. 모집공고에 위안부 모집이라는 것은 없고 장교 메이드(하녀) 구함 등의 거짓내용만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존재했더라도 민간이 운영한 공창제도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 증언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한일 평화단체들의 활동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쓰바라는 당시 트럭군도에는 평균 3만-4만명 가량의 육군과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운용하던 두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위안부 규모는 한 군데에 50-60명씩 120명이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서 각각 7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안부들이는 집단적으로 막사에서 생활하며 낮 12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근무'했으며, 하루 14-15명의 군인들을 상대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한달에 딱 한번 성병 검사를 할 때만 막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마쓰바라는 일본 군대가 모집한 위안부들을 돌려보낼 의도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안소를 작전지역에 설치한 뒤 작전이 끝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부대만 옮기고 위안부들은 내팽개친 채 가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겨진 위안부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마쓰바라는 평화운동을 해오면서 위안소 문제를 고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제이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라며 당시 종군위안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아래는 마쓰바라의 증언을 토대로 트럭 군도 종군위안소인 남국료위안소의 24시를 재구성한 것이다.

■ 위치

남태평양 트럭제도는 총 11개의 큰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제도의 오른쪽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나쓰시마(夏島), 아키시마(秋島), 후유시마(冬島)에는 군 부대와 그 부대를 위한 후방보급기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개의 위안소는 후방보급기지들이 모여 있던 나쓰시마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쓰시마는 위안소 이외에도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 군부대의 위안소 관할

이 두 위안소는 모두 군대가 관할했다. 이 가운데 남국료위안소는 그가 배속된 제4함대 시설부대인 하기와라 간이치 부대가 관할했다. 시설부대인 탓에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 공사들을 진행했지만, 위안소 관리업무도 맡았다.


마쓰바라 씨가 발급되었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되었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위안소 건물과 위안부의 방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였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철책 같은 게 쳐져 있었다.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었다. 외부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경비원이 철책 주변을 계속 돌았다.

막사의 각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각 방마다 몇호인지 적혀 있었다. 복도 끝은 공동으로 쓰는 세면장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방 크기는 하나당 약 2평 정도이고,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 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도 있었다.

■ 위안부

위안부는 주로 18~25살 정도의 젊은 여성들로, 90%는 조선인, 10% 정도는 일본인이었다.

1943년 당시에는 두 위안소에 각 50~60명 정도씩 배채됐다. 하지만, 44년부터는 각각 70명 정도씩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든가, 병원에서 사무볼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의 모집공고에 속아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모집광고에는 월급이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30엔으로 제시됐으며,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유혹했다. 숙박료, 식대기 다 무료니까 아, 이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한 것이었다.

■ 성적 착취

위안부들의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낮 12시부터 22시까지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나는데, 일반 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배를 타고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사관이나 장교,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가는 것도 허용이 됐다.

공휴일도 없었고, 한달에 한번씩 성병 검진이 있었다. 위안부 여성들은 이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라는 것이었다.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 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한다고 즐거워했다.

훈련이 없을 땐 군인 수가 늘어나고,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었지만, 평균적으로 한명의 위안부가 하루 14-15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 군인 외출 때 의무적으로 콘돔 지급

위안소 앞은 언제나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하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는데, 언제 출전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기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군인들은 주로 하루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등에 주둔했는데, 조그만 배를 이용해 자주 나쓰시마를 방문했다.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군인들이 외출할 때 꼭 콘돔을 2개씩 의무적으로 지급했다. 마치 위안소에 가라고 장려하는 듯했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군인들의 위안소 이용

군인들은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1엔의 이용요금을 내고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는다.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이다. 그 번호표를 들고 해당 번호가 적힌 위안부의 방을 찾아갔다.

■ 위안부의 운명

일본 군부는 위안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모집공고가 거짓말인 것이 드러난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든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한다. 그런데 작전이 끝나 후퇴를 해야 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간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간다.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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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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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매춘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읽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스템에 불만족스럽다면, 이 시스템을 제거하자.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성노동자만을 찝어내지 말라. 그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노동을 판매하고 있다.


희생자인가, 노동자인가?- 성노동과 노동조합

아나 로페즈 (Ana Lopes)


나는 이스트 런던대학(University of East London: UEL)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 그곳에서 나는 문화의 기원에 관한 매우 흥미롭고 논쟁적인 이론을 배웠다 - 섹스와 경제 사이의 관계가 매우 오래된 것이고, 첫번째 인간 혁명과 인간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이론. 

나는 멘스(월경, menstruation)가 어떻게 출산력에 대한 여성의 가장 훌륭한 광고가 되었었는지, 그리고, 남자들이 가장 매력적인 여자를 간단히 골라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주기를 동시화해서 동시에 멘스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냥하도록 만들기 위해 섹스 스트라이크를 벌였던가를 배웠다. 음식이 준비되어 오면 그들은 그것을 모두 공유했다. 

물론 여자들은 실제로 모두 동시에 멘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멘스 시그널을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임신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지만 특정한 시간에 임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적 신호(signal)를 집단적으로 전유했고, 이것이 인간 혁명을 생산했다. 

나의 배경은 인류학이다. 그렇지만 학위를 마쳤을 때 나는 길을 잃었다. 이 이론이 현재의 관행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몰랐다. 우리 시대에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크리스 나이트(Chris Knight)의 급진적인 인류학 단체에 소개받았을 당시 나는 인류학을 완전히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이 단체는 내게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의 논문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에서 그녀는 '멘스 기간의 피를 숨기려' 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러한 네트워크가 현대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피를 흘린다. 우리는 모두 멘스한다. 우리는 모두 섹슈얼한 존재다.” 그녀는 성산업을 지칭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게 위대한 계시였다.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 혁명이 실제로 작동했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혁명적이다 - 나는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시스템과 방식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을 원한다 -.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의 이론을 테스트하기 위해 나는 성산업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인류학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워진 열정을 갖고 연구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성산업에 집중했다.


성산업

성산업은 단순한 매춘보다 훨씬, 훨씬 더 크다. 이것은 우리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마주치는 거대한 세계적 산업이다. 우리는 매춘과 포르노그래피만이 아니라 전체 모델 산업과 전체 뮤직 비디오 산업까지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성적 신호를 이용한다. 

막대한 이윤이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윤)은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 성적 신호를 실제로 생산하는 사람보다는 소수 사람들의 손으로 간다. 우리는 대개 여자를 고용하는 산업으로 생각하지만, 성산업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 일한다. 

성산업은 나라마다 다르고 그래서 그것을 통제하는 법률 역시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곳에 은밀하고 지하화된 부분이 적어도 조금씩은 항상 있다. 이것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불러온다. 이것은 다른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향유하는 동일한 보호 메카니즘에 의해 포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성산업의 지위와 성적 호의를 파는 사람들의 지위가 시간에 따라 변해왔고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성산업의 노동자들은 대개 사회에서 낮은 지위를 갖는다. - 그들은 주변화되고 낙인화된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 바빌로니아의 신성한 매춘부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내 생각에 페미니즘이 20세기에 힘을 얻어가기 전까지 성노동자들은 다른 여자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졌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아버지의 재산이던 것에서 남편의 재산인 것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경제적 독립과 - 성교육을 포함해서 - 교육에 대한 접근권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리비도를 갖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노동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가졌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고, 실제 활동을 통해 다른 여자들은 갖지 못했던 성교육에 대한 접근권을 가졌다. 

이러한 거대 산업에 대해 혁명가들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폐쇄하는 캠페인을 벌여야하는가? 이것이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여타의 사람들이 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성산업은 모든 곳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산업을 폐쇄하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실상 성노동자들의 권리에 해악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내가 보기에 이 전략은 작동하지 않았고,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성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폭력과 감염 등의 위협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권리를 가져야 한다.


행동 연구

성산업은 분명히 나의 연구 대상이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종류의 연구를 수행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진정한 연구자들은 - 자신의 연구가 유용하려면, 말이 되려면 - 자신의 연구가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되돌려줄 책임이 있었다. 이 주제(topic)의 논쟁적 성격을 감안했을 때 객관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이론적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나는 실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했다 - 성노동자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 나는 그것을 변화시킬 어떤 것을 하고 싶었다.

나는 '행동 연구(action research)'라고 불리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이것은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단지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작업해나가는 것이었다. 나의 접근법에서 그들은 정보제공자가 아니라 - 참가자였다. 이것은 거리를 두고 수행되는 연구보다 훨씬 더 평등주의적인 연구였다. 나는 자원(resource)을 제공하는 사람이었고 -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성산업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그것은 인류학자들이 '참여 관찰법(participant observ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챗’(채팅)라인에서 5년간 일했고, 마침내 성산업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다. 조건이 절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에 나는 대개 특정한 영역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래서 일하도록 강제된 조건들이 문제였다. 성산업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아래서 일하도록 강제되는 조건들. 

동시에 나는 런던의 여러 지역에서 일하는 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시범 연구에 참여했다 - 이것은 나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요청하는 눈덩이 굴리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를 통해 나는 대규모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대화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문제를 겪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매춘이 되었건 스트립티즈가 되었건, 혹은 그 무엇이 되었건 돈을 위해 성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건에 대해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들은 왜 계약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연금이나 혹은 다른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것들을 왜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그들 역시 일반인들이 현실에 대해 매우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성노동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생각을 갖는다. 미디어는 선정적인(sensational) 스토리를 팔고 두 가지 극단 가운데 하나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는 돈을 많이 벌어서 권한을 가진 여자들 혹은 노예제와 가까운 끔찍한 상황에 놓인 불쌍한 희생자 가운데 하나를 묘사한다. 내가 대화했던 성노동자들은 현실에 관해 공중(public)에게 말할 수 있는 조직화된 집단적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제 성노동자 연대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을 미팅에 초대했다. 이 미팅에는 UEL 인류학과의 사람들과 성적자유동맹(Sexual Freedom Coalition)과 같은 공감하는 단체의 사람들도 참여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부족하다고 말한 집단화된 세력을 진정으로 만들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답변은 “그렇다. 우리 함께 그렇게 하자”였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운동이 탄생했다. 우리는 매우 비공식적인 단체를 결성했고, 이것을 국제성노동자연대(the International Union of Sex Workers)라고 불렀다.

왜 '국제(international)'인가? 왜냐하면 산업이 세계적이고, 따라서 문제 역시 세계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신매매 관련 문제들은 일국가적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세계적 수준에서 조직화해야 한다. 왜 ‘노동조합(union)’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는 노동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이 우리이다. 성산업에서 일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람들이 특별한 부문에 진입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많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매월 말에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일한다. 왜 ‘성노동자(sex workers)’인가? 왜냐하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직업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번째 행동은 2000년 3월에 있었다. 우리는 소호 거리(Soho Street: 런던)로 나섰다. 전 세계의 여러 장소에서 성노동자들이 세계 여성 스트라이크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 행동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태기를 원했고, 성노동자들의 친구와 동맹자들이 그 날 저녁에 지지의 뜻을 보이기 위해 소호에 왔다.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체 일을 계속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한 우리 단체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사항들 - 가령, 자신의 삶과 일이 사회에서 묘사되는 방식들. 그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 을 다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미디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존중(Respect)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했다. 성노동자들이 기사를 쓰고 잡지가 성노동자들 사이에 배포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단체의 에너지를 모으는 것에 정말로 유용했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우리의 웹사이트와 인터넷 포럼에 집중했기 때문에 존중(Respect)을 계속 출판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는 인쇄매체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인터넷 포럼은 권한확대의 수단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 성노동자가 다른 나라로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들은 포럼에 글을 올려서 그곳의 상황이 어떠한지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 나라에 있는 성노동자로부터 정보를 얻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쉽게 착취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포럼을 통해 어느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동료들과 접촉할 수 있다. 등등.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여러 이슈에 대해 의견을 가진 시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 예를 들어 우리는 반전 집회에 참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부심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노동자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한다”라고 말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권한을 확대해갔다. 그들은 조직화할 수 있고, 결집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조건(기존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GMB 지회
(*BRITAIN'S GENERAL TRADE UNION: 영국일반노조)

이 기간 동안 우리의 목표는 TUC(Trades Union Congress: 영국노조회의)로부터 우리의 노동조합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노동조합이라고 불렀지만, 몇몇 사람이 모인 비공식적 단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2년에 정말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 10년 내지 15년 사이에는 아마도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기존의 매우 잘 확립된 노동조합 단체인 GMB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그 전에 몇몇 노동조합에 접근했었다. 그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우연히 GMB의 대표를 만났고, 그에게 그냥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노동자예요, 여러분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몰래 카메라(Candid Camera)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매우 전문적이었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 GMB 지회를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산업에 관여한 성노동자들과 여타 사람들을 포럼에 초대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GMB의 성노동자 지회로 나타났고, 이 나라에서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 

우리가 GMB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TUC’로부터도 승인받았다. 성노동이 노동이라는 것을 확립하고, 이 나라의 모든 성노동자들이 공식적 노동조합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공식적 노동조합에 속하게 된 것은 위대한 성취였다.

이것 외에 가장 기본적인 이 노동권으로부터, GMB에 속하게 된 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혜택을 얻게 되었는가? 작고 분리된 단체로서는 성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던 많은 이점들이 있었다. 법률적 대표가 아마도 노동조합을 통해 성노동자들이 바라던 가장 중대한 자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산업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호하는 법률은 매우 모호하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합법인지 혹은 그 결과로 곤란에 빠져들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료 법률 대변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노동조합은 또한 정신적 지원과 실제적 지원도 제공했다. 한 달에 한번씩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들, 대개 동일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심판받지 않고 여러분의 일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권한 확대의 감각을 주는 중대한 일부이다.

훈련은 또 다른 중요한 사안이고,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산업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훈련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로 사람들이 비난받고 비판받으면서도, 그것을 그만두고 싶어할 때 그들에 대한 문이 모두 폐쇄되어버리고 성산업에 갇히게 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노동조합은 -이력서를 쓰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방법 등에 관한 실제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산업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들, 더 낫고 더 안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훈련도 있다. 예를 들어 호신술에 관한 코스도 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폭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곤란한 손님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보다 폭넓은 코스도 있다. 또한 회계와 세금 등을 관리하는 것에 관한 코스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인기있는 것은 스트립티즈 코스일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이 산업에 남아있는 동안 다른 일을 해보기를 원하는 매춘여성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이미 전문적인 스트리퍼인 여자들이 승인받기 위해, 즉, 코스가 제공하는 자격증을 받기 위해 코스를 이수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학위를 따는 것이건, 자격증 혹은 그냥 직업으로서건, 승인을 얻게되는 순간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 성노동자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승인을 부여받을 자격이 부여되어 있다. 

성노동자들은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스트립티즈에서 그것은 단순히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것만이 아니다: 매우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다루어야 한다 - 예를 들어 그 가운데 일부는 술 취한 사람이다 - 그리고 자신의 직업의 낙인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잘 하는 것, 자신들의 알고 있는 바에 대해 승인받는 이러한 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그래서 훈련, 자격증은 사람들의 자기 존중감을 개발하는 활동의 일부분이다. 자신에 대한 존중감 없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조합은 또한 몇몇 테이블 댄싱 클럽에서 승인되었고, 이곳에서 노동조합은 다른 작업장에서와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미팅을 갖고, 노동조합 대표를 선출한다. 이것은 대다수의 다른 노동에서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기본적인 성취였지만, 성산업에서는 이전까지 쟁취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클럽들에서 노동조건은 향상되기 시작했고 - 노동조합화는 다른 산업들에서 결과를 만들어내었고, 성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이는 자연스럽게 매춘 탈범죄화(=비범죄화) 논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클럽들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들을 매춘업소 내에서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매춘이 기술적으로는 불법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범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춘이 탈범죄화된다면 노동조합은 매춘여성들의 조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Initiative)의 성공은 다른 나라들에서 동일한 길을 따르거나 혹은 노동조합화가 아닌 다른 형태의 집단적 행동을 개발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환상적인(절대적으로) 현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화가 구체적인 전략으로 채택된 나라들에서는 노동조합 네트워크를 개발할 수 있었다. 2007년 3월에 인도에서 성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국제 미팅이 있을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매춘인

성노동에 관한 대규모 논쟁이 있고, 특히 페미니즘 내에서 크게 싸움이 일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주의 사상가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매춘에 관해 말한 것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방식 때문이다. 엥겔스는 별로 일관적이지 않다. 그는 매춘이 "희생자가 된 불운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깨뜨린다"고 말하고(이것마저 공통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는 아니다),  콜론타이(Kollotai)는 "자본주의 내에서는 모든 것이 판매된다"고 지적했지만 분명히 매춘을 철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매춘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매춘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읽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스템에 불만족스럽다면, 이 시스템을 제거하자.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성노동자만을 찝어내지 말라. 그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노동을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팔기“ 때문에 성노동은 다르고 훨씬 더 충격적이라고 종종 말해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팔지 않는다. 성노동자들은 서비스 - 아마도 시간 혹은 특별한 성서비스 -를 팔지만, 거래가 끝난 후 몸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몸은 팔리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이런 방식으로 읽힌다면 노동조합화에 관한 전체 개념이 훨씬 더 잘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접근법 -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노동이고, 성노동자들에게는 완전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 은 결과(긍정적인)를 획득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적 관점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페미니스트 논쟁은 실제로 성노동자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매춘 철폐를 위해 사람들이 싸우든 혹은 그것에 참여하기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든, 성노동자 자신들의 웰빙을 위해 실제로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거대한 산업이 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중요한 일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노동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만약 선택한다면 그것을 떠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다.

나의 전망, 그리고 내가 노동조합화 과정에 참여한 이유는 성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요한 도구가 그들 자신의 몸인 곳에서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명령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비즈니스이고,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고립화된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통제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지하화된 산업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산업 내에서 노동조합화된 그리고 집단화된 단체를 창출할 수 있다면, 조직화할 수 없는 산업은 한군데도 없을 것이다.

만약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노동자들이 그러한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성노동자들이 이 혁명을 쟁취하고,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립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곳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안 좋은 시대가 물려준 관료적 찌꺼기인 사람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망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착한 여자(good women)'과 '나쁜 여자(bad women)' 사이의 구분은 없을 것이다. 성노동자 낙인화의 문제는 단지 우리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 이것은 모든 여자들의 문제이다. 내가 만약 창녀라고 불릴 수 있다면 어떤 여자건 창녀라고 불릴 수 있다 - 모든 여자들이 그러한 낙인에 시달릴 수 있다. 

이것이 권리를 주장하는 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모든 여성의 관심이 되는 이유이다.


▒ 본문은 진보적 매거진 ‘위크리 워커’(Weekly Worker 645. 2006년 10월호)에 게재된 아나 로페즈의 기고문 “희생자인가 노동자인가”(Victims or workers? ) 전문이다. 지난 문건이지만 향후 한국 성노동운동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올린다. 번역문에서 영문 약자 등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편집부에서 추가했음을 양해 구한다.    

▒ 성노동운동번역네트워크 바로가기 [부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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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빈곤 네트워크


단체 소개가 따로 나와 있지는 않고 블로그 운영만 하고 있어서 아직 실체(ㅋㅋ)를 더 파악해야 하지만...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모임을 올해 9월에 했었네요.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것이고 주도자가 있겠죠? 주도자를 찾아야지.
9월의 모임 홍보글 번역해 봤어요.

가난해도 안심 여성으로 안심

여자는 옛날부터 가난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욱 가난해졌다.
싸고 불안정한 비정규직은, 지금 일하는 여성의 다수를 차지한다.
연수 200만엔 이하는 여성의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빈곤은 좀처럼 이야기 되지 않는다. 그것은 왜?
여자는 남자가 먹여 살려 주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안심?
여성이라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가난해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지금 여성들의 빈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빈곤의 진짜 해결책에, 목소리를 높이자!

赤石千衣子(しんぐるまざあず・ふぉーらむ)、鈴木純子(元福祉事務所相談員)
伊藤みどり(働く女性の全国センター)、栗田隆子(フリーターズフリー)
藤井豊味(女性ユニオン東京)、山口静子(パート・未組織労働者)
いちむらみさこ(ノラ)、池田幸代(新宿野宿者女性の会「心を開く輪」)
柏原登希子(ふぇみん)、丸山理絵(反貧困ネットワーク)他…

싱글마더포럼의 아카이시 치에코씨,
전 복지사무소상담원 스즈키 쥰코씨,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의 이토 미도리씨,
freeter's free의 쿠리다 료코씨,
파트타임 노동자인 야마구치 시즈코씨,
노라의 이치무라 미사코씨,
신쥬쿠노숙자여성의 모임 '마음을 여는 바퀴'의 이케다씨,
그 외 여성 유니온 도쿄, 페민, 반빈곤 네트워크의 활동가들

추측하기로는 반빈곤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여성들이 여성의 기치(!) 아래에 또 만든 네트워크가 아닌가 싶어요.
이 중에 관심 가는 인물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길.

일하는 여성들 중, 파트타임과 파견 등,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과반수인 지금, 빈곤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이 새롭게 발족, 처우개선을 목표로 하여 활동을 해 갈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라고 이름 붙인 이 조직은, NPO와 노동조합 등이 만든 것으로, 도쿄에서 열린 발족집회에는, 일하는 여성과 지원자 등이 약 80명 참가하였습니다. 이 중, 하루 고용 파견(핸드폰으로 연락하여 일하는 것. 아무런 보증이 없음)을 경험한 후, 현재는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는 여성은 「하루 고용 파견으로는 낮은 임금으로 내일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가난해졌다. 아무리 분발해도 가난으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고 호소했습니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일하는 여성들 중, 파트타임과 파견 등 비정규노동의 비율은 해마다 계속 증가하여, 53% 남짓 올라가 있는 한편, 모자가정의 연간 노동수입은 평균 약 170만엔에 그칩니다. 집회의 참가자로부터는「연수입이 낮은 싱글마더에게 국가의 지원이 불충분하다」「여성의 노동시간은 길어져 왔는데, 남성과의 임금격차가 크다」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토 미도리 씨는「물가 상승 등을 배경으로 여성으로부터의 빈곤 상담은, 최근 몇 년, 심각함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집회와 상담활동을 통해 여성의 처우 개선을 호소해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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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산다
자립해서 산다
차별도 폭력도, 싫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 된다

'여자'가 그것을 구하는 게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으로서, 누구보다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을 힘의 바탕으로 해서 살아 가기 위해, 우리들은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를 창립했습니다.

 

목적
1) 우리들은 여성이 건강하게 일을 지속하기 위해 활동합니다.
2) 우리들은 혼자라도 풍요롭게 생활 할 수 있는 임금을 목표합니다.
3) 우리들은 여성이 대한 차별과 폭력의 근절을 목표합니다.
4) 우리들은 여성 한 명 한 명이 존중되고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목표합니다.


住所  151-0053 東京都渋谷区代々木1-19-7横山ビル
電話  03-5304-7383
Fax   03-5304-7379
e-mail   office@acw2.org




이 곳도 누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봐서는 알 수 없음.
다만 사무소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니 상근하는 활동가가 있지 않나 싶음.

여성 비정규직 문제(일본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보다는 파트 타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듯)와
노동 차별에서 오는 여성 빈곤 문제 등을 이슈로 하고 있고
사회 운동을 한다는 정체성이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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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5월의 어느 날
기륭 조합원들은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의 빈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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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경찰서 내 똥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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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제작일지를 날려서 의지를 상실한 채로, 의욕도 없이 다시 제작일지를 쓴다. 아우 XX

일본 추가 촬영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 다들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이지 작업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촬영할 때가 몇 배는 좋다. 그리고 이번 추가 촬영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별 변동이 없는 한 마지막 영상촬영이 될 것이고 추가촬영이 그러하듯 거의 추억을 되짚는(?) 여행(!)이기 때문이렷다!

조그만 선물도 준비하고 안부 인사차 전화도 하고 일정 조율을 했다. 일본어 번역 서포터즈 상히가 도와줘서 별 무리없이 스케줄을 짜고 마침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일본 현지 스텝 혜진이 이번에도 우릴 도와주겠다고 했다. 제작위원 중 한 분인 사이토 아야코 교수님이 며칠 간 지낼 숙소를 마련해 주셨다. 마침 다른 곳에 가 있던 영란이도 일본에 올 일이 있다고 하니 거의 완벽한 일정이 아닌가!

1년 전에 4명이서 8인분 짐을 들고 김 세박스를 질질 끌며 신주쿠 역사 바닥을 휘저었던 때와 달리 공항까지 아야코상이 마중을 나와주셨다. 편히 게스트 하우스까지 왔는데, 이런. 게스트 하우스가 너무나 좋다. '이런 호사스러울 때가...'

첫째 날, 조순자 선생님이 계시는 시즈오카로 향했다. 아, 이날은 다시금 '신주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신주쿠는 참으로 사람도 많고 출구도 많고 넓다. (경은의 '제작스케치' 참조) 어쨌든 불안 불안 3분 남겨두고 시즈오카 가는 버스를 탔다. 아, 근데 비까지 내린다. 멈출 것 같지도 않다. 시즈오카에 도착할 때까지도 비가 계속 내렸다. 약속장소에 선생님이 차로 마중 나와 주셨다. 나는 이번이 시즈오카에 처음 가는 것이라서 그런지 일본분들이 겨울연가 촬영지 춘천 가는 것 마냥 영화(!)에 나오는 시즈오카에 가는 기분으로 선생님을 만났다. 한국에서 뵙고 두번 째 뵙는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촬영할 때에 맞춰 비가 멈췄다. 촬영은 금방 끝나고 버스예매 시간도 금방 다가왔다. 반나절이 짧다. 영화에 나오는 후지산을 짧게 감상하고 선생님 집을 나섰다. 좋다라는 말이 이처럼 식상할 수도 없겠지만 두 번 뵙는 것에도 불구하고 조순자 선생님은 참 좋다.

둘째 날, 요요기 공원에 이치무라상을 만나러 갔다. 이날 영란이도 만났다. 텐트무라 가는 길 벤치에 앉아 있던 여인(아저씨일지도 모르는) 사람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다. 텐트무라에 살고 있는 켄보상도 에비사와상도 그 텐트 그대로이다. 그 앞에 새로 입주한 하얀 텐트를 제외하면 요요기공원은 1년 전 그대로 꼭 같은 모습이다. 이치무라상이 우리를 보고 '또 왔냐'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켄보상은 1년 전에 들려줬던 이미자의 부산항에와 일본 엔카를 다시 나에게 들려준다. 이치무라상에게 작은 선물을 줬는데 이치무라상도 우리에게 더 많은 선물을 건냈다. 떡을 구워먹고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이치무라상이 다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자리를 나서야 했다. 아쉽다. 그래도 뭐. 이치무라상의 책처럼 (책 '저 여기에 있어요' 참조)역시 1년 후에도 요요기공원은 그대로일 테니까. 

셋째 날,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에 갔다. 그간 아팠던 단테가 많이 건강해졌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반갑다. 무라야마상이 우리를 근처 맛있는 중국집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사쿠라이상의 매직쇼도 봤다. 난 친히 볼펜 매직쇼 하나를 전수받는 영광을 누렸다. 촬영은 금방 끝나고 마리아 어머니와 남편, 단테와 모니카, 그리고 혜진, 영란, 경은, 경순 다 같이 온천에 갔다. 영화 주인공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넷째 날, 그간 파나소닉을 상대로 복직 투쟁을 해왔던 사토상이 정규직으로 복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일본에 가기 전에 먼저 들었다. 이런 반가운 소식이 또 있다니! 사토상의 얼굴도 목소리도 1년 전과는 다르다. 마침 이날 사토상의 복직을 축하하는 축하 모임이 도쿄에 있어서 후쿠시마에서 왔다. 아는 사람이 생기는 건 나에겐 새삼스럽게도 참 신기한 일 중에 하나인데 축하 모임 자리에 아는 일본인들이 있어서 또 새삼 깜짝 놀랐다. '아, 국제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생기는 구나'싶었다. 어쨌든 이날은 축하 모임 자체보다 2차 자리가 인상 깊었는데 다시금 사토상의 얼굴도 목소리도, 그리고 그의 웃음도 참 멋져 보였다. 영화에서 '힘있는 여자가 되어야 해'라고 말하는 사토상이 떠올라서 지금에 와서 그렇게 느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레드마리아' 참조).

아, 그리고 다섯, 여섯 째날. 난 사실 촬영한 4일보다 휴가날이었던 이틀간이 더 힘들었다. 노는 게 더 힘들 줄이야! 어쨌든 난생 처음 유카타 입어 보고 난생 처음 함박눈 맞으며 노천온천탕에서 달밤 체조를 해보고, 난생 처음 (돈도 별로 없으면서) 하루 종일 쇼핑한답시고 일본 시내를 걸어다녀 본 것은 재밌었다. 일주일 참 짧더라.

끝! 


p.s 늘 그렇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 자기 복인가 보다. 난 복이 많은가? 그런데 옥에 티마냥 이번에 나쁜 사람을 지하철에서 만났다. 마치 원더우먼마냥 우린 그 나쁜 사람들을(착한 말투) 혼내줬다. 경은이 앞장섰다. ㅋㅋ 그것만 빼면 참으로 완벽한 일본추가촬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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