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리뷰2013. 8. 28. 14:21

< 이화리더십개발원 젠더포럼 토론문 ➁ > 2013. 8. 27.

레드마리아, 성노동자, 여성주의자들

김엘리 (이화여대 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

레드마리아를 영화관에서 보고, 이번 젠더포럼을 위해 다시 봤다. 처음 영화관을 찾았을 때는 레드마리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응원의 맘으로 그래서 좀은 흥분한 상태에서 감상했고, 이번에는 여유롭게, 좀은 멍한 상태에서 봤다. 다양한 배꼽모양을 드러낸 배들이 역시나 인상적이다. 여성의 몸은 참으로 다양하다. 다양한 만큼 여성들의 경험도 다양하다. 나에게 레드마리아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 “과연 여성들에게 일이란?”

일본의 여성들도, 필리핀의 여성들도, 그리고 한국의 여성들도 ‘일한다.’ 일은 임금을 받든 아니든 사람들이 먹고, 낳고, 키우고, 사랑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혹은 느끼며 즐기는 다양한 자원을 제공한다. 뭣보다 여성주의자들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공적 영역에서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 생산을 노동으로 정의하는 주류 개념을 뒤집어, 보이지 않으나(엄밀하게 말하면, 사랑과 희생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어서) ‘우리’의 기본적인 생존을 가능하게 한 여성들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돌봄 노동이 일상적으로 우리의 삶을 유지케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드러내어 노동의 개념을 새롭게 재정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드마리아는 공과 사, 보이는 노동과 보이지 않는 노동,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 경쟁사회에서의 과잉노동/남성중심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노동과 이를 거부하는 저항노동,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 이른바 도덕적인 노동과 부도덕한 노동.. 이 모든 노동은 연결돼 있으며, 여성들의 일이며, 여성들은 어디서든 언제든지 노동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도 그 맥락에 있다. 젠더포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 - 성매매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레드마리아는 여성의 일이라는 맥락에서 성매매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합법화냐 혹은 도덕적이냐 와 같은 규범적인 색은 없다. 그냥 여성들이 하는 일이다. 이 지점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많은 사람들은 성매매를 이야기할 때 매우 교훈적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성판매 여성들을 지시하는 여러 언표들이 있다. 더러움, 오염, 불결함,

성매매는 사회적으로 일이라기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혹은 불법적인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내가 <막달레나 집>에서 자원활동을 할 때, 현장출신 활동가님이 시도 때도 없이 “성매매는 합법화돼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세금도 내고 덜 착취당해한다”고. 혼란스러웠다. 현장출신 활동가님이 말하니 참으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싶은데, 이 말을 내가 일하는 여성단체의 선배들에게 고스란히 말하니, 다들 성매매는 “근절”돼야한다고 “주장”한다. 나와 함께 일하는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네트워크 활동가님들도 성매매는 근절돼야한다는 분명한 입장으로 일한다. 마치 합법화와 금지주의 입장만 팽팽하게 긴장감을 돋우는 것처럼 보이는 판에 그나마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막달레나의 집> 연구활동가들은 성매매를 합법화/근절이라는 정책의 차원에서 논하기보다는 성판매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성매매를 논했다. 성판매 여성들이 말하는 인권이란 무엇인가, 거기에서 출발해야한다는 문제제기는 좀 더 현장성을 어떤 당위와 이념이 아닌, 여성들의 경험(입장)에서 봐야한다는 점을 일깨워줬다.

2000년과 2002년도에 성판매여성들의 비인간적 실태가 드러난 군산화재사건은 전국을 들썩였고, 2003년도에 기지촌 여성들의 반인권적 실태가 미국 팍스방송을 타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이 인신매매, 반인권국가로 겨냥됐다. 그러고 나서 2004년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됐다.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싸고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다른 입장들이 불거져 나왔다. 성판매여성들의 노조인 민성노련이 결성돼서 출범했고, 성판매여성을 성노동자로 호명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성명서를 냈다. 그동안 성매매근절을 주장했던 여성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연구자도 등장했다. 성매매근절운동을 한 여성주의자들은 서구여성주의자들이 식민지 여성들을 타자화하듯이 성판매여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판매여성과 여성주의자들이 마치 대립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언론방송을 통해 연출되면서 성매매특별법은 애물단지가 됐고, 여성주의자들은 여성들‘도’ 외면하는 자기 이념으로 뭉친 꼴페미 취급을 받았다.

성매매 이슈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한 사회의 여러 모순(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이 다 복합적으로 얽힌 현장이므로 한 가닥의 이야기로만 풀 수 없는 이슈이다. 그리고 노동으로만, 혹은 폭력이나 범죄행위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성매매는 폭력적 성격이 다분히 있다. 성매매근절운동가들이 제시해왔듯이, 많은 성판매 여성들은 좁은 선택지에서 착취와 폭력을 당하며 비인간적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을 매개로한 폭력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성매매는 이를 에워싼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이윤이 창출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 때 성매매 거래규모는 국내총생산 대비 4.1%로서 농림어업의 것과 맞먹을 정도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특히 감정과 성적 서비스의 상품화가 확장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성매매는 그 노동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전통적 노동의 개념에서 볼 때, 성매매는 전형적인 노동형태가 아니므로, 노동의 의미를 재정의할 필요성을 자극한다. 뭣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상품화된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강하기에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논하는 것에 대해 심리적 거부 반응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캐슬린 베리가 말하듯이 성매매를 폭력으로만 규정하여 설명할 수만은 없다. 그 현장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고, 관계성이 있다.

성매매가 여러 성격이 얽힌 복합적인 현장이라면, 그 설명 또한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성매매는 폭력적이면서도 성적이며, 또 노동이다. 그런데 성매매에 관해 우리가 좀 더 섬세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뭣보다 섹슈얼리티에 묻어있는 도덕성을, 성에 관한 신화를 벗겨내는 일이 필요하다. 섹슈얼리티는 이미 규범적이다. 도덕적인 성과 부도덕한 성, 좋은 성과 나쁜 성으로 구획돼있다. 이 틀에서 보면, 성매매는 윤리적으로 나쁜 성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 틀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선행된 잣대로 판단한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다. “성매매가 없어질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군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만큼이나 그동안 살면서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받는 듯, 다소 당황해하는 학생들 중에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성매매는 인간 욕망의 문제이기 때문에 없어진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시공간적으로 초월한 본능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성매매 역시 이를 에워싼 권력관계를 해체하면서 다양한 성적 욕망을 상상해보는 일은 의미 있다. 말하자면, 돈으로 거래되는 욕망이 아닌, 규범적으로 구획된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관계 안에서 욕망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것 말이다. 성매매도 권력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른바 성적 본능이라는 것도 그 권력관계 안에서 발휘한다. 누군가 통제하고픈 욕망은 함께 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를 만드는 그 권력을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적이다.

또 하나 짚을 점은 성판매여성을 성노동자로 호명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합법화하는데 한 표를 던진다든가 성매매의 지속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하고도 환원적인 이러한 논리 전개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성매매를 노동의 문제로 내놓고 공개적으로 더 깊은 논의하기를 조심스러워한다. 여성주의자들의 논의를 왜곡되게 전유하거나 ‘합법이냐 금지냐’ 하는 이원화된 틀로 그 논의를 환원하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 어떤 이슈를 규제한다고 해서 그 이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이, 법은 최소한의 조치이다. 성매매를 법이나 제도의 차원에서 정의하는 일과 다르게, 우리의 성적 욕망과 권력에 관하여 많은 수다를 떨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의 이야기가 레드마리아에서부터 꽤 많이 간 듯한 느낌이다. 털털하면서 수다스러운 경순 감독님의 영화 영상 못지않은 발제이야기를 젠더포럼에서 들으면서 레드마리아를 감상하려 한다. 그 때 좀 더 섬세한 이야기를 나누길 기대하며. 자신의 배꼽(경험, 이야기)을 좀은 수줍게 또는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와 나눈 레드마리아 여성들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레드마리아, 멋지다!

Posted by 빨간경순
기사와 리뷰2013. 8. 28. 14:14

< 이화리더십개발원 젠더포럼 토론문 ➀ > 2013. 8. 27.

내가 본 영화, “레드마리아”

조중헌(한양대학교 사회학 박사)

며칠 전 다큐멘터리 <레드 마리아>를 보고 토론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여성들의 노동과 몸을 가로지르는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다 아우를 만큼 깜냥이 되지 못해 걱정에 걱정을 하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만 해보기로 맘먹었습니다.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초점을 맞추어달라는 말씀을 듣고 보니, <레드 마리아>라는 제목이 여성을 창녀(레드)와 성녀(마리아)로 나누는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가 반영된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여성들을 이렇게 양분하여 그들을 주체가 아닌 타자, 통제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론가들은 이러한 면모를 ‘양가적 성차별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적대적 성차별주의가 페미니스트나 미혼모 같은 비전통적 특성일 갖는 여성들에 대한 처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면, 온정적 성차별주의는 전통적 역할을 유지하는 여성에 대한 보상을 주고 칭찬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섹슈얼리티는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은 결혼을 한 남편과 - ‘좋은 여자’가 될 자격이 있는 - 아내 사이의 성밖에는 없죠. 법적으로 인정받은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 공식적 성 관계는 그러나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계급의 남성들에게 유곽과 첩이라는 제도가 있었듯이 현대의 남성들 뒤엔 성매매라는 비공식적 성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 성매매에 대한 사회의 기준은 다분히 이중적이라, 남성이 아닌 여성, 또한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하는 업소는 사회적으로 거의 용납되지 않습니다. 간통을 한 자에 대한 태도 역시 그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이러한 사회의 이중성 앞에서 '신성한 가정'이라는 모토는 얼마나 초라한가요. 남성중심적 유교와 기독교 등을 배경으로 하는 보수주의 진영이 줄창 주장하는 '성적 타락의 방지'라는 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남성만의 비공식적 성 체계를 인정하는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유지'와 같은 표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근대화와 개인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인간의 성은 생식이 아닌 쾌락과 관계의 맥락 속에 놓여지고 있지만, 아직 '정조 관념의 죽음'과 '성해방'의 선언문 옆에는 "데리고 놀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구별 짓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이른바 도덕적으로 ‘흠’ 있는 여성이거나 성관계가 ‘문란’하거나 서비스업 혹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경우 아직도 고소의 동기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고 강간에 관한 피해진술의 신빙성을 의심받는 것이 21세기 오늘의 현실입니다.

<레드 마리아>는 지독한 편견을 가진 남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는 것이 목적인 영화는 아니었기에, 성판매여성에 대한 이 사회의 고정관념은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살짝 드러납니다. 바로 ‘리타’의 목소리인데, 1944년 일본군으로부터 집단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어린 것들이 몸을 막 굴린다는 것도 큰 문제야. (…) 우리 때는 처녀가 얼마나 순결했는데 (…) 아무리 돈이 궁해도 네 몸을 파는 것에 대해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아무데나 몸 대주면서 당당하게 돈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니? 권리를 찾으려면 자신한테 먼저 당당할 수 있게 자신을 지켜야 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리타가 다시 “우리 때 사상은 당연히 여자의 순결을 중요시 여겼고 강간이라 하더라도 그걸 지키지 못하면 창녀 취급을 받아야만 하던 때니까 (부끄러워 한 것이었다)”며 “창녀랑 비교해서 이래 저래 논쟁만 하는 건 말도 안 되지. (…) 우리는 여성의 권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그걸 밝힐 용기가 생겼고 (…)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용감해진 것”이라고 여성의 권리와 용기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의 그러한 발언은 "창녀들조차 자신들도 위안부 여성들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창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이어진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상적 페미니스트라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그것의 기반인 문화의 영향을 받는 한명의 여성인 리타가 같은 여성으로서 권리와 용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리타와 상황은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며 연상하게 되는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 귀국 후 자신의 마을과 국가에서 ‘순결이 더럽혀진’ 여성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전국민의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밑에는 이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자발적으로 몸을 준 것’이 아니라 일본군으로부터 '강제로 끌려간 것’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놓여 있습니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희영’은 평택 집창촌에서의 성노동자의 날 3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성노동자의 날은 이 땅의 성노동자들이 인간존엄성을 말살하는 성매매특별법에 저항해 성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성인들 사이의 자율적 성거래 개념으로 규정해 우리 자신의 권리를 선언한 날"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위안부 피해자여성에 대한 응원과 지지가 조직적 강간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자발적인 성적 실천이 비난받을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강제’가 아닌 ‘자율적’ 성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율(혹은 자발)의 의미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 역시 현실입니다. 성매매는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전부가 아닌)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성판매 여성들은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접근은 억압 받는 이들이 동의와 공모 혹은 협조를 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지배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레드 마리아>에서 필리핀의 어떤 성판매 여성도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성실한 직장을 찾기에는 너무 게을러서 우리가 술집에서 일한다고 말하지만, 애들을 키우려면 그것을 관둘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입장들의 충돌 속에서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 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주변부의 존재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나 의사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기보다 주류사회에 의해서 말해지고 규정되어지는 위치에 놓여 왔습니다. “일하고 싶은 곳에서 일할 권리 (희영)”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성매매 구조가 가진 억압성을 규탄하는’ 목소리들이 ‘당사자’라는 단수 명사 안에 완벽하게 합쳐지길 은근히 바라는 나의 속마음은 그 ‘당사자’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성들을 인정하지 않는 태평한 제 3자의 기만적 태도가 아닐까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제 3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좀 거칠게 표현해서 성매매특별법의 재개정 이전에는 성매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이들이, 그 이후 최근에는 그에 저항하는 성노동 지지 진영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매매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 그러한 입장을 가진 여성주의자들은 대부분은 성판매여성의 비범죄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 성판매 여성들이 탈성매매 이후 직업적으로 안정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는 현실과 “나의 자발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성노동자들의 목소리 앞에서 원론적 이야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비판들 중 한 부분이겠죠). 반면 성노동자담론을 지지하는 입장은 여성을 이른바 ‘성녀’와 ‘창녀’로 구분하고 성노동자들을 낙인찍는 보수주의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상당수가 의도적으로 가부장제에 기반한 여성의 성적 통제, 남성중심적 성보수주의와 이중성윤리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여성주의에 겨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업주와 성노동자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성구매 남성의 인권(?)을 보호하며 ‘여성계 (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를 비판하는 것을 성노동자 당사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도 됩니다.

이들은 주로 ‘자율적으로’ 성을 사고파는 것 이면의 남성지배적 젠더권력관계에 대해선 강하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은데, 저는 ‘금지냐, 허용이냐’ 하는 성매매관련 법 적용 문제 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구매 남성들의 욕구와 이해를 읽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성판매 여성은 자신이 가진 우월한 권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남성들은 성구매 경험에서 자신의 성적 만족도가 스스로 느끼는 성적 쾌감 뿐 아니라 여성의 반응에 많이 좌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성적 ‘능력’으로 여성이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을 통해 타인을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남자로서 정체성과 자신감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놓여 있는 것이죠. 따라서 상대 여성이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여지는 - 노동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또한 성매매는 ‘성적인 능력’ 외에도 ‘경제적 능력’을 이용해 상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의 장이기도 합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와 여자친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성구매를 통해 실천하고 또 자신에게 마땅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성판매 여성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들이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에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현실 속에서 남자들에게 성매매 관계 속의 여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편리한 상대로만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그 여성들이 ‘창녀’의 경계를 넘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신의 가족이 누리고 있는 영역에 들어오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습니다. 성노동이 당당하게 ‘노동’으로 자리 잡기 위한 주요조건이 성판매여성들에 대한 ‘창녀’라는 낙인을 없애고 성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성매매 관계 속에서 여성이 남성의 권력에 대해 반응을 제공해주는 통제의 대상이자 상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여성주의의 성찰이 외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의 서두에 <레드 마리아>라는 제목이 여성을 양분하는 가부장제의 이중 잣대를 반영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구도 속에서 ‘창녀’라고 멸시를 받는 ‘나쁜 여자’의 맞은편에는 아늑하고 단란한 안식처 가정을 책임지는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좋은 여자’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 남성은 이른바 공적 영역에서의 노동을 담당하며 아내들에게 “고생은 내가 할테니 당신은 일 하지 말라”는 낭만적 대사를 읊기도 해왔지만, 그동안 그 아내들이 집에서 피아노만 친 것은 아니죠. 시장에서 인정받는 임금 노동은 가사노동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24시간 집에서 수행하는 일은 ‘신성함’으로 포장된 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가치가 저평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영화 속 일본 여성노동자들의 간담회 장면에서 더 이상 ‘좋은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살아있는 목소리들을 통해 증언되고 있습니다). 가사노동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보살핌’ 노동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착하고 신성한 행위로 포장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여성만의 역할로 강제되어 온 ‘타자’의 노동이었습니다. 보살핌 노동이 그토록 신성하고 착하고 좋은 것이라면, 남자들은 왜 그것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높은 시장가치가 보장될 때만 그 일을 하는 걸까요, 속물적으로. 영화 속에서, 이력서에 배우자 없이 아이가 둘 있다고 적으니 “아니 이런 시급으로 괜찮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었던 일본의 여성노동자는 “그런 곳밖에 일할 곳이 없잖아”라고 체념합니다.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라는 구획된 전통적 여성상이 현실 세계 속에서 갖는 기만을 본의 아니게 폭로하는 존재, 이들에게 최적화된 일자리는 비정규직인 듯싶습니다.

필리핀의 어느 성판매 여성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들이다. 당신들이 우릴 창녀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사토는 “파견직이든 임원이든 정규직이든 인생의 무게도 책임도 같다. 여러분의 인생과 일자리를 잃은 파견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생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느껴집니다.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