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09. 2. 11. 16:45

날짜와 시간이 어찌가는지 알수가 없다. 아니 느끼지 못하고 가는 것일테지. 

6일쯤 글을 한번 써야지 했는데 일기에는 날짜만 써있고 오늘날짜를 확인해보니 11일이다.
5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것이다.
기억력의 감퇴인지 아님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건지..ㅎ

어제는 전통일이라고 하는 노동운동 단체의 사무국장인 토리씨를 만났다. 전통일은 중소기업이나 작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주로 가입을 하는 일반노조인데 현재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가입해 있다고 한다. 보통 일본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시간당 1000엔에서 1200엔정도를 받지만 그돈으로도 일본의 높은 물가를 따라잡기 힘든 판인데 일본에 산업연수생 명목으로 들어와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시간당 고작 300엔정도라고 한다.

10년전부터 불법이주노동자들을 대거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산업연수생 외국인노동자들을 늘리고 있는데 문제는 합법적으로 그들의 노동력과 인격이 헐값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50명이하의 중소기업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을 많이 데려오는데 사장이 직접 맘에 드는 여자들을 골라서 데려오곤 하는데 시작부터가 인신매매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그리고 작업장에서는 화장실가는 것까지 체크를 해서 1분을 초과하면 패널티를 매기는등 그들을 감시하고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 얼마나 악랄한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종종 듣던 사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경제대국 일본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인지라 자못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토리씨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처럼 자본가는 노동력만을 사는게 아니라 그들의 인격마저 지배한다는 말처럼 돈이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무서움이 새삼 떨쳐지지를 않았다. 그래서인지 좋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는 인물에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인간상에 대한 혐오감이 내내 머리를 짓눌러 지금까지도 개운치가 않다.

토리상을 만나후 우리는 오사카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치에코씨를 만나러 갔다. 우리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제안한 그녀에게 늘어가는 테잎의 일본어프리뷰를 부탁하기 위해서 였다. 치에코씨는 쇼킹패밀리의 일본 자주상영회를 맡아서 해주시기도 했는데 자신이 상영한 영화중 베스트에 속한다는 말을 하면서 레드마리아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물론 나도 기대감이 만만치 않다고 응수를 했지만 나중에 어찌감당하려고 입에서는 늘 자신감에 찬 말들이 툭툭 튀어나와 통제가 안되는지...쩝

우자지간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저녁준비를 위해 일찌감치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왔다. 갑자기 웬 저녁준비냐 하면 우리가 묵고있는 숙소를 제공해주신 오오즈선생님 부부에게 감사의 표시로 한국식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떤음식을 먹고싶냐고 사전에 여쭤봤더니 부침기와 떡볶기를 말씀하시기에 우리는 허겁지겁 그 재료들을 사기위해 치에코상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것이다.

다행히 시부야의 쇼핑센터의 식품코너에 떡볶기용 떡이 있어서 우리는 무사히 시간을 맞추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저녁 8시 칼같이 시간을 맞추어 오신 두분에 맞이하면서 우리의 요리사간도 칼같이 끝났다. 재료는 열심히 아람이가 씻고  갖은 재료를 알맞게 경은이 썰고 부침기는 내가 그리고 떡볶이는 경은이가 그리고 다시 늘어놓은 거실은 영란이 열심히 치우는 것으로 사전논의가 없었음에도 우리의 역할분담은 착착 어찌나 빠른속도로 진행이 되든지.

남편인 오오즈선생님이 99년부터 5년간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국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주셔서 본인도 일본에 오는 한국분들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싶어서 현재 비어있는 집을 내주시게 된거라고 했다. 일본에 1년간 연수를 온 한국인교사가 이집에 묵었었고 그 바톤을 이어받아 우리가 묻게 되었다. 선생님의 좋은 뜻을 이어받고 나중에 올 한국인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가 청소기나 목욕탕의 온수를 고치는데 일조를 하고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집이 언제 팔릴지 알 수 없어 그냥 이대로 쓰는게 좋겠다고하셔서 그만 제안을 접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인 차이와 경제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 결론적으로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가족이나 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적어도 한국은 그렇지 않지 않냐고 물으시는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국이라고 왜 다르지 않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문화적으로 다를뿐이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한국에 사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가게되는지. 

사실 우리는 얼마나 민폐에 예민한가.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동료든 시간과 공간과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에서 사실은 돈이 없어서 해결되지 않는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우리는 민폐에 대한 강한 알러지 반응이 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저사람은 요만큼 한것에 부르르 하고 저사람이 돈을 안내서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내는 것에 기분 나뻐하고 나는 힘든데 저사람은 편히 가는 것 같아 속이 안좋고 내 공간과 내 시간에 대한 침해에 가중되는 감정소모까지 우리는 얼마나 민폐를 끼치는 인간들에 대한 혐오감이 많은지...

현재 두명의 주인공을 열심히 따라잡고 있고 두명의 주인공을 또 열심히 찾고있다. 그들을 찾고 영화를 완성해가는 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며 하는 일이지만 민폐에 대한 너그러움이 가능한 사회를 꿈꾸면서 일단 ‘이끼마쇼!!’(갑시다) ㅎ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9. 1. 26. 16:43



윗 사진 - 카메라를 통해 무엇인가를 보는 일은 눈으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늘
              긴장이 되고 속도감이 느껴진다. 잘 찍어야겠다는 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잘
              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다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도 그들의 표정이
              어느새 내 마음을 사로잡곤 한다.

아래 사진 - 빈곤을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토론하기 위해 6개의 분과로 나누어 
                 토론이 진행이 됐다. 모두들 자신의 의견을 포스트잇에 적어 주제별로 모았는데
                 현재 곤란을 느끼는 것에대해 그들이 써내는 글귀를 보며 나라만 다를뿐
                 하나하나가 어찌나 와닿든지 역시 여성이 고민하는 지점은 비슷하구나 했다.
                 "모델이 없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 "대화장소의 부재"...


 

일본의 첫 촬영은 일하는 여성들의 전국네트워크 총회로 시작됐다. 올해로 3회째 맞이하는 이들의 총회는 좀 각별하다. 한국의 단위사업장 중심의 총회와는 달리 전국의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상담을 하거나 조직에 가입하게 된 경우라서 서로모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모인사람들의 대부분이 식당이나 기업 그리고 백화점, 보모,간호사,전업주부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파트타임(일본에서는 이를 파견직이라 한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고 그들모두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이 얼마나 하찮게 취급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서 이곳까지 오게됐다는게 나름 신선한 경헙이었다.

이날 총회의 구호는 “빈곤을 보이는 것으로, 천천히 관계를 풍요롭게”라는 것이었는데 총회의 과정을 지켜보다보니 너무도 와닿는 이야기였다. 최근 파견직문제가 일본에서 심각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사실 여성의 파견직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60년대 이후 계속 되는 문제였다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회나 국가가 관심조차 보이지 않다가 작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불황 이후 남성들이 대거 회사에서 해고되기 시작하자 파견직 문제가 사회문제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에 많은 파견직 여성들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파견직문제가 공론화 되고 있음에도 그것이 여성보다는 남성들의 일자리 문제로 가시화되고 있는 형편이니 여성스스로 이제는 다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일하는여성들의 전국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에 몸이 먼저 소름끼치도록 지지를 외치고 있었다는 것. 이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재밌는 대목이 기업내 노동조합이 있었어도 여성들이 겪는 파견직문제에 별다름 도움이 되지 않아 스스로 법정투쟁을 하면서 싸워온 이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 과정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사회적 편견과 멸시속에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일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에 바라는 점들을 이야기할 때 속을 드러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 대한 필요성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오직하면 그 먼지방에서 홀로 이 총회에 참여했을까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늘 여성들의 노동은 무임금이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이들의 노동은 늘 하잘 것없는 가벼운 것으로 취급되다보니 여성의 빈곤은 늘 여성들의 개별적인 문제인냥 도외시 되어온게 사실이다. 그러니 “빈곤을 보이는 것으로 그리고 관계를 천천히 풍요롭게” 라는 구호는 바로 지금 아시아여성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스스로의 말걸기에 대한 시작으로서 모두에게 유의미한 구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지위가 달라지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나혼자만의 성공으로 가능한 일이 아님을 적어도 이곳에 모인 여성들은 강하게 공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하나 이날 총회의 재미를 더해준 것중 하나는 요요기공원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는 이치무라씨의 발언이었는데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돈때문에 싸우고 권력과 폭력이 야기되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가는데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가.일을 적게해도 우리사회는 너무나 먹을 것이 남아돌고 입을 것은 천지다. 그것을 나누며 살 수 있다면 구지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하는가라는 이야기였는데 이주제를 가지고 많은 여성들이 흥미로운 토론을 하게되었다.

가난을 몰라서 그런거다 난 가난이 싫어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했다라면서 그녀의 발언에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부터 이제껏 열심히 일만했지만 결국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걸 보면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간다라는 말까지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고민할 수 있는 자리가 됐다. 만일 우리였다면 우리사회의 많은 여성들은 또 어떻게 이러한 물음에 답변을 할지 궁금해지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열심히 살았다고 열심히 일만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에도 만만치 않게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도 빈곤의 여기저기를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고민해본다면 결코 쉽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고민은 레드마리아의 고민이기도 하고.

일하는여성들의 전국네트워크는 한국의 여성운동을 모델로 삼으면서 3년전 만들어졌다고 한다. 단위사업장 중심의 폭발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한국의 여성운동에 대한 부러움을 말했지만 오히려 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의 단위사업장이 아니어도 개개인들이 자신있게 참여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이들의 새로운 조직이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좋은 조직이라해도 아래로부터의 욕구가 세세하게 수용되지 않는 조직은 이미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 매너리즘은 새로운 공기를 수용하기엔 이미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간의 이들의 합숙에 참여하면서 많은 공부가 됐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예상한대로 물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 그리고 촬영에 장애가 될 제도와 질서들이 꽤 많다는 것, 결정적으로 말을 직접 못알아 듣는 것 등등이 도사리고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또 한명의 주인공을 발굴해냈고 그와 더블어 영화에 대한 주제가 점점 더 촘촘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흥분이 되기도 한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9. 1. 4. 21:48

이래저래 벌써 새해가 4일째 된다.정말 시간이란...

책상위엔 작년초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산 일본어 책이 먼지가 수북한채 놓여있다.

웬일인지 일찍부터 일어난 나는 간만에 책을 들여다 본다.

고래까라 오세와니 나리마스...앞으로 신세지게 됐습니다

도조 요로시꾸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드립니다.


정말이지 뭔가를 외우는 것에 소질이 없는 나는 무슨 형벌로 이번 작업을 하면서 여러나라 말을 배운답시고 헉헉 대는지.사실 헉헉댄다는 말은 좀 무리긴 하다.헉헉대지 않았으니 이제와 눈앞에 닥친 말이 급해진 것이니.우자지간 번개치기라도 해야지 뭐.

필리핀 촬영과는 달리 일본 촬영은 좀 두렵다. 필리핀은 일년간 머물면서 나름 이것저것 이해의 폭을 넓혀놓은 베이스가 있었으니 두달간의 시간이 나름 생각한 만큼 잘 진행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바지만 일본은 단기간 여러번 방문한 눈치정도의 감이여서 사실 얼마나 일이 착착 진행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질서와 제도가 몸에 밴 나라의 국민들 사이를 파고들면서 일을 한다는 건 일의 추진에 불이 붙기 힘들 터이니.


더군다나 필리핀 제작비의 3배는 넘게 그것도 한참 꼿꼿하게 올라가는 엔고의 와중이다 보니 정말이지 간이 부어도 한참 부었구나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복잡한 상황이다. 왜 하필 지금이어야 하는지. 그러나 일단 가기로 했다. 그것도 다섯명이 동시에. 지난 필리핀 촬영때 3명이서 갔지만 사실 영란이 합류하지 못한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고, 안그래도 복잡한 동선을 따라 영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현장의 상황파악이 필수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영화에 참여한 보람이 스텝들 개인의 성과로 조금이나마 남을 수 있을터이니.


신년과 함께 스텝도 한명 더 늘었다. 다큐멘터리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그녀에게 가르치는 재주가 없으니 스스로 배우라는 말로 대충 레드마리아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스텝으로 참여하는 일년간 나름대로 먹고살 궁리며 어떻게 버틸 것인지를 고민하며 준비하는 모습이 여간 대견스러운게 아니다. 그녀가 무엇을 배울지 무엇을 얻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레드마리아를 위해 이미 휴학을 두 번이나 감행하고 있는 아람과 새로운 학교 편입을 앞두고 있음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제작위원 모집에 힘을 쏟고 있는 경은과 일본 촬영후 역시 유학을 떠나게 될 영란까지 모두의 열정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들의 앞날도 영화만큼이나 기대가 된다.


일본 촬영은 일단 도쿄의 반빈곤네트워크에 소속된 일하는 여성들의 모임을 촬영하는 것으로 시작될거 같다. 사전 섭외라는 것이 눈으로 보면 다를때가 많기 때문에 바로 그림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촬영일정에 맞게 그들의 모임을 주선해 주었으니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필시 괘찮은 분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확신은 든다. 게다가 하나씩 일본 촬영을 위해 자료를 제공해 주고 사람을 소개해 주는 친구들이 생겨나니 일단 이정도면 출발은 순조롭다 하겠다.


그리고 어제 아람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일본 촬영을 위한 후원금 모집 통장에 200만원이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정확하게 어느분인지 파악을 못해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첫 단추를 채워준 그분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쇼킹패밀리 상영료를 모아 제작팀 모두 해외여행 가자고 공동통장을 마련해 돈을 모았는데 세영의 제안으로 레드마리아에 제작지원금을 후원해주기로 했다. 물론 더블어 김미례 감독의 영화와 세영의 영화에도 함께 후원하기로 했다는 야그. 우리모두 스스로의 대견스러움에 감동했다는 야그다.


일본의 첫 촬영이 잡혀있는 이달 21일쯤은 출국을 해야 한다. 그기간 얼마나 제작위원을 모으고 후원회원을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의기충천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클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지난해 실망이란 실망은 이미 여러번 한터라 더 이상 할게 있을까 싶어 기대만 가져보기로 한다. 더더군다나 실망하기엔 레드마리아가 정말 괜찮은 영화인거 같아서 말이지.ㅎ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12. 30. 21:39

1월 수림과 팔라완에 가서 율리우스 시저라는 이름의 다이버에게 오픈워터 다이빙

자격증을 땀

레드마리아 기획안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

제제 마닐라 방문

- 아시안브릿지 멤버들과 함께 에코투어


2월 바탕가스에 가서 친구와 어드벤스 다이빙 자격증 땀.


3월 레드마리아 기획안 대충 윤곽이 잡힘


4월 1차 기획안 완료 및 경기영상위원회에 제줄

혼자서 귀국

미례집에서 기거시작.

여성영화제에서 만날 사람들의 반을 만남.


5월 영화진흥위원회 기획안 제출했으나 포트폴리오가 빠졌다고 접수에서 제외됨.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는 독립영화10주년 기념작에 출연해달라고 마리오 연락.

세무서에서 종합소득세가 400만원 가까이 나와 돈이 없으니 연기해달라고 갔다가

열만 받고 대판 싸우고 돌아옴.

- 사업자등록증록 빌려준 친구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함께 나누어

종합소득세를 해결.

촛불집회에서 또 만날 사람들의 반을 만남

경기영상위원회 제작지원 탈락 소식


6월 서울영상위원회에 기획안 제출

- 포트폴리오 까먹을까봐 미리 제출함

스텝구성 완료 및 첫 촬영 개시


7월 인디스토리 사무실을 두달간 빌리기로 함

세영의 소개로 저렴한 방 입주

제나린 섭외 및 촬영 시작

서울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 선정됨

촬영장비 구입 및 필리핀 촬영 준비


8월 필리핀 촬영 시작

왼쪽다리 아프기 시작

마닐라의 아시안 브릿지에 베이스 캠프를 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님

중순쯤 경은 2주간 촬영 합류

영화진흥위원회 하반기 제작 지원 서류 제출

조연출 영란 국내촬영


9월 제작비와 생활비가 바닥나기 시작해서 아르바이트하러 1주간 귀국

조연출 아람 처음으로 촬영하기 시작

필리핀 촬영분의 전체윤곽이 잡힘

- 이주여성 제나린, 성매매반대단체 부클로드, 위안부 할머니 단체 말라야 룰라스,

그리고 빈민지역 톤도

외쪽다리 통증이 심해서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마닐라의 병원에서 엑스레이도 찍었지만

원인을 모른다고 함.


10월 아시안브릿지에서 숙소비를 제작지원으로 하겠다고 소식전함

-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rid 울었다

경순 먼저 귀국하고 조연출 아람은 따갈로그를 영어로 번역하기위해 현지에 남음.

영진위 제작지원 1차에서 탈락

- 이때부터 예정된 촬영일정 등 모든 것이 엉키기 시작

아르바이트 시작

영화창작공간 입주

동생이 병으로 귀국 및 성모병원에 입원

왼쪽다리가 계속 아퍼서 정형외과에서 MRI촬영하니 고관절염이라고 함

- 물리치료 몇 번 받다가 시간이 없어 흐지부지


11월 아르바이트 계속

동생이 떠남

- 청아공원에 동생의 유골을 안치. 그곳에 젊어서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 수림 일주일간 귀국

독도영웅 독립다큐 제작지원에 애국자게임2-한일독도영웅전 기획안 제출

- 연출료 2천만원에 제작비 1억3천이라니 되기만 하면 2천만원을 일본촬영에 쏜다


12월 독도영웅 1차선정 및 면접

- 심사위원들의 질문

“독도영웅은 목적영화인데 감독님의 기획안은 좀 의도와 다른거 같은데요?”

“다른사람들은 구성안이 완결구조인데 감독님의 구성은 열려있고 제작비는

제일 많이 들어가는데 일본 촬영 기간이 좀 길지 않나요?“

“감독님의 전작들은 대체로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는데 독도영웅도 편향되지

않을까요?”

“...”

훌륭한 질문들에 훌륭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틀후 탈락소식


다시 여성영화제 옥랑상 제작지원을 위한 기획안 정리 및 접수

아르바이트와 제작지원 기획안 작성 그리고 동생일로 세달을 까먹은후

마지막보루로 일본촬영을 위한 제작위원을 꾸리기로 함.

- 제작팀 모두의 의지 “씨바 안되면 가서 몸팔어”

엄마의 소개로 한의원에서 왼쪽다리 치료를 위한 뜸뜨기 시작

- 등짝에 8군데 앞에 두군데. 만나는 사람이 누군든지 뜸떠달라고 부탁.

우리에게 몸은 무엇인가를 되씹으며 한해를 마무리함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10. 1. 16:40


윗 사진 : 빈민운동단체인 UPA에서 그레이스를 처음 만나던날. 이날 무슨대화를 하다가 이렇게 웃었는지 기억이 안난
              다.ㅎㅎ

              활짝웃는 친구가 그레이스이고 가운데 있는 친구는 지난번 사우스레일 촬영때 도움을 준 UPA활동가 티나.

아래 사진 : 그레이스집 이층의 난간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그곳에 앉아 동네를 보고있자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가끔 괜찮은 그림들이 종종 잡히곤 한다.




경순, 담배는 너의 건강에 댄저러스해. 그만 좀 피워.
(그때 집밖으로 열차가 지나간다)
그레이스 니네 집이 더 댄저러스 하거든.너나 걱정하세요..

철로변에 사는 그레이스의 집에 머물러 있다보면 시간날때마다 아니 내가 담배를
피울때마다 반복되곤 하는 그레이스와의 대화다.
온통 쓰레기더미에다 카메라에 녹화되지 않는게 원망스러울 정도의 악취가 생활화된
이곳에서 그레이스는 늘 청결과 건강을 이야기 하곤 한다.
거기다 하나 더 살을 붙이자면 하나님 이야기까지.

그레이스 근데 혹시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은 없니?
난 4명이면 됐어. 너무 많이 낳고 싶지 않아.
너 이미 많이 낳았거든. 도대체 어쩌자고 이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거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래도 너의 하나님은 착한하나님이 아닌거 같아.
경순 그런이야기 하면 안되.
뭐가 안되. 너의 하나님이 착하면 어떻게 너희들더러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아
여자들이 이토록 고생하도록 놔두겠니.
....

눈을 몇 번 흘기고는 이내 걸레를 들어 여기저기 청소를 하는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다가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해서
이곳 철로변에 둥지를 틀게됐고 현재까지 1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은 현재 철로변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레이스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이제 6살짜리 막내아들을 두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만큼이라도 학교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나마 그레이스는 철로변에 사는 사람들중 부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촬영을 온 후 이틀째 되는날 그레이스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막내아들이 눈이 짝짜기인데 니가 좀 도와줄 수 없겠니?
그레이스 난 부자가 아니야. 한국에선 나는 집도 없고 사무실도 없어.
내 재산은 그저 이 카메라 뿐이란다.나도 너만큼 가난하거든.
하지만 넌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잖아.비행기값 비싸잖아.
그건 그렇지만...쩝...우자지간 나 가난하거든.

그래 이해가 안되겠지.
비행기타고 먼나라에 와서 보기만해도 비싼 카메라들고 영화를 찍는다는데
돈이 없다는게 이해가 될 리가 없지.
차비가 아까워 다른동네 한번 다녀보기도 힘든 그들이 택시타고 이곳에 촬영을 오고
남편은 늘 한 개피씩 사서 피우는 담배를 한갑씩 사서 피우는 우리들이
정말 가난한건지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지원을 받아서 너희들을 찍고 있지만
이곳촬영이 끝나면 어떻게 한국에서 먹고살거며 어떻게 국내 촬영을 하고
또 어떻게 일본에 갈 수 있을지 머리에 쥐가 나는 이 심정을
그들이 이해할 수는 없으리.
이곳의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떨어져가는 제작비를 걱정하며
다시 비싼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가 알바를 시작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을
그들은 도저히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자지간 촬영 3주를 남기고 나는 잠시 한국에 돌아왔다.
남아있는 잔고 3백만원이 떨어지면 필리핀에서의 숙박비며 남은 촬영비도 모자랄 판이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촬영도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때맞추어 들어온 알바를 놓칠 수 없었고 남에게 맡기기엔 남는게 없었다.
빠듯한 촬영일정과 흐름을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됐지만
결국 내가 들어가서 처리해야만 했다.
일이 한참 꼬이겠군 했지만 그나마 일이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했다.
우자지간 급하게 한국에서 일주일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찾은 그레이스의 동네.
이미 이주를 시작해서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린 철로변을 보고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서울에서 미처 다 처리하지 않고 온 일들부터 영진위에 지원한 제작비신청이 1차에서
무산됐다는 소식까지 온통 복잡한 일들이 마음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왜이리도 더운지.
그많던 철로변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여기저기 끊어진 전기줄을 줍는 아이들과
조용히 창문밖을 보며 말없이 밖을 내다보는 할머니들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리도 조용히 밖을 보는 것일까.

그러다 나도 그레이스집의 난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특별히 재미있는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는게 아닌데도 시간은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고
나도 모르게 참 평화롭다라는 말이 머리를 계속 맴맴돌았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아들과 낮잠을 자고 잊을만 하면 한번씩 흔들흔들 지나가는
은하철도 999.

저녁이 되자 그레이스 가족이 함께 이주할 곳에 집을 지으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때맞추어 비는 억세게 퍼붓기 시작한다.
막상 차에 타고보니 그레이스의 가족만이 아니다.
같은 지역으로 이사가는 동네사람들이 트럭뒷칸에 꽉찼다.
철로변 사람들은 정부가 제공해주는 특정지역으로 이사를 가게되는데 그중 몬탈반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은 땅만 정부에서 제공받고(물론 공짜가 아니라 해마다 갚아야 한다)
집은 직접 자신들이 지어야 한다.
왜 이곳을 선택했냐고 물으니 다른지역은 너무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채소를 심을 수가 없단다. 자신들은 집은 작아도 조그마한 땅에 이것저것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땅을 원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그레이스도 주말마다 집을 짓기 위해 몬탈반으로 갔는데 벌써 두달째 짓고 있다는 집이
이제 벽돌 몇칸 올라온 수준이었다.
그레이스 난 니집을 보고싶어. 대체 언제 완성되는거니?
아마 내년 7월쯤...
오마이갓...그럼 그동안 어디서 살건데.
동생집에서 살다가 지붕이 완성되면 살면서 계속 지어야지.
그러면서 남편과 함께 열심히 집터의 잡초를 뽑고있다.
그레이스 난 아무래도 너희집이 정말 완성될지 상상이 안된다.

그런나를 오히려 처량하게 보면서 위로의 한마디를 건넨다.
담배한대 피워.
흐흐 웃으면서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 세워두었던 카메라를 지나가는 아이들이 툭툭 건드리자 그레이스가
쫓아와서 혼을 낸다.
그리고는 나에게 한마디 한다.
너 재산은 카메라밖에 없잖아. 잘 간수해야지.
그래 니말이 맞다. 내재산은 그것뿐이지.

처음엔 나에게 돈을 요구하던 그녀가 어느새 독립영화 레드마리아를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었다. 누군가 촬영을 못하게 하거나 왜 이런걸 찍느냐고 묻기로도 하면
그녀가 어느새 말하고 있다.
이 친구는 독립영화감독이고 아시아의 여성들을 찍고 있으며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보기위해 우리동네에서 촬영을 하는거라고.
오 마이 그레이스.흐흐

과연 저 황량한 터에서 그들이 말하는 꿈같은 궁전이 언제쯤 지어질지..
아니 완성되기는 할런지.
여기저기 채소를 키우겠다는 그 채소는 어디서 꽃을 피울지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년에 집이 다 지어질때 쯤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물론 속으로는 내년에 정말 이곳에 올 수 있을까를 조용히 되물으면서 말이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9. 20. 16:33


윗사진 - 우리가 묵었던집 리타 할머니.말라야롤라스의 대표이기도 한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그나마 영어가 되는 할머니다. 통역을 대동하지 않은 관계로 할머니와 대화를 할때는
             서로 인상을 써가며 바디랭귀지가 주를 이룬다.하지만 서로 못해서 좋은건 문법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사진 - 마을의 할머니들은 걸어갈때 늘 어깨동무를 하곤 한다. 내가 옆에 있을때는 내게도
                어깨동무를 하시던 할머니들. 그분들이 걸어가실 길이 걸어온 길보다 짧겠지.
                나도 생각해보면 걸어갈 길이 걸어온 길보다 길지 않겠구나 생각을 했다.



 

지구상 어디를가나 할머니들이 있다. 어머니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할머니인 이들은 여자와는 다른 종자가 되어 살아간다. 최근에 읽고 있는 태백산맥에 봐도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종종 영화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역사책이 놓치고 가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할머니들의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한이 서려있고 그 한은 눈물이 되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영화를 만들면서 관객과의 대화가 싫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거 같다. 이야기가 확장되지 못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이야기속에 갇혀버리는 매너리즘이 싫었던 순간들처럼.

말라야 룰라스의 할머니들도 남들못지 않은 한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이야기가 되곤 한다. 꽃같은 나이에 순결을 잃고 여자로서 살아가기 힘들었던 그 이야기들. 가끔 증언이 주는 그 패턴화된 이야기들은 사실 할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사회가 종용하는 패턴이기도 하다. 말라야라는 말은 자유롭게 하라는 말이고 롤라스는 할머니들이란 말인데 그런 증언들과 함께 할머니들이 자유로와지는건 어떤걸 의미하는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말라야 롤라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단체이름이다. 우리가 익히 알던 위안소로 끌려가 오랜기간 강간을 당해야만 했던 할머니들과는 다른 사례인데 말라야 롤라스의 할머니들은 한마을에 일본군이 쳐들어와 주둔하면서 마을전체의 부녀자를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엄마와 딸이 동시에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자식을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워 버렸던 만행.

현재 마을에는 그렇게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지만 이미 반이상은 돌아가셨고 남아있는 58명의 할머니들 중 15명만이 걸어다닐 수가 있다. 할머니들의 집들을 방문하자니 홀로사는 시누이와 동서가 다같은 위안부할머니일 정도로 그들의 삶은 지겹게도 꼬여있었다. 마을의 사건이 터진후 모두가 쉬쉬하며 숨어살기도 하고 이웃동네로 이사가 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족들이 있는 그마을로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되었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속을 터놓고 사는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마을에서 그나마 좀 사는 집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일본에 가서 돈을벌어온 집들이다. 남자들은 건설업이나 공장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고 여자들은 엔터테이너나 성산업에 종사하다 돌아온 케이스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착찹했다. 과연 할머니들이 늘 말하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정의란 것이 현재의 그들의 삶에서 의미하는 건 무엇일지 말이다. 

우자지간 그렇게 살고있는 그 마을의 할머니들은 해마다 아니 한해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장례식을 치루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처음 방문했던날도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마을의 할머니들이 모여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참석한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슬픔이기엔 살아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오히려 평온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비가 엄청 내리던 날 하나밖에 없는 바지가 다 젖었을때 우리가 묵고있던 집의 리타할머니가 속바지 같은 빨간색 바지를 내주셨다. 천이 부드러워서 좋아 하면서 말이다. 할머니 저 빨간색 좋아하는거 어찌알고 감사합니다 했다. 할머니들은 왜 다들 이런 바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속으로 궁시렁 거렸지만 사실 맘에 꼭 드는 바지였다. 결국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바지를 배낭속에 넣고 다니며 요즘 잠잘 때 입고있다. 조연출 아람이도 바지하나를 받았는데 내바지가 더 이쁘다고 난리다. 이상하게 우리스텝들은 촌스러울수록 탐을 내는 경향이 있다. 거 참...ㅎㅎ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9. 10. 16:31

수빅은 미군기지가 있던 도시로 이미 미군이 국민들의 기지 반대를 위한 국민투표로 1992년 철수를 했지만 이후 필리핀정부와 맺은 방문협정이라는 걸 구실로 한달에 한번 배가 이곳에 정착을 한다. 물론 그 명목이 아니어도 이미 여기저기 비밀기지가 도처에 있다는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우자지간 그래서 수빅에도 수많은 기지촌이 있고 수빅과 가까운 올롱가포라는 도시는 성매매로 돈을 벌기위해 가난한 여성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그 여성들을 위해 성매매여성들이 스스로 만든 조직이 있는데 바로 북클로드다.

북클로드의 대표도 성매매출신 여성이다. 처음만난 외국인에게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자신도 성매매여성이었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놀랐다. 보수적인 카톨릭국가인 필리핀에서 더구나 이들은 성노동자라는 말을 싫어할 정도로 반성매매를 기치로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늘 반성매매 운동의 필요성을 동의하면서도 성매매의 경력을 숨겨야만 하는 한국의 여성들을 보면서 늘 뭔가 놓치는 부분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우자지간 이들은 반성매매를 목표로 활동을 하기는 하지만 조직에 가입한 여성들중 반이상은 현재 성매매일을 하고 있고 그들의 인권을 감시하고 지원하는 일도 역시 북클로드가 하고 있어서 국내에 있는 성매매반대 단체와는 좀 결이 다르다는 생각도 한편으론 들었다.

북클로드에는 특히 거리의 아이들..특히 미성년자출신의 성매매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중 십여명이 북클로드의 사무실에서 숙식을 한다. 그중 4명은 아이가 있는데 대부분이 십대에 아이를 낳아 아이나 엄마나 다 어리지만 그들의 모성애는 정말 각별하다. 게다가 함께 사는 거리의 친구들이 모두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서로 돌봐주고 놀아주고 한다. 한국이라면 벌써 아이를 입양기관에 보냈거나 했을텐데 그들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아이를 아빠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키우면서 다시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간다.

북클로드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학교를 여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 검정고시와 같은 학력인정시험을 볼 수 있도록 북클로드가 올롱가포시와 협의를 했다고한다. 그러나 선생님과 운영은 모두 북클로드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한다. 결국 북클로드에서 자원활동할 선생님을 못구해 마닐라에서 매주 선생님이 온다. 마닐라에서 북클로드는 4시간 거리이다. 처음 학교를 운영할 생각을 했던건 바로 거리의 아이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무조건 성매매를 그만두라고 하기엔 생계가 막막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수입도 변변치 못한 가내수공업(사탕 만들기,걸레만들기 등등)정도이고 그렇게 수입이 안되다보면 결국 다시 거리로 나가야하는 생리를 알기 때문에 모두들 중단한 학업을 다시 시작해서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어서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거나 고등학교를 다니다 만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물론 그 이유는 다들 돈이 없어서다. 돈은 없고 먹고 살기는 해야겠고 집안 식구들의 입은 모두 굶주리고 있을때 늘 여성들의 몸은 상품이 된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여성의 몸은 상품이지. 우자지간 그래서인지 이 여성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참 대단하다. 이제 글자를 쓰기 시작하는 여성들부터 덧셈나눗셈을 배우고 구구단을 외우고 있는 이 여성들이 언제쯤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또 대학을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멋진 건 삶에 대한 열정이다.

무엇인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선택해서 노력하는 기분은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따뜻하고 소중하게 만든다. 옆에 있다보면 말은 통하지 않지만 느껴진다. 느낄 수 있다는거 참 어메이징한 감동이다. 그들의 존재감으로 인해 나의 존재감마저 새롭게 느끼게 되니 말이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이 경순이라는 발음을 어려워 하는데 나는 다른 이름을 만들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는데 못부르고 있다는걸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레드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랬더니 레드를 따갈로그로 뽈락이라 말하더니 그들은 재밌어하면서 뽈락 뽈락 레드 레드 불러댄다. 그래 서울에서 빨간이라 부르는 것들도 있는데 뽈락이면 어떻고 레드면 어떠냐.ㅎㅎ

그들과 아쉽게 며칠을 보내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 마닐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곳 촬영이 끝나면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들의 수업시간과 그들의 아이와 그들의 친밀한 생활을 좀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나기전 민성노련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매매여성들이 필요한 약이 무엇일까 자문을 구한적이 있었는데 질정과 질 부위에 바를 수 있는 연고를 강추해 주었었다. 우린 그약을 성매매여성들을 위해 준비했고 그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그 외 필요한 상비약도 함께. 북클로드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워 하던지 역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안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서 우리도 기뻤다.

8월16일에 필리핀 촬영에 합류한 경은이 12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며칠전 돌아갔다. 국내에서 필요한 촬영을 위해 남아있는 영란도 함께 했다면 더욱 좋았겠다 싶다. 일은 고단하고 빡세게 돌아가긴 했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았기에 아쉽다. 경은이 어렵게 찍은 많은 사진들도 이후 영화에 멋지게 살아나리라 믿는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8. 27. 17:02



위의 사진 - 제나린의 형제들과 저녁에 노래부르면서 노는 장면.
                 필리핀에서는 집안이든 어디든 노래방 기기로 노래하는 것을 즐겨한다.리모컨 들고있는 친구가 제나린.
아래 사진 - 마지막날 떠나는 언니를 보내는 동생들
                 왼쪽부터 막내 얀얀, 세째동생 에데리다, 둘째동생 임임,첫째동생 디딧.




제나린은 이주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주여성이라는 선입관은 그새 사라지고 만다. 그저 애둘에 남편과 이것저것 생활비를 아껴가면서 아이들 교육에 누구처럼 열심히 고민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표 주부다. 그런데 이주여성하면 웬지 뉴스나 가십거리 기사 그리고 이주여성에 대한 문제점들을 기술해 놓은 논문속의 이야기로만 대상화된 선입관이 내머릿속에 있었는데 그녀를 만나면서 하나씩 깨지고 현실이 됐다.


그녀를 처음 만난건 여성재단에서 주최하는 이주여성친정방문프로젝트<날자>의 익산 오리엔테이션에서 였다. 한국으로 시집온 이후 한번도 친정방문을 못한 사람들이 이번에 선정이 됐고 제나린도 그 중 한명이었다. 10년전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하나 딸 하나 (에고 얼마나 이쁜것들인지 ㅎㅎ) 낳아 알콩달콩 잘 살아왔지만 친정은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그녀의 친정집이 워낙 어려운데다 2년전 어머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친정방문위을 위해 모아둔 돈을 매번 병원비나 생활비로 보내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돈이 아니어도 매달 친정에 돈을 보냈고 남편도 그녀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지원하는 편이었다.


제나린의 친정집은 꽤 멀었다. 여성재단에서 마련해준 이번 행사에서 고향집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은 4박5일이었는데 제나린은 그중 1박2일을 다시 까먹어야 했다. 마닐라에서 친정집인 민다나오섬의 부투안시티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반을 가야하고 또 거기서 동네마을까지 2시간을 차를 타고 가야하는데 하루에 한번밖에 비행기가 운행을 하지 않아 마닐라에서 1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마닐라에 사는 그녀의 사촌언니집에서 하루를 신세지고 다음날 부투안시티로 떠났다.


그녀의 친정집은 전형적인 필리핀 시골동네였다. 오빠가 만들었다는 나무로 만들어진 전통가옥에 그녀의 세명의 여동생이 어머님을 간호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이날은 제나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근처에 사는 오빠 식구들과 결혼한 셋째동생 식구가 모두 모여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중앙에는 ‘Welcome, Eun Family!'라고 써 있었다. 따갈로그도 못알아 먹지만 이곳은 비사어를 사용하니 머릿속에 벌써 번역이 걱정이다. 하지만 얼굴은 생글거리면서 제나린과 함께 그들과의 생활에 조용히 스며들어 3박4일을 보냈다. 지내다 보면 참 희한하다. 나도 그렇지만 제나린의 아이들도 말 한마디 못 알아 듣는데도 어느덧 그들과 어울려 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이 그나마 영어를 해서 가끔 대화라는 걸 짧게나마 하는데 제나린의 남편은 나보다 더 심한지라 흐흐 꽤나 고생이 심했을 텐데도 이 남자 또 호인인지라 그저 허허하면서 즐거운 표정을 어찌나 끊임없이 짓고 있는지.


제나린은 이집의 큰언니다. 오빠가 하나 있긴 하지만 워낙 벌이가 안 좋은데다 자기 집 아이들도 넷씩이나 되니 먹고살기가 힘들다. 결국 어머니 병원비며 간호는 딸들이 맡아서 하고 있는데 그중 제나린의 지원이 가장 큰 힘이랄 수 있겠다. 그래서 큰언니 제나린의 존재는 너무나 특별했고 그들의 10년만의 만남은 더없이 특별할 수밖에. 언니는 멀리 있지만 늘 동생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물질적으로도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하지만 제나린은 그 모든 덕을 남편 덕으로 돌린다. 남편 때문에 남편이 잘 지원해줘서 남편이 아니었으면...


우자지간 난 그녀들의 자매애에 놀랐다는 거. 쓰러진 엄마를 간호할 사람이 없어 셋째가 일을 그만두고 엄마 간병인을 자처해 하고 있고 막내는 대학교수로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월급은 9000페소로 원화로 치면 20만원 정도라니 겨우 집안의 생계비 정도일 뿐이다. 둘째는 미혼모로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데 아무도 뭐라지 않는다. 그렇게 세자매가 한집에 모여 병든 엄마와 혼자서 애를 키우는 언니를 서로 보듬으며 살고 있으니 이보다 이쁠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던가. 아니 우리도 그렇게 산적이 있긴 있었지. 까마득히 오랜옛날 우리도 정말 가난했던 그 시절 그런 이야기는 우리도 주변에서 늘 보던 이야기였지.


제나린의 오빠는 할 말이 참 많았다. 그와 나 둘다 영어가 짧아 하고싶은 말을 비사어로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했더니 이 오빠 정말 비사어로 한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는데 그 눈빗만 봐도 그림이 그려지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겠지. 그랬더니 이분 내가 비사어를 알아듣는 줄 알고 뿌듯해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ㅎㅎ 우자지간 제나린의 오빠는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지 안그래도 큰 눈이 퉁퉁부어 보기도 안스러운 눈빚을 계속 하고 있어 정말 마음이 짠했다는 거. 게다가 오랜만의 딸의 방문을 아는지 의식이 없던 엄마가 제나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태까지...


물이 이틀에 한번씩 밖에 안나와 이틀에 한번씩 물을 받아놓고 쓰는데 오랜만에 손님이 많아져 그집 물은 늘 모자랐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물을 빌려오고 받아와 동생네 식구와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던 그 사람들, 필리핀 말 하나도 모르는데 조카를 위해 늘 눈을 보고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하나씩 가르쳐주던 그 사람들, 집안에서 장작불로 음식을 하는통에 안그래도 더운집이 더더욱 더운데도 그 불앞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준비하던 그 사람들, 제나린이 돌아가기 전날 언니를 위해 동생들과 조카가 모여 다함께 준비한 춤을 섹시하게 추었던 그 사람들....짧은 일정이자만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길고 끝이없다.


이미 제나린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고향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그날들을 벌써 그리워하고 있겠지. 늘 그렇지만 시간은 너무 짧다. 그리고 시간은 아무것도 담아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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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8. 10. 16:49

필리핀에서 돌아온지 네달이 조금 안됐다. 그동안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나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레드마리아와 한축을 이룬 일이었다.
종종 사적인 흥미진진한 일들이 더러 있어 꼭지가 돌 뻔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촉촉해지는
감동의 순간도 있었지만 역시 레드마리아가 주는 기쁨보다는 순위가 뒤처지는 게 사실이니
당분간 그렇게 계속 가는 수밖에.

마치 모든 무기의 장전을 끝내고 출정하는 기분으로 다시 가게 될 필리핀에서의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과연 생각대로 잘 진행이 될지 아님 다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두렵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어제는 필리핀에 보낼 의약품을 구입하고 영어와 따갈로그로 복용법을 일일이 써서
붙이느라 스텝들이 밤늦게 까지 고생했다.
그저 만나는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준비하고자
시작한 일인데 의외로 돈이 많이 모아져 의약품 가방만 10키로는 족히 되지 싶다.
무슨 전쟁터에 간다고 이렇게 많은 의약품을 준비하는지..쩝

돈을 보내준 분들 중에 민주성노동자연합과 민주성산업인연대에서 보내준 돈도 있다.
그분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필리핀의 성매매단체나 성노동자단체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분들께 직접 이들이 보내준 의약품을 전달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대충 감기약이나 두통약 정도를 생각했는데 역시 약사와 상의하니
필요한 약들이 의외로 많다. 똑같은 감기약이라 해도 아기들에게는 시럽을 준비해야 하고
파상풍과 같은 상처에 바를 연고며 여성들이 많이 필요로 하는 좌약이나 연고 등
구체적인 약들이 다시금 추가되어 약 종류만 20가지는 되는 듯 하다.

필리핀 촬영의 첫 시작은 이주여성 친정방문 프로젝트인<날자>행사를 찍으면서
그 행사에 선정된 한 가족을 취재하는 것이다.
이주여성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평범한 가족이고 부부관계도 끔직하게 좋은
이 커플을 통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만나자마자 오랫동안 사귄 친구 처럼 벌써 정이 통하는 사이가 되어 그들의 친정방문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 가보는 친정이라고 하니 어떤 기분일지 그들의 고향은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가슴이 콩알 콩알 뛴다.

그리고나서 취재할 곳은 사우스레일 빈민가이다. 작년에 사우스레일을 방문하면서
사전취재삼아 이미 가난에 대한 연대를 만들긴 했지만 내 마음은 정작 레드마리아에
있었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늘 삶은 파헤쳐지고 뒤집어진다.
그리고 그 가난한 삶의 밑바닥에 던져지는 돈 몇푼.
그 돈을 무작정 버릴 수도 없고 취하기엔 너무 비굴해지는 우리의 치사한 삶의 기복.
작년 이맘때쯤 그 사우스레일을 방문하면서 그리고 촬영을 하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만감이 다시금 머릿속에 교차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찌나 밝고 씩씩하던지.
에블린...좀만 기둘려.나 이제 그곳에 갈 수 있게 됐어.

그리고 민다나오섬의 다바오시에서 만난 성매매여성들을 위한 단체.
가브리엘라라는 여성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그 단체를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었다.
만일 ‘여연’이라면 이런게 가능했을까라는 생각부터 그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채로 있었지만 그들에게 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님 기억이나 할까?
우자지간 난 그곳에 가서 그들의 존재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생각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게 될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여성운동선상에서
연대하게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취재할 곳은 필리핀의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아시아엔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건 아직 너무 없다.
일단 직접 찾아가서 만나보고 들어보고 해야 무엇을 찍을 것인지 감이 잡힐 듯 하다.
김동원선배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보고 참 할 말이 많았는데 접었다.  
왜 접었을까?

비가 참 많이도 온다.
필리핀에도 우기인데 가면 졸라 많은 비를 보겠군.
필리핀은 우기에 하루에 한차례 정확히 폭우가 쏟아진다.
우산을 쓰는게 의미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가 올때는 나가지 않는다.
조용한 방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 비를 바라보면 참 낭만적인데
그 비가 오는동안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난 어느쪽에 있게될지 곧 보게 되겠지.

참 수림이도 있구나.
서울로 전화걸때마다 짜증부리면서 나 바뻐 했었는데
군소리 안하고 늘 바로 끊었던 녀석.
녀석을 위해 묵은지 세포기를 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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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7. 28. 21:23

영화를시작하면서 참으로 많은 계약들을 했던거 같다.

때로는 방송국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보적인 시민단체와 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제작 지원금을 받을때 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윤성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계약이라는걸 했던거 같다.

그렇게 계약을 하면서 우린 서로에게 요구되는 어떤 의무와 권리에 대한 조항을

문서로 남기는 것인데 한번도 만족할만한 계약서는 없었다.

윤감독과의 경우를 빼면 대부분이 돈으로 얽혀있는 내용이고

나머지는 내가 돈을 확실하게 받기위해 그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계약서를 쓴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가 불공정한 계약이고 굉장히 자본주의 적인 계약이라는 것.

가끔 그것이 거대방송자본과의 계약일 경우 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를 갈면서

넘어가기는 하지만 문제는 진보적인 시민단체의 경우도 그 조항이라는 것이 말도 안되게

자본주의적이라는데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철저한 용역과 고용주의 관계를 무시무시한 용어로 써놓은 그 계약서를 보며

정작 문제가 정권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런 관행이

언제쯤 제대로 시정이 될지 아니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하면 깝깝하기만 하다.

우자지간 그래도 계약은 필요하다.

더구나 영화를 만들고 스텝들과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킹패밀리때 부터 스텝들과 계약이라는 것을 했는데 내용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이야기고 스텝들입장에서야 돈을 왕창 받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크게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계약은 무신...이라고

다른 생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우리도 계약을 했다.

계약서를 쓰면서 다들 심드렁했다. 아니 진지했던건가. 우자지간 계약서를 쓰면서

조연출 아람이 그랬다.

“이거 50만원에 종신계약 아니야” 라고.

지지배 은근히 눈치가 빠르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우리 모두가 영화를 만들면서 돈보다 더 큰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난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도 나에게 많은 것을 줄 준비가 되어있겠지.

하긴 지금까지 보면 너무 많은 것을 주어서 좀 감당하기 힘든점 도 있지만

부디 피곤함은 주지 마삼. ㅎㅎ

참 경은이가 그랬다. 경순은 이렇게 훌륭한 스텝들을 만나다니

대체 뭔 복이 그리도 많은거야. 그러게 말이야. 흐흐흐


쇼킹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모집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작비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혼자할까 망설이던 중이었는데

그들이 내앞에 나타난 것이다.

우연히 만난 어떤 자리에서 언고잉홈을 만든 영란이 나에게 그랬다.

이번 영화에 일본도 가신다면서요. 혹시 일본어 필요하시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좀 하거든요.

그래? 필요해. 근데 다른것도 필요해.해서 엮였다.

그녀왈 타로를 보았는데 생각보다 할 일이 많을거라고 하더니 역시라고 했다.

아람은 필리핀 아시아센터 연수중에 만난 대학생이었다.

우린 쉽게 친구가 됐고 그녀는 영화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그래서 엮였다.

경은에게는 가끔 그랬다. 다음영화도 너 스텝이야.

그녀는 ‘알고있어’ 그랬다.


이번에는 조연출이 두명이다. 영란에게 카메라 하라고 했더니 조연출이 좋겠단다. 

그래서 조연출이 두명이 됐다. 아람이는 필리핀 조연출. 영란은 일본 조연출. 그리고 사진작가 경은.

우리가 레드마리아 제작팀이다.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