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국전 미리 이야기 한 것처럼 ACW2의 총회는 바로 레드마리아의 첫촬영이 있었던 곳이다.
미리 ACW2의 대표인 이토 미도리를 만나기 위해 전 날 출발한 나는 공항에서 그녀와 조우를 했다.
예전보다 헬쓱해지고 인상도 좀 부드러워진 듯한 미도리에게 '귀여줘졌다'고 말하니 웃는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반가운 포옹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의 최근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미도리의 말에 의하면 쓰나미와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 일본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무엇이었든지 간에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건
참으로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말이었다.
그것이 돈을 버는 것이든 집을 사는 것이든 교육을 향한 열정이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욕망의 순위가 바뀌었다는 건 혁명이거나 재앙을 격은 후의 선택지이다.
쓰나미와 원전사고의 여파는 바로 일본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심어 준 거였다.
그래서 미도리상은 현재 일본의 상황에서 노동의 의미를 다시금 재고해 보는 이 영화가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했고 구지 일년에 한번 있는 전국총회의 메인프로그램으로
레드마리아의 상영을 결정했던 것이다.
보통 노동조합이나 단체의 특별행사 정도로 기획되는 영화상영을 감안하면
정말 획기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마냥 즐겁게만 받아들일 일만은 아니었다.
4년전 이치무라가 섰던 그자리에서 내가 대신 받아쳐야 할 많은 질문들을 상상하며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조금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회가 있던 날 아침 요요기공원에 사는 이치무라의 초대로 텐트에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내가 상영후 관객과의 대화가 긴장된다고 했더니 사실 자기도 그렇단다.
영화에서는 그래도 걸러서 편집을 했지만 그날 혼자서 많은 사람들의 공격적인 질문과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치무라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치무라는 3.11이후 꾸준히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과 연대와 지원사업에
참여를 했고 현재는 폐허가된 동북부의 마을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을 그림에 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성들과 아이들은 여전히 뒷전이고
남성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사업을 중심으로 재건사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치무라의 말에 의하면 가부장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든 시스템과 건물 등이 무너졌는데
다시 복구하는 방식도 여전히 가부장중심의 문화를 세우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현장을 담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나 기특하고 예민한 투사인가. 예민함이란 바로 이런곳에 빛을 발해야 제격인데
우린 그 예민함을 얼마나 엉뚱한 곳에서 쓰고 있는지 갑자기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우자지간 그렇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우린 총회장소로 이동을 했다.
총회장소는 요요기공원의 바로 옆에 위치한 도쿄 올림픽청소년센터였다.
총회장소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방마리아 어머님과 모니카가 눈에 뛴다.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사는 사토상까지 참석을 해 서로 얼굴도 모르던 그녀들이
처음으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시즈오카에 사는 조순자선생님만 빼고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영화가 끝난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이번 상영은 원래 총회에 참여하는 ACW2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상영이었지만
특별히 이날은 영화만을 보러온 사람들도 혀용이 되어 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왔다.
영화가 끝난후 우선 주인공 세명을 단상에 불러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졌는데
모두들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예정시간을 초과해 버렸다.
모니카는 이주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늘 희망을 잃으면 안되다고
우리 모두 함께 싸워야 한다고 너무나 당당하게 마치 연설을 하듯이
청중을 끌어들여서 그 힘찬 발언에 관객들 모두를 쥐었다 폈다 했는데
보통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광경이었다.
사토상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집과 일자리를 잃은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그들이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장시간 이야기했다.
그녀는 더더욱 단단한 운동가로 변신해 있었다.
싸움이 끝난후 행동이 달라지는 많은 사람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녀의 현재가 너무 아름다워보였다.
이치무라는 조금 긴장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이치무라답게 천천히 할말을 다하는 그녀의 방식대로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했고
마무리는 역시 노숙여성들이 함게 만든 생리대를 홍보하며 끝냈다.ㅎ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여러질문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건 영화속에 나오는 많은 여성들이 각자의 현실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싸우고 있고 또 우리의 현실도 무언가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 같다.
그 이야기에 대한 대답을 내가 하는 것 보다는 영화속 주인공들이 하는게 더 좋을 거 같아서
마이크를 넘겼는데 모두들 참으로 진지하게 다양한 대답을 했던거 같다.
문득 이질문을 들으면서 우리도 각자 답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원래 한시간이 넘게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모자랐다.
결국 아쉬움을 남기며 상영회가 끝났는데 한 관객이 함께 사진찍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었다.
큐슈에서 이 영화를 보기위해 왔다고 하는데 한번 놀랐고
영화를 보고 구체적인 감상평을 이야기 하는데 또 한번 놀랐다.
그녀와 함께 온 친구가 옆에서 자막과 그림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두눈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도 때로는 영화가 어렵다거나 뭔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분은 그런 내색은 커녕 이영화를 많은 장애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까지 해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는 야그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잡혀있는 분반토론 중 하나인 감독과의 대화를 하는 시간까지
참여를 해서 장애인들의 노동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는 돌아갔다.
다시한번 느끼는 이야기지만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혹은 잃어버린 기능들이 참 많다는걸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시기, 위기의 시대라고 느끼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장애인들이 느끼는 것 같은 결핍의 새로운 감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익숙해 하는 모든것을 의심하고 바꾸는 감각 말이다.
1박2일의 총회가 끝난후 나는 영화를 찍는데 도움을 준 분들께 인사를 하기위해
4박5일간의 바쁜 여행을 시작했다.
공항에 마중나온 이토 미도리상과 가토상. 두사람 모두 이번 일본 여행에 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사람에게서 늘 배우는 재미를 다시한번 알게해준 분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전히 그대로 변함없는 이치무라의 텐트. 이날도 꽤나 추었는데 여전히 잘 버티고 있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녀는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는 노숙인이었는데 노숙여성들과 함께 만드는 면생리대와 도쿄올림픽을 개최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고 앞서 이야기한 3.11 이후의 동북부 지역의 여성들의 삶을 그림에 담는 프로젝트를 하고있다.특히나 이 프로젝트는 왔다갔다 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이 표현에 의하면 여기저기 조금씩 돈을 구걸해서 한다고하는데 남의 일같지가 않아 마음이 짠했다. 아무도 조명하지 않는 곳을 찾아 예술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가를 알기에.
방마리아 어머니와 모니카.
이치무라 모니카 사토
밥을 먹으면서도 모니카와 사토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생전 몰랐던 사람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서로 적극적이어서 보기 좋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모니카는 후쿠시마의 생생한 이야기를 사토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알았을듯 싶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통역해 주었던 왼쪽의 히로유키와 오른쪽의 가토상. 동시통역사가 둘이나 되는 황송한 경험을 했다. 정말 감사 감사.^^
올림픽청소년센터에서 1박을 했는데 아침에 자신이 사용했던 시트를 깔끔히 정리했다. 반납을 할때 센터에서 말한 규격대로 접어서 반납을 해야한다고해서 정리하는데만 꽤나 많은 시간을 써야했다.ㅎ
다음날 오전에 있었던 분반토론.감독과 대화를 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토상과 큐슈에서 오셨던 시각장애인 후지와라상. 그녀는 토론중에 레드마리아에서 많은 여성들의 노동을 이야기했는데 장애인들이 살아내기 위한 노력도 노동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보통 장애인을 돌보는 분들의 돌봄노동만을 이야기하는데 장애인들은 살아가기위해 해야 하는 모든것이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게 참 안타까웠다는 그녀의 말에 백프로 동의를 하면서 그렇게 레드마리아를 읽어낼 수 있는 시선에 새삼 놀랐다.여성들의 시선이 힘을 발하는 대목이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총회가 끝나고 통역을 해준 가토상이 그녀가 통역비로 받은 돈의 일부를 나를 따라온 친구 히로유키에게 주었다. 그냥 놀러온거 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중간중간 통역을 대신해주어 덕분에 자기가 편했다고 그러니 당연히 나누어 써야하지 않겠냐며 주었다. 나는 정말 눈물이 나올지경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고 또란 존경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여지껏 이렇게 쿨하고 정확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햇다.특히나 모든것에 쿨하다가도 늘 돈문제에서는 감춰지지 않는 쫀쫀함을 많이 보았기에.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지만 사실 이게 진정한 투게더 정신이 아닐까 싶다.존경합니다 가토상.!!!
총회가 끝난후 바로 시즈오카에 사는 조순자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생님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반가웠던건 마짱과 히로짱을 만난 것. 마짱이 워낙 욘사마를 비롯한 한류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에는 비스트 사진이 박혀있는 컵을 선물했는데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에 내가 다 감격했다. 근데 한가지 안타까운 소식은 촬영이 끝난 다음해 마짱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지금은 혼자서 거동하기 힘들만큼 몸이 안좋다고 한다. 그녀가 오래도록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래는 마짱을 만난후 메부키의 친구들까지 다 만나 볼 생각이었으나 멤버들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은 대신 선생님이 선물을 전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마치 친정집을 방문한 것마냥 간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선생님집에서 늦잠을 자고 해주시는 밥을 먹고 선생님이 챙겨주시는 선물까지 잔뜩들고와서 결국은 배낭이 다시 무거워졌다지.ㅎ
카나가와시티유니온에서 다시 방마리아 어머님과 위원장인 무라야마상을 만났다. 방마리아 어머님은 남편이 작년에 돌아가셨고 무라야마상은 4년전과 똑같이 피로에 쌓여있었다. 한때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던 이곳은 이제 모니카와 같은 중남미노동자들이 대부분인데 일본경제가 안좋아지면서 현재는 이들도 많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어서 남은 일꾼들은 할일이 많지만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밝다.
원래 모니카의 집에서 일박을 하기로 했는데 모니카가 아침여섯시에 출근을 나가야 해서 마리아어머님이 일찍같이나오면 피곤하다며 당신집으로 가자고 했다. 결국 모니카와 나는 어머님과 온천엘 같이가서 깨벗고 목욕하면서 수다를 떨다가 나왔다.역시 여자들의 수다는 목욕탕이 최고다.^^
방마리아 어머님댁에서 발견한 어머님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책. 마리아 어머니는 65년도에 일본인 남편을 제주도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일본으로 넘어와 80년대말부터 한국인노동자들을 위해 일하시기 시작했다.말한마디 못하는 불법이주노동자였던 한국인들이 산재를 당하거나 문제가 생길때 어머님이 이들을 돕는 일을 하셨는데 그당시 산재를 당한 사람들이 많아 한해에 5명씩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함께 의기투합해서 만들어진게 바로 카나가와시티유니온이라고 한다. 이책은 94년도에 일본 르뽀작가가 어머님의 활동을 기록해서 책으로 출판것이라고 한다. 왜 이런책이 한국에는 번역되어 나오지 않는지.
어머님이 사시는 아파트도 3.11 이후 지진에 대비한 철근공사가 시작되어 작년에 완공이 됐다고 한다. 현재도 일본의 지진계를 보면 거의 매일 곳곳에서 크고작은 지진이 있다고 한다.이모습을 보니 그들은 거의 지뢰를 밟고 사는거처럼 보였다. 한국이라면 벌서 난리법석이 났을텐데 우자지간 이런면에서 보면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일본에 도착해서 부터 계속 나와 함게하며 통역을 도와준 히로유키. 어쩌다보니 녀석을 찍은 사진이 없어서 쉴대 한장 찍어놓았다.현재 일본 도쿄에 살고 있고 미혼이고 한국어 통역과 번역에 아주 유능한 친구이니 통역이 필요한 사람들 연락주시압.^^
내가 떠나기 전날 레드마리아 배급을 위해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맛있는 오꼬노미야끼로 저녁까지 사주셨다. 내가 오히려 대접해야 한다고 했더니 가토상이 그런다. 내가 더 언니잖아.ㅎㅎ 가끔 같이 있다보면 이분이 일본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한국말도 문화도 너무 잘아신다. 일본에 있을때는 언니라고 불러들이지 못했는데 정말 이런 언니는 한명 있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ㅎ
일본 촬영이 있거나 이렇게 방문할 일이 있을때마다 가끔 잠도 재워주고 맛난것도 사주고 여러가지 조언도 아끼지 않는 사이토 아야코상. 이날 아야코가 대장금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나 맛깔나게 하던지 한국 돌아가면 나도 꼭 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오나라 오나라....ㅋㅋ
우리 사회에는 수없이 많은 노동이 있다.하지만 임금을 받고 하는 노동과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이 분리되고 감정을 파는 노동과 팔지 않아도 되는 노동이 있고 인격을 유지시키며 할 수 있는 노동과 그렇지 못한 노동 등 수많은 노동이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혼재되기도 해서 매우 복합적으로 복잡한 구조다. 그런데 그중 자신의 노동으로 자부심을 느낄만큼 스스로 가치있게 생각하는 노동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이 그 가치를 임금에 둔다든지 자신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다소 착각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노동의 의미를 확대포장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구지 파업까지 가는 경우가 아니어도 노동문제를 상담하거나 하고싶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바로 자부심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많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요인들 때문이다. 단지 돈을 벌기위해 감수하거나 감수해야만 하는 문제들. 인간적으로는 용납이 안되지만 생존을 위해 바둥거리며 버티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실상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더더욱 감정의 비정상적인 과잉노동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들이다.게다가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도 내가 좋아서 시작했다기 보다는 그것밖에 할 수가 없어서 선택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편의점에서 일하는게 꿈인 사람이 있을까. 청소노동자로 사는게 평생 꿈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공장에서 일하는게 서빙을 하는게 보험설계사를 하는게 다들 최고의 꿈이어서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 그런데 그것이 꿈이 되면 안되는 이유는 또 뭘까. 그것이 꿈이어서 부끄럽지 않은 자부심으로 살아 갈 수도 있는데 구지 부끄럽고 자부심은 콩알만큼도 느끼기 힘들고 누구한테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노동이 된 이유는 뭘까.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개인적이 선택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결국 자부심을 느낄 만큼의 환경과 대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꿈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해야만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직종에 종사해서 일을 하고 있고 그것마저도 짤릴까봐 걱정까지 하는 세상이다. 근데 왜 유독 그 모든 것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직업과 노동임에도 성노동만이 이렇게 전근대적인 지탄속에 노동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일까. 성노동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것이 꿈이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자부심에 찬 일 이어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없이 해야만 하는 다른 노동과는 달리 그래도 원하는 임금이 다른 것보다는 크기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지금 이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자기 자본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름 배워서 수많은 경쟁을 뚫고 대기업이나 원하는 전문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빼면 다들 살기위해 일자리를 찾을 뿐이고 자존심이고 뭐고 챙길 겨를도 없이 그저 돈을 벌 수 있다면 해야만이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기에 묵묵히 조용히 이사회에 편입된 많은 이들이 임금을 위한 노동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은 더더욱 제약된 윤리와 관습과 가부장적 사고에 눌려 그나마의 직업경쟁력에서 밀려나 몸을 상품화해야만 살아야 하는 직종이 너무 많다.모델로 분류되는 다양한 직종부터 서비스업의 다양한 직종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성적 구분이 상품화 되어야만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것들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성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취약한 곳이 그곳이다. 그래도 그래야 이사회에서 먹히니까 그렇게 선택하고 살거나 아니거나.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노동은 대부분 성노동과 유사한 노동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오바일까.마치 삽입외에는 키스나 애무는 섹스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삽입섹스만 성노동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체 이 문제가 왜 이토록 이사회에서 진도가 안나가는지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니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확장이 안된다. 서로 노동이라고 우기는 것들이 죄다 자본가가 원하고 가부장 사회의 기틀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우기는 노동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레드마리아를 만들때 성노동만을 이야기 하고자 한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진채 성노동의 인정과 불인정에 대한 잣대로만 영화를 대하는 현상을 보면서 새삼 우리사회의 노동을 보는 인식의 단면을 읽게 된다.
언젠가 성노동을 하는 한 친구가 그런말을 했다. 레드마리아로 인해 성노동자들만 덕을 본거 같다고.레드마리아 덕분에 여기저기 성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기사도 나오고 했는데 정작 레드마리아는 성노동으로 인해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아 이래저래 피해를 보는 것 같다고. 무슨소리야.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든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들의 것이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것이야. 그리고 노동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 하는 일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성노동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라고 했다.
우자지간 간만에 레드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길어졌다. 길어진 김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렇게까지 노동문제가 구조적으로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해결점 없이 폭주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의 이슈외에 우리가 왜 노동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여전히 던지지 않는 사회에서 진보를 이야기하는게 답답하다. 게다가 고작 성노동을 받아들이는 일이 기본적인 그들의 노동권이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목숨을 걸만큼 반대할만한 큰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잼다큐 강정을 만든다고 한여름을 보내고 다시 배급을 하면서 겨울이 됐다.그리고 벌써 새해도 중순이다. 여름에 멈춰진 편집본을 사이사이 손보면서 작년 9월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106분짜리 편집본을 선 보인후 다시 최종편집을 하여 12월 서독제에서 98분짜리 완성본으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일년을 필리핀에서 보내며 기획하고 2008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이래 5년만의 결실이다. 물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쉽게 한줄로 거론하기 쉽지 않을만큼 다사다난했다. 그 다사다난함은 고스란히 제작비의 압박이 됐고 레드마리아는 독립영화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됐다. 하지만 그뿐이다. 작업이 길어졌던 그 수많은 일들은 쏙 빠지고 영화만 귀찮은 늦둥이가 되어버린 느낌. 그 느낌 때문에 작년은 좀 힘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안그런 영화가 어딨겠나. 이 척박한 독립영화의 거친 토양을 자양분 삼아 영화를 만든다는 모든 사람들의 비슷한 과정일 뿐. 그래도 다행인건 이들에겐 오기와 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살아있다는 것이 다시 그길로 또 걸어가게 하는 힘인 것을. 나도 그렇게 아직 심장이 식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최종본을 끝낼 수 있었겠지. 그래서 흐믓하다. 2년전 여성영화제를 앞두고 수술을 받을때는 소원이 그래서 레드마리아를 완성하는거였는데 막상 완성을 하고보니 10편은 더 만들어야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하하하
우자지간 그 끝을 잔소리 한마디 없이 기다려준 영재와 지금은 다들 곁에 없지만 함께 해준 스텝 경은,아람,영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늘 힘들때마다 이들이 있어 한 산 한 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며 사운드며 색보정이며 몇 번의 수정을 마다않고 작업해준 지은이,용수,재원에게도 너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친구는 애니메이션을 해준 성애다. 물론 편집이 길어지는데 공을 세운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기다린만큼의 보람이 있어 아주 흐믓했다. 이렇게 작업을 같이 하고 진행을 하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제작비. 일본 촬영을 고민하다 꾸리게 된 제작위원회의 후원은 새롭게 시도해본 소중한 경험이었다.
보통 후원금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크게 부탁을 하고 받았기 때문이다. 50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기꺼이 내주신 제작위원들께 너무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담스럽다면서도 직접 제작위원장을 맡아 여기저기 이름을 팔아주신 김은실선생님, 친구라는 죄로 월급쟁이 친구들이 100만원 200만원 투척해준 감동의 순간, 제작위원으로 친구로 수술 후에는 죽까지 끓여서 매달 화학치료가 끝날때마다 먹을것을 챙겨준 박혜경선생님, 그리고 병원갈때마다 덜덜거리는 프라이드를 씽씽몰며 나를 데리고 다녔던 미례, 집이 없어 미례집에서 신세질때 고모가 살던 방을 저렴하게 소개해준 세영이, 그리고 워낭소리의 덕을 왕창 은혜입게 해준 영재의 특별한 지워금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사실 레드마리아 제작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어떻게 그 기간 가장 힘든일과 가장 행복한 일들이 완벽하게 겹칠 수 있었는지. 그 행운이 함께 했기에 필리핀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을 다시 촬영하면서 레드마리아라는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거 같다. 만일 예전처럼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해야 했다면 아마 지금도 영화는 완성되기 힘들었을것이다. 그 많은 번역을 거쳐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으며 그 많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나. 족히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치며 이렇게 레드마리아가 왔다고 생각하니 정말 긴 길을 관통했구나 싶다.
아마 예전 같으면 제작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작업으로 올인했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그렇게 일년쉬자고 작정했지만 그 심심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거 같아 안해보던 일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배급이라도 재밌게 해보자고 맘먹고 있다. 사실 지난달만해도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영화거리를 내지를뻔 했는데 번번히 다음날 일어날때쯤 체력이 딸리는걸 확인하고는 단칼에 단념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여름쯤에 프랑스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갔다 알프스를 등반해보는게 작다면 작은 꿈인데 부디 실현이 되기를. 그곳에 가면 친구가 50에 진입한 기념파티를 해준다고해서 정말 땡빚을 내서라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올해는 연애운도 있단다. 아싸...^^ 혹시 프랑스에서 붕쥬르 하면서 부딪힐 어떤 놈 혹은 년? ㅎㅎ 우자지간 신나게 일년을 또 살아보지 뭐.
봐야 안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절감하며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결국 오는길에 강정마을 영화만들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김포에 도착할 때 쯤 내가 총대를 멜테니 니가 총연출을 맡고 옴니버스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동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말하기전에 녀석도 나만큼 머리속에 많은 생각이 오갔으리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참여할 감독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대충 머리속에 있는 감독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그날 저녁에 우연히 영상자료원에서 만난 조영각에도 이야기를 했다. 불과 하루가 지났는데 벌써 소문이 났는지 많은 친구들이 흔쾌히 함께 하겠다고 나서 주니 갑자기 일이 급진전이다. 그렇게 일을 벌여 놨는데 머리한쪽에서는 계속 레드마리아를 한번 더 고칠 구상이 막 돌아가기 시작한다.
한번만 더 해보자고 한게 벌써 세번은 뒤집었는데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영재에게 가편본을 넘겼는데 가슴에 뭔가 언친듯 찝찝한게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하루를 내리 잔후 사무실에 나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 붙이고 나니 결국 쓸 그림들은 쓰게 되는구나 싶다. 구성을 바꿀 때마다 좋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다른 구성으로 넘어가면서 버려지고는 했는데 이제사 비로서 버려졌던 것들이 다 자기자리를 찾아 모인 형국이 됐다. 물론 내보기에 그렇다는 이야기.
수정된 편집본에 따라 추가되는 이야기를 다시 번역을 맡겨야 하는데 응주에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지만 결국 바쁘다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미리미리 말해주면 좋을 것을...' '감독이란게 다 죽일것들이야 미안해..근데 부탁해 응주야.' 혼자서 바둥거리며 하자니 최근에 내가 괴롭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거 같다.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번역이며 모니터며 심지어 한글감수까지 게다가 이번에는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일본어 감수까지 부탁을 하고 또 수정본을 다시한번 봐달라는 부탁도 했다.
부탁을 하는 일이라는게 늘 성의있는 태도를 요하지만 지눈에 불이 나면 성의 있게 부탁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성의 있으려면 그리고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연락을 안하는게 맞으니까. 사실 그래서 두달전 강정마을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던 양윤모선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나 바쁘고 그렇게 거기까지 신경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년이 넘게 성의를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를 위해 싸우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그렇게 성의있게 참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 성의있게 산다는게 무엇일까. 과연 가능은 한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 강정마을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마음먹은건 성의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성의있게 살기 힘든 사회에 사는 마당에 그저 성의없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즐거운 일을 나름'성의있게' 벌일 수 있는지를 한번 시도해 보자는 출발이다. 레드마리아도 역시 성의없는 사회에 던지는 작은 외침일 뿐이고.
3차 가편을 끝내고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슬슬 몸도 피곤하고 모니터 내용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이정도면 하고싶은 이야기를 대충 알맞게 쏟아냈다 싶었다. 몇군데 거친부분을 다듬고 애니메이션이 완성되면 후반부의 시간과 리듬 조절만 해야지 했었다. 근데 끈적끈적하게 원인도 알 수 없게 그저 뭉실뭉실 끝나지 않은 느낌이 드는건 뭔지. 그렇게 한달을 대충 몸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머리에 그분이 오신 필을 받고 화면을 다시 대면하기 시작했는데 머리가 아득해진다.
그분이 오긴 왔는데 문제는 다 뒤집으라는 계시인 것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닌것이다. 큼직하게 몇구다리로 화면을 이리저리 옮겨보자니 공사도 보통 공사가 아니게 생겼다. 3월말에 끝내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이미 4월 중순이 넘어서 다시 한번 편집을 하겠다하니 영재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누나 제가 보기에는 3차가 최선이라 생각되고요 저도 완성본이 있어야 어떻게 할지 구상도 좀 하는데...어쩌구저쩌구...%^$#*&^(*!!!!??#####! 녀석의 말이 귀에 안들어온다.
이래저래 한참 힘들텐데 내 모냥새가 걱정됐는지 진행비로 쓰라고 카드까지 건네준 녀석을 생각하면 좀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어차피 늦어진거 한번만 더 시간을 주렴...하는 마음으로 편집기를 노려보고 있다. 그래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붙어보자. 근데 초반부터 널려있는 클립들과 프리뷰를 보는 순간 기가 눌린다. 이런...워쩐디야. 그래 주인공도 많고 사건도 많긴 많구나. 하나를 손댈때마다 덩달아 달라지는 다음씬에 머리를 잡아뜯던 시간들이 새삼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제 정말 막판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지쳐갈 때쯤 다들 이제는 손을 놓고 싶어지는 그때처럼. 어쩌면 지금 나는 그 고비의 순간을 지치지 않고 잘 넘기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시작도 하기전에 미리 없었던 시간으로 조용히 손을 놓고 싶어 질까봐. 그래서 그러지말고 한번 더 그림과 신나게 놀아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설사 그렇게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지라도 이 순간을 놓치면 더 많은 아쉬움으로 가슴을 후려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때는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힘들다. 하긴 한달전 제주도에서 올라온 양윤모선배를 만나 어리광이나 한번 부려볼까 했다가 더 큰 보따리를 내미는 선배에게 어리광은 고사하고 강정마을 소식만 부지기로 머릿속에 쳐넣게 됐었다. 뭐야 나두 힘들거든. 근데 웬일이니.이제는 해군기지반대싸움으로 구속되어 단식까지 하고 있다는 소식마저 듣고 보니 이렇게 편집기를 붙들고 있는 마음이 더 무겁기만 하다. 다들 그렇게 살고있구나. 누구는 그렇게 자신을 던져 해군기지 반대싸움을 하고 누구는 영진위에 맞서 대책을 고심하고 누구는 오늘도 가족문제로 골머리를 썪이며 두통을 앓아가며 하루가 무사히 지나기를 바라고 누구는 다가올 피칭을 준비하며 자신의 새영화를 시작하기 위해 또 밤을 새며 골머리를 싸메고 있는...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편집기를 덮어야 할거 같다. 일단 내일 산에가서 맑은 공기 한번 마셔주고 머릿속에 차있는 잡다한 걱정들을 일단 내머리에서 접어두자. 그리고 정말 화끈하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오케이?
대충 봄 냄새가 나의 무딘코에까지 전해지는 걸 보면 겨울이 얼추 지나간 거 같다. 한때는 겨울이 그렇게도 좋았는데 그래서 겨울이 다 간거 같은 애매한 2월이 참 싫었는데 언제부턴가 봄이오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뭐 봄이 와도 여전히 나는 레드마리아와 함께 머리가 아프겠지만. 그래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진짜 쑤신다.
레드마리아를 찍으면서 여유있게 글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져 점점 더 글과는 거리가 느껴지는터라 조금씩 다시 회복해 보고자 노력중이다. 그동안 글이라는 건 기획서와 지원서 그리고 섭외하는 내용과 현장에서의 구상등이 전부고 모든 건 머리에서 돌아갔다.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글을 쓸 시간도 없어서 한동안은 머리로 글을 쓰는 습관까지 생겼다. 뭔가 쓰고 싶은 거리들이 생각나면 걸어가면서 차를 타면서 촬영장에 나가면서 머리로 글을썼다. 문장을 써나가면서 지우기도 하고 다시 쓰는 이과정이 끊임없이 반복이 됐는데 결국 그 머리로 썼던 글들을 컴퓨터에 앉아 옮겨야지 생각하고 나면 당근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그렇지. 안그래도 잘까먹는 내가 무슨 수로..우자지간 그런 과정을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글을 쓰는게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글을 쓰는 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편집을 할 때도 이거야 워낙 습관이기는 하지만 영상으로 구성을 하고 바로 편집을 하다보니 구성안이라는 것도 써보지를 못했다. 사람마다 습관이 있겠는데 나는 글로 구성을 하는게 익숙하지 않다. 그림 봐야 상상력이 잘 가동이 되는지라 편집구성안을 먼저 정리하고 편집을 하는게 잘 안된다. 그러다보니 가편을 할때 구성이 휙휙 변한다. 물론 생각이 변하면.
하지만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다.포기할 수 없는 생각.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 시작이 된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던 그리고 그 출발이 여성의 몸이라는 것. 그런데 이게 쉽게 그림으로 연결이 잘 안됐다. 가편 모니터를 하니 누구는 몸과 노동을 분리하라고도 하고 누구는 주인공중 서너명은 과감히 포기하라고 하고 누구는 영화자체를 포기하라는 말도 했지 아마. 그래 그래서 쉽게 끝날 거 같던 이 편집은 길어지고 그만큼 머리도 복잡해 진다.
나의 생각이 틀렸던 걸까. 그게 무리한 시도였던 걸까. 온갖 생각들이 자신을 후벼파기 시작한다. 그런데 누구는 거기다 한술 더떠 이런 걱정까지 해준다. 영화가 완성되면 어디서 틀어줄지 걱정이라고. 왜 그게 걱정이야? 아니 신작도 아닌데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서요...야 뭔소리야 신작이지. 여성영화제 옥랑상 프리미어 상영해야 돼서 완성도 안된걸 무리해서 딱 한번 상영한게 고작인데 그리고 이제 영화를 완성해 보려고 아둥바둥 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 그런 고민까지 떠안고 가야한단 말이야.
내심 가까운 독립영화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게 여간 속상하고 서운한게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날 하루종일 머리에서 뚜껑이 여러번 열렸다 닫혔다 했지만 그리고 영화제서 영화 안틀면 지들 손해지 내손핸가? 라고 큰소리 빵빵쳤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개인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완성되고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라는데 이런정도의 생각이야 가능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속상하다. 의욕도 상실될 위기.
무슨 놈의 팔자인지 이상하게 레드마리아를 만드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엄살 좀 부릴 여유가 없이 뭔가 끊임없이 대처를 하고 또 대처를 하고 대처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거 같다. 뭐 그래서 또 더 애착이 가는 작업인지도 모르겠고.이번주는 3차 가편본 모니터 중이다. 1차 2차는 공개적인 모니터를 했는데 이번에는 개별 모니터를 받고 있다.근데 하나씩 들어오는 의견이 나쁘지 않다. 물론 아직 끝은 아니다. 좀 있으면 도착할 애니메이션 작가와 또 즐거운 설전을 벌여야 하고 군데군데 영상을 정리할 것들도 많다. 역시 영화로 돌아가니 다시 의욕이 불끈불끈.
극영화를 만들어보지는 않았지만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의 차이에 대한 느낌들이 가끔 생각될때가 있는데 편집을 할때가 그중 하나인듯 하다. 예를 들어 극영화는 사전에 만들어진 대본이 영화전반을 많이 좌우한다면 다큐멘터리영화는 편집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대본을 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많이들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미리 짜여진 구성과 대본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억지로 현장 연출을 감행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원하는 그림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현장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찍는 일은 늘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최초의 기획안은 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지점은 이 영화를 시작했던 시발점 한마디로 왜 나는 이 영화를 시작했는지...그리고 왜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근데 문제는 편집을 하면서 찍혀진 수많은 그림을 보면서 그 고민을 하는 과정이 너무 고되다는 거. 그래서 누구 말대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프레임을 붙여가고 인물을 분석하고 상황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대본 한줄 한줄을 피말리 듯 써내려 가는 것처럼 쉽게 줄줄이 엮이지가 않는다는 거. 물론 줄줄이 잘 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됐구나 싶어 막상 모니터를 해보면 그 속에 담긴 건 혼자만의 생각과 욕심과 자만의 결정체일 뿐이라는 걸 아주 빠른속도로 느끼게 된다. 그게 아주 아프고 잔인하고 따겁고 쓰리다. 그런데 신기한건 그 단계를 거치면 아프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빠른속도로 마음을 비우게 된다. 음..이게 아니란 말이지.
지금 내가 그렇단 이야기다. 오늘도 그렇게 1차가편 모니터를 끝내고 다시 어떻게 2차를 시작할까 고민을 하던 중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에 잠도 안오고 그렇다고 이 시간에 누구 불러 놀 사람도 없고 쉽게 볼 수 있는 영화조차 땡기지도 않는다. 왜냐면 오늘 느낀 감정은 단지 모니터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이 영화를 시작할 때 했던 생각,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찍을때 부터 계속 시도하던 건데 숏컷이나 크래쉬 그리고 러브액츄얼리같은 극영화처럼 많은 주인공을 등장시켜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처럼 구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이번에도 좌절되는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도 처음엔 욕심을 내서 편집을 시도했지만 막판에 주인공들이 세명으로 축소됐고 나는 거기에 만족해야 했다.
그 쓰라림을 이번에는 정말 작정을 하고 제대로 시도하고 싶었다. 씨발..근데 그게 왜 이렇게 쉽지가 않냐고. 물론 준비된 배우가 있는것도 아니고 준비된 사건이 있는것도 아니고 준비된 자금과 시간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도 안통하는 세나라의 준비되지 않은 그 많은 주인공들로 그런 욕심을 냈다니 결국 내가 허황된년이었던가 싶어 돌아버리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지금 굉장히 울고 싶다. 현장박치기로 그런 장면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미친년 아니야. 근데 촬영이 끝난 지금까지 왜 그 미련을 못버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이해가 안간다는데도 무슨 미련이 남아 이렇게 심란하냐 이 말이거든.
그래서 화가나고 열받고 허탈하고 한심하고 기분졸라 작렬이다. 좋아..그렇다 말이지. 알았어 알았다고. 바꾸면 될거 아니야. 근데 바꿔야 되는거 알겠는데 그리고 그렇게 가기위해 모니터 한 거 맞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복잡한지 모르겠다. 다시 엎어서 편집을 할거고 결국에는 뭔가 종지부를 찍게 될 모양새가 언젠가는 나오겠지만 오늘 이 기분은 아마 오래 갈거 같다. 하고 싶은 방향대로 영화를 제대로 밀고나가지 못했던 그 한계에 대해서는. 오늘처럼 내가 미워보기는 처음인거 같다. 그래 그냥 속편하게 울자 맘껏.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아까 모니터를 끝내고 모두가 돌아간뒤 한방을 쓰는 수정이와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인물을 쭉 옴니버스처럼 해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 그거말이지 처음에 생각을 안해본건 아닌데 너무 다른 인물들이 쭉 연결되면 주제를 빗나가게 될 공산이 커서 포기했다고 그리고 한 인물을 길게 10분에서 15분을 끌고 가면 지루하지 않을까. 내가 말이지 오래전 봤던 영화중에 꼭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쩝 근데 영화제목이 생각이 안난다. 그렇게 연결되지 않는 인물들의 옴니버스같은 스토리가 욕심이 났지만 쇼킹패밀리를 만들때도 그렇게 의도했다가 결국 막판에 영화에 쓰지말아 달라던 몇몇의 주인공덕에 포기해야 했던 그 구성. 결국 쇼킹패밀리도 세명의 주인공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을 생각하며 그건아니야라고 했던...
글고보니 내가 삼이라는 숫자를 너무 좋아하는 결벽이 있긴하지만 이렇게 만들고 싶은 의도와 벗어나서 두 번씩이나 세명의 주인공으로 끝냈다면 삼은 좀 공포스럽기도 하다.아흐...우자지간 그래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내내 그게 얼마나 힘든일인가를 구구절절 말했지만 이제사 생각하니 그렇게 포기할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가지를 섞으면 되잖아. 왜 안되겠어. 뭐 아니면 나중에 또 뒤집지 뭐...라고 지금 막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내가 울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촌스럽게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 그래 안될게 뭐있어 한번 해보는거지. 그리고 또 절망은 해본 다음에 그때 가서 실컷 하자구. 웃긴다. 밤을 골딱새서 도달한 결론이 처음이라니. 우자지간 일단 밀어보자.^^
영화만들며 놀기<민들레>1999,<애국자게임>2001,<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003,<쇼킹패밀리>2006,<잼다큐 강정>2011,<레드마리아>2011,모든영화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음.
redsnowm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