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가사노동2012. 3. 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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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부엌’


고립되고 비가시화되는 노동공간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부엌은 마루를 내려간 다음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하는 별도의 공간이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식의 관련 금기들도 많았다. 가옥 구조가 변하면서 현재 대부분 가정에서 부엌은 밥을 먹는 공간을 포함하며 실내로 들어왔다. 부엌 공간은 이제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소개된다. 그리하여 때때로 부엌이 식사와 휴식공간일 뿐 아니라 그 식사를 준비하는 작업공간이라는 사실은 망각되곤 한다.

일상문화연구회의 <한국인의 일상문화>에 따르면, 부엌의 사정과 식탁의 사정은 다르게 이해된다며 ‘칼국수’의 예를 든다. 칼국수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당시 ‘간단하고 서민적인 음식’으로 소개될 때 사람들은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칼국수가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데는 상당한 노동력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보지 않고서, 식탁에 앉아 자신이 칼국수를 먹기 쉽다고 ‘간단한 음식’ 운운했다는 것이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도 끓인다’는데 그 부엌의 코앞에서 매일 먹고 자는 사람들이 간단한 음식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것은 부엌이 여전히 집에서 홀로 떠 있는 섬과도 같고, 부엌에서 노동을 하는 주부 역시 ‘나 홀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 구조에 있어서 부엌이라는 공간은 주부의 노동이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집안 구조상 문을 열었을 때 부엌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보통 부엌은 집에서 가장 깊은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평수가 넓어질수록 부엌과 식탁 사이에는 전통가옥 뺨치는 경계선이 생긴다. 공간의 여유가 생기면 부엌은 유리문을 달고 커튼을 드리우며 ‘가족들의 공동공간’이라기보단 점점 더 ‘주부의 개인작업공간’이 되어 숨어 들어간다. 

음식냄새나 조리기구가 내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누굴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식사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 작업 동선을 길어지게 하고 노동시간 동안 가족들로부터 고립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주부 K씨(54세)는 “식사준비를 할 때 옆에 사람이 있으면 필요할 때 시키게 되지만 혼자 있으면 그냥 혼자 한다”고 말한다. 다른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함께 준비를 하려고 해도, 각자의 혹은 공동의 휴식공간에 있는 식구들을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번거로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집은 부엌을 마음 편하게 ‘외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가족들은 밥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있을 수 있다. 부엌은 일부러 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고, 부엌에 있는 사람은 일을 하는 동안 ‘공동공간’인 거실에 있는 가족들을 보거나 텔레비전 등을 볼 수 없다. 식구들이 보는 것은 일하고 있는 주부의 ‘뒷모습’이다. 일반적인 가족들에게 부엌은 먹을 때만 공동공간이 되는 ‘식탁이 있는 곳’이지 공동작업공간은 아닌 것이다.

직장인 M씨(28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부엌에서 엄마가 불러도 못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통 부엌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주부 L씨(55세)는 “평생 음식 장만을 혼자 하는 것은 그럭저럭 참을 만했어도 식사가 끝난 후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TV를 보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 땐 화가 나고 미웠다”라고 말했다.

한편 다용도실은 대부분 부엌과 연결되어 있거나 부엌과 가깝고, 집의 깊은 곳에 숨어있어 가사노동을 비가시화하는 데 일조한다. 양파, 감자, 통마늘 등의 다듬어야 하는 재료들, 관리를 요하는 장기저장 식품 등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세탁 관련 기기들까지 위치하고 있다. 걸레, 손빨래, 세탁기 빨래 등 일거리들이 쌓여 있는 이 곳에 주부를 제외한 가족들은 ‘빨래를 가져다 놓으러’ 간헐적으로 방문할 뿐이다. 게다가 세탁기는 집의 후면에 위치한 다용도실 있는데 건조대는 주로 집의 전면(테라스)에 위치하고 있다. 세탁기와 건조대까지의 동선이 길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미관상’이다.

가정은 사회적 임금노동으로부터 혹은 학교로부터의 휴식처라고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고 조용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하며, 세탁기 소리도, 음식 냄새도 맡지 않고 ‘쉰다.’ 그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성된 공간에서 막상 어떠한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는 비가시화 되며, 그러한 노동은 고립되고 평가 절하된다. 이로써 우리의 부엌은 ‘집은 쉬는 곳’, ‘가정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 ‘집안 일은 엄마일’이라는 통념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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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