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스케치2008. 12. 20. 15:14



 





<080720 제작일지 | 경순 >

1. 참석자 : 경은,영란,경순

2. 방문 목적 : 통일교를 통해 결혼한 엘리사 부부를 통해 다른 이주여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획를 확보하고 이주여성들의 삶을
                   좀 더 깊숙히 이해하기 위함.

3. 일리사 가족소개
엘리사 (36세) 10년전 통일교의 주선으로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됐고 필리핀에서는 옷장사를 했다고 함.
안병희 (45세) 키작은 컴플렉스로 결혼을 못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의 성화로 고민을 하다가 전주(전봇대)에서 우연히 본 통일
                    교 전단지를 읽고 통일교의 주선으로 필리핀에 가서 엘리사를 만나게 됐고 첫눈에 맘에 들었다고 함.
안미영(9세) 딸 초등학교 2학년
안가영(8세) 딸 초등학교 1학년

4. 방문소감 : 일요일이라 온가족을 다함께 만날 수 있었고 특히 남편의 이해속에 편안하게 촬영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
                   구들이 모두 모여있어서 엘리사의 인터뷰는 다시 해야할듯.

5.이후 촬영 계획 : 필리핀에 가기전에 한번더 엘리사를 인터뷰할 시간 잡고 이후 엘리사의 생활과 엘리사가 친구들과 만나 수
                          다떠는 이야기들과 친구들의 고민들을 촬영했으면 함
                          그리고 이주커플들의 만남 시간이 있다고 하니 추후에 촬영 요망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10. 1. 16:40


윗 사진 : 빈민운동단체인 UPA에서 그레이스를 처음 만나던날. 이날 무슨대화를 하다가 이렇게 웃었는지 기억이 안난
              다.ㅎㅎ

              활짝웃는 친구가 그레이스이고 가운데 있는 친구는 지난번 사우스레일 촬영때 도움을 준 UPA활동가 티나.

아래 사진 : 그레이스집 이층의 난간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그곳에 앉아 동네를 보고있자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가끔 괜찮은 그림들이 종종 잡히곤 한다.




경순, 담배는 너의 건강에 댄저러스해. 그만 좀 피워.
(그때 집밖으로 열차가 지나간다)
그레이스 니네 집이 더 댄저러스 하거든.너나 걱정하세요..

철로변에 사는 그레이스의 집에 머물러 있다보면 시간날때마다 아니 내가 담배를
피울때마다 반복되곤 하는 그레이스와의 대화다.
온통 쓰레기더미에다 카메라에 녹화되지 않는게 원망스러울 정도의 악취가 생활화된
이곳에서 그레이스는 늘 청결과 건강을 이야기 하곤 한다.
거기다 하나 더 살을 붙이자면 하나님 이야기까지.

그레이스 근데 혹시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은 없니?
난 4명이면 됐어. 너무 많이 낳고 싶지 않아.
너 이미 많이 낳았거든. 도대체 어쩌자고 이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거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래도 너의 하나님은 착한하나님이 아닌거 같아.
경순 그런이야기 하면 안되.
뭐가 안되. 너의 하나님이 착하면 어떻게 너희들더러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아
여자들이 이토록 고생하도록 놔두겠니.
....

눈을 몇 번 흘기고는 이내 걸레를 들어 여기저기 청소를 하는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다가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해서
이곳 철로변에 둥지를 틀게됐고 현재까지 1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은 현재 철로변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레이스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이제 6살짜리 막내아들을 두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만큼이라도 학교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나마 그레이스는 철로변에 사는 사람들중 부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촬영을 온 후 이틀째 되는날 그레이스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막내아들이 눈이 짝짜기인데 니가 좀 도와줄 수 없겠니?
그레이스 난 부자가 아니야. 한국에선 나는 집도 없고 사무실도 없어.
내 재산은 그저 이 카메라 뿐이란다.나도 너만큼 가난하거든.
하지만 넌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잖아.비행기값 비싸잖아.
그건 그렇지만...쩝...우자지간 나 가난하거든.

그래 이해가 안되겠지.
비행기타고 먼나라에 와서 보기만해도 비싼 카메라들고 영화를 찍는다는데
돈이 없다는게 이해가 될 리가 없지.
차비가 아까워 다른동네 한번 다녀보기도 힘든 그들이 택시타고 이곳에 촬영을 오고
남편은 늘 한 개피씩 사서 피우는 담배를 한갑씩 사서 피우는 우리들이
정말 가난한건지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지원을 받아서 너희들을 찍고 있지만
이곳촬영이 끝나면 어떻게 한국에서 먹고살거며 어떻게 국내 촬영을 하고
또 어떻게 일본에 갈 수 있을지 머리에 쥐가 나는 이 심정을
그들이 이해할 수는 없으리.
이곳의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떨어져가는 제작비를 걱정하며
다시 비싼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가 알바를 시작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을
그들은 도저히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자지간 촬영 3주를 남기고 나는 잠시 한국에 돌아왔다.
남아있는 잔고 3백만원이 떨어지면 필리핀에서의 숙박비며 남은 촬영비도 모자랄 판이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촬영도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때맞추어 들어온 알바를 놓칠 수 없었고 남에게 맡기기엔 남는게 없었다.
빠듯한 촬영일정과 흐름을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됐지만
결국 내가 들어가서 처리해야만 했다.
일이 한참 꼬이겠군 했지만 그나마 일이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했다.
우자지간 급하게 한국에서 일주일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찾은 그레이스의 동네.
이미 이주를 시작해서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린 철로변을 보고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서울에서 미처 다 처리하지 않고 온 일들부터 영진위에 지원한 제작비신청이 1차에서
무산됐다는 소식까지 온통 복잡한 일들이 마음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왜이리도 더운지.
그많던 철로변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여기저기 끊어진 전기줄을 줍는 아이들과
조용히 창문밖을 보며 말없이 밖을 내다보는 할머니들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리도 조용히 밖을 보는 것일까.

그러다 나도 그레이스집의 난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특별히 재미있는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는게 아닌데도 시간은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고
나도 모르게 참 평화롭다라는 말이 머리를 계속 맴맴돌았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아들과 낮잠을 자고 잊을만 하면 한번씩 흔들흔들 지나가는
은하철도 999.

저녁이 되자 그레이스 가족이 함께 이주할 곳에 집을 지으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때맞추어 비는 억세게 퍼붓기 시작한다.
막상 차에 타고보니 그레이스의 가족만이 아니다.
같은 지역으로 이사가는 동네사람들이 트럭뒷칸에 꽉찼다.
철로변 사람들은 정부가 제공해주는 특정지역으로 이사를 가게되는데 그중 몬탈반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은 땅만 정부에서 제공받고(물론 공짜가 아니라 해마다 갚아야 한다)
집은 직접 자신들이 지어야 한다.
왜 이곳을 선택했냐고 물으니 다른지역은 너무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채소를 심을 수가 없단다. 자신들은 집은 작아도 조그마한 땅에 이것저것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땅을 원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그레이스도 주말마다 집을 짓기 위해 몬탈반으로 갔는데 벌써 두달째 짓고 있다는 집이
이제 벽돌 몇칸 올라온 수준이었다.
그레이스 난 니집을 보고싶어. 대체 언제 완성되는거니?
아마 내년 7월쯤...
오마이갓...그럼 그동안 어디서 살건데.
동생집에서 살다가 지붕이 완성되면 살면서 계속 지어야지.
그러면서 남편과 함께 열심히 집터의 잡초를 뽑고있다.
그레이스 난 아무래도 너희집이 정말 완성될지 상상이 안된다.

그런나를 오히려 처량하게 보면서 위로의 한마디를 건넨다.
담배한대 피워.
흐흐 웃으면서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 세워두었던 카메라를 지나가는 아이들이 툭툭 건드리자 그레이스가
쫓아와서 혼을 낸다.
그리고는 나에게 한마디 한다.
너 재산은 카메라밖에 없잖아. 잘 간수해야지.
그래 니말이 맞다. 내재산은 그것뿐이지.

처음엔 나에게 돈을 요구하던 그녀가 어느새 독립영화 레드마리아를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었다. 누군가 촬영을 못하게 하거나 왜 이런걸 찍느냐고 묻기로도 하면
그녀가 어느새 말하고 있다.
이 친구는 독립영화감독이고 아시아의 여성들을 찍고 있으며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보기위해 우리동네에서 촬영을 하는거라고.
오 마이 그레이스.흐흐

과연 저 황량한 터에서 그들이 말하는 꿈같은 궁전이 언제쯤 지어질지..
아니 완성되기는 할런지.
여기저기 채소를 키우겠다는 그 채소는 어디서 꽃을 피울지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년에 집이 다 지어질때 쯤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물론 속으로는 내년에 정말 이곳에 올 수 있을까를 조용히 되물으면서 말이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9. 20. 16:33


윗사진 - 우리가 묵었던집 리타 할머니.말라야롤라스의 대표이기도 한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그나마 영어가 되는 할머니다. 통역을 대동하지 않은 관계로 할머니와 대화를 할때는
             서로 인상을 써가며 바디랭귀지가 주를 이룬다.하지만 서로 못해서 좋은건 문법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사진 - 마을의 할머니들은 걸어갈때 늘 어깨동무를 하곤 한다. 내가 옆에 있을때는 내게도
                어깨동무를 하시던 할머니들. 그분들이 걸어가실 길이 걸어온 길보다 짧겠지.
                나도 생각해보면 걸어갈 길이 걸어온 길보다 길지 않겠구나 생각을 했다.



 

지구상 어디를가나 할머니들이 있다. 어머니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할머니인 이들은 여자와는 다른 종자가 되어 살아간다. 최근에 읽고 있는 태백산맥에 봐도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종종 영화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역사책이 놓치고 가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할머니들의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한이 서려있고 그 한은 눈물이 되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영화를 만들면서 관객과의 대화가 싫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거 같다. 이야기가 확장되지 못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이야기속에 갇혀버리는 매너리즘이 싫었던 순간들처럼.

말라야 룰라스의 할머니들도 남들못지 않은 한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이야기가 되곤 한다. 꽃같은 나이에 순결을 잃고 여자로서 살아가기 힘들었던 그 이야기들. 가끔 증언이 주는 그 패턴화된 이야기들은 사실 할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사회가 종용하는 패턴이기도 하다. 말라야라는 말은 자유롭게 하라는 말이고 롤라스는 할머니들이란 말인데 그런 증언들과 함께 할머니들이 자유로와지는건 어떤걸 의미하는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말라야 롤라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단체이름이다. 우리가 익히 알던 위안소로 끌려가 오랜기간 강간을 당해야만 했던 할머니들과는 다른 사례인데 말라야 롤라스의 할머니들은 한마을에 일본군이 쳐들어와 주둔하면서 마을전체의 부녀자를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엄마와 딸이 동시에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자식을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워 버렸던 만행.

현재 마을에는 그렇게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지만 이미 반이상은 돌아가셨고 남아있는 58명의 할머니들 중 15명만이 걸어다닐 수가 있다. 할머니들의 집들을 방문하자니 홀로사는 시누이와 동서가 다같은 위안부할머니일 정도로 그들의 삶은 지겹게도 꼬여있었다. 마을의 사건이 터진후 모두가 쉬쉬하며 숨어살기도 하고 이웃동네로 이사가 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족들이 있는 그마을로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되었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속을 터놓고 사는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마을에서 그나마 좀 사는 집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일본에 가서 돈을벌어온 집들이다. 남자들은 건설업이나 공장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고 여자들은 엔터테이너나 성산업에 종사하다 돌아온 케이스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착찹했다. 과연 할머니들이 늘 말하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정의란 것이 현재의 그들의 삶에서 의미하는 건 무엇일지 말이다. 

우자지간 그렇게 살고있는 그 마을의 할머니들은 해마다 아니 한해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장례식을 치루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처음 방문했던날도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마을의 할머니들이 모여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참석한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슬픔이기엔 살아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오히려 평온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비가 엄청 내리던 날 하나밖에 없는 바지가 다 젖었을때 우리가 묵고있던 집의 리타할머니가 속바지 같은 빨간색 바지를 내주셨다. 천이 부드러워서 좋아 하면서 말이다. 할머니 저 빨간색 좋아하는거 어찌알고 감사합니다 했다. 할머니들은 왜 다들 이런 바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속으로 궁시렁 거렸지만 사실 맘에 꼭 드는 바지였다. 결국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바지를 배낭속에 넣고 다니며 요즘 잠잘 때 입고있다. 조연출 아람이도 바지하나를 받았는데 내바지가 더 이쁘다고 난리다. 이상하게 우리스텝들은 촌스러울수록 탐을 내는 경향이 있다. 거 참...ㅎㅎ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9. 10. 16:31

수빅은 미군기지가 있던 도시로 이미 미군이 국민들의 기지 반대를 위한 국민투표로 1992년 철수를 했지만 이후 필리핀정부와 맺은 방문협정이라는 걸 구실로 한달에 한번 배가 이곳에 정착을 한다. 물론 그 명목이 아니어도 이미 여기저기 비밀기지가 도처에 있다는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우자지간 그래서 수빅에도 수많은 기지촌이 있고 수빅과 가까운 올롱가포라는 도시는 성매매로 돈을 벌기위해 가난한 여성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그 여성들을 위해 성매매여성들이 스스로 만든 조직이 있는데 바로 북클로드다.

북클로드의 대표도 성매매출신 여성이다. 처음만난 외국인에게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자신도 성매매여성이었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놀랐다. 보수적인 카톨릭국가인 필리핀에서 더구나 이들은 성노동자라는 말을 싫어할 정도로 반성매매를 기치로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늘 반성매매 운동의 필요성을 동의하면서도 성매매의 경력을 숨겨야만 하는 한국의 여성들을 보면서 늘 뭔가 놓치는 부분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우자지간 이들은 반성매매를 목표로 활동을 하기는 하지만 조직에 가입한 여성들중 반이상은 현재 성매매일을 하고 있고 그들의 인권을 감시하고 지원하는 일도 역시 북클로드가 하고 있어서 국내에 있는 성매매반대 단체와는 좀 결이 다르다는 생각도 한편으론 들었다.

북클로드에는 특히 거리의 아이들..특히 미성년자출신의 성매매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중 십여명이 북클로드의 사무실에서 숙식을 한다. 그중 4명은 아이가 있는데 대부분이 십대에 아이를 낳아 아이나 엄마나 다 어리지만 그들의 모성애는 정말 각별하다. 게다가 함께 사는 거리의 친구들이 모두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서로 돌봐주고 놀아주고 한다. 한국이라면 벌써 아이를 입양기관에 보냈거나 했을텐데 그들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아이를 아빠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키우면서 다시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간다.

북클로드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학교를 여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 검정고시와 같은 학력인정시험을 볼 수 있도록 북클로드가 올롱가포시와 협의를 했다고한다. 그러나 선생님과 운영은 모두 북클로드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한다. 결국 북클로드에서 자원활동할 선생님을 못구해 마닐라에서 매주 선생님이 온다. 마닐라에서 북클로드는 4시간 거리이다. 처음 학교를 운영할 생각을 했던건 바로 거리의 아이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무조건 성매매를 그만두라고 하기엔 생계가 막막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수입도 변변치 못한 가내수공업(사탕 만들기,걸레만들기 등등)정도이고 그렇게 수입이 안되다보면 결국 다시 거리로 나가야하는 생리를 알기 때문에 모두들 중단한 학업을 다시 시작해서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어서다.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거나 고등학교를 다니다 만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물론 그 이유는 다들 돈이 없어서다. 돈은 없고 먹고 살기는 해야겠고 집안 식구들의 입은 모두 굶주리고 있을때 늘 여성들의 몸은 상품이 된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여성의 몸은 상품이지. 우자지간 그래서인지 이 여성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참 대단하다. 이제 글자를 쓰기 시작하는 여성들부터 덧셈나눗셈을 배우고 구구단을 외우고 있는 이 여성들이 언제쯤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또 대학을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멋진 건 삶에 대한 열정이다.

무엇인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선택해서 노력하는 기분은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따뜻하고 소중하게 만든다. 옆에 있다보면 말은 통하지 않지만 느껴진다. 느낄 수 있다는거 참 어메이징한 감동이다. 그들의 존재감으로 인해 나의 존재감마저 새롭게 느끼게 되니 말이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이 경순이라는 발음을 어려워 하는데 나는 다른 이름을 만들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는데 못부르고 있다는걸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레드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랬더니 레드를 따갈로그로 뽈락이라 말하더니 그들은 재밌어하면서 뽈락 뽈락 레드 레드 불러댄다. 그래 서울에서 빨간이라 부르는 것들도 있는데 뽈락이면 어떻고 레드면 어떠냐.ㅎㅎ

그들과 아쉽게 며칠을 보내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 마닐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곳 촬영이 끝나면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들의 수업시간과 그들의 아이와 그들의 친밀한 생활을 좀더 가까이서 보고 느끼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나기전 민성노련의 성노동자들에게 성매매여성들이 필요한 약이 무엇일까 자문을 구한적이 있었는데 질정과 질 부위에 바를 수 있는 연고를 강추해 주었었다. 우린 그약을 성매매여성들을 위해 준비했고 그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그 외 필요한 상비약도 함께. 북클로드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워 하던지 역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안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서 우리도 기뻤다.

8월16일에 필리핀 촬영에 합류한 경은이 12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며칠전 돌아갔다. 국내에서 필요한 촬영을 위해 남아있는 영란도 함께 했다면 더욱 좋았겠다 싶다. 일은 고단하고 빡세게 돌아가긴 했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았기에 아쉽다. 경은이 어렵게 찍은 많은 사진들도 이후 영화에 멋지게 살아나리라 믿는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8. 27. 17:02



위의 사진 - 제나린의 형제들과 저녁에 노래부르면서 노는 장면.
                 필리핀에서는 집안이든 어디든 노래방 기기로 노래하는 것을 즐겨한다.리모컨 들고있는 친구가 제나린.
아래 사진 - 마지막날 떠나는 언니를 보내는 동생들
                 왼쪽부터 막내 얀얀, 세째동생 에데리다, 둘째동생 임임,첫째동생 디딧.




제나린은 이주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주여성이라는 선입관은 그새 사라지고 만다. 그저 애둘에 남편과 이것저것 생활비를 아껴가면서 아이들 교육에 누구처럼 열심히 고민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표 주부다. 그런데 이주여성하면 웬지 뉴스나 가십거리 기사 그리고 이주여성에 대한 문제점들을 기술해 놓은 논문속의 이야기로만 대상화된 선입관이 내머릿속에 있었는데 그녀를 만나면서 하나씩 깨지고 현실이 됐다.


그녀를 처음 만난건 여성재단에서 주최하는 이주여성친정방문프로젝트<날자>의 익산 오리엔테이션에서 였다. 한국으로 시집온 이후 한번도 친정방문을 못한 사람들이 이번에 선정이 됐고 제나린도 그 중 한명이었다. 10년전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하나 딸 하나 (에고 얼마나 이쁜것들인지 ㅎㅎ) 낳아 알콩달콩 잘 살아왔지만 친정은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그녀의 친정집이 워낙 어려운데다 2년전 어머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친정방문위을 위해 모아둔 돈을 매번 병원비나 생활비로 보내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돈이 아니어도 매달 친정에 돈을 보냈고 남편도 그녀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지원하는 편이었다.


제나린의 친정집은 꽤 멀었다. 여성재단에서 마련해준 이번 행사에서 고향집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은 4박5일이었는데 제나린은 그중 1박2일을 다시 까먹어야 했다. 마닐라에서 친정집인 민다나오섬의 부투안시티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반을 가야하고 또 거기서 동네마을까지 2시간을 차를 타고 가야하는데 하루에 한번밖에 비행기가 운행을 하지 않아 마닐라에서 1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마닐라에 사는 그녀의 사촌언니집에서 하루를 신세지고 다음날 부투안시티로 떠났다.


그녀의 친정집은 전형적인 필리핀 시골동네였다. 오빠가 만들었다는 나무로 만들어진 전통가옥에 그녀의 세명의 여동생이 어머님을 간호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이날은 제나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근처에 사는 오빠 식구들과 결혼한 셋째동생 식구가 모두 모여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중앙에는 ‘Welcome, Eun Family!'라고 써 있었다. 따갈로그도 못알아 먹지만 이곳은 비사어를 사용하니 머릿속에 벌써 번역이 걱정이다. 하지만 얼굴은 생글거리면서 제나린과 함께 그들과의 생활에 조용히 스며들어 3박4일을 보냈다. 지내다 보면 참 희한하다. 나도 그렇지만 제나린의 아이들도 말 한마디 못 알아 듣는데도 어느덧 그들과 어울려 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이 그나마 영어를 해서 가끔 대화라는 걸 짧게나마 하는데 제나린의 남편은 나보다 더 심한지라 흐흐 꽤나 고생이 심했을 텐데도 이 남자 또 호인인지라 그저 허허하면서 즐거운 표정을 어찌나 끊임없이 짓고 있는지.


제나린은 이집의 큰언니다. 오빠가 하나 있긴 하지만 워낙 벌이가 안 좋은데다 자기 집 아이들도 넷씩이나 되니 먹고살기가 힘들다. 결국 어머니 병원비며 간호는 딸들이 맡아서 하고 있는데 그중 제나린의 지원이 가장 큰 힘이랄 수 있겠다. 그래서 큰언니 제나린의 존재는 너무나 특별했고 그들의 10년만의 만남은 더없이 특별할 수밖에. 언니는 멀리 있지만 늘 동생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물질적으로도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하지만 제나린은 그 모든 덕을 남편 덕으로 돌린다. 남편 때문에 남편이 잘 지원해줘서 남편이 아니었으면...


우자지간 난 그녀들의 자매애에 놀랐다는 거. 쓰러진 엄마를 간호할 사람이 없어 셋째가 일을 그만두고 엄마 간병인을 자처해 하고 있고 막내는 대학교수로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월급은 9000페소로 원화로 치면 20만원 정도라니 겨우 집안의 생계비 정도일 뿐이다. 둘째는 미혼모로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데 아무도 뭐라지 않는다. 그렇게 세자매가 한집에 모여 병든 엄마와 혼자서 애를 키우는 언니를 서로 보듬으며 살고 있으니 이보다 이쁠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던가. 아니 우리도 그렇게 산적이 있긴 있었지. 까마득히 오랜옛날 우리도 정말 가난했던 그 시절 그런 이야기는 우리도 주변에서 늘 보던 이야기였지.


제나린의 오빠는 할 말이 참 많았다. 그와 나 둘다 영어가 짧아 하고싶은 말을 비사어로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했더니 이 오빠 정말 비사어로 한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는데 그 눈빗만 봐도 그림이 그려지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겠지. 그랬더니 이분 내가 비사어를 알아듣는 줄 알고 뿌듯해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ㅎㅎ 우자지간 제나린의 오빠는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지 안그래도 큰 눈이 퉁퉁부어 보기도 안스러운 눈빚을 계속 하고 있어 정말 마음이 짠했다는 거. 게다가 오랜만의 딸의 방문을 아는지 의식이 없던 엄마가 제나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태까지...


물이 이틀에 한번씩 밖에 안나와 이틀에 한번씩 물을 받아놓고 쓰는데 오랜만에 손님이 많아져 그집 물은 늘 모자랐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물을 빌려오고 받아와 동생네 식구와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던 그 사람들, 필리핀 말 하나도 모르는데 조카를 위해 늘 눈을 보고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하나씩 가르쳐주던 그 사람들, 집안에서 장작불로 음식을 하는통에 안그래도 더운집이 더더욱 더운데도 그 불앞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준비하던 그 사람들, 제나린이 돌아가기 전날 언니를 위해 동생들과 조카가 모여 다함께 준비한 춤을 섹시하게 추었던 그 사람들....짧은 일정이자만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길고 끝이없다.


이미 제나린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고향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그날들을 벌써 그리워하고 있겠지. 늘 그렇지만 시간은 너무 짧다. 그리고 시간은 아무것도 담아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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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8. 10. 16:49

필리핀에서 돌아온지 네달이 조금 안됐다. 그동안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나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레드마리아와 한축을 이룬 일이었다.
종종 사적인 흥미진진한 일들이 더러 있어 꼭지가 돌 뻔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촉촉해지는
감동의 순간도 있었지만 역시 레드마리아가 주는 기쁨보다는 순위가 뒤처지는 게 사실이니
당분간 그렇게 계속 가는 수밖에.

마치 모든 무기의 장전을 끝내고 출정하는 기분으로 다시 가게 될 필리핀에서의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과연 생각대로 잘 진행이 될지 아님 다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두렵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어제는 필리핀에 보낼 의약품을 구입하고 영어와 따갈로그로 복용법을 일일이 써서
붙이느라 스텝들이 밤늦게 까지 고생했다.
그저 만나는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준비하고자
시작한 일인데 의외로 돈이 많이 모아져 의약품 가방만 10키로는 족히 되지 싶다.
무슨 전쟁터에 간다고 이렇게 많은 의약품을 준비하는지..쩝

돈을 보내준 분들 중에 민주성노동자연합과 민주성산업인연대에서 보내준 돈도 있다.
그분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필리핀의 성매매단체나 성노동자단체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분들께 직접 이들이 보내준 의약품을 전달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대충 감기약이나 두통약 정도를 생각했는데 역시 약사와 상의하니
필요한 약들이 의외로 많다. 똑같은 감기약이라 해도 아기들에게는 시럽을 준비해야 하고
파상풍과 같은 상처에 바를 연고며 여성들이 많이 필요로 하는 좌약이나 연고 등
구체적인 약들이 다시금 추가되어 약 종류만 20가지는 되는 듯 하다.

필리핀 촬영의 첫 시작은 이주여성 친정방문 프로젝트인<날자>행사를 찍으면서
그 행사에 선정된 한 가족을 취재하는 것이다.
이주여성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평범한 가족이고 부부관계도 끔직하게 좋은
이 커플을 통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만나자마자 오랫동안 사귄 친구 처럼 벌써 정이 통하는 사이가 되어 그들의 친정방문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 가보는 친정이라고 하니 어떤 기분일지 그들의 고향은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가슴이 콩알 콩알 뛴다.

그리고나서 취재할 곳은 사우스레일 빈민가이다. 작년에 사우스레일을 방문하면서
사전취재삼아 이미 가난에 대한 연대를 만들긴 했지만 내 마음은 정작 레드마리아에
있었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늘 삶은 파헤쳐지고 뒤집어진다.
그리고 그 가난한 삶의 밑바닥에 던져지는 돈 몇푼.
그 돈을 무작정 버릴 수도 없고 취하기엔 너무 비굴해지는 우리의 치사한 삶의 기복.
작년 이맘때쯤 그 사우스레일을 방문하면서 그리고 촬영을 하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만감이 다시금 머릿속에 교차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찌나 밝고 씩씩하던지.
에블린...좀만 기둘려.나 이제 그곳에 갈 수 있게 됐어.

그리고 민다나오섬의 다바오시에서 만난 성매매여성들을 위한 단체.
가브리엘라라는 여성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그 단체를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었다.
만일 ‘여연’이라면 이런게 가능했을까라는 생각부터 그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채로 있었지만 그들에게 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님 기억이나 할까?
우자지간 난 그곳에 가서 그들의 존재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생각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게 될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여성운동선상에서
연대하게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취재할 곳은 필리핀의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아시아엔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건 아직 너무 없다.
일단 직접 찾아가서 만나보고 들어보고 해야 무엇을 찍을 것인지 감이 잡힐 듯 하다.
김동원선배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보고 참 할 말이 많았는데 접었다.  
왜 접었을까?

비가 참 많이도 온다.
필리핀에도 우기인데 가면 졸라 많은 비를 보겠군.
필리핀은 우기에 하루에 한차례 정확히 폭우가 쏟아진다.
우산을 쓰는게 의미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가 올때는 나가지 않는다.
조용한 방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 비를 바라보면 참 낭만적인데
그 비가 오는동안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난 어느쪽에 있게될지 곧 보게 되겠지.

참 수림이도 있구나.
서울로 전화걸때마다 짜증부리면서 나 바뻐 했었는데
군소리 안하고 늘 바로 끊었던 녀석.
녀석을 위해 묵은지 세포기를 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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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스케치2008. 7. 17. 15:10





 










 

노명과 함께 한 첫 회의.
사진찍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독사진
여러분의 사랑스런 찍사 경은 드림

 

인디스토리 사무실에 2개월 동안 얹혀 지내던 때...
잘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6. 30. 16:32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촬영을 지지난주에 했다.

그간 자료를 모으면서 찍었던 분량이 벌써 디브이 테잎 70개가 넘지만
이제 워밍업에 종지부를 찍고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 첫 촬영의 현장은 ‘성노동자의 날 3주년 기념식'

2004년 성매매반대특별법이 만들어진 후 사회에 첫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나에게 생소했고 다소 어색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내내 그 목소리는 나에게 많은 것을 고민하게 했고 결국 ‘레드마리아’를
구체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몇 번의 기획안을 손보며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 고리를 찾아 헤메면서
나는 스스로 피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지점이 성노동자에 대한 고민이 마무리 되지 않은 지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차에 결국 첫 촬영도 그들의 모습을 담는 것에서 시작이 됐으니...

난 그 첫 촬영을 위해 HDV카메라를 빌려 내려갔다.
애인이나 다름없다고 애지중지 하는 박정숙 감독의 촬영감독에게 그 애인과
절대 섹스는 안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빌려와 촬영을 했는데 이게
예사롭지 않은 놈인 것이다.
어느새 나도 그놈에게 빠져 거의 섹스직전까지 갈 뻔 했지만 그놈에게 마음 준
다른 놈이 있으니 건전한 연애생활을 위해 일단 마음을 정리했다는 야그.

우자지간 그렇게 첫 촬영을 시작한 이후 촬영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고 촬영할 일정이
점점 빼곡히 달력을 채워나가는데 문제는 카메라다.
일단 미디어센터에 그 카메라가 있어서 빌려 쓰고 있는데 카메라 대여비에
지방출장비까지 주머니에 들어오기 무섭게 나가는 돈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디 털만한 은행이 없나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안토니아 반데라스처럼 권총을 휘드르는 재주가 있거나 빼어난 미모에 언변이라도
갖췄으면 모를까 은행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지풀에 이건 포기.

그런데 은행을 털지 않고서 카메라를 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촬영부터 다음 달 가게 될 필리핀 촬영분까지 일단
초반 제작비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흐흐 얼마나 좋은지 잠이 안 온다.
서울영상위원회에서 독립영화제작지원작에 선정이 됐다.
선정해준 심사위원에게 감사드린다. 물론 떨어졌으면 바가지로 욕을 했겠지만.ㅎㅎ
그리고 슬며시 50만원을 영화 만드는데 쓰라고 보내준 지선에게도 감사한다.
그녀의 처지를 보면 받을 수 없는 돈이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민들레'이후 영화를 새로 만들때 마다 늘 첫 촬영이 따로 없었다.
찍고 있던 내용들이 겹쳐져서 이 영화와 저 영화가 맞물려
이미 찍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첫 촬영은 느낌이 새롭다. 아니 좋았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오랜 고민 속에 어렵게 한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
얼마나 긴장되고 황홀한 것인지를 새삼 경험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 그대로 일단 쭉...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6. 23. 16:25

요즘 내생활의 즐거움은 천원짜리 옷을 파는 가게에 오며가며 들르는 일이다.

이런 옷은 특히 시간과의 진득한 싸움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하나를 제대로 건지면 그 기쁨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게
단점을 능히 감수할만한 장점이다.
그래서 난 종종 이곳에 들러 요즘 잘 입고 다니는 남방부터 수림에게 공수하는 나시까지
구입의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그리고 편안히 두 발 피고 잘 수 있는 나의 공간.
미례 집 거실에서 한 달 반을 게기다가 드디어 작은방을 쟁취해 세입자로 당분간 살기로 했는데
점점 장기화되고 보니 미안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작은방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중학교 때 화장실을 개조해 만든 1평 남짓한 공간을 책상하나 놓고 얼마나 좋아했든지.
그곳에 비하면 이공간은 잠도 잘 수 있으니 어디 감히 비할 수 있으리.

가끔 친구중 하나가 나에게 늘 이런 말을 한다.
‘언니는 가난을 잘 모르는 거 같아, 그치? 그런 경험 해본 적 없지?’
하하하 도대체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종종 해대는지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나도 너만큼 어쩌구저쩌구 이바구를 떠는 일도 민망한 일이다.
게다가 나에겐 단 한번도 가난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없으니 말이다.
아니면 이 단순함에 그새 잊어버렸는지도. 하지만 가난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은 또렷하다.

그 기억들 대부분이 없어서 힘들었던 것 보다는 대부분 따뜻한 기억들이다.
늘 군침만 흘리던 동네 리어커의 홍합을 훔쳐보다가 어느날 옆집 아줌마가 사준 한사발에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던 일, 동화책도 변변히 없었지만 늘 찾아가면 신간을 비롯해서
온갖 만화책이 줄줄이 있었던 그 허름한 만화책방, 염색약이 없던 시절 과산화수소수를 사다가
머리에 쳐발라 노랑머리를 하고 다녔던 청량리 588의 그 언니,
모두가 그 시절을 가난했던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돈이 철철 넘치는 21세기에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 넘쳐났으니 가난에 대한 정의는 새로워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난이 주던 그 행복한 기억은 사라져 가고 그 자리는 빈곤으로 꽉꽉 메꿔졌다.
있어도 있어도 늘 부족하고 누구도 넉넉하다고 말하는 이가 드물다.
전셋집에 살아도 50평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사람들은 늘 부족하고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절대 같아질 수가 없다. 공동체와 차별없음을 머리로는 깊이 알지만
그들은 세상을 이길 만큼 강하지 않기에 머리와 행동이 같아지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우린 가능하면 언행일치라는 말은 안쓰는게 좋다.
사전에서도 그 말은 지워버리는 게 좋겠다.

우자지간 난 가난이 좋다. 물론 피곤하고 힘든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필요이상의 부유함이 그리 부럽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 치고 살 수 없으니 동조하는 세력이 많아져야
내가 좀 편해지지 않을까.
세력을 확산시키려면 빈곤에 무너지는 마음을,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하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무리들을 없애면 되는 것일까.
그럼 그들을 없애는 무기는 뭐로 써야 하나...갑자기 미팅에서 맘에 들지 않은 남자를
떼어놓으려고 코딱지를 팠다는 친구가 생각난다. 그래 그것도 무기라면 무기겠다.
난 방구를 잘 끼니까 방구를 압축해서 보온병에 넣어가지고 다닐까.

빈곤을 느끼지 않는 가난은 어떻게 가능할지. 늘 그게 의문이고 숙제다.
머리 아프다. 그냥 영화나 빨랑 시작해야지.
그저께 다음 영화 레드마리아의 첫 스텝회의가 있었다.
제작비 때문에 망설이다 주춤주춤 했는데 기꺼이 함께 하겠다고 달려들어 준 친구들이 있어
조금 속도가 나려고 한다.
젠장..가난이 좋기는...역시 언행불일치다.
우자지간 두 달간 인디스토리의 사무실을 쓰기로 했다. 두 달이 지나면 또 방법이 생기겠지.

시작은 정말 반일까. 하하하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스케치2008. 6. 22. 15:07




















촬영 세영

땡큐^^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