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위안부2012. 3. 14. 14:01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일제말 트럭군도 근무자 “위안부, 하루 10시간 15명 상대”
 
“일본군 외출 때 콘돔 주며 출입 부추겨…90%가 한국처녀”



<한겨레>가 일본 뉴스 전문 포털사이트 <제이피뉴스>(JPnews.kr)와 제휴해 일본 소식을 전달합니다. 전여옥 의원과 ‘일본은 없다’ 재판을 벌여 지난 1월13일 2심에서 승소한 재일 언론인 유재순씨가 <제이피뉴스>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제이피뉴스>는 전 일본인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로부터 일제시기 종군위안부와 관련한 생생한 증언을 얻었습니다. 원문을 보시고자 하시는 분은 아래에 있는 바로가기를 누르시면 <제이피뉴스>의 해당 기사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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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종군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직접 운영됐다는 증언이 전 일본인 군속에게서 나왔다. <제이피뉴스>는 23일 일제시대 때 트럭제도에서 근무했던 군속 마쓰바라 마사루(85)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군 위안소 두곳을 군 부대에서 직접 관할했다고 보도했다. 지바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인 1943년 11월부터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었다.

마쓰바라는 그 증거로 당시 부대에서 발급한 출입증을 제시했다. “군 위안소 출입증”은 가로 5.8cm 세로 10.8cm 증명서로 ‘남국료출입증(南國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시 이 ‘남국료위안소’는 해군용이었으며, 이외에 육군이 이용하던 ‘남성료(南星寮)위안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마쓰바라는 특히 대부분 위안부는 거짓광고에 속아서 왔다고 증언했다. 모집공고에 위안부 모집이라는 것은 없고 장교 메이드(하녀) 구함 등의 거짓내용만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존재했더라도 민간이 운영한 공창제도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이 증언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한일 평화단체들의 활동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쓰바라는 당시 트럭군도에는 평균 3만-4만명 가량의 육군과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육군과 해군이 각각 운용하던 두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위안부 규모는 한 군데에 50-60명씩 120명이었으나, 전쟁 말기로 가면서 각각 70명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위안부들이는 집단적으로 막사에서 생활하며 낮 12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근무'했으며, 하루 14-15명의 군인들을 상대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한달에 딱 한번 성병 검사를 할 때만 막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마쓰바라는 일본 군대가 모집한 위안부들을 돌려보낼 의도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안소를 작전지역에 설치한 뒤 작전이 끝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부대만 옮기고 위안부들은 내팽개친 채 가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겨진 위안부들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마쓰바라는 평화운동을 해오면서 위안소 문제를 고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제이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라며 당시 종군위안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아래는 마쓰바라의 증언을 토대로 트럭 군도 종군위안소인 남국료위안소의 24시를 재구성한 것이다.

■ 위치

남태평양 트럭제도는 총 11개의 큰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제도의 오른쪽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나쓰시마(夏島), 아키시마(秋島), 후유시마(冬島)에는 군 부대와 그 부대를 위한 후방보급기지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두 개의 위안소는 후방보급기지들이 모여 있던 나쓰시마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쓰시마는 위안소 이외에도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 군부대의 위안소 관할

이 두 위안소는 모두 군대가 관할했다. 이 가운데 남국료위안소는 그가 배속된 제4함대 시설부대인 하기와라 간이치 부대가 관할했다. 시설부대인 탓에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 공사들을 진행했지만, 위안소 관리업무도 맡았다.


마쓰바라 씨가 발급되었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되었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위안소 건물과 위안부의 방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였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철책 같은 게 쳐져 있었다.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었다. 외부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경비원이 철책 주변을 계속 돌았다.

막사의 각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각 방마다 몇호인지 적혀 있었다. 복도 끝은 공동으로 쓰는 세면장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방 크기는 하나당 약 2평 정도이고,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 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다.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도 있었다.

■ 위안부

위안부는 주로 18~25살 정도의 젊은 여성들로, 90%는 조선인, 10% 정도는 일본인이었다.

1943년 당시에는 두 위안소에 각 50~60명 정도씩 배채됐다. 하지만, 44년부터는 각각 70명 정도씩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든가, 병원에서 사무볼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의 모집공고에 속아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모집광고에는 월급이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30엔으로 제시됐으며,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유혹했다. 숙박료, 식대기 다 무료니까 아, 이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한 것이었다.

■ 성적 착취

위안부들의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낮 12시부터 22시까지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나는데, 일반 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배를 타고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사관이나 장교,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가는 것도 허용이 됐다.

공휴일도 없었고, 한달에 한번씩 성병 검진이 있었다. 위안부 여성들은 이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라는 것이었다.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 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한다고 즐거워했다.

훈련이 없을 땐 군인 수가 늘어나고,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었지만, 평균적으로 한명의 위안부가 하루 14-15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

■ 군인 외출 때 의무적으로 콘돔 지급

위안소 앞은 언제나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하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는데, 언제 출전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기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군인들은 주로 하루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등에 주둔했는데, 조그만 배를 이용해 자주 나쓰시마를 방문했다.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군인들이 외출할 때 꼭 콘돔을 2개씩 의무적으로 지급했다. 마치 위안소에 가라고 장려하는 듯했다.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군인들의 위안소 이용

군인들은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1엔의 이용요금을 내고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는다.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이다. 그 번호표를 들고 해당 번호가 적힌 위안부의 방을 찾아갔다.

■ 위안부의 운명

일본 군부는 위안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모집공고가 거짓말인 것이 드러난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든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한다. 그런데 작전이 끝나 후퇴를 해야 할 때 데려가지 않는다.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간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간다.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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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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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매춘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읽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스템에 불만족스럽다면, 이 시스템을 제거하자.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성노동자만을 찝어내지 말라. 그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노동을 판매하고 있다.


희생자인가, 노동자인가?- 성노동과 노동조합

아나 로페즈 (Ana Lopes)


나는 이스트 런던대학(University of East London: UEL)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 그곳에서 나는 문화의 기원에 관한 매우 흥미롭고 논쟁적인 이론을 배웠다 - 섹스와 경제 사이의 관계가 매우 오래된 것이고, 첫번째 인간 혁명과 인간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이론. 

나는 멘스(월경, menstruation)가 어떻게 출산력에 대한 여성의 가장 훌륭한 광고가 되었었는지, 그리고, 남자들이 가장 매력적인 여자를 간단히 골라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주기를 동시화해서 동시에 멘스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고 -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냥하도록 만들기 위해 섹스 스트라이크를 벌였던가를 배웠다. 음식이 준비되어 오면 그들은 그것을 모두 공유했다. 

물론 여자들은 실제로 모두 동시에 멘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멘스 시그널을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임신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었지만 특정한 시간에 임신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성적 신호(signal)를 집단적으로 전유했고, 이것이 인간 혁명을 생산했다. 

나의 배경은 인류학이다. 그렇지만 학위를 마쳤을 때 나는 길을 잃었다. 이 이론이 현재의 관행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몰랐다. 우리 시대에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 있는가? 크리스 나이트(Chris Knight)의 급진적인 인류학 단체에 소개받았을 당시 나는 인류학을 완전히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이 단체는 내게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의 논문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에서 그녀는 '멘스 기간의 피를 숨기려' 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러한 네트워크가 현대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피를 흘린다. 우리는 모두 멘스한다. 우리는 모두 섹슈얼한 존재다.” 그녀는 성산업을 지칭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게 위대한 계시였다.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 혁명이 실제로 작동했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혁명적이다 - 나는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시스템과 방식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을 원한다 -. 카밀라 파워(Camilla Power)의 이론을 테스트하기 위해 나는 성산업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인류학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워진 열정을 갖고 연구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성산업에 집중했다.


성산업

성산업은 단순한 매춘보다 훨씬, 훨씬 더 크다. 이것은 우리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마주치는 거대한 세계적 산업이다. 우리는 매춘과 포르노그래피만이 아니라 전체 모델 산업과 전체 뮤직 비디오 산업까지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성적 신호를 이용한다. 

막대한 이윤이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윤)은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 성적 신호를 실제로 생산하는 사람보다는 소수 사람들의 손으로 간다. 우리는 대개 여자를 고용하는 산업으로 생각하지만, 성산업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 일한다. 

성산업은 나라마다 다르고 그래서 그것을 통제하는 법률 역시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곳에 은밀하고 지하화된 부분이 적어도 조금씩은 항상 있다. 이것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불러온다. 이것은 다른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향유하는 동일한 보호 메카니즘에 의해 포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성산업의 지위와 성적 호의를 파는 사람들의 지위가 시간에 따라 변해왔고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성산업의 노동자들은 대개 사회에서 낮은 지위를 갖는다. - 그들은 주변화되고 낙인화된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 바빌로니아의 신성한 매춘부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내 생각에 페미니즘이 20세기에 힘을 얻어가기 전까지 성노동자들은 다른 여자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졌다. 대다수의 여자들은 아버지의 재산이던 것에서 남편의 재산인 것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경제적 독립과 - 성교육을 포함해서 - 교육에 대한 접근권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리비도를 갖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노동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가졌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고, 실제 활동을 통해 다른 여자들은 갖지 못했던 성교육에 대한 접근권을 가졌다. 

이러한 거대 산업에 대해 혁명가들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폐쇄하는 캠페인을 벌여야하는가? 이것이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여타의 사람들이 하려고 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성산업은 모든 곳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계속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산업을 폐쇄하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실상 성노동자들의 권리에 해악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내가 보기에 이 전략은 작동하지 않았고,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성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폭력과 감염 등의 위협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하고 권리를 가져야 한다.


행동 연구

성산업은 분명히 나의 연구 대상이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종류의 연구를 수행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진정한 연구자들은 - 자신의 연구가 유용하려면, 말이 되려면 - 자신의 연구가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되돌려줄 책임이 있었다. 이 주제(topic)의 논쟁적 성격을 감안했을 때 객관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이론적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나는 실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했다 - 성노동자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 나는 그것을 변화시킬 어떤 것을 하고 싶었다.

나는 '행동 연구(action research)'라고 불리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다. 이것은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단지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작업해나가는 것이었다. 나의 접근법에서 그들은 정보제공자가 아니라 - 참가자였다. 이것은 거리를 두고 수행되는 연구보다 훨씬 더 평등주의적인 연구였다. 나는 자원(resource)을 제공하는 사람이었고 -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성산업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그것은 인류학자들이 '참여 관찰법(participant observ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챗’(채팅)라인에서 5년간 일했고, 마침내 성산업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다. 조건이 절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에 나는 대개 특정한 영역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았다.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래서 일하도록 강제된 조건들이 문제였다. 성산업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아래서 일하도록 강제되는 조건들. 

동시에 나는 런던의 여러 지역에서 일하는 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시범 연구에 참여했다 - 이것은 나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요청하는 눈덩이 굴리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를 통해 나는 대규모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대화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문제를 겪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매춘이 되었건 스트립티즈가 되었건, 혹은 그 무엇이 되었건 돈을 위해 성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건에 대해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들은 왜 계약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연금이나 혹은 다른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것들을 왜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그들 역시 일반인들이 현실에 대해 매우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성노동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생각을 갖는다. 미디어는 선정적인(sensational) 스토리를 팔고 두 가지 극단 가운데 하나를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는 돈을 많이 벌어서 권한을 가진 여자들 혹은 노예제와 가까운 끔찍한 상황에 놓인 불쌍한 희생자 가운데 하나를 묘사한다. 내가 대화했던 성노동자들은 현실에 관해 공중(public)에게 말할 수 있는 조직화된 집단적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제 성노동자 연대

내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을 미팅에 초대했다. 이 미팅에는 UEL 인류학과의 사람들과 성적자유동맹(Sexual Freedom Coalition)과 같은 공감하는 단체의 사람들도 참여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부족하다고 말한 집단화된 세력을 진정으로 만들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답변은 “그렇다. 우리 함께 그렇게 하자”였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운동이 탄생했다. 우리는 매우 비공식적인 단체를 결성했고, 이것을 국제성노동자연대(the International Union of Sex Workers)라고 불렀다.

왜 '국제(international)'인가? 왜냐하면 산업이 세계적이고, 따라서 문제 역시 세계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신매매 관련 문제들은 일국가적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세계적 수준에서 조직화해야 한다. 왜 ‘노동조합(union)’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는 노동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이 우리이다. 성산업에서 일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람들이 특별한 부문에 진입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은 많을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매월 말에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일한다. 왜 ‘성노동자(sex workers)’인가? 왜냐하면 가능한 모든 형태의 직업을 포괄하는 일반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번째 행동은 2000년 3월에 있었다. 우리는 소호 거리(Soho Street: 런던)로 나섰다. 전 세계의 여러 장소에서 성노동자들이 세계 여성 스트라이크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 행동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태기를 원했고, 성노동자들의 친구와 동맹자들이 그 날 저녁에 지지의 뜻을 보이기 위해 소호에 왔다.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체 일을 계속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한 우리 단체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사항들 - 가령, 자신의 삶과 일이 사회에서 묘사되는 방식들. 그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 을 다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미디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존중(Respect)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했다. 성노동자들이 기사를 쓰고 잡지가 성노동자들 사이에 배포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단체의 에너지를 모으는 것에 정말로 유용했다.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우리의 웹사이트와 인터넷 포럼에 집중했기 때문에 존중(Respect)을 계속 출판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는 인쇄매체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인터넷 포럼은 권한확대의 수단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 성노동자가 다른 나라로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들은 포럼에 글을 올려서 그곳의 상황이 어떠한지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 나라에 있는 성노동자로부터 정보를 얻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쉽게 착취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포럼을 통해 어느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동료들과 접촉할 수 있다. 등등.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여러 이슈에 대해 의견을 가진 시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 예를 들어 우리는 반전 집회에 참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부심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성노동자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한다”라고 말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권한을 확대해갔다. 그들은 조직화할 수 있고, 결집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조건(기존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GMB 지회
(*BRITAIN'S GENERAL TRADE UNION: 영국일반노조)

이 기간 동안 우리의 목표는 TUC(Trades Union Congress: 영국노조회의)로부터 우리의 노동조합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노동조합이라고 불렀지만, 몇몇 사람이 모인 비공식적 단체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2년에 정말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 10년 내지 15년 사이에는 아마도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기존의 매우 잘 확립된 노동조합 단체인 GMB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그 전에 몇몇 노동조합에 접근했었다. 그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우연히 GMB의 대표를 만났고, 그에게 그냥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노동자예요, 여러분의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몰래 카메라(Candid Camera)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매우 전문적이었고,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 GMB 지회를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산업에 관여한 성노동자들과 여타 사람들을 포럼에 초대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GMB의 성노동자 지회로 나타났고, 이 나라에서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 

우리가 GMB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TUC’로부터도 승인받았다. 성노동이 노동이라는 것을 확립하고, 이 나라의 모든 성노동자들이 공식적 노동조합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공식적 노동조합에 속하게 된 것은 위대한 성취였다.

이것 외에 가장 기본적인 이 노동권으로부터, GMB에 속하게 된 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혜택을 얻게 되었는가? 작고 분리된 단체로서는 성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수 없었던 많은 이점들이 있었다. 법률적 대표가 아마도 노동조합을 통해 성노동자들이 바라던 가장 중대한 자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산업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호하는 법률은 매우 모호하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합법인지 혹은 그 결과로 곤란에 빠져들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료 법률 대변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노동조합은 또한 정신적 지원과 실제적 지원도 제공했다. 한 달에 한번씩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들, 대개 동일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심판받지 않고 여러분의 일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권한 확대의 감각을 주는 중대한 일부이다.

훈련은 또 다른 중요한 사안이고,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산업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훈련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로 사람들이 비난받고 비판받으면서도, 그것을 그만두고 싶어할 때 그들에 대한 문이 모두 폐쇄되어버리고 성산업에 갇히게 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노동조합은 -이력서를 쓰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방법 등에 관한 실제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산업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들, 더 낫고 더 안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훈련도 있다. 예를 들어 호신술에 관한 코스도 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폭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곤란한 손님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보다 폭넓은 코스도 있다. 또한 회계와 세금 등을 관리하는 것에 관한 코스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인기있는 것은 스트립티즈 코스일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이 산업에 남아있는 동안 다른 일을 해보기를 원하는 매춘여성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이미 전문적인 스트리퍼인 여자들이 승인받기 위해, 즉, 코스가 제공하는 자격증을 받기 위해 코스를 이수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학위를 따는 것이건, 자격증 혹은 그냥 직업으로서건, 승인을 얻게되는 순간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 성노동자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승인을 부여받을 자격이 부여되어 있다. 

성노동자들은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스트립티즈에서 그것은 단순히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것만이 아니다: 매우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다루어야 한다 - 예를 들어 그 가운데 일부는 술 취한 사람이다 - 그리고 자신의 직업의 낙인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잘 하는 것, 자신들의 알고 있는 바에 대해 승인받는 이러한 순간을 거의 갖지 못한다. 그래서 훈련, 자격증은 사람들의 자기 존중감을 개발하는 활동의 일부분이다. 자신에 대한 존중감 없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조합은 또한 몇몇 테이블 댄싱 클럽에서 승인되었고, 이곳에서 노동조합은 다른 작업장에서와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미팅을 갖고, 노동조합 대표를 선출한다. 이것은 대다수의 다른 노동에서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기본적인 성취였지만, 성산업에서는 이전까지 쟁취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클럽들에서 노동조건은 향상되기 시작했고 - 노동조합화는 다른 산업들에서 결과를 만들어내었고, 성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이는 자연스럽게 매춘 탈범죄화(=비범죄화) 논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클럽들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들을 매춘업소 내에서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매춘이 기술적으로는 불법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범죄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춘이 탈범죄화된다면 노동조합은 매춘여성들의 조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계획(Initiative)의 성공은 다른 나라들에서 동일한 길을 따르거나 혹은 노동조합화가 아닌 다른 형태의 집단적 행동을 개발하도록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환상적인(절대적으로) 현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화가 구체적인 전략으로 채택된 나라들에서는 노동조합 네트워크를 개발할 수 있었다. 2007년 3월에 인도에서 성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국제 미팅이 있을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매춘인

성노동에 관한 대규모 논쟁이 있고, 특히 페미니즘 내에서 크게 싸움이 일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회주의 사상가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매춘에 관해 말한 것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방식 때문이다. 엥겔스는 별로 일관적이지 않다. 그는 매춘이 "희생자가 된 불운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깨뜨린다"고 말하고(이것마저 공통적으로 믿어지는 정도는 아니다),  콜론타이(Kollotai)는 "자본주의 내에서는 모든 것이 판매된다"고 지적했지만 분명히 매춘을 철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매춘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매춘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다.” 내가 이것을 읽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성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스템에 불만족스럽다면, 이 시스템을 제거하자.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노동을 판매한다는 이유로 성노동자만을 찝어내지 말라. 그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의 노동을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팔기“ 때문에 성노동은 다르고 훨씬 더 충격적이라고 종종 말해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팔지 않는다. 성노동자들은 서비스 - 아마도 시간 혹은 특별한 성서비스 -를 팔지만, 거래가 끝난 후 몸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몸은 팔리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이런 방식으로 읽힌다면 노동조합화에 관한 전체 개념이 훨씬 더 잘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접근법 -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노동이고, 성노동자들에게는 완전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 은 결과(긍정적인)를 획득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적 관점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페미니스트 논쟁은 실제로 성노동자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매춘 철폐를 위해 사람들이 싸우든 혹은 그것에 참여하기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든, 성노동자 자신들의 웰빙을 위해 실제로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거대한 산업이 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중요한 일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노동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만약 선택한다면 그것을 떠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다.

나의 전망, 그리고 내가 노동조합화 과정에 참여한 이유는 성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요한 도구가 그들 자신의 몸인 곳에서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명령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비즈니스이고,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고립화된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통제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지하화된 산업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화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산업 내에서 노동조합화된 그리고 집단화된 단체를 창출할 수 있다면, 조직화할 수 없는 산업은 한군데도 없을 것이다.

만약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노동자들이 그러한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성노동자들이 이 혁명을 쟁취하고,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립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곳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안 좋은 시대가 물려준 관료적 찌꺼기인 사람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망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착한 여자(good women)'과 '나쁜 여자(bad women)' 사이의 구분은 없을 것이다. 성노동자 낙인화의 문제는 단지 우리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 이것은 모든 여자들의 문제이다. 내가 만약 창녀라고 불릴 수 있다면 어떤 여자건 창녀라고 불릴 수 있다 - 모든 여자들이 그러한 낙인에 시달릴 수 있다. 

이것이 권리를 주장하는 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것이 모든 여성의 관심이 되는 이유이다.


▒ 본문은 진보적 매거진 ‘위크리 워커’(Weekly Worker 645. 2006년 10월호)에 게재된 아나 로페즈의 기고문 “희생자인가 노동자인가”(Victims or workers? ) 전문이다. 지난 문건이지만 향후 한국 성노동운동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올린다. 번역문에서 영문 약자 등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편집부에서 추가했음을 양해 구한다.    

▒ 성노동운동번역네트워크 바로가기 [부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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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


단체 소개가 따로 나와 있지는 않고 블로그 운영만 하고 있어서 아직 실체(ㅋㅋ)를 더 파악해야 하지만...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모임을 올해 9월에 했었네요.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것이고 주도자가 있겠죠? 주도자를 찾아야지.
9월의 모임 홍보글 번역해 봤어요.

가난해도 안심 여성으로 안심

여자는 옛날부터 가난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욱 가난해졌다.
싸고 불안정한 비정규직은, 지금 일하는 여성의 다수를 차지한다.
연수 200만엔 이하는 여성의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빈곤은 좀처럼 이야기 되지 않는다. 그것은 왜?
여자는 남자가 먹여 살려 주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안심?
여성이라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가난해도 안심하고 살고 싶다
지금 여성들의 빈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빈곤의 진짜 해결책에, 목소리를 높이자!

赤石千衣子(しんぐるまざあず・ふぉーらむ)、鈴木純子(元福祉事務所相談員)
伊藤みどり(働く女性の全国センター)、栗田隆子(フリーターズフリー)
藤井豊味(女性ユニオン東京)、山口静子(パート・未組織労働者)
いちむらみさこ(ノラ)、池田幸代(新宿野宿者女性の会「心を開く輪」)
柏原登希子(ふぇみん)、丸山理絵(反貧困ネットワーク)他…

싱글마더포럼의 아카이시 치에코씨,
전 복지사무소상담원 스즈키 쥰코씨,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의 이토 미도리씨,
freeter's free의 쿠리다 료코씨,
파트타임 노동자인 야마구치 시즈코씨,
노라의 이치무라 미사코씨,
신쥬쿠노숙자여성의 모임 '마음을 여는 바퀴'의 이케다씨,
그 외 여성 유니온 도쿄, 페민, 반빈곤 네트워크의 활동가들

추측하기로는 반빈곤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여성들이 여성의 기치(!) 아래에 또 만든 네트워크가 아닌가 싶어요.
이 중에 관심 가는 인물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길.

일하는 여성들 중, 파트타임과 파견 등,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과반수인 지금, 빈곤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이 새롭게 발족, 처우개선을 목표로 하여 활동을 해 갈 것을 확인했습니다.

「여성과 빈곤 네트워크」라고 이름 붙인 이 조직은, NPO와 노동조합 등이 만든 것으로, 도쿄에서 열린 발족집회에는, 일하는 여성과 지원자 등이 약 80명 참가하였습니다. 이 중, 하루 고용 파견(핸드폰으로 연락하여 일하는 것. 아무런 보증이 없음)을 경험한 후, 현재는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는 여성은 「하루 고용 파견으로는 낮은 임금으로 내일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되어,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가난해졌다. 아무리 분발해도 가난으로부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고 호소했습니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일하는 여성들 중, 파트타임과 파견 등 비정규노동의 비율은 해마다 계속 증가하여, 53% 남짓 올라가 있는 한편, 모자가정의 연간 노동수입은 평균 약 170만엔에 그칩니다. 집회의 참가자로부터는「연수입이 낮은 싱글마더에게 국가의 지원이 불충분하다」「여성의 노동시간은 길어져 왔는데, 남성과의 임금격차가 크다」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토 미도리 씨는「물가 상승 등을 배경으로 여성으로부터의 빈곤 상담은, 최근 몇 년, 심각함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집회와 상담활동을 통해 여성의 처우 개선을 호소해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Posted by 빨간경순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산다
자립해서 산다
차별도 폭력도, 싫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 된다

'여자'가 그것을 구하는 게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으로서, 누구보다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을 힘의 바탕으로 해서 살아 가기 위해, 우리들은 일하는 여성의 전국 센터를 창립했습니다.

 

목적
1) 우리들은 여성이 건강하게 일을 지속하기 위해 활동합니다.
2) 우리들은 혼자라도 풍요롭게 생활 할 수 있는 임금을 목표합니다.
3) 우리들은 여성이 대한 차별과 폭력의 근절을 목표합니다.
4) 우리들은 여성 한 명 한 명이 존중되고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목표합니다.


住所  151-0053 東京都渋谷区代々木1-19-7横山ビル
電話  03-5304-7383
Fax   03-5304-7379
e-mail   office@acw2.org




이 곳도 누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봐서는 알 수 없음.
다만 사무소를 따로 운영하고 있으니 상근하는 활동가가 있지 않나 싶음.

여성 비정규직 문제(일본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 보다는 파트 타임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듯)와
노동 차별에서 오는 여성 빈곤 문제 등을 이슈로 하고 있고
사회 운동을 한다는 정체성이 크게 느껴진다.




 

Posted by 빨간경순





 











 

뜨거웠던 5월의 어느 날
기륭 조합원들은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의 빈소를 찾았다.




 

Posted by 빨간경순



















송파 경찰서 내 똥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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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제작일지를 날려서 의지를 상실한 채로, 의욕도 없이 다시 제작일지를 쓴다. 아우 XX

일본 추가 촬영 전부터 마음이 설렌다. 다들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이지 작업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촬영할 때가 몇 배는 좋다. 그리고 이번 추가 촬영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별 변동이 없는 한 마지막 영상촬영이 될 것이고 추가촬영이 그러하듯 거의 추억을 되짚는(?) 여행(!)이기 때문이렷다!

조그만 선물도 준비하고 안부 인사차 전화도 하고 일정 조율을 했다. 일본어 번역 서포터즈 상히가 도와줘서 별 무리없이 스케줄을 짜고 마침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일본 현지 스텝 혜진이 이번에도 우릴 도와주겠다고 했다. 제작위원 중 한 분인 사이토 아야코 교수님이 며칠 간 지낼 숙소를 마련해 주셨다. 마침 다른 곳에 가 있던 영란이도 일본에 올 일이 있다고 하니 거의 완벽한 일정이 아닌가!

1년 전에 4명이서 8인분 짐을 들고 김 세박스를 질질 끌며 신주쿠 역사 바닥을 휘저었던 때와 달리 공항까지 아야코상이 마중을 나와주셨다. 편히 게스트 하우스까지 왔는데, 이런. 게스트 하우스가 너무나 좋다. '이런 호사스러울 때가...'

첫째 날, 조순자 선생님이 계시는 시즈오카로 향했다. 아, 이날은 다시금 '신주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신주쿠는 참으로 사람도 많고 출구도 많고 넓다. (경은의 '제작스케치' 참조) 어쨌든 불안 불안 3분 남겨두고 시즈오카 가는 버스를 탔다. 아, 근데 비까지 내린다. 멈출 것 같지도 않다. 시즈오카에 도착할 때까지도 비가 계속 내렸다. 약속장소에 선생님이 차로 마중 나와 주셨다. 나는 이번이 시즈오카에 처음 가는 것이라서 그런지 일본분들이 겨울연가 촬영지 춘천 가는 것 마냥 영화(!)에 나오는 시즈오카에 가는 기분으로 선생님을 만났다. 한국에서 뵙고 두번 째 뵙는 것이다. 정말 다행히도 촬영할 때에 맞춰 비가 멈췄다. 촬영은 금방 끝나고 버스예매 시간도 금방 다가왔다. 반나절이 짧다. 영화에 나오는 후지산을 짧게 감상하고 선생님 집을 나섰다. 좋다라는 말이 이처럼 식상할 수도 없겠지만 두 번 뵙는 것에도 불구하고 조순자 선생님은 참 좋다.

둘째 날, 요요기 공원에 이치무라상을 만나러 갔다. 이날 영란이도 만났다. 텐트무라 가는 길 벤치에 앉아 있던 여인(아저씨일지도 모르는) 사람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다. 텐트무라에 살고 있는 켄보상도 에비사와상도 그 텐트 그대로이다. 그 앞에 새로 입주한 하얀 텐트를 제외하면 요요기공원은 1년 전 그대로 꼭 같은 모습이다. 이치무라상이 우리를 보고 '또 왔냐'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켄보상은 1년 전에 들려줬던 이미자의 부산항에와 일본 엔카를 다시 나에게 들려준다. 이치무라상에게 작은 선물을 줬는데 이치무라상도 우리에게 더 많은 선물을 건냈다. 떡을 구워먹고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이치무라상이 다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자리를 나서야 했다. 아쉽다. 그래도 뭐. 이치무라상의 책처럼 (책 '저 여기에 있어요' 참조)역시 1년 후에도 요요기공원은 그대로일 테니까. 

셋째 날, 카나가와 시티 유니온에 갔다. 그간 아팠던 단테가 많이 건강해졌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반갑다. 무라야마상이 우리를 근처 맛있는 중국집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사쿠라이상의 매직쇼도 봤다. 난 친히 볼펜 매직쇼 하나를 전수받는 영광을 누렸다. 촬영은 금방 끝나고 마리아 어머니와 남편, 단테와 모니카, 그리고 혜진, 영란, 경은, 경순 다 같이 온천에 갔다. 영화 주인공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넷째 날, 그간 파나소닉을 상대로 복직 투쟁을 해왔던 사토상이 정규직으로 복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일본에 가기 전에 먼저 들었다. 이런 반가운 소식이 또 있다니! 사토상의 얼굴도 목소리도 1년 전과는 다르다. 마침 이날 사토상의 복직을 축하하는 축하 모임이 도쿄에 있어서 후쿠시마에서 왔다. 아는 사람이 생기는 건 나에겐 새삼스럽게도 참 신기한 일 중에 하나인데 축하 모임 자리에 아는 일본인들이 있어서 또 새삼 깜짝 놀랐다. '아, 국제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생기는 구나'싶었다. 어쨌든 이날은 축하 모임 자체보다 2차 자리가 인상 깊었는데 다시금 사토상의 얼굴도 목소리도, 그리고 그의 웃음도 참 멋져 보였다. 영화에서 '힘있는 여자가 되어야 해'라고 말하는 사토상이 떠올라서 지금에 와서 그렇게 느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 '레드마리아' 참조).

아, 그리고 다섯, 여섯 째날. 난 사실 촬영한 4일보다 휴가날이었던 이틀간이 더 힘들었다. 노는 게 더 힘들 줄이야! 어쨌든 난생 처음 유카타 입어 보고 난생 처음 함박눈 맞으며 노천온천탕에서 달밤 체조를 해보고, 난생 처음 (돈도 별로 없으면서) 하루 종일 쇼핑한답시고 일본 시내를 걸어다녀 본 것은 재밌었다. 일주일 참 짧더라.

끝! 


p.s 늘 그렇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 자기 복인가 보다. 난 복이 많은가? 그런데 옥에 티마냥 이번에 나쁜 사람을 지하철에서 만났다. 마치 원더우먼마냥 우린 그 나쁜 사람들을(착한 말투) 혼내줬다. 경은이 앞장섰다. ㅋㅋ 그것만 빼면 참으로 완벽한 일본추가촬영이었음. 



Posted by 빨간경순






2009. 9. 1
1.
에블린 아줌마와 함께 수빅베이 가보다. 항공모함 보다가 에블린의 가족사를 듣는다.
에블린은 참 재밌는 사람같다. 자기딸더라 계속 멍청하다고 한다. 그녀는 첫째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그의 아들은 똑똑하고 동생을 호되게 올바르게 가르치고, 게이 남친과 여자친구가 둘이 있다고 한다.- 내용상은 모두 연애처럼 만나고 있는 듯하다. 에블린이 우리를 신경써주는게 고맙다.

2.
예정에 없던 쟌리의 올드부끌로드 방문.
나의 생일파티를 위해 모든 부끌로드 멤버가 화이트 하우스에 입성. 호오...그림 나오겠다...
아나의 생일파티에서 못다한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100페소 더 투자한다. ㅎㅎ

파티 즐겁게 마치다.
다들 좀더 특별하고 재밌게 먹기 위해 파티를? 보라카이 스타일(?) 칵테일 맛있다. 언니들 케잌 감사해요^^ 근데, 난 한 조각도 못 먹어봤다.
한국에선 전혀 해본 기억이 없는 야외 테라스 파뤼라.. 비록 2시간도 채 안되어 끝났지만. 엄마가 준 500페소로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끼를 배부르게 해치울 수 있다는게 행복했다.
PM 6:30
마지막 지프니를 타기 위해 부끌로드 언니들과 헐레벌떡 화이트하우스에서 하산.
미쉘, 쟌리, 쟈넷, 질린과 작별 키스. 수줍어하며 왼쪽 볼에 키스해준 쟌리에게 고맙고 미안함.
나는 왜 촬영을 하면서 늘 그 사람에게 미안함이 생길까. 찍히기 싫어한는 듯함을 느낄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저주저하게 된다.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친 않지만, 끊임없이 나를 고민하게 만들어 힘들다.
올드부끌로드 도착.
예전에 아람이 있을때완 다르게, 어느샌가 적극적인 코디의 모습까지 갖춰버린 나.
알마에게도 고마움과 인사를 표하고 포옹. 크리스마스 파티에 놀러오라는 알마의 말에 매우 혹하다. 나는 노는 것 좋아하나보다.ㅎ

2009. 9. 2
촬영 테입 온종일 프리뷰.
PM  5시.
수림과 미팅.
생일 얘기 듣고 자신이 저녁 사겠다고 바쁜 시간 쪼개서 아시안 브릿지까지 오다.
'얘가 언제 어른이 된거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왠지 슬픈데..그러기에 너무 이른건 아닌가?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른이 된 척'이거나  '매우 작은 부분' 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음이 느껴진다. '힘들땐 같이 있어도 돼. 수림씨'
그녀가 데려간 한식당에서 보양식과 같은 메기찜과 매운탕 먹다. 소주 한 병 수림과 나눠먹고, 그녀는 팀과제를 하기 위해 가볍게 떠난다. 난 어지럽다..취했다.
그녀의 접대비는 한사코 거절하고, 마음만 받다.

2009. 9. 3
로즈비의 동생이란 분에게 번역을 맡기다.
아이비의 번역노트 보고 깜짝 놀라다. 난 한국말로도 그렇게 자세히 쓰지 못할거 같은데...허걱
정말 힘들었겠다. 그리고, 다시 안할 확률이 높겠군...음.
이전 촬영테입들 받고, 이번에 찍은 촬영 테입 넘기다.
아이비 내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어 깜짝 놀라다. 왜? 프리뷰 번역하면서 애들이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계속 나왔다고...그랬겠구나.
이제부터 '버생쇼' 업무를 좀 하려다 포기하고 잠들다.  약간의 감기 기운.

2009. 9. 4
까부야오에 가는 봉고차 얻어타고 돌아오는 길에 마닐라 스케치 돌입.
C5 근처의 공사중인 높은 건물로 들어가 허가 요청.
생각보다 허가 절차는 간단했고, 우리는 무대뽀처럼 카메라를 들고 이 건물 저 건물 휘젓기 시작.
거의 네비게이터 수준의 펭이 지정한 건물은 우리가 찍으려던 풍경과 흡사했다. 다만 복도에선 건물 기둥에 가려져 풍경이 시원하게 보이지 않는다. 창문을 넘어 10층 난간에서 찍으려고 버둥거리고 올라서며 발발거리던 나와 펭.
이건 너무 무모해...무작정 입주한 사람들 문을 두들겨본다. 운좋게 혼자 사는 30대 추정 여성이 약간의 고민 끝에 촬영을 허락해주다. 그 언니 완전 럭셔리한 느낌.. 언니 너무 고마워요. 우리는 'only 5minutes'를 외치고 들어가 15분간 그 집 베란다를 점유하다.

거의 3분에 한 대 꼴로 다니는 비행기 소음과 날씨 탓인지 탁한 마을 공기와, 고층빌딩과 빈민촌의 풍경이 뒤엉켜진 이 곳에서 사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마 서울과 비슷하겠지. 풍경은 도시 삶에 큰 조건이 되지 못한다. 도시의 삶은 접근성, 용도성, 가격이 전부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이것에 맞추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대로 끌려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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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필리핀 촬영일지였습니다.

오늘은, 2010년 1월 4일이고, 함박눈이 엄청나게 쌓였네요.
이 글을 쓰는 동안은 그 곳의 여름날씨에 빠져있어, 잠시 겨울을 잊었네요. 재밌군요.

2009년 7월~9월까지 제 인생계획에 필리핀은 없었었지만, 갑자기 그 곳이 내 현실이 된 이후부턴 삶이 더 다채로워졌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즐겁기도, 신나기도, 머리 아프기도, 슬프기도, 황당하기도, 지루하기도 등등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고, 한국에 있었다면 평생을 가도 만나지 않았을 사람과 장소들을 만났으며. 그 사람과 공간과 시간 속에 많은 것들이 제 몸에 고스란히 체화되어 다음으로 나가는데 분명히 큰 보탬이 될 것 같습니다.
촬영을 하는 사이 사이, 촬영을 마친 후 여행을 다니며 내 안을 들여다 볼 기회가 된 것. 그러면서 끄적인것들도 계속 여기에 있었으면 하지 못했겠지요ㅎㅎ 물론, 같은 시기 맞물린 베트남가족여행을 갔었어도 새로운 경험과 기회가 됐겠지만, 필리핀 다녀온 일이 좋았기 때문에 후회같은건 없답니다 ㅋㅋ 생각해보면, 뭔가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적은 있지만, 막상 하는 동안, 하고 나서 후회 하지 않는 특기는 있는 것 같네요. 가끔 투정은 부리지요. 하하핫

아무튼 모두들 고생많으셨고요,
앞으로 계속 고생들 하셔야 하니 힘냅시다.
말로만 듣던 2010년이군요. '블레이드 러너'라도 다시 봐야 할지... 왜 텔레포트는 안되는 거지요?
자 자, 올해도 속지 말고, 각자 방식대로 잘들 달려봅시다!




 

Posted by 빨간경순






AM 2:00 기상
비오는 줄 알고 깜짝 놀라서 깨다. 선풍기 소리 한 번 거창하네.
오늘은 비오지 않는 올드부끌로드 앞 일출을 찍으리라 맘을 먹고 있던 터라. 씨겁했네..
주섬 주섬 챙겨서 펭과 함께 트라이앵글 공원으로 가다.
이런. 두 번째 깜짝 놀라다.
왜 아무도 없는거니? 니들 여기서 자고 있어야 되는거 아냐? 놀고 있든지.
허탈한 마음에 편의점에서 라면과 커피를 사다가, 애들대신 공원 벤치에 박스 깔고 앉아서 먹고 눕고.
니나노....
앗. 누군가 부시시 왔다갔다 한다. 그녀들은 클롯과 로즈. 부시시 나타나서 체육관 스탠드에 가서 꼭 끌어안고 자고 있다.
아까는 클롯과 헤어졌다고 나랑 결혼하자더니...ㅜ.ㅜ 그래, 마음가는대로 할 수 있을때 하렴.

AM 4:00
쟌리, 크리스티나, 마일린 어디선가 박스들고 등장.
얘들은 또 어디있다가 동시다발로 튀어들어오는거야. 동시다발로 벤치마다 박스깔고 잠자기 시작한다.
나중에 물어보니 아까 잠깐 비가와서 다른 건물에 들어가 있었다고.. 그럼 열려있는 건물이 있긴 있나본데...
 
AM 5:00
얘네들 늘 그렇듯이 왔다 갔다 장난치고.
그러다 어느순간 애들이 눈앞에서 다 사라졌다. 아씨..어디간거야 또.
아무래도, 찾아나서야지. 목도 마르고.
졸리비를 지나 두리번 거리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누군가 저 뒤에서 부른다.
'세영~!'
'누구지??'
뒤를 돌아보니, 내가 찾아헤매던 애들이 길모퉁이에 쪼르르 앉아서 손흔들며 이리 오라고 한다.
애들이 나에게 물어본다.  '어디가?' '으음....물 사러..' '물사려면 저~쪽으로 가서 사오면 돼'
'니들 찾고 있었어'라고 말하기가...그냥 나도 옆에 쪼르륵 대열에 합류한다.
담배를 피려고 하니, 자기들도 달라고 한다.
뉴페이스의 언니도 하나 있고. 우린 한국어도 필리핀어도 영어도 아닌 옹알이로 매우 의사소통을 한다.
크리스티나 언니 매우 용썼다. 고마워^^
오늘은 쟌리가 기분이 좋아보이네. 그녀의 텅빈 앞니가 오늘따라 사랑스러워 보인다.
애들이 갑자기 내 사진 찍겠다고 지들 핸드폰 들이댄다. 마침 나에게 있던 디카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어쨌건, 공원에서 손님 없을때 아침 무렵에 건물앞에서 남자들 낚기도 한다고 한다.
내가 있어선지, 여기 있어봐야 실효가 없어선지 다시 공원에 돌아가자고 한다.
 
AM 7:00
이미 해는 다 떳고, 쳐 자던 애들 경찰 오니 부시시 일어난다.
여기서 박스깔고 자는게 불법이라며 짜증내는 경찰. 얘네들이 골칫거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크리스티나 언니 커플을 공원을 쓸고닦고 청결유지 1등공신이다. 크리스티나 언니는 부끌로드에서도 청소하고 여기서도 청소한다. 정말 저커플과 그녀의 아들 둘을 보면 마치 한국에 있는 소위 정상가족을 보는 듯하다. ㅎ
이런 사이, 쟌리는 손님 만나러 공원을 빠져나가고. 최대한 카메라 피해서 나간 그녀의 뒷모습만 보인다.

AM 8:00
트라이앵글. 크리스티나 커플, 마일린, 조슬린, 쟌리 등과 함께 아침을 먹다.
여기서 같이 노닥거리는 언니 하나가 밥도 판다. 비닐봉지에 따끈한 밥과 따끈한 반찬을 1인분씩 들고 와서 니들도 먹자고 내민다.
펭과 나도 돈을 지불하고, 같이 테이블에 밥 펼쳐놓고 미친듯 먹는다. 아...맛있고 배부르다.
'이거 아주 편리한 시스템인데..ㅎㅎ'
처음 이 곳에 왔을땐 30분의 시간이 어색하고 길었는데, 이제 우린 아무렇지 않게 6시간을 흘러 보낼수 있다.
점점 나 역시 이 공간에 적응되버린다.
여기 있으면 하루가 스~윽 흘러간다.
모든게 가능하다. 밥도, 친구도, 이벤트도, 일도, 사랑도.
또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
이렇게 하루 하루 가다보면 12시간, 24시간...어느새 그들과 같아지겠지.
그건 또 반대로, 내가 서울에서 하루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 못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AM 9:00
아나(알마딸) 트라이앵글 도착.
쟌리, 아나와 짧게 대화 후 혼자 장보러 감.
나는 쟌리의 시장보기를 팔로우한다.
아침 먹거리 혹은 반찬 사서 화이트하우스로 터덜터덜 가는 그녀.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까를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다.
까를로. 지엄만줄 알고 미친듯이 네발짐승처럼 기어온다. 둘은 만 하루만에 또다시 극적 상봉을 한다.
쟌리와 까를로를 보고 있자니,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내가 알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쟌리는 엄마다. 엄마의 모습이 있다....엄마라...




 

Posted by 빨간경순






2009. 8. 30 울릉가포
뉴부끌로드. 일명 화이트 하우스.
새로운 집에 이사온 사람들. 대체로 들떠있는 모습이다. 아침부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이들의 기상은 오전 6시전에 거의 이뤄지니, 이들의 음악소리과 대화소리와 청소시스템에선 아무리 버텨도 8시를 넘기긴 어렵다.
이제 올드부끌로드는 사무실, 뉴부끌로드는 말그대로 집이다. 아..물론 가끔씩 이곳에서 컨퍼런스나 포럼을 한다고도 한다.
이 곳의 거실과 정원은 20명은 거뜬히 소화할 넓이이다.

대개 이 곳에서 거주하는 애들의 시스템을 보자면,
밤에 트라이앵글서 업을 하는 쟌리, 크리스티나, 마일린, 조슬린 etc(나머지 애들은 자주 바껴서 잘 모르겠다)은 아침 8~9시사이에 집에 들어와서 잠시 노닥거리다가 잠을 잔다. 쟈넷, 미쉘, 크리스 (모두 알마의 양녀라고 한다) 등 트라이앵글에서 알바뛰지 않는 애들은 하루종일 집에서 왔다갔다 하며, 설거지, 빨래와 같은 집안 일을 하고 아기들을 돌본다. 아...학교도 다니는구나.
그러다가 오후 2~3시경엔 모두들 낮잠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러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 하나 둘씩 일어나서 저녁을 준비하거나 왔다갔다 하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저녁시간즈음이 되면 다시 일하러 나가는 이들과 밥먹고 노닥거리다 자려는 애들.
완벽하게 같은 하루는 아니지만, 뭔가 비슷하게, 타이트하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1) AM 10:00
조날린 집 방문. 700페소 가까이 기저귀, 분유, 통조림 등 사가다.
집엔 조날린의 언니들 2명과 언니들의 애인들과 언니들의 자식들 모두 모여있다.
역시 아무렇지 않게 물건 놔두고, '내가 이걸 가져간게 맞는건가? 그렇게 사오라더니 아무말이 없네..'
그녀의 아기(새로 태어난 베이비- 저스틴 조말) 빨리 찍고 나가자함.
'와..애기 진짜 쪼꼬맣다.' 부서질까봐 잘 못안겠다.
조날린은 애 낳은지 2주도 안됐는데, 잘 돌아다닌다.
져스틴 조말은 구석에서 바둥거리고... 우리는 또다시 추적거리는 빗물을 뚫고 트라이앵글로 이동.
공원 거의 도착했을때, 조날린, 모모의 전부인 있다고 도망다니다. 흐음...

2) PM 3:00
아나 (알마 딸) 생일잔치.
트라이앵글서 케잌 사들고 집에 가니 대략 20명의 사람들이 왔다간 흔적. 생일파티는 배불리 먹는 것.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위스키와 음식 덕분에 몇몇 퍼져 있는 인간들 속에 꿋꿋하게 잠자고 있는 쟌리.
그러다 갑자기 일어나서 까를로 데리고 싸리싸리 조용히 다녀온다. 기분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데..
한 손엔 까를로를 안고, 다른 한 손엔 까를로 과자를 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이 한 장의 사진 같다.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