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리뷰2013. 11. 26. 01:25

경순 | 존재의 이유  interview / F.OUND 

2013/05/2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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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rtant to Us & Those Who Need_존재의 이유 

경순

 

경순 감독의 영화들은 내가 얼마나 ‘열린 사고’를 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깨지고 아프고 반성하고 고민하고, 한 마디로 그녀에게 매번 함락되면서도 그녀의 영화를 멀리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과정이 현재의 나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작 <레드 마리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영화 <레드 마리아>에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엄마와 창녀, 이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위안부 할머니로 불리는 한국과 일본, 필리핀의 여성들이 다양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돈을 벌고, 6년 넘게 농성을 벌이고,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자신들의 과거를 밝히고, 부정부패한 정부를 한탄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낸다. 다른 모양, 다른 언어,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그녀들의 몸은 묘하게 하나가 된다.


여성의 몸과 노동의 이야기로 시작된 영화는 이 사회의 편견과 제도에 물음표를 날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모든 것이 여성의 ‘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배’로 돌아갈 때 어쩌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이 사회가 만들어낸 물음표들이 사라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고? 당연하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영화를 보는 게 가장 빠른 길이겠지만, 아래의 인터뷰가 어느 정도의 궁금증을 달래 줄 수 있을 것이다.


경순 감독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근하고 따뜻했고 단호하고 의연했다. 거기에 유머러스하기까지 했고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까지 갖추고 있었다. 올해로 14년째 영화를 만들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힘은 뭐였냐고. 그녀가 얘기했다. “계속해서 질문이 있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게 여전히 있기 때문에. 내 속이 답답하니까 뭔가를 계속 찾으면서 그 다음, 그 다음을 해왔던 거 같아요.” 누군가는 그녀에게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렇게 애쓴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고,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세상이라는 것이 쉽게 바뀔 물건도 아니고, 또 쉽게 바뀌어버리면 그 또한 재미없는 일이니까. 그들에게 내가 한마디 해야겠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일을 그녀가 하고 있다고.

 

 

#1. ‘레드 마리아’들의 이야기


여성의 몸과 노동을 이번 영화의 화두로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쌓여있었던 거 같아요.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들과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기존의 잣대들이 파편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 생각이 계속 답답한 갈증처럼 남아 있었어요. 21세기 가부장 사회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이 많이 있어요.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 노동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보통 노동이라고 하면 임금노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이걸 해체해서 비정규직이니, 가사노동이니 윤리적으로 얽혀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했고, 그러면서 몸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거죠. 제가 어릴 때부터 배에 꽂혀있었어요. 목욕탕 가면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아줌마, 언니들 배를 보는 걸 재미있어했어요.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봤는데, 나이가 들면서 배에 감정이 하나씩 하나씩 쓰여지더라구요. 생리도 하고, 임신도 하고, 출산도 하고, 배로 하는 일이 많아진 거 같은데, 왜 여자들은 배를 부끄러워할까. 왜 비밀스럽게 숨겨야 하고, 은밀해야 하는 걸까. 반대로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억압받고 벗어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스스로도 그 벽을 못 깬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출발을 다시 해야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여자와 남자가 다른 건 여자는 가슴, 남자는 자지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자지와 보지인 거잖아요. 보지의 출발은 자궁이고, 그 자궁을 감싸고 있는 것이 배인 건데. 이와 비슷한 형태로 여성의 노동 역시 편견 속에서 고스란히 사회의 노동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려면 몸 얘기를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인물들을 한국여성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일본, 필리핀으로 확장시킨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영화) <쇼킹 패밀리> 상영으로 일본에 6번 정도 다녀왔어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선입관, 경제대국이기 때문에 여성의 삶도 우리보다는 상황이 나을 거라는 막연함을 갖고 일본에 갔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아닌 거죠. 우리보다 훨씬 더 개인의 운신의 폭이 좁고, 발언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적은데 해결돼야 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그대로인 상황인 거죠.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과연 여성의 지위도 그만큼 발전했나, 겉모양만 다를 뿐이지 그 속의 내용들은 똑같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세상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일을 한다는 건 절망적이다. 일과 노숙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노숙을 선택 하겠다”는 이치무라의 이야기는 좀 충격적이었어요. 
영화에는 안 썼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무슨 얘기를 했냐면 이치무라의 이야기가 컬쳐 쇼크라는 얘기를 하면서 “니가 가난을 몰라서 그런다. 우리가 1970년대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일 했는 줄 아냐. 니가 어떻게 노동을 그렇게 얘기할 수 있냐”고 하시더라구요. 이 총회가 한국으로 옮겨왔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거 같아요. 이치무라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을 했던 건 내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노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 왜 노동을 하는지, 노동에 대한 본연적인 질문을 이치무라가 던져준 거잖아요. 노동을 하는 여러 여성들 사이에 노동을 하지 않는 이치무라를 집어넣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구요.

 

성노동자와 위안부 할머니를 같이 놓는다는 게 어떻게 보면 돌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에요. 
<쇼킹 패밀리>를 만들 즈음에 외국에서 성노동자로 활동하는 친구를 소개 받았어요. 친구가 “이 친구는 성노동자야”라고 소개를 해주는데 “어머 반갑다”가 아니라 “어… 그래…” 이렇게 된 거죠. 그날 집에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니까 내 행동이 나 스스로도 당황스럽더라구요.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니, 내가 성노동자에 대해 깊숙이 고민을 안 해본 거지. 그렇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편견이 생긴 이유가 뭘까. 그 끝 지점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자신의 몸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고, 내 몸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똑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이 사회가 2차 가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근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교육을 받아요. 남자 아이가 고추를 내놓고 다니는 건 아무 말 안 하는데 여자 아이는 꼭 팬티를 입히거나 기저귀를 채우죠. 돌 사진만 해도 그래요. 남자 아이들은 고추를 내놓고 사진을 찍잖아요. 거기서부터 이미 여자와 남자가 조심해야 될 것들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이것이 한 쪽의 성노동자와 한 쪽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으로 연결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예민한 얘기라고 해서 덮어둘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고민으로 안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잖아요. 영화에 담긴 이야기는 일부분일 거 같은데 만나면서 어떤 걸 느끼셨어요? 
자라면서 보고 겪고 만났던 사람들을 일본과 필리핀에서 다시 만난 거 같았어요. 그리고 그 주인공들을 길게 꿰면 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필리핀 톤도의 그레이스가 일본의 조순자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좋았던 건 다들 너무 따뜻했다는 거예요. 마치 내 이웃, 언니, 동생, 엄마 같은 분들이셨어요. 나라와 환경은 다르지만 그걸 벗겨놓고 보면 여자들의 수다나 삶, 고민은 비슷한 거 같아요.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역사성, 거기서 나오는 습관이나 버릇만 다를 뿐인데 우리는 왜 자꾸 그것만 크게 얘기를 하고, 굉장히 다른 것처럼 바라볼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2.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감독님 영화는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거 같아요.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기도 하고, 충격을 주기도 하구요. 세상을 보는 감독님만의 시선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어렸을 때부터 쭉 생각해왔던 방식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 안에 고스란히 드러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예를 들면 어떤 거에 통제받지 않고 자랐던 거 같아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고 각각 재혼을 하셨는데, 사실 그분들이 괴로웠던 삶을 빼면 저는 그게 좋았어요. 왜냐면 나한테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근데 남동생은 다르더라구요.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해요. 근데 저는 그걸 굉장히 자유롭게 느꼈거든요. 어릴 때 보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행동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저는 그런 스트레스를 안 받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내가 보고 싶은 거 보고, 그래서 경험의 폭이 조금 넓었던 거 같아요. 학교 다닐 때 날라리 친구도 있고, 모범생 친구도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경순아 너는 친구 따라 강남을 어느 쪽으로 가는 거니?” (웃음) 그 친구들 자체가 나에게 많은 경험들을 하게 해줬죠. 커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문화운동을 하든, 노동운동을 하든 어떤 곳에 있든지 간에 그냥 내 기질대로 살아왔던 거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반응해주는 사람들이 나를 공부하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들었어요. 영화도 마찬가지에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풀리지 않는 고민들을 얻고, 그것들을 이미지로 만드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하는 거죠. 어쩌면 그게 제 나름의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어요.

 

통제가 없다는 건 본인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무언가를 취하고 버려야한다는 건데, 보통은 부모가 그 역할을 해주잖아요. 어린 아이가 혼자 알아서 취하고 버린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그게 부모하고의 관계 속에만 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과 친구들이 다 내 바운더리인 거죠. 보호나 통제라는 것이 좀 더 확대됐다고 보면 될 거 같아요. 내가 뭔가를 할 때 부모가 얘기를 안 해줘도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 듣기도 하고, 아니면 옆집 할머니가 얘기해주시기도 하고, 그분들에 의해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긴 거죠. 그 역할을 부모만이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건데, 저는 그들이 갖고 있는 스스로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판단의 힘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그러지.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근데 학교에 있는 시간만 학생은 아니거든. 그 친구들도 인터넷 하고, TV 보고, 사람들을 만난다는 거죠. 자신들을 보는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 사고를 하는 건데 학교 중심으로 통제를 하는 방식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가족으로 봤을 때는 더 심각한 거지. 어디 가서 못된 짓 하면 엄마 욕먹는다, 그런 방식이 너무 웃긴 거죠. 그건 걔 문제지, 내가 왜 욕을 먹어.

 

근데 그건 저도 아직까지 못 벗어나는 말 중에 하나인 거 같아요. 내가 잘못하면 엄마가 욕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네 다닐 때 인사도 잘하고, 행동도 바르게 하려고 하거든요. 
그게 최면인 거잖아. 씨족사회에서 연대하던 방식이 몇 백 년, 몇 천 년이 흘러서도 똑같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반복된다는 게 웃긴 거죠. 제가 지금 고등학교에서 영화 관련 수업을 하는데 아이들이 처음에는 고민을 안 해요. 자기가 여자라는 것,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것에 대해. 왜냐면 계속 보고 듣는 건 수능에 관련된 거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를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들을 보면서 해소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없는 거죠. 근데 얘기를 하나씩 꺼내놓으니까 우리 때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가 여동생 낳았을 때 할머니가 되게 실망했고, 남동생 낳으니까 너무 좋아했다.  

 

아직도 그렇단 말이에요? 
그런 집이 있다니까. 여자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들을 텍스트로 작업하는 걸 했는데 내가 보여줄게요. 설날 용돈 차등 분배, 항상 왜 남자가 리드를 해야 하나, 그게 얘네들도 꼭 좋은 건 아닌 거야. 여자만 집안 살림할 때, 얘는 촬영감독을 하고 싶나 봐. 촬영은 남자들이 하는 거라고 할 때, 험한 일 못하게 할 때, 생리를 한다는 것, 고등학교 2학년 애들이 이런 얘기들을 한다는 거죠. 이런 얘기가 정말 자유롭게 오가면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건데 얘기를 못하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그래서 내가 ‘웬일이니, 나랑 이 아이들이 몇 십 년 차이인데’ 그랬어요. 그게 어렸을 때부터 바뀌지 않고, 대학 들어가고 성인이 되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하니까 50대든, 40대든, 30대든 똑같은 고민을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겉으로 보기에 생활이 달라졌기 때문에 우린 윗세대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문화적인 코드가 다른 것뿐이에요. 그 외에는 달라진 게 없어요.

 

그 얘기 들으니까 무섭네요. 
깜짝 깜짝 놀란다니까. 컬쳐 쇼크 아니에요?

 

 

 

 

#3. 영화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 

 

대학 졸업하고 노동단체에서 일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일을 하신 거예요? 
졸업을 한 건 아니고 4학년 중퇴를 하고, 시 쓴다고 깝죽대다가 문화운동을 하게 됐어요.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현장 문화운동을 하다가 지하철노조에 들어갔죠. 활동가 간사로 일을 했어요. 근데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가의 역할이 양에 안 차더라구요. 뭔가 좀 더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데, 거기서 이야기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로 전업하게 된 거죠.

 

얘기되지 못하는 것들을 영화를 통해 얘기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렇죠. 대의 속에 가려 있는 얘기들. 노동운동을 한다고 해서 다 미화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노동운동 내에도 차별과 여러 문제점들이 있는 건데 그 안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뜬금없는 얘기가 되니까. 그에 대한 갈증이 컸어요. 그 얘기들을 제대로 하려면 문화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될 것 같았고, 시는 양이 안 차서 영화를 선택했던 거 같아요. 근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궁합이 잘 맞는 거 같아요.

 

영화를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감독님이 영화를 시작하던 1990년대 후반의 독립영화계가 지금보다 환경이 좋았던 것도 아닌데, 영화 만들기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오히려 그때는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었던 거 같아요. 서울인권영화제는 당국의 탄압을 받으면서 열렸고, 인디포럼은 상영장에서 쫓겨나고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상황도 벌어지고. 독립영화를 한다는 느낌이 말 그대로 독립군 같았어요. 그리고 워낙 사회 분위기 자체가 억압되는 분위기였고, 영화를 볼 수 있는 데가 많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토해내는 창구로서 영화를 접했다면, 영화를 접하면서 내가 토해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영화화하는 과정이 점점 재미있어졌어요. 

 

15년 정도 영화를 만들어오셨잖아요. 성장했다는 생각이 드세요? 
전혀 안 들어요. 언젠가 홍형숙 감독이 (영화) <경계도시 2>를 만들고 나서 산 중턱쯤 온 거 같은 느낌이 든다는 얘기를 했는데 나는 늘 영화를 만들 때마다 바닥에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늘 신인 같은 느낌. 이런 건 있죠. 처음엔 당황스러웠던 것들이 덜 당황스러워진다든지, 좀 더 요령이 생긴다든지, 근게 그걸 갖고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 작품을 만들었을 때 내가 그 역할을 못하면 그 작품이 정말 별로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는 늘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게 창작의 매력이죠. 그리고 나이가 많다고 잘 만드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창작 세계에선 작품으로 확인되는 거기 때문에 늘 신인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긴 세월 동안 영화를 계속 할 수 있게 만든 힘은 뭐였어요? 
계속해서 질문이 있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게 여전히 있기 때문에. 내 속이 답답하니까 뭔가를 계속 찾으면서 그 다음, 그 다음을 해왔던 거 같아요. 정말 숨차게 헐떡헐떡 거리면서 10년이 지나갔어요. <레드 마리아>를 하면서는 좀 여유 있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몸이 안 받쳐 주는 거지. (웃음) 나한테 체력은 큰 무기고 재산이었던 거 같아요.

 

영화를 하면서 스스로 변화된 것들이 있으세요? 
그럼요. 저는 영화 만드는 기간 동안 매번 새로운 삶을 사는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성장한다고 느껴요. 영화 자체로 성장을 했다기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배우고 깨지고 고민하고 느낀 것들이 진짜 나를 성장하게 해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본연적으로 공부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그나마 영화를 만들면서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어쩌면 매번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질문들과 사람들이 궁금해요.

 

 

#4. 우리가 사는 세상


수림이(경순 감독의 딸)는 올해 몇 살이에요? 
올해 드디어 스물이 됐어요. 많이 컸죠.

 

진짜 많이 컸네요. <쇼킹 패밀리>에 출연할 때가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떻게 지내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갔어요. 자기가 돈 벌어서.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경제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밥 먹듯이 얘기했는데, 실제로 수림이도 그렇게 생각을 하더라구요. 필리핀에서 돌아온 날부터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서울에 있는 1년 동안 자기가 번 돈으로 나보다 더 떵떵 거리면서 살았어요. (웃음) 근데 자기도 고민이 많겠지. 얼떨결에 나 때문에 필리핀에 딸려 갔다가 혼자 있는 기간 동안 많은 고민을 한 거 같더라구요. 내가 그걸 보면서도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을 하는 구나 그랬어요. 자기의 삶이나 자기의 몫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엄마를 믿었다가는 자기 인생이 구겨질 거라는 걸 아는 거지. (웃음) 앞으로도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해요.

 

수림이 키우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수림이 키우면서 힘든 건 하나도 없었는데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려운 게 너무 많았지. 얘를 왜 안 가르치냐, 얘가 왜 아직도 말을 못 하냐, 얘가 왜 아직도 오줌을 싸냐. 심지어 목욕탕에 애를 데리고 가도 생판 모르는 분이 와서 막 뭐라고 하는 거야. 다 컸는데 기저귀 채운다고. 아까 얘기한 거처럼 아이가 못하면 부모가 욕을 먹는 그런 상황들과 무수히 싸우는 거죠. 그런 시선이 수림이를 불쌍한 애처럼 만드는 거에 대해서 싸웠고, 주로 내가 하는 일은 그런 일이었던 거 같아요. 수림이가 나를 피곤하게 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친구는 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 말썽피우면 피우는 대로, 미우면 미운대로 그런 재미로 애 키우는 건데. (웃음)

 

왠지 수림이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거 같아요. 
다르지만, 다르게 자랐기 때문에 수림이가 느끼는 편견과 부담이 있어요. 수림이가 필리핀에서 혼자 하숙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친구 엄마가 그랬나봐. “넌 졸업하고 어느 대학 갈 거니, 순서가 어떻게 되니?” 근데 얘는 대학 갈 생각도 없는데 “어느 대학 가려구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길 왜 해?”라고 했더니 안 그러면 너무 피곤하다는 거야. 그러면 너 왜 대학을 안 가려고 하니, 그것이 네 인생에 어떤 문제가 되는지 아니, 그게 너무 피곤하다는 거죠. 그런 어려움들은 언제나 있는 거 같아요. 근데 그것 역시도 수림이가 헤쳐 나가야 할 일인 거니까. 

 

혹시 살면서 후회하신 일은 없으세요? 
어릴 때부터 후회하는 걸 되게 싫어했어요. ‘한 일은 절대 후회 안 한다’는 기조가 초등학교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계속 됐고, 영화를 만들면서도 계속 있었어요. 근데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후회하는 맛도 있어야지. (웃음) 누구 약 올리냐고 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느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이거랑 비슷한 예로 자기가 자주 쓰는 단어가 있고, 안 쓰는 단어가 있잖아요. 저는 안 쓰는 단어 중에 자괴감이 있었던 거예요. 예전에 한 친구가 영화가 잘 안 풀려서 글을 썼는데 자괴감 어쩌고 하는 거야. 근데 나는 그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너무 신선했던 거지. 도대체 자괴감은 어떤 감정일까, 그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재수 없다고. (웃음) 나는 정말 궁금했는데.

 

앞으로 후회가 되거나 자괴감이 들면 감독님을 생각해야겠어요. 후회와 자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하면서. (웃음) 요즘 약간의 고민이 있는데 제가 싫어했던 어른의 모습이 되어가는 거 같아요. ‘꼰대’라고 하죠. 남 얘기 잘 안 들으려고 하고, 배배 꼬여있고. 저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만나도 느끼거든요. 그렇게 ‘오픈 마인드’를 외치던 애들이 점점 생각하는 폭이 좁아지는 거 같아요. 
나이가 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일 거예요. 나 역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나 할아버지를 볼 때 똑같이 느끼니까. 끊임없이 긴장해야 되는 거 같아요. 저는 어른이기 때문에 어른 역할을 해야 된다는 말이 불편해요. 잘 못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어른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 긴장하면서 나를 고민하고, 생각해보면 되는 거죠.

 

데뷔 초반과 지금을 비교할 때 세상이 조금 달라진 거 같으세요? 
전혀요. 오히려 더 심각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예를 들면 이주여성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 고민의 수준이 얼마만큼 달라지고 성장했냐를 보면 그렇게 많이 달라진 거 같지 않아요.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구요. 심지어 한국에서는 여성운동과 여성노동운동이 잘 겹합 되어 있지도 않아요. 그래도 <레드 마리아>를 만들면서 여성들 스스로가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누군가는 자꾸 얘기를 해야 된다, 다른 얘기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결국은 불편한 사람이 얘기하는 수밖에 없어요. 단 그 얘기가 너무 공허해지지 않길 바라는 거죠.

 

감독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에요? 
어렵다. 아주 추상적으로 얘기하면 자유로운 세상인 거 같아요. 서로를 통제하는 기준들은 낮고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높은 세상. 그게 국가의 법이든 뭐든 간에 뭔가에 대한 기준치는 정말 필요한 기준치가 되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다양성, 다름에 대해서는 폭이 넓어지길 바래요. 근데 지금 우리는 양쪽 모두 아니잖아요. 다름을 바라보는 폭은 굉장히 낮고, 기준치는 사람마다 다른 걸 적용하려 들죠. 제도나 법이 많이 달라져야 돼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식의 교육과 다른 식의 문화가 있어야 하는 거고. 오늘 앞에서도 많이 얘기했던 거 같은데 저는 여성의 시선이나 여성주의가 중요한 거 같아요. 여성주의 하면 자꾸 남자들과 여자들을 대립시키려고 하는데,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사회를 위한, 사회를 바꾸는 시선인 거죠.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요?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잘 사는 거죠. (웃음) 단 편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상대방도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게 가족이 됐든, 친구가 됐든, 애인이 됐든 간에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수림이도, 그리고 저 역시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issue #21, may 2012, interview
www.foundmag.co.kr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3. 8. 28. 15:21

어제 이대 리더십개발원 주최로 여는 젠더포럼에서 레드마리아를 보고 

여성의 노동에 대한 많은 부분 중 성노동에 대한 이슈를 특화시켜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다.

내가 메인 발제를 하고 두명의 토론자들(조중헌,김엘리)과 함께 이야기를 해보는 자리였다.

포럼이나 토론에 익속하지는 않지만 어제의 자리가 기억에 남는건

주제가 성노동이기는 했으나 참여한 분들의 토론문(토론문은 블러그 리뷰 코너에 올려놓았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노동만 떼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맥락이 있는 것을 다들 공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늘 레드마리아를 보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거나 혹자의 리뷰를 보아도

정작 레드마리아가 이야기하는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빠진듯 하여 영화를 총체적으로 보는 느낌이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어제의 자리가 조금은 뿌듯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야 비로서 레드마리아가 보여주고자 하는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편견을 조금 덜어내고 이야기되는구나 싶었다.

영화를 어떤 맥락에서 보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가 묻어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수많은 과정... 그것이 역사고 사건이고 관계고 윤리고 가족이고 노동인 모든 것들이 해명되지 않고서 

어떻게 가부장사회에서 만들어진 현재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의 틀로만 말 할 수 있겠는가.

문득 이런 이야기들을 다시 하는 과정도 결국은 레드마리아2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연장이 아닌가 싶어

매번 곰곰히 되씹게 된다.


오늘 성노동자 연희와 그의 동무를 만난다.

간만에 밥도 먹고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자리기는 하지만

그녀와 다시한번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얼만큼의 너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지.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 주었으며 그 자리가 편하고 좋은지.

그리고 사실 그런 이야기는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수많은 할머니들과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돌아가신 분들이 많으니 유령과의 만남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살아오는 동안 당신들의 공간은 어느만큼 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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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기사와 리뷰2013. 8. 28. 14:21

< 이화리더십개발원 젠더포럼 토론문 ➁ > 2013. 8. 27.

레드마리아, 성노동자, 여성주의자들

김엘리 (이화여대 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

레드마리아를 영화관에서 보고, 이번 젠더포럼을 위해 다시 봤다. 처음 영화관을 찾았을 때는 레드마리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응원의 맘으로 그래서 좀은 흥분한 상태에서 감상했고, 이번에는 여유롭게, 좀은 멍한 상태에서 봤다. 다양한 배꼽모양을 드러낸 배들이 역시나 인상적이다. 여성의 몸은 참으로 다양하다. 다양한 만큼 여성들의 경험도 다양하다. 나에게 레드마리아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 “과연 여성들에게 일이란?”

일본의 여성들도, 필리핀의 여성들도, 그리고 한국의 여성들도 ‘일한다.’ 일은 임금을 받든 아니든 사람들이 먹고, 낳고, 키우고, 사랑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혹은 느끼며 즐기는 다양한 자원을 제공한다. 뭣보다 여성주의자들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공적 영역에서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 생산을 노동으로 정의하는 주류 개념을 뒤집어, 보이지 않으나(엄밀하게 말하면, 사랑과 희생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어서) ‘우리’의 기본적인 생존을 가능하게 한 여성들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돌봄 노동이 일상적으로 우리의 삶을 유지케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드러내어 노동의 개념을 새롭게 재정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드마리아는 공과 사, 보이는 노동과 보이지 않는 노동,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 경쟁사회에서의 과잉노동/남성중심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노동과 이를 거부하는 저항노동,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 이른바 도덕적인 노동과 부도덕한 노동.. 이 모든 노동은 연결돼 있으며, 여성들의 일이며, 여성들은 어디서든 언제든지 노동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도 그 맥락에 있다. 젠더포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 - 성매매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레드마리아는 여성의 일이라는 맥락에서 성매매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합법화냐 혹은 도덕적이냐 와 같은 규범적인 색은 없다. 그냥 여성들이 하는 일이다. 이 지점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많은 사람들은 성매매를 이야기할 때 매우 교훈적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성판매 여성들을 지시하는 여러 언표들이 있다. 더러움, 오염, 불결함,

성매매는 사회적으로 일이라기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혹은 불법적인 것이다. 1990년대 초반 내가 <막달레나 집>에서 자원활동을 할 때, 현장출신 활동가님이 시도 때도 없이 “성매매는 합법화돼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세금도 내고 덜 착취당해한다”고. 혼란스러웠다. 현장출신 활동가님이 말하니 참으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싶은데, 이 말을 내가 일하는 여성단체의 선배들에게 고스란히 말하니, 다들 성매매는 “근절”돼야한다고 “주장”한다. 나와 함께 일하는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네트워크 활동가님들도 성매매는 근절돼야한다는 분명한 입장으로 일한다. 마치 합법화와 금지주의 입장만 팽팽하게 긴장감을 돋우는 것처럼 보이는 판에 그나마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막달레나의 집> 연구활동가들은 성매매를 합법화/근절이라는 정책의 차원에서 논하기보다는 성판매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성매매를 논했다. 성판매 여성들이 말하는 인권이란 무엇인가, 거기에서 출발해야한다는 문제제기는 좀 더 현장성을 어떤 당위와 이념이 아닌, 여성들의 경험(입장)에서 봐야한다는 점을 일깨워줬다.

2000년과 2002년도에 성판매여성들의 비인간적 실태가 드러난 군산화재사건은 전국을 들썩였고, 2003년도에 기지촌 여성들의 반인권적 실태가 미국 팍스방송을 타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이 인신매매, 반인권국가로 겨냥됐다. 그러고 나서 2004년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됐다.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싸고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다른 입장들이 불거져 나왔다. 성판매여성들의 노조인 민성노련이 결성돼서 출범했고, 성판매여성을 성노동자로 호명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성명서를 냈다. 그동안 성매매근절을 주장했던 여성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연구자도 등장했다. 성매매근절운동을 한 여성주의자들은 서구여성주의자들이 식민지 여성들을 타자화하듯이 성판매여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판매여성과 여성주의자들이 마치 대립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언론방송을 통해 연출되면서 성매매특별법은 애물단지가 됐고, 여성주의자들은 여성들‘도’ 외면하는 자기 이념으로 뭉친 꼴페미 취급을 받았다.

성매매 이슈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한 사회의 여러 모순(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이 다 복합적으로 얽힌 현장이므로 한 가닥의 이야기로만 풀 수 없는 이슈이다. 그리고 노동으로만, 혹은 폭력이나 범죄행위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성매매는 폭력적 성격이 다분히 있다. 성매매근절운동가들이 제시해왔듯이, 많은 성판매 여성들은 좁은 선택지에서 착취와 폭력을 당하며 비인간적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을 매개로한 폭력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성매매는 이를 에워싼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이윤이 창출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 때 성매매 거래규모는 국내총생산 대비 4.1%로서 농림어업의 것과 맞먹을 정도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특히 감정과 성적 서비스의 상품화가 확장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성매매는 그 노동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전통적 노동의 개념에서 볼 때, 성매매는 전형적인 노동형태가 아니므로, 노동의 의미를 재정의할 필요성을 자극한다. 뭣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상품화된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강하기에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논하는 것에 대해 심리적 거부 반응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캐슬린 베리가 말하듯이 성매매를 폭력으로만 규정하여 설명할 수만은 없다. 그 현장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고, 관계성이 있다.

성매매가 여러 성격이 얽힌 복합적인 현장이라면, 그 설명 또한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성매매는 폭력적이면서도 성적이며, 또 노동이다. 그런데 성매매에 관해 우리가 좀 더 섬세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뭣보다 섹슈얼리티에 묻어있는 도덕성을, 성에 관한 신화를 벗겨내는 일이 필요하다. 섹슈얼리티는 이미 규범적이다. 도덕적인 성과 부도덕한 성, 좋은 성과 나쁜 성으로 구획돼있다. 이 틀에서 보면, 성매매는 윤리적으로 나쁜 성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 틀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선행된 잣대로 판단한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다. “성매매가 없어질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군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만큼이나 그동안 살면서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을 받는 듯, 다소 당황해하는 학생들 중에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성매매는 인간 욕망의 문제이기 때문에 없어진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시공간적으로 초월한 본능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성매매 역시 이를 에워싼 권력관계를 해체하면서 다양한 성적 욕망을 상상해보는 일은 의미 있다. 말하자면, 돈으로 거래되는 욕망이 아닌, 규범적으로 구획된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관계 안에서 욕망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것 말이다. 성매매도 권력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른바 성적 본능이라는 것도 그 권력관계 안에서 발휘한다. 누군가 통제하고픈 욕망은 함께 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를 만드는 그 권력을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적이다.

또 하나 짚을 점은 성판매여성을 성노동자로 호명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합법화하는데 한 표를 던진다든가 성매매의 지속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하고도 환원적인 이러한 논리 전개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성매매를 노동의 문제로 내놓고 공개적으로 더 깊은 논의하기를 조심스러워한다. 여성주의자들의 논의를 왜곡되게 전유하거나 ‘합법이냐 금지냐’ 하는 이원화된 틀로 그 논의를 환원하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 어떤 이슈를 규제한다고 해서 그 이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이, 법은 최소한의 조치이다. 성매매를 법이나 제도의 차원에서 정의하는 일과 다르게, 우리의 성적 욕망과 권력에 관하여 많은 수다를 떨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의 이야기가 레드마리아에서부터 꽤 많이 간 듯한 느낌이다. 털털하면서 수다스러운 경순 감독님의 영화 영상 못지않은 발제이야기를 젠더포럼에서 들으면서 레드마리아를 감상하려 한다. 그 때 좀 더 섬세한 이야기를 나누길 기대하며. 자신의 배꼽(경험, 이야기)을 좀은 수줍게 또는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와 나눈 레드마리아 여성들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레드마리아, 멋지다!

Posted by 빨간경순
기사와 리뷰2013. 8. 28. 14:14

< 이화리더십개발원 젠더포럼 토론문 ➀ > 2013. 8. 27.

내가 본 영화, “레드마리아”

조중헌(한양대학교 사회학 박사)

며칠 전 다큐멘터리 <레드 마리아>를 보고 토론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여성들의 노동과 몸을 가로지르는 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다 아우를 만큼 깜냥이 되지 못해 걱정에 걱정을 하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이야기만 해보기로 맘먹었습니다.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초점을 맞추어달라는 말씀을 듣고 보니, <레드 마리아>라는 제목이 여성을 창녀(레드)와 성녀(마리아)로 나누는 우리 사회의 이중 잣대가 반영된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여성들을 이렇게 양분하여 그들을 주체가 아닌 타자, 통제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론가들은 이러한 면모를 ‘양가적 성차별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적대적 성차별주의가 페미니스트나 미혼모 같은 비전통적 특성일 갖는 여성들에 대한 처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면, 온정적 성차별주의는 전통적 역할을 유지하는 여성에 대한 보상을 주고 칭찬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섹슈얼리티는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은 결혼을 한 남편과 - ‘좋은 여자’가 될 자격이 있는 - 아내 사이의 성밖에는 없죠. 법적으로 인정받은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 공식적 성 관계는 그러나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계급의 남성들에게 유곽과 첩이라는 제도가 있었듯이 현대의 남성들 뒤엔 성매매라는 비공식적 성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 성매매에 대한 사회의 기준은 다분히 이중적이라, 남성이 아닌 여성, 또한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하는 업소는 사회적으로 거의 용납되지 않습니다. 간통을 한 자에 대한 태도 역시 그가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이러한 사회의 이중성 앞에서 '신성한 가정'이라는 모토는 얼마나 초라한가요. 남성중심적 유교와 기독교 등을 배경으로 하는 보수주의 진영이 줄창 주장하는 '성적 타락의 방지'라는 것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남성만의 비공식적 성 체계를 인정하는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유지'와 같은 표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근대화와 개인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인간의 성은 생식이 아닌 쾌락과 관계의 맥락 속에 놓여지고 있지만, 아직 '정조 관념의 죽음'과 '성해방'의 선언문 옆에는 "데리고 놀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구별 짓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이른바 도덕적으로 ‘흠’ 있는 여성이거나 성관계가 ‘문란’하거나 서비스업 혹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경우 아직도 고소의 동기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받고 강간에 관한 피해진술의 신빙성을 의심받는 것이 21세기 오늘의 현실입니다.

<레드 마리아>는 지독한 편견을 가진 남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는 것이 목적인 영화는 아니었기에, 성판매여성에 대한 이 사회의 고정관념은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살짝 드러납니다. 바로 ‘리타’의 목소리인데, 1944년 일본군으로부터 집단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어린 것들이 몸을 막 굴린다는 것도 큰 문제야. (…) 우리 때는 처녀가 얼마나 순결했는데 (…) 아무리 돈이 궁해도 네 몸을 파는 것에 대해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아무데나 몸 대주면서 당당하게 돈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니? 권리를 찾으려면 자신한테 먼저 당당할 수 있게 자신을 지켜야 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리타가 다시 “우리 때 사상은 당연히 여자의 순결을 중요시 여겼고 강간이라 하더라도 그걸 지키지 못하면 창녀 취급을 받아야만 하던 때니까 (부끄러워 한 것이었다)”며 “창녀랑 비교해서 이래 저래 논쟁만 하는 건 말도 안 되지. (…) 우리는 여성의 권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그걸 밝힐 용기가 생겼고 (…)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용감해진 것”이라고 여성의 권리와 용기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의 그러한 발언은 "창녀들조차 자신들도 위안부 여성들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창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고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이어진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상적 페미니스트라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그것의 기반인 문화의 영향을 받는 한명의 여성인 리타가 같은 여성으로서 권리와 용기를 이야기하기 위한 조건이 바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리타와 상황은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며 연상하게 되는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우 귀국 후 자신의 마을과 국가에서 ‘순결이 더럽혀진’ 여성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전국민의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밑에는 이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자발적으로 몸을 준 것’이 아니라 일본군으로부터 '강제로 끌려간 것’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놓여 있습니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희영’은 평택 집창촌에서의 성노동자의 날 3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성노동자의 날은 이 땅의 성노동자들이 인간존엄성을 말살하는 성매매특별법에 저항해 성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성인들 사이의 자율적 성거래 개념으로 규정해 우리 자신의 권리를 선언한 날"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위안부 피해자여성에 대한 응원과 지지가 조직적 강간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자발적인 성적 실천이 비난받을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강제’가 아닌 ‘자율적’ 성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율(혹은 자발)의 의미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 역시 현실입니다. 성매매는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전부가 아닌)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성판매 여성들은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접근은 억압 받는 이들이 동의와 공모 혹은 협조를 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지배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레드 마리아>에서 필리핀의 어떤 성판매 여성도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성실한 직장을 찾기에는 너무 게을러서 우리가 술집에서 일한다고 말하지만, 애들을 키우려면 그것을 관둘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입장들의 충돌 속에서 당사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울려 퍼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주변부의 존재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나 의사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기보다 주류사회에 의해서 말해지고 규정되어지는 위치에 놓여 왔습니다. “일하고 싶은 곳에서 일할 권리 (희영)”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성매매 구조가 가진 억압성을 규탄하는’ 목소리들이 ‘당사자’라는 단수 명사 안에 완벽하게 합쳐지길 은근히 바라는 나의 속마음은 그 ‘당사자’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체성들을 인정하지 않는 태평한 제 3자의 기만적 태도가 아닐까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제 3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좀 거칠게 표현해서 성매매특별법의 재개정 이전에는 성매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이들이, 그 이후 최근에는 그에 저항하는 성노동 지지 진영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매매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 그러한 입장을 가진 여성주의자들은 대부분은 성판매여성의 비범죄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 성판매 여성들이 탈성매매 이후 직업적으로 안정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는 현실과 “나의 자발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성노동자들의 목소리 앞에서 원론적 이야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비판들 중 한 부분이겠죠). 반면 성노동자담론을 지지하는 입장은 여성을 이른바 ‘성녀’와 ‘창녀’로 구분하고 성노동자들을 낙인찍는 보수주의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상당수가 의도적으로 가부장제에 기반한 여성의 성적 통제, 남성중심적 성보수주의와 이중성윤리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여성주의에 겨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업주와 성노동자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성구매 남성의 인권(?)을 보호하며 ‘여성계 (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를 비판하는 것을 성노동자 당사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도 됩니다.

이들은 주로 ‘자율적으로’ 성을 사고파는 것 이면의 남성지배적 젠더권력관계에 대해선 강하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은데, 저는 ‘금지냐, 허용이냐’ 하는 성매매관련 법 적용 문제 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구매 남성들의 욕구와 이해를 읽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성판매 여성은 자신이 가진 우월한 권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원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남성들은 성구매 경험에서 자신의 성적 만족도가 스스로 느끼는 성적 쾌감 뿐 아니라 여성의 반응에 많이 좌우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성적 ‘능력’으로 여성이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을 통해 타인을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남자로서 정체성과 자신감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놓여 있는 것이죠. 따라서 상대 여성이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여지는 - 노동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또한 성매매는 ‘성적인 능력’ 외에도 ‘경제적 능력’을 이용해 상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의 장이기도 합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와 여자친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성구매를 통해 실천하고 또 자신에게 마땅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으로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성판매 여성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들이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에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현실 속에서 남자들에게 성매매 관계 속의 여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편리한 상대로만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그 여성들이 ‘창녀’의 경계를 넘어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신의 가족이 누리고 있는 영역에 들어오는 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습니다. 성노동이 당당하게 ‘노동’으로 자리 잡기 위한 주요조건이 성판매여성들에 대한 ‘창녀’라는 낙인을 없애고 성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성매매 관계 속에서 여성이 남성의 권력에 대해 반응을 제공해주는 통제의 대상이자 상품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여성주의의 성찰이 외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의 서두에 <레드 마리아>라는 제목이 여성을 양분하는 가부장제의 이중 잣대를 반영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구도 속에서 ‘창녀’라고 멸시를 받는 ‘나쁜 여자’의 맞은편에는 아늑하고 단란한 안식처 가정을 책임지는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좋은 여자’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 남성은 이른바 공적 영역에서의 노동을 담당하며 아내들에게 “고생은 내가 할테니 당신은 일 하지 말라”는 낭만적 대사를 읊기도 해왔지만, 그동안 그 아내들이 집에서 피아노만 친 것은 아니죠. 시장에서 인정받는 임금 노동은 가사노동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24시간 집에서 수행하는 일은 ‘신성함’으로 포장된 채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가치가 저평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영화 속 일본 여성노동자들의 간담회 장면에서 더 이상 ‘좋은 여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살아있는 목소리들을 통해 증언되고 있습니다). 가사노동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보살핌’ 노동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착하고 신성한 행위로 포장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여성만의 역할로 강제되어 온 ‘타자’의 노동이었습니다. 보살핌 노동이 그토록 신성하고 착하고 좋은 것이라면, 남자들은 왜 그것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높은 시장가치가 보장될 때만 그 일을 하는 걸까요, 속물적으로. 영화 속에서, 이력서에 배우자 없이 아이가 둘 있다고 적으니 “아니 이런 시급으로 괜찮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었던 일본의 여성노동자는 “그런 곳밖에 일할 곳이 없잖아”라고 체념합니다. ‘좋은 여자’와 ‘나쁜 여자’라는 구획된 전통적 여성상이 현실 세계 속에서 갖는 기만을 본의 아니게 폭로하는 존재, 이들에게 최적화된 일자리는 비정규직인 듯싶습니다.

필리핀의 어느 성판매 여성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들이다. 당신들이 우릴 창녀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사토는 “파견직이든 임원이든 정규직이든 인생의 무게도 책임도 같다. 여러분의 인생과 일자리를 잃은 파견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생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느껴집니다.

Posted by 빨간경순
기사와 리뷰2013. 4. 3. 10:25

레드마리아 (경순, 2011)[2012.08.14]

레드마리아 (경순, 2011)

동시대를 사는 아시아 여성들의 삶을 하나의 범주 안에서 기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다만 가장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 내려가서, 이 여성들이 공유하는 어떤 지점들, 즉,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사는 아시아 여성들의 노동, 그리고 그 노동과 분리될 수 없는 몸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몸의 상처, 고통, 활동, 그러니까 그 몸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아마도 그간 남성들의 시선, 언어에서 누락된 아시아 여성들 각각의 과거와 현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완결적이지 않고 통합적이지 않으며 파편적이고 희미하지만, 오직 정서적이고 경험적인 연대로 가지를 뻗어가는 아시아 여성들의 지도. 아마도 경순 감독의 <레드마리아>는 그 지도의 첫 장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일본, 그리고 필리핀을 오가며 감독은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일상과 그 일상을 꾸려가기 위한 그들의 노동과 그 일상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시작한 그들의 저항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는 엄마이기도 하고, 성노동자이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이기도 하고, 위안부 여성이기도 하고, 이주민 여성이기도 한 이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공통된 지점들로 엮어내면서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들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이들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한국과 일본의 파견 노동자들이 기업들의 해고에 맞서 어떤 투쟁을 하고 있는지, 한국과 필리핀의 성노동자들이 사회의 편견에 맞서 어떤 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생존을 꾸려 가는지 이어서 보여주는 식이다. 여기에 영화는 특별한 설명을 덧붙여 각 국가의 여성들이 당면한 현실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대신, 그저 그들의 세계 각각을 오갈 뿐인데, 그 과정에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쟁점을 만들어낸다. 요컨대, 오래 전 일본 군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간을 당했던, 지금은 노인이 된 필리핀 여성들 중 한 명이 현실의 성노동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들을 ‘여성의 권리’ 안에서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때, 두 집단은 시스템의 폭력 안에서 자신들의 몸-경험, 혹은 몸-역사로 교집합을 발견하고 끌어안는 법을 터득한다. 그것은 그 어떤 지식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보다 급진적이다. 혹은 영화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을 오갈 때, 우리는 그 유사한 상황 속에서도 계급, 섹슈얼리티, 민족 등의 차이가 빚어내는 다른 삶의 조건들을 보게 되고, 단순히 여성이라는 범주로 포괄할 수 없는, 그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착취와 피착취의 무수한 권력관계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와 끝에서 감독은 자신이 만난 수많은 여성들의 배를 얼굴 없이 찍었다. 늘어지고, 터지고, 불룩한, 각양각색의 형상을 한 신체의 기관, 아니, 여성의 개별 과거를 고스란히 담은 흔적이자, 지금도 살아 숨쉬는 활동으로서 어쩌면 가장 숭고하고 가장 추한, 그리하여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여성 몸의 일부, 아니 전체. 거기, 얼굴이 잘린 이 배들은 이상하게도 대상으로서의 신체 일부가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세계로 느껴진다. <레드마리아>는 무언가 메시지를 역설하거나 어떤 답의 뿌리를 찾기 위해 각국의 여성들의 삶을 모아 깊게 들어가는 대신, 서로를 서로의 질문으로 만들어 즐겁게 펼쳐가며 스스로 네트워크가 되려는 영화다. 무엇보다 이 여성들이 붙잡은 삶의 의지를 기꺼이 끌어안고, 그들의 친구로서,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그 삶들이 마주한 세계들을 바라보려는 영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직, 시작이다.

/ 글: 남다은(영화평론가)

원문출처 http://www.kmdb.or.kr/docu/board/choice_list.asp?seq=1133&GotoPage=1

Posted by 빨간경순
기사와 리뷰2012. 12. 27. 15:22

이번달 초에 여성국제연대행동네트워크에서 레드마리아 상영이 있었다.

그 모임에 주도적인 참여자 중 하나인 쥬드가 영화가 참 좋았다고 하길래

리뷰로 보답하라고 했더니만 글을 보내왔다.

리뷰에 대한 피드백을 해달라고 하기에 그랬다.

나는 내영화를 보고 쓴 어떤종류의 글이든 비평이든 다시 비평하지 않는다가 원칙이라고.^^

 

어디 블러그에 올려진 글도 아니기에 하두 고마워서

내 블러그에 올리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영화 시작 , 붉은 흘림체로 씌어진 제목, 레드 마리아가 시선을 사로 잡는다. 일반적으로 마리아는 항상 결혼식장에 순수하오라고 광고하며 들어가야 하는 신부들의 하얀 드레스와 같이 백색의 뽀얀 이미지다. 정상적인 성교도 없이 아이를 잉태했으니, 오죽이나 하얗고 순수 하실까. 앞에 피처럼 흘러내리는 글씨체로 레드를 붙여 놓았으니, 감독의 익살스러움에 웃음이 난다. 크리스테바의(Julia Kristeva) 책에 자주 등장하는 비체(abstract), 주체를 비체로 구성하기 위해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고름, , 토사물, 배변 등이다. 감독은 피의 색을 통해, 백색인 마리아를 비체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진 않았더라도, 신화적 순수함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렸음은 분명하다.

레드 마리아는 한국, 일본,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적지 않은 여성들의 삶을 98 안에 숨차게 보여준다. 그러나 들쭉날쭉 끼워 맞춰진 그녀들의 삶은 놀랍게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한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을 화면에 담는다. 이들은 가정에서 어머니, 부인, 며느리의 역할 외에 사회에서 정규직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다. 가부장적인 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이들은 누군가가제대로살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은 일본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예고 없이 해고당한 사토의 투쟁과 일본사회 내에서 이루 말할 없는 부당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재일 조선인 순자, 사회복지사 직업의 고단함을 보여준다. 화면 그녀의 노동이 매우 고달프게 조명되고 있진 않지만, 그녀의 월급이 자막으로 제공될 , 우리는 급작스럽게 그녀가 하는 노동의 고단함을 체험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사회에서 그래도 여성의 노동으로 인정해 주는 부류를 보여준 , 영화는 굳건한 가부장이 종교 또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여성에게 이중 잣대를 드리우고 있는 노동자 삶을 보여준다. 카톨릭의 막대한 영향력이 곳곳에 미치고 있는 필리핀에서 마리아는 여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회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주점에 나가 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죄책감은 고단한 그녀들의 육체적 고통 위에 남성중심적인 종교가선사하는 다른 정신적 노동이다. 이들은 그들 사회에서 모든 이들에게 존경 받는 마리아가 되기는 틀린 것이다. 1970년대 한국의 외화벌이를 위해 군사 독재자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나서 설립한 홍등가가 당시 100군데가 넘었다. 이들은 외화벌이의역군으로 칭해지며, 때론 미군으로부터현모양처들을 지키기 위한 보호막이 되고, 일본인들의 유흥을 돋구기 위한 노리갯감이 되었다. 사회 필요악이라는 명분으로 전체 GDP 1~2% 차지하는 성산업에 여성들을 대거 유입시키더니, 이제는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들을 사회 구석에서조차 몰아내고 있다. 한국의 젊은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맥락에서 필리핀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영화는 이러한 사회에서 조차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노동, 가정 내에서의 노동을 비춘다. 소위 배운 한국 여성들이 기피하는 농촌, 곳엔 동남아시아 부인들이 있다. 하이힐을 신고 비료를 나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도 농촌 일이 익숙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있다. 이상 한국여성들이 하지 않아 비워진 자리를 그녀들의 노동이 채워주고 있다. 무임금으로그녀의 노동은 그녀의 남편이 농사를 짓게 하고, 한국인들이 농산품을 소비하게 하는데, 무임금 보조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사회가 정해놓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주체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노숙자 이치무라를 보여준다. 그녀는 일본사회가 그녀에게여성의로서 요구하고 있는 노동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요구하고 있는 노동도 모두 거부하며, 여성의 몸이 생산하는 노동 생리를 위한 노동만 참여한다. 그것은 바로 생리대 만들기이다. 그녀의 이러한 행위는 사회에서여성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다른 여성들에게 위협적이다. 이러한 위협은 일하는 여성들의 모임에서 발언한 여성들의 속에서 읽을 있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느끼는 그녀의 절망감이 무노동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느낀 참가자들은, 그녀의 행동을 용감한 행위로 칭하며 남편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희생된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영화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성에게 내어 주긴 했지만, 온전히 주지 않은노동자의 자리 비정규직 투쟁으로, 사회가 남성을 위해 허가한 성산업을 사회 뒷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의 비가시적노동으로, 가정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의 노동을 무임금 노동으로 그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사회가 부당하게 여성에게 지우고 있는 가시적, 비가지석 노동을 모두 거부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이렇듯, 여성에게 사회가 부가하고 있는 다층의 노동 개념을 현장에서, 그녀들의 목소리와 행위, 투쟁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사회 여성의 역할에안주하며살고 계시는 그리고 나라의 여성지위가 세계 108 것에 분노 없이, 그저 비둘기처럼 구구 거리며 사회에 순응해 살고 계시는 많은 여성들에게 힘들고 불편한 영화 것이다. ? 고민해야 하니까? 그래, 감독의 말처럼, 영환 친절하지는 않다. 그러나 말은 해야겠다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Posted by 빨간경순
상영정보2012. 12. 3. 14:27

여성국제연대행동네트워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지지하는 단체로 주로 국내외 외국인들이 중심으로 활동하는단체라고 한다.

이날 상영은 한.영문자막으로 상영이 될 예정이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그들이 직접 상영포스터를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1. 2. 22. 16:56

대충 봄 냄새가 나의 무딘코에까지 전해지는 걸 보면 겨울이 얼추 지나간 거 같다. 한때는 겨울이 그렇게도 좋았는데 그래서 겨울이 다 간거 같은 애매한 2월이 참 싫었는데 언제부턴가 봄이오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뭐 봄이 와도 여전히 나는 레드마리아와 함께 머리가 아프겠지만. 그래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진짜 쑤신다.

레드마리아를 찍으면서 여유있게 글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져 점점 더 글과는 거리가 느껴지는터라 조금씩 다시 회복해 보고자 노력중이다. 그동안 글이라는 건 기획서와 지원서 그리고 섭외하는 내용과 현장에서의 구상등이 전부고 모든 건 머리에서 돌아갔다.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글을 쓸 시간도 없어서 한동안은 머리로 글을 쓰는 습관까지 생겼다. 뭔가 쓰고 싶은 거리들이 생각나면 걸어가면서 차를 타면서 촬영장에 나가면서 머리로 글을썼다. 문장을 써나가면서 지우기도 하고 다시 쓰는 이과정이 끊임없이 반복이 됐는데 결국 그 머리로 썼던 글들을 컴퓨터에 앉아 옮겨야지 생각하고 나면 당근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그렇지. 안그래도 잘까먹는 내가 무슨 수로..우자지간 그런 과정을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글을 쓰는게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글을 쓰는 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편집을 할 때도 이거야 워낙 습관이기는 하지만 영상으로 구성을 하고 바로 편집을 하다보니 구성안이라는 것도 써보지를 못했다. 사람마다 습관이 있겠는데 나는 글로 구성을 하는게 익숙하지 않다. 그림 봐야 상상력이 잘 가동이 되는지라 편집구성안을 먼저 정리하고 편집을 하는게 잘 안된다. 그러다보니 가편을 할때 구성이 휙휙 변한다. 물론 생각이 변하면.

하지만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다.포기할 수 없는 생각.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 시작이 된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던 그리고 그 출발이 여성의 몸이라는 것. 그런데 이게 쉽게 그림으로 연결이 잘 안됐다. 가편 모니터를 하니 누구는 몸과 노동을 분리하라고도 하고 누구는 주인공중 서너명은 과감히 포기하라고 하고 누구는 영화자체를 포기하라는 말도 했지 아마. 그래 그래서 쉽게 끝날 거 같던 이 편집은 길어지고 그만큼 머리도 복잡해 진다.

나의 생각이 틀렸던 걸까. 그게 무리한 시도였던 걸까. 온갖 생각들이 자신을 후벼파기 시작한다. 그런데 누구는 거기다 한술 더떠 이런 걱정까지 해준다. 영화가 완성되면 어디서 틀어줄지 걱정이라고. 왜 그게 걱정이야? 아니 신작도 아닌데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서요...야 뭔소리야 신작이지. 여성영화제 옥랑상 프리미어 상영해야 돼서 완성도 안된걸 무리해서 딱 한번 상영한게 고작인데 그리고 이제 영화를 완성해 보려고 아둥바둥 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 그런 고민까지 떠안고 가야한단 말이야.

내심 가까운 독립영화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게 여간 속상하고 서운한게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날 하루종일 머리에서 뚜껑이 여러번 열렸다 닫혔다 했지만 그리고 영화제서 영화 안틀면 지들 손해지 내손핸가? 라고 큰소리 빵빵쳤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개인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완성되고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라는데 이런정도의 생각이야 가능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속상하다. 의욕도 상실될 위기.

무슨 놈의 팔자인지 이상하게 레드마리아를 만드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엄살 좀 부릴 여유가 없이 뭔가 끊임없이 대처를 하고 또 대처를 하고 대처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거 같다. 뭐 그래서 또 더 애착이 가는 작업인지도 모르겠고.이번주는 3차 가편본 모니터 중이다. 1차 2차는 공개적인 모니터를 했는데 이번에는 개별 모니터를 받고 있다.근데 하나씩 들어오는 의견이 나쁘지 않다. 물론 아직 끝은 아니다. 좀 있으면 도착할 애니메이션 작가와 또 즐거운 설전을 벌여야 하고 군데군데 영상을 정리할 것들도 많다. 역시 영화로 돌아가니 다시 의욕이 불끈불끈.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