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08. 8. 10. 16:49

필리핀에서 돌아온지 네달이 조금 안됐다. 그동안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나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레드마리아와 한축을 이룬 일이었다.
종종 사적인 흥미진진한 일들이 더러 있어 꼭지가 돌 뻔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촉촉해지는
감동의 순간도 있었지만 역시 레드마리아가 주는 기쁨보다는 순위가 뒤처지는 게 사실이니
당분간 그렇게 계속 가는 수밖에.

마치 모든 무기의 장전을 끝내고 출정하는 기분으로 다시 가게 될 필리핀에서의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과연 생각대로 잘 진행이 될지 아님 다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두렵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어제는 필리핀에 보낼 의약품을 구입하고 영어와 따갈로그로 복용법을 일일이 써서
붙이느라 스텝들이 밤늦게 까지 고생했다.
그저 만나는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준비하고자
시작한 일인데 의외로 돈이 많이 모아져 의약품 가방만 10키로는 족히 되지 싶다.
무슨 전쟁터에 간다고 이렇게 많은 의약품을 준비하는지..쩝

돈을 보내준 분들 중에 민주성노동자연합과 민주성산업인연대에서 보내준 돈도 있다.
그분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필리핀의 성매매단체나 성노동자단체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분들께 직접 이들이 보내준 의약품을 전달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대충 감기약이나 두통약 정도를 생각했는데 역시 약사와 상의하니
필요한 약들이 의외로 많다. 똑같은 감기약이라 해도 아기들에게는 시럽을 준비해야 하고
파상풍과 같은 상처에 바를 연고며 여성들이 많이 필요로 하는 좌약이나 연고 등
구체적인 약들이 다시금 추가되어 약 종류만 20가지는 되는 듯 하다.

필리핀 촬영의 첫 시작은 이주여성 친정방문 프로젝트인<날자>행사를 찍으면서
그 행사에 선정된 한 가족을 취재하는 것이다.
이주여성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평범한 가족이고 부부관계도 끔직하게 좋은
이 커플을 통해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담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만나자마자 오랫동안 사귄 친구 처럼 벌써 정이 통하는 사이가 되어 그들의 친정방문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 가보는 친정이라고 하니 어떤 기분일지 그들의 고향은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가슴이 콩알 콩알 뛴다.

그리고나서 취재할 곳은 사우스레일 빈민가이다. 작년에 사우스레일을 방문하면서
사전취재삼아 이미 가난에 대한 연대를 만들긴 했지만 내 마음은 정작 레드마리아에
있었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늘 삶은 파헤쳐지고 뒤집어진다.
그리고 그 가난한 삶의 밑바닥에 던져지는 돈 몇푼.
그 돈을 무작정 버릴 수도 없고 취하기엔 너무 비굴해지는 우리의 치사한 삶의 기복.
작년 이맘때쯤 그 사우스레일을 방문하면서 그리고 촬영을 하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만감이 다시금 머릿속에 교차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찌나 밝고 씩씩하던지.
에블린...좀만 기둘려.나 이제 그곳에 갈 수 있게 됐어.

그리고 민다나오섬의 다바오시에서 만난 성매매여성들을 위한 단체.
가브리엘라라는 여성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그 단체를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었다.
만일 ‘여연’이라면 이런게 가능했을까라는 생각부터 그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채로 있었지만 그들에게 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님 기억이나 할까?
우자지간 난 그곳에 가서 그들의 존재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생각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게 될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여성운동선상에서
연대하게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취재할 곳은 필리핀의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아시아엔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건 아직 너무 없다.
일단 직접 찾아가서 만나보고 들어보고 해야 무엇을 찍을 것인지 감이 잡힐 듯 하다.
김동원선배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보고 참 할 말이 많았는데 접었다.  
왜 접었을까?

비가 참 많이도 온다.
필리핀에도 우기인데 가면 졸라 많은 비를 보겠군.
필리핀은 우기에 하루에 한차례 정확히 폭우가 쏟아진다.
우산을 쓰는게 의미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가 올때는 나가지 않는다.
조용한 방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 비를 바라보면 참 낭만적인데
그 비가 오는동안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난 어느쪽에 있게될지 곧 보게 되겠지.

참 수림이도 있구나.
서울로 전화걸때마다 짜증부리면서 나 바뻐 했었는데
군소리 안하고 늘 바로 끊었던 녀석.
녀석을 위해 묵은지 세포기를 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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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