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위안부2013. 8. 10. 00:21

▲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328쪽 | 1만8000원

2011년 12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한복, 단발머리, 맨발의 소녀는 움켜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많은 한국인들이 간직한 군위안부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는 이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는 대부분 20대였고, 정규교육을 받을 만큼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기에 학생에게 어울리는 단발머리를 할 가능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 교수는 단지 조각상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조각상은 제국과 식민지, 계급 격차 등 군위안부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모두 삭제한 채, 오직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강간당한 뒤 버려진 가련한 소녀만을 기린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의 뒤에는 ‘정의의 독점’을 꾀하는 한국, 일본의 강경파들이 있고, 이들이 문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는 분명 논쟁적이다. 앞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작 <화해를 위해서>(2005) 역시 그랬다. 한국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는 여전히 뜨겁다. 일본엔 혐한 분위기가 일고 있고, 보수 정권은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입지는 더욱 취약해졌을 수도 있다. 박 교수도 <제국의 위안부> 서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화해를 위해서> 출간 시)보다 훨씬 나빠졌다”고 말한다.<제국의 위안부>가 말하는 위안부란 어떤 사람들인가. 일찌감치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했던 일본은 식민지로 떠난 자국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불편’을 호소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라유키상’을 파견했다. 가라유키상이란 해외에 돈을 벌러 떠나는 여성을 일컫는 말로, 사실상 해외 일본인 거주지에 있는 공창의 유녀를 뜻한다. 가라유키상은 강력한 국가권력, 가부장제 아래 있는 가난한 여성의 고난을 보여준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기원은 가라유키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전쟁을 하던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일본 여성만으로는 그 수를 감당할 수 없자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집의 주체와 방법에서 논란이 있다. 한국에서의 인식과 달리, 조선인 군위안부는 일본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기보다는 조선의 지방관료, 매춘업자들이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쌀밥을 먹게 해준다는 꼬드김으로 데려갔다는 증언이 많다. 물론 박 교수가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이 이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강제성’을 만든 일본 정부를 면책하지 않는다.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설령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매매춘에 나섰다 하더라도, 세상이 멸시하는 일을 선택한 것은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남성, 군대, 국가 그리고 일본 제국에 최종 책임이 있다. 다만, ‘현실적 강제성’을 따져묻기 시작하면, ‘우리 안의 협력자들’까지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는 오늘날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중국,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와 조금 달랐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라는 말에서 ‘조선’이란 국적이 아닌 출신지일 뿐, 이들은 서류상 일본인이었다. 국적이 조선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성을 착취당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겠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적의 여자’가 아니었기에 일본군의 가족, 연인의 역할까지 하도록 요구받았다. 조선 출신 일본 군속이 그러했듯, 조선인 위안부들은 중국, 인도네시아 등 현지인들에게 ‘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없었다는 한국인의 인식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절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박 교수는 1993년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명의로 발표된 ‘고노 담화’와 이후 만들어진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한다. 고노 담화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이 위안부 본인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고 참혹했다는 점도 적시했다.

사회당수인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이끌던 일본 내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자민당 의석수가 사회당의 세 배였던 당시 의회에서는 관련 법제를 만들기 불가능했다. 일본에서는 과거청산 문제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내각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기금을 마련해 보상금과 함께 무라야마 총리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보상금을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한국의 여론은 이것을 받아들이면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 보상사업에는 52억엔의 돈이 들어갔고, 이 중 90%가 정부 예산이었다. 그리고 보상금과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인 위안부도 61명이 있었다. 여전히 수요집회에 나가는 ‘투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서 위안부는 당사자인가. 박 교수는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지원 단체를 비판한다. 그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으로 응원받고 있는 위안부 지원운동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일본의 위안부 지원운동은 피해 여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일본의 보수적 정치 구도를 혁파하려는 좌파 진영의 수단에 그친다고 본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 위안부 문제의 해결 책임은 여전히 일본 정부에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전쟁 후 처리에 대한 것일 뿐 식민지 지배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전(前) 제국 국가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이 한일협정의 시대적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해 반성한다면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

1990년대의 사죄와 보상도 아쉽다. 박 교수는 당시의 문제는 보상 주체가 아니라 보상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상에 가까웠는데도 정부의 관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고, 인도네시아, 중국, 조선 출신 위안부에 대한 구분도 섬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20세기는 인권이 세계 각지에서 침해당한 세기였는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넓은 의미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좁은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아베 신조)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다시금 고조되는 지금 상황에서 일본은 외부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고 박 교수는 제안한다. 일본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많다는 점을 피해자와 국제사회가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의 문제이자 자본의 문제였다. 돌아보면 제국주의 일본만이 위안부를 동원했던 건 아니다. 위안부는 “일본의 천황제나 일본의 군사주의가 아니라 국가세력을 유지/확장시키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는 국가 시스템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 이후 한국, 일본에 기지를 둔 미군 기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 이곳 기지촌에는 한국인 여성 대신 조선족, 러시아, 페루, 필리핀 여성이 대거 들어왔다. 조선인 군위안부뿐 아니라 이들 모두가 피해자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가로막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도덕적 오만을 경계하자고 제안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의 ‘피해자’로 박제화해 ‘투사’나 ‘민족의 딸’로 만들기보다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박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친일파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실제 인터넷에서는 그를 두고 ‘위장한 일본 우익’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된 대담하고 논쟁적인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092100545&code=900308

Posted by 빨간경순
상영정보2012. 12. 3. 14:27

여성국제연대행동네트워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지지하는 단체로 주로 국내외 외국인들이 중심으로 활동하는단체라고 한다.

이날 상영은 한.영문자막으로 상영이 될 예정이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그들이 직접 상영포스터를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2. 11. 4. 20:57

우리 사회에는 수없이 많은 노동이 있다.하지만 임금을 받고 하는 노동과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이 분리되고 감정을 파는 노동과 팔지 않아도 되는 노동이 있고 인격을 유지시키며 할 수 있는 노동과 그렇지 못한 노동 등 수많은 노동이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혼재되기도 해서 매우 복합적으로 복잡한 구조다. 그런데 그중 자신의 노동으로 자부심을 느낄만큼 스스로 가치있게 생각하는 노동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이 그 가치를 임금에 둔다든지 자신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다소 착각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노동의 의미를 확대포장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Posted by 빨간경순
빨간경순의 노트2012. 11. 2. 21:28

제목만 들어도 너무 재미있을거 같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만나 귀신들린 미친 세상을 만들고 있는 지금 이시대에 말이다.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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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
여행일기2012. 9. 6. 04:05

이번여행에서 재밌는 현상중 하나는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거. 

보통 여행을 하다보면 계획이 틀어지거나 숙소를 잘못 잡았거나 밥을 시켜먹다가 불쾌해지는 일이 다반사로 생기고 

그런 일을 해결해 가는 일이 여행코스의 필수인 것처럼 등장하게 되는데 정말 희안하게도 이번여행에서는 

짜증에 ‘짜’자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만족스럽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게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라는 걸 번번히 뼈아픈 경험을 통해 알게되는 우리들은 

뼈아픈 경험을 하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을 만나서 느끼게 되는 답답함이 가끔 뼈아픈 경험이 되곤한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안이하고 덜 떨어진듯한 모습을 보는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걸 종종 경험으로 알기에. 

하지만 이번은 정말 달랐다. 

그런 경험이 있고 없음과 상관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 힘은 무엇이었을지.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11. 2. 22. 16:56

대충 봄 냄새가 나의 무딘코에까지 전해지는 걸 보면 겨울이 얼추 지나간 거 같다. 한때는 겨울이 그렇게도 좋았는데 그래서 겨울이 다 간거 같은 애매한 2월이 참 싫었는데 언제부턴가 봄이오는 이 느낌이 나쁘지 않다. 뭐 봄이 와도 여전히 나는 레드마리아와 함께 머리가 아프겠지만. 그래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진짜 쑤신다.

레드마리아를 찍으면서 여유있게 글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져 점점 더 글과는 거리가 느껴지는터라 조금씩 다시 회복해 보고자 노력중이다. 그동안 글이라는 건 기획서와 지원서 그리고 섭외하는 내용과 현장에서의 구상등이 전부고 모든 건 머리에서 돌아갔다.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며 글을 쓸 시간도 없어서 한동안은 머리로 글을 쓰는 습관까지 생겼다. 뭔가 쓰고 싶은 거리들이 생각나면 걸어가면서 차를 타면서 촬영장에 나가면서 머리로 글을썼다. 문장을 써나가면서 지우기도 하고 다시 쓰는 이과정이 끊임없이 반복이 됐는데 결국 그 머리로 썼던 글들을 컴퓨터에 앉아 옮겨야지 생각하고 나면 당근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그렇지. 안그래도 잘까먹는 내가 무슨 수로..우자지간 그런 과정을 지나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글을 쓰는게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글을 쓰는 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편집을 할 때도 이거야 워낙 습관이기는 하지만 영상으로 구성을 하고 바로 편집을 하다보니 구성안이라는 것도 써보지를 못했다. 사람마다 습관이 있겠는데 나는 글로 구성을 하는게 익숙하지 않다. 그림 봐야 상상력이 잘 가동이 되는지라 편집구성안을 먼저 정리하고 편집을 하는게 잘 안된다. 그러다보니 가편을 할때 구성이 휙휙 변한다. 물론 생각이 변하면.

하지만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다.포기할 수 없는 생각. 애초에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 시작이 된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던 그리고 그 출발이 여성의 몸이라는 것. 그런데 이게 쉽게 그림으로 연결이 잘 안됐다. 가편 모니터를 하니 누구는 몸과 노동을 분리하라고도 하고 누구는 주인공중 서너명은 과감히 포기하라고 하고 누구는 영화자체를 포기하라는 말도 했지 아마. 그래 그래서 쉽게 끝날 거 같던 이 편집은 길어지고 그만큼 머리도 복잡해 진다.

나의 생각이 틀렸던 걸까. 그게 무리한 시도였던 걸까. 온갖 생각들이 자신을 후벼파기 시작한다. 그런데 누구는 거기다 한술 더떠 이런 걱정까지 해준다. 영화가 완성되면 어디서 틀어줄지 걱정이라고. 왜 그게 걱정이야? 아니 신작도 아닌데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서요...야 뭔소리야 신작이지. 여성영화제 옥랑상 프리미어 상영해야 돼서 완성도 안된걸 무리해서 딱 한번 상영한게 고작인데 그리고 이제 영화를 완성해 보려고 아둥바둥 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 그런 고민까지 떠안고 가야한단 말이야.

내심 가까운 독립영화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게 여간 속상하고 서운한게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날 하루종일 머리에서 뚜껑이 여러번 열렸다 닫혔다 했지만 그리고 영화제서 영화 안틀면 지들 손해지 내손핸가? 라고 큰소리 빵빵쳤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개인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완성되고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라는데 이런정도의 생각이야 가능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속상하다. 의욕도 상실될 위기.

무슨 놈의 팔자인지 이상하게 레드마리아를 만드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엄살 좀 부릴 여유가 없이 뭔가 끊임없이 대처를 하고 또 대처를 하고 대처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거 같다. 뭐 그래서 또 더 애착이 가는 작업인지도 모르겠고.이번주는 3차 가편본 모니터 중이다. 1차 2차는 공개적인 모니터를 했는데 이번에는 개별 모니터를 받고 있다.근데 하나씩 들어오는 의견이 나쁘지 않다. 물론 아직 끝은 아니다. 좀 있으면 도착할 애니메이션 작가와 또 즐거운 설전을 벌여야 하고 군데군데 영상을 정리할 것들도 많다. 역시 영화로 돌아가니 다시 의욕이 불끈불끈.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9. 3. 14. 16:49

사람의 관계라는게 참 묘하다. 관계에 집착하면 할수록 의무와 책임감 사이에 던져지는 자잘 한 고민들로 상처와 고민을 반복적으로 안게 되지만, 관계를 열어놓고 받아들이면 수많은 관계들이 다시 알을 까듯이 새로운 관계가 이어져 말그대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니 말이다.

일본에서의 촬영도 역시 그 관계의 힘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관계속에 묻어 두었더라면, 그렇게 우리에게 소개를 해주고 우리가 만날 수 있게 연결해준 그 사람들의 열린관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수많은 사람들.

모르는 사람이지만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해주신 오오즈 선생님 부부를 알게된 것도 텐트에서 살고있는 이치무라씨을 소개해준 페민의 아카이시씨를 만난 것도, 그리고 파나소닉사를 대상으로 해고무효투쟁을 벌이는 사토씨를 일하는 여성의 네트워크 대표 미도리씨를 통해 알게 된것도 지금 시즈오카에서 촬영중인 재일교포 개호사 조순자씨를 알게된 것도 모두가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연결된 관계를 통해서였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관계가 이제는 우리의 관계가 되었고 우리를 통해 또 누군가가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관계의 좋고 나쁨은 그 관계를 맺는이의 몫이니 이후야 어찌 소개해준 이의 소관이겠는가. 다만 소개해준 이의 마음에 보답하고 또 새롭게 만들어진 관계를 잘 잇기위해 서로가 노력하는 것이 남을뿐.

그렇게 관계를 생각해보니 우리시대의 관계 맺기가 참 자본주의 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족관계든 친구관계든 물론 그보다 훨씬 관계를 확장시켜보면 알겠지만 참 돈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지 돈이 아니어도 그 방식 그대로 관계를 소유하려들고 내가 아는 관계를 나만이 알고 있으려하는걸 마치 대단한 관계인냥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관계를 소유하고 싶은 것일까? 왜 관계를 소유하면서 관계가 확장되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고 하는 것일까. 가끔 그렇게 답답한 관계들을 보면 할말이 없지 않지만 할 말을 다한다고 해서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보면 관계라는 건 역시 상호적인것보다는 다분이 내속에서 일방적인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내영화에 출연한 인연으로 두 번째 영화를 같이 하고 있는 경은을 만난 것도, 그렇게 먼나라 필리핀에서 어쩌다 내앞에 나타나 준 아람과의 인연도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어느날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도움을 기꺼이 주겠다고 말해준 영란까지 이들을 생각하면 늘 어메이징한 관계의 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더더욱 어메이징하게 만들어주는 또 한명의 친구가 있는데 영란이 돌아간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고 있는 혜진이다. 요즘 내주변에 혜진이 왜이리 많은지..ㅎㅎ 우자지간 그녀를 만나 이곳에서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그녀에게 그랬다. 니가 나를 만나려고 십년동안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구나.하하하 물론 그녀의 표정은 안봐도 알겠지만 황당무계하다는 표정.

이제 남은건, 그렇게 맺어준 훌륭한 관계까지는 좋았지만 카메라에 담겨진 내용도 좋아야 하는데 그것이 고민이라는거. 이건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해결되기 힘든 나만의 몫이니 죽는 소리 해봤자 나만 골치아프겠지.^^ 게다가 지금은 눈까지 다쳤으니 일단 쉬는게 상책이다. 아침에 급하게 일어나다 말그대로 눈깔을 카세트에 뽀족하게 나온부분에 그대로 박아버렸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각막이 찢어지고 눈깔이 탱탱부었다. 병원에 가서 15만원깨지고(물론 이건 산재처리 해줘야해 흑) 눈은 하루종일 뜰수가 없어서 며칠간 촬영 종치게 생겼는데 경은이 자기가 해보겠다며 대신 촬영을 나갔다.

이런, 아람이는 도쿄에서 경은은 시즈오카에서 졸지에 카메라맨이 둘이나 생겼다. 물론 난중에 그러겠지. 경순이 시켰으니 그림이 안나와도 지들 책임 아니라고. 그렇게 발뺌하고 싶겠지만 사람이 어디 똥 눌때와 똑같은가. 엉터리로 찍어오기만 하면 걍 캭!!! 흐흐흐



Posted by 빨간경순
제작일기2009. 2. 11. 16:45

날짜와 시간이 어찌가는지 알수가 없다. 아니 느끼지 못하고 가는 것일테지. 

6일쯤 글을 한번 써야지 했는데 일기에는 날짜만 써있고 오늘날짜를 확인해보니 11일이다.
5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것이다.
기억력의 감퇴인지 아님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건지..ㅎ

어제는 전통일이라고 하는 노동운동 단체의 사무국장인 토리씨를 만났다. 전통일은 중소기업이나 작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주로 가입을 하는 일반노조인데 현재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가입해 있다고 한다. 보통 일본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시간당 1000엔에서 1200엔정도를 받지만 그돈으로도 일본의 높은 물가를 따라잡기 힘든 판인데 일본에 산업연수생 명목으로 들어와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시간당 고작 300엔정도라고 한다.

10년전부터 불법이주노동자들을 대거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산업연수생 외국인노동자들을 늘리고 있는데 문제는 합법적으로 그들의 노동력과 인격이 헐값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50명이하의 중소기업 사업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을 많이 데려오는데 사장이 직접 맘에 드는 여자들을 골라서 데려오곤 하는데 시작부터가 인신매매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그리고 작업장에서는 화장실가는 것까지 체크를 해서 1분을 초과하면 패널티를 매기는등 그들을 감시하고 돈을 뜯어내는 수법이 얼마나 악랄한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물론 한국에서 종종 듣던 사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경제대국 일본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인지라 자못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토리씨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처럼 자본가는 노동력만을 사는게 아니라 그들의 인격마저 지배한다는 말처럼 돈이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무서움이 새삼 떨쳐지지를 않았다. 그래서인지 좋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는 인물에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인간상에 대한 혐오감이 내내 머리를 짓눌러 지금까지도 개운치가 않다.

토리상을 만나후 우리는 오사카여성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치에코씨를 만나러 갔다. 우리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제안한 그녀에게 늘어가는 테잎의 일본어프리뷰를 부탁하기 위해서 였다. 치에코씨는 쇼킹패밀리의 일본 자주상영회를 맡아서 해주시기도 했는데 자신이 상영한 영화중 베스트에 속한다는 말을 하면서 레드마리아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물론 나도 기대감이 만만치 않다고 응수를 했지만 나중에 어찌감당하려고 입에서는 늘 자신감에 찬 말들이 툭툭 튀어나와 통제가 안되는지...쩝

우자지간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저녁준비를 위해 일찌감치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왔다. 갑자기 웬 저녁준비냐 하면 우리가 묵고있는 숙소를 제공해주신 오오즈선생님 부부에게 감사의 표시로 한국식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떤음식을 먹고싶냐고 사전에 여쭤봤더니 부침기와 떡볶기를 말씀하시기에 우리는 허겁지겁 그 재료들을 사기위해 치에코상의 사무실을 빠져나온 것이다.

다행히 시부야의 쇼핑센터의 식품코너에 떡볶기용 떡이 있어서 우리는 무사히 시간을 맞추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저녁 8시 칼같이 시간을 맞추어 오신 두분에 맞이하면서 우리의 요리사간도 칼같이 끝났다. 재료는 열심히 아람이가 씻고  갖은 재료를 알맞게 경은이 썰고 부침기는 내가 그리고 떡볶이는 경은이가 그리고 다시 늘어놓은 거실은 영란이 열심히 치우는 것으로 사전논의가 없었음에도 우리의 역할분담은 착착 어찌나 빠른속도로 진행이 되든지.

남편인 오오즈선생님이 99년부터 5년간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국친구들이 많은 도움을 주셔서 본인도 일본에 오는 한국분들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싶어서 현재 비어있는 집을 내주시게 된거라고 했다. 일본에 1년간 연수를 온 한국인교사가 이집에 묵었었고 그 바톤을 이어받아 우리가 묻게 되었다. 선생님의 좋은 뜻을 이어받고 나중에 올 한국인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가 청소기나 목욕탕의 온수를 고치는데 일조를 하고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집이 언제 팔릴지 알 수 없어 그냥 이대로 쓰는게 좋겠다고하셔서 그만 제안을 접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인 차이와 경제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 결론적으로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가족이나 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적어도 한국은 그렇지 않지 않냐고 물으시는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국이라고 왜 다르지 않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문화적으로 다를뿐이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한국에 사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가게되는지. 

사실 우리는 얼마나 민폐에 예민한가.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동료든 시간과 공간과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모든 것들에서 사실은 돈이 없어서 해결되지 않는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우리는 민폐에 대한 강한 알러지 반응이 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저사람은 요만큼 한것에 부르르 하고 저사람이 돈을 안내서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내는 것에 기분 나뻐하고 나는 힘든데 저사람은 편히 가는 것 같아 속이 안좋고 내 공간과 내 시간에 대한 침해에 가중되는 감정소모까지 우리는 얼마나 민폐를 끼치는 인간들에 대한 혐오감이 많은지...

현재 두명의 주인공을 열심히 따라잡고 있고 두명의 주인공을 또 열심히 찾고있다. 그들을 찾고 영화를 완성해가는 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며 하는 일이지만 민폐에 대한 너그러움이 가능한 사회를 꿈꾸면서 일단 ‘이끼마쇼!!’(갑시다) ㅎ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