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08. 9. 20. 16:33


윗사진 - 우리가 묵었던집 리타 할머니.말라야롤라스의 대표이기도 한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그나마 영어가 되는 할머니다. 통역을 대동하지 않은 관계로 할머니와 대화를 할때는
             서로 인상을 써가며 바디랭귀지가 주를 이룬다.하지만 서로 못해서 좋은건 문법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사진 - 마을의 할머니들은 걸어갈때 늘 어깨동무를 하곤 한다. 내가 옆에 있을때는 내게도
                어깨동무를 하시던 할머니들. 그분들이 걸어가실 길이 걸어온 길보다 짧겠지.
                나도 생각해보면 걸어갈 길이 걸어온 길보다 길지 않겠구나 생각을 했다.



 

지구상 어디를가나 할머니들이 있다. 어머니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할머니인 이들은 여자와는 다른 종자가 되어 살아간다. 최근에 읽고 있는 태백산맥에 봐도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종종 영화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역사책이 놓치고 가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할머니들의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한이 서려있고 그 한은 눈물이 되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영화를 만들면서 관객과의 대화가 싫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거 같다. 이야기가 확장되지 못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이야기속에 갇혀버리는 매너리즘이 싫었던 순간들처럼.

말라야 룰라스의 할머니들도 남들못지 않은 한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이야기가 되곤 한다. 꽃같은 나이에 순결을 잃고 여자로서 살아가기 힘들었던 그 이야기들. 가끔 증언이 주는 그 패턴화된 이야기들은 사실 할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사회가 종용하는 패턴이기도 하다. 말라야라는 말은 자유롭게 하라는 말이고 롤라스는 할머니들이란 말인데 그런 증언들과 함께 할머니들이 자유로와지는건 어떤걸 의미하는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말라야 롤라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단체이름이다. 우리가 익히 알던 위안소로 끌려가 오랜기간 강간을 당해야만 했던 할머니들과는 다른 사례인데 말라야 롤라스의 할머니들은 한마을에 일본군이 쳐들어와 주둔하면서 마을전체의 부녀자를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엄마와 딸이 동시에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자식을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워 버렸던 만행.

현재 마을에는 그렇게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지만 이미 반이상은 돌아가셨고 남아있는 58명의 할머니들 중 15명만이 걸어다닐 수가 있다. 할머니들의 집들을 방문하자니 홀로사는 시누이와 동서가 다같은 위안부할머니일 정도로 그들의 삶은 지겹게도 꼬여있었다. 마을의 사건이 터진후 모두가 쉬쉬하며 숨어살기도 하고 이웃동네로 이사가 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족들이 있는 그마을로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되었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속을 터놓고 사는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마을에서 그나마 좀 사는 집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일본에 가서 돈을벌어온 집들이다. 남자들은 건설업이나 공장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고 여자들은 엔터테이너나 성산업에 종사하다 돌아온 케이스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착찹했다. 과연 할머니들이 늘 말하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정의란 것이 현재의 그들의 삶에서 의미하는 건 무엇일지 말이다. 

우자지간 그렇게 살고있는 그 마을의 할머니들은 해마다 아니 한해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장례식을 치루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처음 방문했던날도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마을의 할머니들이 모여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참석한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슬픔이기엔 살아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오히려 평온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비가 엄청 내리던 날 하나밖에 없는 바지가 다 젖었을때 우리가 묵고있던 집의 리타할머니가 속바지 같은 빨간색 바지를 내주셨다. 천이 부드러워서 좋아 하면서 말이다. 할머니 저 빨간색 좋아하는거 어찌알고 감사합니다 했다. 할머니들은 왜 다들 이런 바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속으로 궁시렁 거렸지만 사실 맘에 꼭 드는 바지였다. 결국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바지를 배낭속에 넣고 다니며 요즘 잠잘 때 입고있다. 조연출 아람이도 바지하나를 받았는데 내바지가 더 이쁘다고 난리다. 이상하게 우리스텝들은 촌스러울수록 탐을 내는 경향이 있다. 거 참...ㅎㅎ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