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리뷰2013. 8. 28. 14:14

< 이화리더십개발원 젠더포럼 토론문 ➀ > 2013. 8. 27.

내가 본 영화, “레드마리아”

조중헌(한양대학교 사회학 박사)

며칠 전 다큐멘터리 <레드 마리아>를 보고 토론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여성들의 노동과 몸을 가로지르는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다 아우를 만큼 깜냥이 되지 못해 걱정에 걱정을 하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만 해보기로 맘먹었습니다.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초점을 맞추어달라는 말씀을 듣고 보니, <레드 마리아>라는 제목이 여성을 창녀(레드)와 성녀(마리아)로 나누는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가 반영된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여성들을 이렇게 양분하여 그들을 주체가 아닌 타자, 통제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론가들은 이러한 면모를 ‘양가적 성차별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적대적 성차별주의가 페미니스트나 미혼모 같은 비전통적 특성일 갖는 여성들에 대한 처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면, 온정적 성차별주의는 전통적 역할을 유지하는 여성에 대한 보상을 주고 칭찬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섹슈얼리티는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은 결혼을 한 남편과 - ‘좋은 여자’가 될 자격이 있는 - 아내 사이의 성밖에는 없죠. 법적으로 인정받은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 공식적 성 관계는 그러나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계급의 남성들에게 유곽과 첩이라는 제도가 있었듯이 현대의 남성들 뒤엔 성매매라는 비공식적 성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 성매매에 대한 사회의 기준은 다분히 이중적이라, 남성이 아닌 여성, 또한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하는 업소는 사회적으로 거의 용납되지 않습니다. 간통을 한 자에 대한 태도 역시 그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이러한 사회의 이중성 앞에서 '신성한 가정'이라는 모토는 얼마나 초라한가요. 남성중심적 유교와 기독교 등을 배경으로 하는 보수주의 진영이 줄창 주장하는 '성적 타락의 방지'라는 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남성만의 비공식적 성 체계를 인정하는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유지'와 같은 표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근대화와 개인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인간의 성은 생식이 아닌 쾌락과 관계의 맥락 속에 놓여지고 있지만, 아직 '정조 관념의 죽음'과 '성해방'의 선언문 옆에는 "데리고 놀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구별 짓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이른바 도덕적으로 ‘흠’ 있는 여성이거나 성관계가 ‘문란’하거나 서비스업 혹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경우 아직도 고소의 동기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고 강간에 관한 피해진술의 신빙성을 의심받는 것이 21세기 오늘의 현실입니다.

<레드 마리아>는 지독한 편견을 가진 남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는 것이 목적인 영화는 아니었기에, 성판매여성에 대한 이 사회의 고정관념은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살짝 드러납니다. 바로 ‘리타’의 목소리인데, 1944년 일본군으로부터 집단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어린 것들이 몸을 막 굴린다는 것도 큰 문제야. (…) 우리 때는 처녀가 얼마나 순결했는데 (…) 아무리 돈이 궁해도 네 몸을 파는 것에 대해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아무데나 몸 대주면서 당당하게 돈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니? 권리를 찾으려면 자신한테 먼저 당당할 수 있게 자신을 지켜야 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리타가 다시 “우리 때 사상은 당연히 여자의 순결을 중요시 여겼고 강간이라 하더라도 그걸 지키지 못하면 창녀 취급을 받아야만 하던 때니까 (부끄러워 한 것이었다)”며 “창녀랑 비교해서 이래 저래 논쟁만 하는 건 말도 안 되지. (…) 우리는 여성의 권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그걸 밝힐 용기가 생겼고 (…)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용감해진 것”이라고 여성의 권리와 용기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의 그러한 발언은 "창녀들조차 자신들도 위안부 여성들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창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이어진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상적 페미니스트라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그것의 기반인 문화의 영향을 받는 한명의 여성인 리타가 같은 여성으로서 권리와 용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리타와 상황은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며 연상하게 되는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 귀국 후 자신의 마을과 국가에서 ‘순결이 더럽혀진’ 여성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전국민의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밑에는 이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자발적으로 몸을 준 것’이 아니라 일본군으로부터 '강제로 끌려간 것’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놓여 있습니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희영’은 평택 집창촌에서의 성노동자의 날 3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성노동자의 날은 이 땅의 성노동자들이 인간존엄성을 말살하는 성매매특별법에 저항해 성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성인들 사이의 자율적 성거래 개념으로 규정해 우리 자신의 권리를 선언한 날"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위안부 피해자여성에 대한 응원과 지지가 조직적 강간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자발적인 성적 실천이 비난받을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강제’가 아닌 ‘자율적’ 성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율(혹은 자발)의 의미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 역시 현실입니다. 성매매는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전부가 아닌)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성판매 여성들은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접근은 억압 받는 이들이 동의와 공모 혹은 협조를 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지배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레드 마리아>에서 필리핀의 어떤 성판매 여성도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성실한 직장을 찾기에는 너무 게을러서 우리가 술집에서 일한다고 말하지만, 애들을 키우려면 그것을 관둘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입장들의 충돌 속에서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 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주변부의 존재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나 의사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기보다 주류사회에 의해서 말해지고 규정되어지는 위치에 놓여 왔습니다. “일하고 싶은 곳에서 일할 권리 (희영)”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성매매 구조가 가진 억압성을 규탄하는’ 목소리들이 ‘당사자’라는 단수 명사 안에 완벽하게 합쳐지길 은근히 바라는 나의 속마음은 그 ‘당사자’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성들을 인정하지 않는 태평한 제 3자의 기만적 태도가 아닐까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제 3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좀 거칠게 표현해서 성매매특별법의 재개정 이전에는 성매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이들이, 그 이후 최근에는 그에 저항하는 성노동 지지 진영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매매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 그러한 입장을 가진 여성주의자들은 대부분은 성판매여성의 비범죄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 성판매 여성들이 탈성매매 이후 직업적으로 안정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는 현실과 “나의 자발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성노동자들의 목소리 앞에서 원론적 이야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비판들 중 한 부분이겠죠). 반면 성노동자담론을 지지하는 입장은 여성을 이른바 ‘성녀’와 ‘창녀’로 구분하고 성노동자들을 낙인찍는 보수주의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상당수가 의도적으로 가부장제에 기반한 여성의 성적 통제, 남성중심적 성보수주의와 이중성윤리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여성주의에 겨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업주와 성노동자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성구매 남성의 인권(?)을 보호하며 ‘여성계 (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를 비판하는 것을 성노동자 당사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도 됩니다.

이들은 주로 ‘자율적으로’ 성을 사고파는 것 이면의 남성지배적 젠더권력관계에 대해선 강하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은데, 저는 ‘금지냐, 허용이냐’ 하는 성매매관련 법 적용 문제 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구매 남성들의 욕구와 이해를 읽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성판매 여성은 자신이 가진 우월한 권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남성들은 성구매 경험에서 자신의 성적 만족도가 스스로 느끼는 성적 쾌감 뿐 아니라 여성의 반응에 많이 좌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성적 ‘능력’으로 여성이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을 통해 타인을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남자로서 정체성과 자신감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놓여 있는 것이죠. 따라서 상대 여성이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여지는 - 노동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또한 성매매는 ‘성적인 능력’ 외에도 ‘경제적 능력’을 이용해 상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의 장이기도 합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와 여자친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성구매를 통해 실천하고 또 자신에게 마땅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성판매 여성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들이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에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현실 속에서 남자들에게 성매매 관계 속의 여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편리한 상대로만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그 여성들이 ‘창녀’의 경계를 넘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신의 가족이 누리고 있는 영역에 들어오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습니다. 성노동이 당당하게 ‘노동’으로 자리 잡기 위한 주요조건이 성판매여성들에 대한 ‘창녀’라는 낙인을 없애고 성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성매매 관계 속에서 여성이 남성의 권력에 대해 반응을 제공해주는 통제의 대상이자 상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여성주의의 성찰이 외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의 서두에 <레드 마리아>라는 제목이 여성을 양분하는 가부장제의 이중 잣대를 반영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구도 속에서 ‘창녀’라고 멸시를 받는 ‘나쁜 여자’의 맞은편에는 아늑하고 단란한 안식처 가정을 책임지는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좋은 여자’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 남성은 이른바 공적 영역에서의 노동을 담당하며 아내들에게 “고생은 내가 할테니 당신은 일 하지 말라”는 낭만적 대사를 읊기도 해왔지만, 그동안 그 아내들이 집에서 피아노만 친 것은 아니죠. 시장에서 인정받는 임금 노동은 가사노동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24시간 집에서 수행하는 일은 ‘신성함’으로 포장된 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가치가 저평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영화 속 일본 여성노동자들의 간담회 장면에서 더 이상 ‘좋은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살아있는 목소리들을 통해 증언되고 있습니다). 가사노동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보살핌’ 노동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착하고 신성한 행위로 포장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여성만의 역할로 강제되어 온 ‘타자’의 노동이었습니다. 보살핌 노동이 그토록 신성하고 착하고 좋은 것이라면, 남자들은 왜 그것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높은 시장가치가 보장될 때만 그 일을 하는 걸까요, 속물적으로. 영화 속에서, 이력서에 배우자 없이 아이가 둘 있다고 적으니 “아니 이런 시급으로 괜찮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었던 일본의 여성노동자는 “그런 곳밖에 일할 곳이 없잖아”라고 체념합니다.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라는 구획된 전통적 여성상이 현실 세계 속에서 갖는 기만을 본의 아니게 폭로하는 존재, 이들에게 최적화된 일자리는 비정규직인 듯싶습니다.

필리핀의 어느 성판매 여성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들이다. 당신들이 우릴 창녀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사토는 “파견직이든 임원이든 정규직이든 인생의 무게도 책임도 같다. 여러분의 인생과 일자리를 잃은 파견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생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느껴집니다.

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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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리뷰2013. 4. 3. 10:25

레드마리아 (경순, 2011)[2012.08.14]

레드마리아 (경순, 2011)

동시대를 사는 아시아 여성들의 삶을 하나의 범주 안에서 기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다만 가장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 내려가서, 이 여성들이 공유하는 어떤 지점들, 즉,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사는 아시아 여성들의 노동, 그리고 그 노동과 분리될 수 없는 몸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몸의 상처, 고통, 활동, 그러니까 그 몸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아마도 그간 남성들의 시선, 언어에서 누락된 아시아 여성들 각각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완결적이지 않고 통합적이지 않으며 파편적이고 희미하지만, 오직 정서적이고 경험적인 연대로 가지를 뻗어가는 아시아 여성들의 지도. 아마도 경순 감독의 <레드마리아>는 그 지도의 첫 장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일본, 그리고 필리핀을 오가며 감독은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일상과 그 일상을 꾸려가기 위한 그들의 노동과 그 일상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시작한 그들의 저항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는 엄마이기도 하고, 성노동자이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이기도 하고, 위안부 여성이기도 하고, 이주민 여성이기도 한 이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공통된 지점들로 엮어내면서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들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이들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한국과 일본의 파견 노동자들이 기업들의 해고에 맞서 어떤 투쟁을 하고 있는지, 한국과 필리핀의 성노동자들이 사회의 편견에 맞서 어떤 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생존을 꾸려 가는지 이어서 보여주는 식이다. 여기에 영화는 특별한 설명을 덧붙여 각 국가의 여성들이 당면한 현실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대신, 그저 그들의 세계 각각을 오갈 뿐인데, 그 과정에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쟁점을 만들어낸다. 요컨대, 오래 전 일본 군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간을 당했던, 지금은 노인이 된 필리핀 여성들 중 한 명이 현실의 성노동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들을 ‘여성의 권리’ 안에서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때, 두 집단은 시스템의 폭력 안에서 자신들의 몸-경험, 혹은 몸-역사로 교집합을 발견하고 끌어안는 법을 터득한다. 그것은 그 어떤 지식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보다 급진적이다. 혹은 영화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을 오갈 때, 우리는 그 유사한 상황 속에서도 계급, 섹슈얼리티, 민족 등의 차이가 빚어내는 다른 삶의 조건들을 보게 되고, 단순히 여성이라는 범주로 포괄할 수 없는, 그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착취와 피착취의 무수한 권력관계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와 끝에서 감독은 자신이 만난 수많은 여성들의 배를 얼굴 없이 찍었다. 늘어지고, 터지고, 불룩한, 각양각색의 형상을 한 신체의 기관, 아니, 여성의 개별 과거를 고스란히 담은 흔적이자, 지금도 살아 숨쉬는 활동으로서 어쩌면 가장 숭고하고 가장 추한, 그리하여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여성 몸의 일부, 아니 전체. 거기, 얼굴이 잘린 이 배들은 이상하게도 대상으로서의 신체 일부가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세계로 느껴진다. <레드마리아>는 무언가 메시지를 역설하거나 어떤 답의 뿌리를 찾기 위해 각국의 여성들의 삶을 모아 깊게 들어가는 대신, 서로를 서로의 질문으로 만들어 즐겁게 펼쳐가며 스스로 네트워크가 되려는 영화다. 무엇보다 이 여성들이 붙잡은 삶의 의지를 기꺼이 끌어안고, 그들의 친구로서,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그 삶들이 마주한 세계들을 바라보려는 영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직, 시작이다.

/ 글: 남다은(영화평론가)

원문출처 http://www.kmdb.or.kr/docu/board/choice_list.asp?seq=1133&Goto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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