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스케치2008. 12. 21. 15:22




 















촬영 아람



<080807~080811 제나린 Butuan 친정방문 | 아람 >

080807 1시쯤 international 필리핀 공항에 제나린 가족 도착
          2시 30분쯤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 근처에 있는 제나린 사촌 집에 도착. 
          치킨과 피자를 시켜먹음. 
          짐을 풀고 오랜만에 만나 대화 나누고 근처 시장에 가서 장을 봐온 뒤, 음식 해먹음(한국식 요리 쌈과 김)
          제나린 사촌의 자녀 옴.

080808 새벽 5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2시 30분에 일어남
          3시 30분쯤 공항으로 출발
          부투안 시티에 도착, 큰오빠와 여동생이 마중. 
          7시 반쯤 아침을 먹고 또 다시 한시간 반을 밴을 타고 10시쯤 제나린 집에 도착
          오빠 1명과 제나린 포함 자매 5명. 
          제나린 식구를 맞이하기 위해서 코코넛 따지 않고 기다렸다고 함. 
          화장실로 새로 고쳐 놓음. 
          오랜만에 어머니와 재회.        
          동네 잠깐 돌고 3시부터 5시까지 경순과 낮잠. 
          빨래하고 저녁 준비하는 모습. 
          오랜만에 제나린, 오고 가는 이웃주민들과 대화.   
      
080809 8시 반쯤 기상 9시 식사
          식구들의 엄청난 빨래를 너는 모습 촬영
          점심 이후 아버지 묘소 찾아가는 모습. 
          식사 준비 
          저녁 늦게까지 술마시고 식구들과 가라오케, 발룻 시식(-_-)
      
080810 새벽 5시 시장에 가기 위해 기상(-_-)
          두리안과 기타 먹거리들을 사고 식구들을 위해 바가지와 대야를 삼. 
          무리한 새벽 기상으로 다시 낮 12시까지 잠. 
          큰 오빠 자녀 안직의 목욕하는 모습. 
          제나린이 어머니에게 음식 먹여주는 모습. 
          제나린 남편 코코넛 나무 올라가는 모습. 
          동네 아이들&사촌 남매들&청정, 하나 함께 노는 모습
          제나린 남편이 제나린 큰 오빠에게 시계를 선물로 줌. 
          식사 준비하는 모습. 
          제나린 오빠 인터뷰

080811 제나린 어머니 목욕하는 모습
          제나린 조카 목욕하는 모습
          마닐라로 향하기 전 식구들과 대화 
          식구들 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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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10. 1. 16:40


윗 사진 : 빈민운동단체인 UPA에서 그레이스를 처음 만나던날. 이날 무슨대화를 하다가 이렇게 웃었는지 기억이 안난
              다.ㅎㅎ

              활짝웃는 친구가 그레이스이고 가운데 있는 친구는 지난번 사우스레일 촬영때 도움을 준 UPA활동가 티나.

아래 사진 : 그레이스집 이층의 난간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그곳에 앉아 동네를 보고있자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가끔 괜찮은 그림들이 종종 잡히곤 한다.




경순, 담배는 너의 건강에 댄저러스해. 그만 좀 피워.
(그때 집밖으로 열차가 지나간다)
그레이스 니네 집이 더 댄저러스 하거든.너나 걱정하세요..

철로변에 사는 그레이스의 집에 머물러 있다보면 시간날때마다 아니 내가 담배를
피울때마다 반복되곤 하는 그레이스와의 대화다.
온통 쓰레기더미에다 카메라에 녹화되지 않는게 원망스러울 정도의 악취가 생활화된
이곳에서 그레이스는 늘 청결과 건강을 이야기 하곤 한다.
거기다 하나 더 살을 붙이자면 하나님 이야기까지.

그레이스 근데 혹시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은 없니?
난 4명이면 됐어. 너무 많이 낳고 싶지 않아.
너 이미 많이 낳았거든. 도대체 어쩌자고 이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거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래도 너의 하나님은 착한하나님이 아닌거 같아.
경순 그런이야기 하면 안되.
뭐가 안되. 너의 하나님이 착하면 어떻게 너희들더러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아
여자들이 이토록 고생하도록 놔두겠니.
....

눈을 몇 번 흘기고는 이내 걸레를 들어 여기저기 청소를 하는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다가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해서
이곳 철로변에 둥지를 틀게됐고 현재까지 1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은 현재 철로변 근처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레이스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이제 6살짜리 막내아들을 두고 있는데
이곳에서 그만큼이라도 학교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나마 그레이스는 철로변에 사는 사람들중 부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촬영을 온 후 이틀째 되는날 그레이스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 막내아들이 눈이 짝짜기인데 니가 좀 도와줄 수 없겠니?
그레이스 난 부자가 아니야. 한국에선 나는 집도 없고 사무실도 없어.
내 재산은 그저 이 카메라 뿐이란다.나도 너만큼 가난하거든.
하지만 넌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잖아.비행기값 비싸잖아.
그건 그렇지만...쩝...우자지간 나 가난하거든.

그래 이해가 안되겠지.
비행기타고 먼나라에 와서 보기만해도 비싼 카메라들고 영화를 찍는다는데
돈이 없다는게 이해가 될 리가 없지.
차비가 아까워 다른동네 한번 다녀보기도 힘든 그들이 택시타고 이곳에 촬영을 오고
남편은 늘 한 개피씩 사서 피우는 담배를 한갑씩 사서 피우는 우리들이
정말 가난한건지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지원을 받아서 너희들을 찍고 있지만
이곳촬영이 끝나면 어떻게 한국에서 먹고살거며 어떻게 국내 촬영을 하고
또 어떻게 일본에 갈 수 있을지 머리에 쥐가 나는 이 심정을
그들이 이해할 수는 없으리.
이곳의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떨어져가는 제작비를 걱정하며
다시 비싼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가 알바를 시작해야 하는 우리의 상황을
그들은 도저히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자지간 촬영 3주를 남기고 나는 잠시 한국에 돌아왔다.
남아있는 잔고 3백만원이 떨어지면 필리핀에서의 숙박비며 남은 촬영비도 모자랄 판이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촬영도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때맞추어 들어온 알바를 놓칠 수 없었고 남에게 맡기기엔 남는게 없었다.
빠듯한 촬영일정과 흐름을 보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됐지만
결국 내가 들어가서 처리해야만 했다.
일이 한참 꼬이겠군 했지만 그나마 일이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했다.
우자지간 급하게 한국에서 일주일간을 보내고 나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찾은 그레이스의 동네.
이미 이주를 시작해서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린 철로변을 보고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서울에서 미처 다 처리하지 않고 온 일들부터 영진위에 지원한 제작비신청이 1차에서
무산됐다는 소식까지 온통 복잡한 일들이 마음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왜이리도 더운지.
그많던 철로변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여기저기 끊어진 전기줄을 줍는 아이들과
조용히 창문밖을 보며 말없이 밖을 내다보는 할머니들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리도 조용히 밖을 보는 것일까.

그러다 나도 그레이스집의 난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특별히 재미있는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는게 아닌데도 시간은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고
나도 모르게 참 평화롭다라는 말이 머리를 계속 맴맴돌았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아들과 낮잠을 자고 잊을만 하면 한번씩 흔들흔들 지나가는
은하철도 999.

저녁이 되자 그레이스 가족이 함께 이주할 곳에 집을 지으러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때맞추어 비는 억세게 퍼붓기 시작한다.
막상 차에 타고보니 그레이스의 가족만이 아니다.
같은 지역으로 이사가는 동네사람들이 트럭뒷칸에 꽉찼다.
철로변 사람들은 정부가 제공해주는 특정지역으로 이사를 가게되는데 그중 몬탈반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은 땅만 정부에서 제공받고(물론 공짜가 아니라 해마다 갚아야 한다)
집은 직접 자신들이 지어야 한다.
왜 이곳을 선택했냐고 물으니 다른지역은 너무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채소를 심을 수가 없단다. 자신들은 집은 작아도 조그마한 땅에 이것저것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땅을 원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그레이스도 주말마다 집을 짓기 위해 몬탈반으로 갔는데 벌써 두달째 짓고 있다는 집이
이제 벽돌 몇칸 올라온 수준이었다.
그레이스 난 니집을 보고싶어. 대체 언제 완성되는거니?
아마 내년 7월쯤...
오마이갓...그럼 그동안 어디서 살건데.
동생집에서 살다가 지붕이 완성되면 살면서 계속 지어야지.
그러면서 남편과 함께 열심히 집터의 잡초를 뽑고있다.
그레이스 난 아무래도 너희집이 정말 완성될지 상상이 안된다.

그런나를 오히려 처량하게 보면서 위로의 한마디를 건넨다.
담배한대 피워.
흐흐 웃으면서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옆에 세워두었던 카메라를 지나가는 아이들이 툭툭 건드리자 그레이스가
쫓아와서 혼을 낸다.
그리고는 나에게 한마디 한다.
너 재산은 카메라밖에 없잖아. 잘 간수해야지.
그래 니말이 맞다. 내재산은 그것뿐이지.

처음엔 나에게 돈을 요구하던 그녀가 어느새 독립영화 레드마리아를 대변하는
대변자가 되었다. 누군가 촬영을 못하게 하거나 왜 이런걸 찍느냐고 묻기로도 하면
그녀가 어느새 말하고 있다.
이 친구는 독립영화감독이고 아시아의 여성들을 찍고 있으며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보기위해 우리동네에서 촬영을 하는거라고.
오 마이 그레이스.흐흐

과연 저 황량한 터에서 그들이 말하는 꿈같은 궁전이 언제쯤 지어질지..
아니 완성되기는 할런지.
여기저기 채소를 키우겠다는 그 채소는 어디서 꽃을 피울지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내년에 집이 다 지어질때 쯤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물론 속으로는 내년에 정말 이곳에 올 수 있을까를 조용히 되물으면서 말이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8. 9. 20. 16:33


윗사진 - 우리가 묵었던집 리타 할머니.말라야롤라스의 대표이기도 한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그나마 영어가 되는 할머니다. 통역을 대동하지 않은 관계로 할머니와 대화를 할때는
             서로 인상을 써가며 바디랭귀지가 주를 이룬다.하지만 서로 못해서 좋은건 문법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사진 - 마을의 할머니들은 걸어갈때 늘 어깨동무를 하곤 한다. 내가 옆에 있을때는 내게도
                어깨동무를 하시던 할머니들. 그분들이 걸어가실 길이 걸어온 길보다 짧겠지.
                나도 생각해보면 걸어갈 길이 걸어온 길보다 길지 않겠구나 생각을 했다.



 

지구상 어디를가나 할머니들이 있다. 어머니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할머니인 이들은 여자와는 다른 종자가 되어 살아간다. 최근에 읽고 있는 태백산맥에 봐도 어머니는 여자가 아닌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종종 영화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역사책이 놓치고 가거나 숨기고 싶어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할머니들의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한이 서려있고 그 한은 눈물이 되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영화를 만들면서 관객과의 대화가 싫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던거 같다. 이야기가 확장되지 못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이야기속에 갇혀버리는 매너리즘이 싫었던 순간들처럼.

말라야 룰라스의 할머니들도 남들못지 않은 한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으로 이야기가 되곤 한다. 꽃같은 나이에 순결을 잃고 여자로서 살아가기 힘들었던 그 이야기들. 가끔 증언이 주는 그 패턴화된 이야기들은 사실 할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사회가 종용하는 패턴이기도 하다. 말라야라는 말은 자유롭게 하라는 말이고 롤라스는 할머니들이란 말인데 그런 증언들과 함께 할머니들이 자유로와지는건 어떤걸 의미하는것일까 자못 궁금하다.

말라야 롤라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단체이름이다. 우리가 익히 알던 위안소로 끌려가 오랜기간 강간을 당해야만 했던 할머니들과는 다른 사례인데 말라야 롤라스의 할머니들은 한마을에 일본군이 쳐들어와 주둔하면서 마을전체의 부녀자를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엄마와 딸이 동시에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자식을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워 버렸던 만행.

현재 마을에는 그렇게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지만 이미 반이상은 돌아가셨고 남아있는 58명의 할머니들 중 15명만이 걸어다닐 수가 있다. 할머니들의 집들을 방문하자니 홀로사는 시누이와 동서가 다같은 위안부할머니일 정도로 그들의 삶은 지겹게도 꼬여있었다. 마을의 사건이 터진후 모두가 쉬쉬하며 숨어살기도 하고 이웃동네로 이사가 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족들이 있는 그마을로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되었고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 서로의 속을 터놓고 사는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이마을에서 그나마 좀 사는 집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일본에 가서 돈을벌어온 집들이다. 남자들은 건설업이나 공장에 가서 일을 했다고 하고 여자들은 엔터테이너나 성산업에 종사하다 돌아온 케이스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착찹했다. 과연 할머니들이 늘 말하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정의란 것이 현재의 그들의 삶에서 의미하는 건 무엇일지 말이다. 

우자지간 그렇게 살고있는 그 마을의 할머니들은 해마다 아니 한해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장례식을 치루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처음 방문했던날도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마을의 할머니들이 모여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미 죽음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참석한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슬픔이기엔 살아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오히려 평온한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비가 엄청 내리던 날 하나밖에 없는 바지가 다 젖었을때 우리가 묵고있던 집의 리타할머니가 속바지 같은 빨간색 바지를 내주셨다. 천이 부드러워서 좋아 하면서 말이다. 할머니 저 빨간색 좋아하는거 어찌알고 감사합니다 했다. 할머니들은 왜 다들 이런 바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속으로 궁시렁 거렸지만 사실 맘에 꼭 드는 바지였다. 결국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바지를 배낭속에 넣고 다니며 요즘 잠잘 때 입고있다. 조연출 아람이도 바지하나를 받았는데 내바지가 더 이쁘다고 난리다. 이상하게 우리스텝들은 촌스러울수록 탐을 내는 경향이 있다. 거 참...ㅎㅎ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