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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심함이 주는 짜릿함에 빠진 나는 하염없이 느리게 하루를 보냈지만 지나고 보니
이틀간 제네바에서 시간들도 나름 바쁜 일정이었구나 싶다.
제네바는 프랑스에 사는 친구집과 취리히에 사는 친구집을 가기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도시였는데
그곳에서의 이틀이 의외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이번여행이 보호자같은 친구들집으로 전전하는 여행인지라 제네바에서의 이틀이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끔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심심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게 요즘 내 생각인데
제네바는 그런 컨셉에 딱 어울리는 적당한 장소였다.
거대한 레만호수 주변을 돌다보면 반나절이 뚝딱.
끝없이 이어지는 호수와 공원을 산책하며 한강과는 또다른 이국의 쫄깃한 맛을 잘근잘근 씹는 재미가 제법 좋다.
피크닉으로 준비해간 음식이 고작 컵라면과 햇반 그리고 칼로리바에 불과했지만 밥 한끼 먹는데 2-3만원을 줘야 하는
비싼나라에서 두말이 필요없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는데 스스로 얼마나 대견하던지.
게다가 물이 워낙 깨끗해서 수돗물을 그대로 마셔도 되는지라 물값까지 대폭 절약. 심지어 수돗물이 냉장고에서 나오는
물만큼 이나 시원해서 더위를 싹 가시게 해준다.
스위스에서는 한낮의 더위가 장난아니게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늘만 있으면 시원하다.
그래서인지 에어컨을 트는 곳이 별로 없다. 내가 묵던 유스호스텔도 에어컨이 없어서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햇볕만 가려주면 시원하니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을것 같은 한국땅에 지쳐있는 내가
어찌 이나라의 살아가는 방식을 알 수 있었겠나.
우자지간 에어컨을 안트니 거리도 후덥지근 하지 않고 전기버스나 전차가 주로 다니다보니 공기오염도도 낮고
여기저기 발길 닿는데마다 우거진 숲과 공원들이 있어 도시 자체가 공기청정기지 뭔가.
제길...나 어릴때는 한국도 그렇게 그늘진 나무 밑에서 시원한 부채한방으로 더위를 잊곤 했는데
어쩌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기계재앙에 갇혀버렸는지.
갑자기 시원한 공기청정기와 에어컨 어쩌구하는 가증스런 대기업들의 홍보문구가 떠올라 화가 치민다.
하지만..릴렉스...그 생각은 그만. 비싸게 여행온 기분을 삼성 따위의 대기업 때문에 망치지는 말자.
제네바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확실하게 마무리해준 장소는 야외 영화 상영장.
해마다 정동진 영화제에서 별이 쏟아지는 영화제를 보며 세계제일의 아름다운 영화제라 자부해 왔는데
호수옆에 세워진 대형스크린 주변으로 4시간전부터 모여들어 밥을 해먹고 피크닉을 즐기며 기다리는 관객들을 보며
웬지모를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버렸다.
제네바에서는 여름시즌에 이런 야외영화상영을 하는데 무료다. 나중에 알고보니 취리히에서는 야외영화 상영도 유료라
친구들은 비싸서 엄두를 못냈었다는 후문.
근데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시간이 장난 아니게 긴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그시간을 즐기는듯 했다.
스위스에서는 여름에 해가 길어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캄캄해지기 때문에 그때서야 영화상영을 시작할 수 있다.
기다리다 지쳐 나는 재빨리 숙소로 돌아가 라면을 끓여 먹은뒤에 깔개로 쓸 천과 하이네켄 하나를 사들고
다시 상영장을 찾으니 아까와는 달리 족히 천 여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호주주변의 언덕위로 자유롭게 앉아서
혹은 누워서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를 새삼... 드디어 짠...해가 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모두가 숨죽이며 영화를 보는데 그속에 있는 나도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묘한 황홀경에 빠졌다는.
자정이 넘어서 영화가 끝났는데 아무도 자리를 빠져나가지 않았다는데 또한번 감동.
그렇게 조용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다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도 덩달아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날 본 영화는 <슬럼독 밀리어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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