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에서 출간돼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까지 당한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자 조간에 이례적으로 긴 서평을 실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은 번역돼 최근 일본어판이 출간됐다.
서평을 쓴 사람은 일본 소설가이자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 교수인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源一郞). 글은 오피니언 페이지에 해당하는 ‘논단시평’에 메인으로 실렸다. 모양새는 ‘제국의 위안부’를 ‘일한 역사인식문제란 무엇인가’(기무라 간 지음) ‘과거는 죽지 않는다’(테사 모리스스즈키)와 함께 독후 감상의 형태로 정리한 것이지만 내용의 대부분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평가다. ‘고독한 책…기억의 주인이 되기 위해’라는 제목의 서평 중 ‘제국의 위안부’ 관련 부분을 번역해 소개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출판돼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제소ㆍ고소당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이 드디어 출간됐다. 감명 받았다고 쓰기도 망설여질 정도로 준엄함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이후로 쓰여질 모든 ‘위안부’에 관한 말에서, 공감하든 반발하든 부동의 항성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이 정도까지 고독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저자의 마음을 생각하며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회복불가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균열을 만들어냈다. 한쪽에는 “위안부는 단순한 매춘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위안부들은 강제로 끌려온 성노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국가의 책임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거듭해왔다.
박유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위안부들은 경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제각각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어왔다. 그것은 위안부문제를 부정해온 사람에게도, 위안부들을 지원해온 사람들에게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양한 상황을 말한 증언 가운데에서 각각 갖고 있던 대일본제국의 이미지에 맞춰 위안부들의 ‘기억’을 취사선택해온 것이다.”
박유하가 하려고 한 것은 위안부들 한사람 한사람의 다양하고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거기서 박유하가 귀에 담아낸 이야기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는 것이었다.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전장에 끌고 간 ‘책임’과 ‘죄’의 주체는 제국일본이라면서, 동시에 실제로 그들을 끌고 간 조선인 동포업자와 그것을 허락한 ‘여자의 인생을 지배 아래 두는 가부장제’(일본인의 경우도 같다)를 강하게 비판한다.
‘사죄’해야 하는 것은 제국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또 북한)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졌다. 왜일까. 식민지에서 살았던 사람은 때로는 본국민보다도 더 열렬히 그 종주국에 사랑과 충성과 협력을 맹세했다. 그것이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은 잊혀져야 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위안부’의 대체물로서 전장에 보내진 ‘조선인 위안부’에게 일본인 병사는 때로 (몸과 마음을 유린하는)치떨리는 증오의 대상이고, 때로는 (똑같이 전장에서 ‘물건’으로 취급 받는)동지일 수도 있었다. 그 모순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됐던 그들의 진실한 목소리는 일본과 한국 어느 쪽의 공적인 ‘기억’에서도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노예’는 성적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은폐해버리는 말이다. 위안부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측면만 주목해서 ‘피해자’로서 기억 이외를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된다. 그것은 위안부들에게서 스스로 기억의 ‘주인’이 될 권리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가 바라는 기억만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속을 강제하는 것이 된다.”
과거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인 것을 허락 받지 못했던 위안부들은 지금은 자기자신의 ‘기억’의 주인인 것을 거부당하고 있다. 그 비애가 박유하의 책을 깊은 고독의 색깔로 물들이고 있다.
2011년 12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한복, 단발머리, 맨발의 소녀는 움켜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많은 한국인들이 간직한 군위안부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는 이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는 대부분 20대였고, 정규교육을 받을 만큼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기에 학생에게 어울리는 단발머리를 할 가능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 교수는 단지 조각상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조각상은 제국과 식민지, 계급 격차 등 군위안부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모두 삭제한 채, 오직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강간당한 뒤 버려진 가련한 소녀만을 기린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의 뒤에는 ‘정의의 독점’을 꾀하는 한국, 일본의 강경파들이 있고, 이들이 문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는 분명 논쟁적이다. 앞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작 <화해를 위해서>(2005) 역시 그랬다. 한국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는 여전히 뜨겁다. 일본엔 혐한 분위기가 일고 있고, 보수 정권은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입지는 더욱 취약해졌을 수도 있다. 박 교수도 <제국의 위안부> 서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화해를 위해서> 출간 시)보다 훨씬 나빠졌다”고 말한다.<제국의 위안부>가 말하는 위안부란 어떤 사람들인가. 일찌감치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했던 일본은 식민지로 떠난 자국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불편’을 호소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라유키상’을 파견했다. 가라유키상이란 해외에 돈을 벌러 떠나는 여성을 일컫는 말로, 사실상 해외 일본인 거주지에 있는 공창의 유녀를 뜻한다. 가라유키상은 강력한 국가권력, 가부장제 아래 있는 가난한 여성의 고난을 보여준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기원은 가라유키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전쟁을 하던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일본 여성만으로는 그 수를 감당할 수 없자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집의 주체와 방법에서 논란이 있다. 한국에서의 인식과 달리, 조선인 군위안부는 일본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기보다는 조선의 지방관료, 매춘업자들이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쌀밥을 먹게 해준다는 꼬드김으로 데려갔다는 증언이 많다. 물론 박 교수가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이 이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강제성’을 만든 일본 정부를 면책하지 않는다.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설령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매매춘에 나섰다 하더라도, 세상이 멸시하는 일을 선택한 것은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남성, 군대, 국가 그리고 일본 제국에 최종 책임이 있다. 다만, ‘현실적 강제성’을 따져묻기 시작하면, ‘우리 안의 협력자들’까지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는 오늘날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중국,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와 조금 달랐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라는 말에서 ‘조선’이란 국적이 아닌 출신지일 뿐, 이들은 서류상 일본인이었다. 국적이 조선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성을 착취당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겠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적의 여자’가 아니었기에 일본군의 가족, 연인의 역할까지 하도록 요구받았다. 조선 출신 일본 군속이 그러했듯, 조선인 위안부들은 중국, 인도네시아 등 현지인들에게 ‘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없었다는 한국인의 인식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절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박 교수는 1993년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명의로 발표된 ‘고노 담화’와 이후 만들어진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한다. 고노 담화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이 위안부 본인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고 참혹했다는 점도 적시했다.
사회당수인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이끌던 일본 내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자민당 의석수가 사회당의 세 배였던 당시 의회에서는 관련 법제를 만들기 불가능했다. 일본에서는 과거청산 문제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내각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기금을 마련해 보상금과 함께 무라야마 총리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보상금을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한국의 여론은 이것을 받아들이면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 보상사업에는 52억엔의 돈이 들어갔고, 이 중 90%가 정부 예산이었다. 그리고 보상금과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인 위안부도 61명이 있었다. 여전히 수요집회에 나가는 ‘투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서 위안부는 당사자인가. 박 교수는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지원 단체를 비판한다. 그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으로 응원받고 있는 위안부 지원운동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일본의 위안부 지원운동은 피해 여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일본의 보수적 정치 구도를 혁파하려는 좌파 진영의 수단에 그친다고 본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 위안부 문제의 해결 책임은 여전히 일본 정부에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전쟁 후 처리에 대한 것일 뿐 식민지 지배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전(前) 제국 국가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이 한일협정의 시대적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해 반성한다면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
1990년대의 사죄와 보상도 아쉽다. 박 교수는 당시의 문제는 보상 주체가 아니라 보상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상에 가까웠는데도 정부의 관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고, 인도네시아, 중국, 조선 출신 위안부에 대한 구분도 섬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20세기는 인권이 세계 각지에서 침해당한 세기였는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넓은 의미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좁은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아베 신조)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다시금 고조되는 지금 상황에서 일본은 외부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고 박 교수는 제안한다. 일본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많다는 점을 피해자와 국제사회가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의 문제이자 자본의 문제였다. 돌아보면 제국주의 일본만이 위안부를 동원했던 건 아니다. 위안부는 “일본의 천황제나 일본의 군사주의가 아니라 국가세력을 유지/확장시키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는 국가 시스템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 이후 한국, 일본에 기지를 둔 미군 기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 이곳 기지촌에는 한국인 여성 대신 조선족, 러시아, 페루, 필리핀 여성이 대거 들어왔다. 조선인 군위안부뿐 아니라 이들 모두가 피해자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가로막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도덕적 오만을 경계하자고 제안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의 ‘피해자’로 박제화해 ‘투사’나 ‘민족의 딸’로 만들기보다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박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친일파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실제 인터넷에서는 그를 두고 ‘위장한 일본 우익’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된 대담하고 논쟁적인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일본 출국전 미리 이야기 한 것처럼 ACW2의 총회는 바로 레드마리아의 첫촬영이 있었던 곳이다.
미리 ACW2의 대표인 이토 미도리를 만나기 위해 전 날 출발한 나는 공항에서 그녀와 조우를 했다.
예전보다 헬쓱해지고 인상도 좀 부드러워진 듯한 미도리에게 '귀여줘졌다'고 말하니 웃는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반가운 포옹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의 최근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미도리의 말에 의하면 쓰나미와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 일본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무엇이었든지 간에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건
참으로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말이었다.
그것이 돈을 버는 것이든 집을 사는 것이든 교육을 향한 열정이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욕망의 순위가 바뀌었다는 건 혁명이거나 재앙을 격은 후의 선택지이다.
쓰나미와 원전사고의 여파는 바로 일본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심어 준 거였다.
그래서 미도리상은 현재 일본의 상황에서 노동의 의미를 다시금 재고해 보는 이 영화가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했고 구지 일년에 한번 있는 전국총회의 메인프로그램으로
레드마리아의 상영을 결정했던 것이다.
보통 노동조합이나 단체의 특별행사 정도로 기획되는 영화상영을 감안하면
정말 획기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마냥 즐겁게만 받아들일 일만은 아니었다.
4년전 이치무라가 섰던 그자리에서 내가 대신 받아쳐야 할 많은 질문들을 상상하며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조금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회가 있던 날 아침 요요기공원에 사는 이치무라의 초대로 텐트에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내가 상영후 관객과의 대화가 긴장된다고 했더니 사실 자기도 그렇단다.
영화에서는 그래도 걸러서 편집을 했지만 그날 혼자서 많은 사람들의 공격적인 질문과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치무라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치무라는 3.11이후 꾸준히 쓰나미와 원전사고로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과 연대와 지원사업에
참여를 했고 현재는 폐허가된 동북부의 마을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을 그림에 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성들과 아이들은 여전히 뒷전이고
남성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사업을 중심으로 재건사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치무라의 말에 의하면 가부장 중심으로 만들어진 모든 시스템과 건물 등이 무너졌는데
다시 복구하는 방식도 여전히 가부장중심의 문화를 세우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현장을 담고 싶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나 기특하고 예민한 투사인가. 예민함이란 바로 이런곳에 빛을 발해야 제격인데
우린 그 예민함을 얼마나 엉뚱한 곳에서 쓰고 있는지 갑자기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우자지간 그렇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우린 총회장소로 이동을 했다.
총회장소는 요요기공원의 바로 옆에 위치한 도쿄 올림픽청소년센터였다.
총회장소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방마리아 어머님과 모니카가 눈에 뛴다.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사는 사토상까지 참석을 해 서로 얼굴도 모르던 그녀들이
처음으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시즈오카에 사는 조순자선생님만 빼고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영화가 끝난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이번 상영은 원래 총회에 참여하는 ACW2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상영이었지만
특별히 이날은 영화만을 보러온 사람들도 혀용이 되어 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왔다.
영화가 끝난후 우선 주인공 세명을 단상에 불러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졌는데
모두들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예정시간을 초과해 버렸다.
모니카는 이주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늘 희망을 잃으면 안되다고
우리 모두 함께 싸워야 한다고 너무나 당당하게 마치 연설을 하듯이
청중을 끌어들여서 그 힘찬 발언에 관객들 모두를 쥐었다 폈다 했는데
보통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광경이었다.
사토상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집과 일자리를 잃은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그들이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장시간 이야기했다.
그녀는 더더욱 단단한 운동가로 변신해 있었다.
싸움이 끝난후 행동이 달라지는 많은 사람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녀의 현재가 너무 아름다워보였다.
이치무라는 조금 긴장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이치무라답게 천천히 할말을 다하는 그녀의 방식대로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했고
마무리는 역시 노숙여성들이 함게 만든 생리대를 홍보하며 끝냈다.ㅎ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여러질문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건 영화속에 나오는 많은 여성들이 각자의 현실에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싸우고 있고 또 우리의 현실도 무언가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 같다.
그 이야기에 대한 대답을 내가 하는 것 보다는 영화속 주인공들이 하는게 더 좋을 거 같아서
마이크를 넘겼는데 모두들 참으로 진지하게 다양한 대답을 했던거 같다.
문득 이질문을 들으면서 우리도 각자 답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원래 한시간이 넘게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모자랐다.
결국 아쉬움을 남기며 상영회가 끝났는데 한 관객이 함께 사진찍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녀는 시각장애인었다.
큐슈에서 이 영화를 보기위해 왔다고 하는데 한번 놀랐고
영화를 보고 구체적인 감상평을 이야기 하는데 또 한번 놀랐다.
그녀와 함께 온 친구가 옆에서 자막과 그림을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두눈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도 때로는 영화가 어렵다거나 뭔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분은 그런 내색은 커녕 이영화를 많은 장애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까지 해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는 야그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잡혀있는 분반토론 중 하나인 감독과의 대화를 하는 시간까지
참여를 해서 장애인들의 노동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는 돌아갔다.
다시한번 느끼는 이야기지만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혹은 잃어버린 기능들이 참 많다는걸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시기, 위기의 시대라고 느끼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장애인들이 느끼는 것 같은 결핍의 새로운 감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익숙해 하는 모든것을 의심하고 바꾸는 감각 말이다.
1박2일의 총회가 끝난후 나는 영화를 찍는데 도움을 준 분들께 인사를 하기위해
4박5일간의 바쁜 여행을 시작했다.
공항에 마중나온 이토 미도리상과 가토상. 두사람 모두 이번 일본 여행에 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사람에게서 늘 배우는 재미를 다시한번 알게해준 분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전히 그대로 변함없는 이치무라의 텐트. 이날도 꽤나 추었는데 여전히 잘 버티고 있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녀는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는 노숙인이었는데 노숙여성들과 함께 만드는 면생리대와 도쿄올림픽을 개최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고 앞서 이야기한 3.11 이후의 동북부 지역의 여성들의 삶을 그림에 담는 프로젝트를 하고있다.특히나 이 프로젝트는 왔다갔다 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이 표현에 의하면 여기저기 조금씩 돈을 구걸해서 한다고하는데 남의 일같지가 않아 마음이 짠했다. 아무도 조명하지 않는 곳을 찾아 예술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가를 알기에.
방마리아 어머니와 모니카.
이치무라 모니카 사토
밥을 먹으면서도 모니카와 사토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생전 몰랐던 사람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서로 적극적이어서 보기 좋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모니카는 후쿠시마의 생생한 이야기를 사토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알았을듯 싶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통역해 주었던 왼쪽의 히로유키와 오른쪽의 가토상. 동시통역사가 둘이나 되는 황송한 경험을 했다. 정말 감사 감사.^^
올림픽청소년센터에서 1박을 했는데 아침에 자신이 사용했던 시트를 깔끔히 정리했다. 반납을 할때 센터에서 말한 규격대로 접어서 반납을 해야한다고해서 정리하는데만 꽤나 많은 시간을 써야했다.ㅎ
다음날 오전에 있었던 분반토론.감독과 대화를 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토상과 큐슈에서 오셨던 시각장애인 후지와라상. 그녀는 토론중에 레드마리아에서 많은 여성들의 노동을 이야기했는데 장애인들이 살아내기 위한 노력도 노동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보통 장애인을 돌보는 분들의 돌봄노동만을 이야기하는데 장애인들은 살아가기위해 해야 하는 모든것이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게 참 안타까웠다는 그녀의 말에 백프로 동의를 하면서 그렇게 레드마리아를 읽어낼 수 있는 시선에 새삼 놀랐다.여성들의 시선이 힘을 발하는 대목이 바로 이런것이 아닐까.
총회가 끝나고 통역을 해준 가토상이 그녀가 통역비로 받은 돈의 일부를 나를 따라온 친구 히로유키에게 주었다. 그냥 놀러온거 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중간중간 통역을 대신해주어 덕분에 자기가 편했다고 그러니 당연히 나누어 써야하지 않겠냐며 주었다. 나는 정말 눈물이 나올지경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고 또란 존경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여지껏 이렇게 쿨하고 정확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햇다.특히나 모든것에 쿨하다가도 늘 돈문제에서는 감춰지지 않는 쫀쫀함을 많이 보았기에.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지만 사실 이게 진정한 투게더 정신이 아닐까 싶다.존경합니다 가토상.!!!
총회가 끝난후 바로 시즈오카에 사는 조순자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생님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반가웠던건 마짱과 히로짱을 만난 것. 마짱이 워낙 욘사마를 비롯한 한류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에는 비스트 사진이 박혀있는 컵을 선물했는데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에 내가 다 감격했다. 근데 한가지 안타까운 소식은 촬영이 끝난 다음해 마짱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지금은 혼자서 거동하기 힘들만큼 몸이 안좋다고 한다. 그녀가 오래도록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래는 마짱을 만난후 메부키의 친구들까지 다 만나 볼 생각이었으나 멤버들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은 대신 선생님이 선물을 전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마치 친정집을 방문한 것마냥 간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선생님집에서 늦잠을 자고 해주시는 밥을 먹고 선생님이 챙겨주시는 선물까지 잔뜩들고와서 결국은 배낭이 다시 무거워졌다지.ㅎ
카나가와시티유니온에서 다시 방마리아 어머님과 위원장인 무라야마상을 만났다. 방마리아 어머님은 남편이 작년에 돌아가셨고 무라야마상은 4년전과 똑같이 피로에 쌓여있었다. 한때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던 이곳은 이제 모니카와 같은 중남미노동자들이 대부분인데 일본경제가 안좋아지면서 현재는 이들도 많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어서 남은 일꾼들은 할일이 많지만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밝다.
원래 모니카의 집에서 일박을 하기로 했는데 모니카가 아침여섯시에 출근을 나가야 해서 마리아어머님이 일찍같이나오면 피곤하다며 당신집으로 가자고 했다. 결국 모니카와 나는 어머님과 온천엘 같이가서 깨벗고 목욕하면서 수다를 떨다가 나왔다.역시 여자들의 수다는 목욕탕이 최고다.^^
방마리아 어머님댁에서 발견한 어머님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책. 마리아 어머니는 65년도에 일본인 남편을 제주도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일본으로 넘어와 80년대말부터 한국인노동자들을 위해 일하시기 시작했다.말한마디 못하는 불법이주노동자였던 한국인들이 산재를 당하거나 문제가 생길때 어머님이 이들을 돕는 일을 하셨는데 그당시 산재를 당한 사람들이 많아 한해에 5명씩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함께 의기투합해서 만들어진게 바로 카나가와시티유니온이라고 한다. 이책은 94년도에 일본 르뽀작가가 어머님의 활동을 기록해서 책으로 출판것이라고 한다. 왜 이런책이 한국에는 번역되어 나오지 않는지.
어머님이 사시는 아파트도 3.11 이후 지진에 대비한 철근공사가 시작되어 작년에 완공이 됐다고 한다. 현재도 일본의 지진계를 보면 거의 매일 곳곳에서 크고작은 지진이 있다고 한다.이모습을 보니 그들은 거의 지뢰를 밟고 사는거처럼 보였다. 한국이라면 벌서 난리법석이 났을텐데 우자지간 이런면에서 보면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일본에 도착해서 부터 계속 나와 함게하며 통역을 도와준 히로유키. 어쩌다보니 녀석을 찍은 사진이 없어서 쉴대 한장 찍어놓았다.현재 일본 도쿄에 살고 있고 미혼이고 한국어 통역과 번역에 아주 유능한 친구이니 통역이 필요한 사람들 연락주시압.^^
내가 떠나기 전날 레드마리아 배급을 위해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맛있는 오꼬노미야끼로 저녁까지 사주셨다. 내가 오히려 대접해야 한다고 했더니 가토상이 그런다. 내가 더 언니잖아.ㅎㅎ 가끔 같이 있다보면 이분이 일본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한국말도 문화도 너무 잘아신다. 일본에 있을때는 언니라고 불러들이지 못했는데 정말 이런 언니는 한명 있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ㅎ
일본 촬영이 있거나 이렇게 방문할 일이 있을때마다 가끔 잠도 재워주고 맛난것도 사주고 여러가지 조언도 아끼지 않는 사이토 아야코상. 이날 아야코가 대장금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나 맛깔나게 하던지 한국 돌아가면 나도 꼭 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오나라 오나라....ㅋㅋ
잼다큐 강정을 만든다고 한여름을 보내고 다시 배급을 하면서 겨울이 됐다.그리고 벌써 새해도 중순이다. 여름에 멈춰진 편집본을 사이사이 손보면서 작년 9월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106분짜리 편집본을 선 보인후 다시 최종편집을 하여 12월 서독제에서 98분짜리 완성본으로 상영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일년을 필리핀에서 보내며 기획하고 2008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이래 5년만의 결실이다. 물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쉽게 한줄로 거론하기 쉽지 않을만큼 다사다난했다. 그 다사다난함은 고스란히 제작비의 압박이 됐고 레드마리아는 독립영화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됐다. 하지만 그뿐이다. 작업이 길어졌던 그 수많은 일들은 쏙 빠지고 영화만 귀찮은 늦둥이가 되어버린 느낌. 그 느낌 때문에 작년은 좀 힘들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안그런 영화가 어딨겠나. 이 척박한 독립영화의 거친 토양을 자양분 삼아 영화를 만든다는 모든 사람들의 비슷한 과정일 뿐. 그래도 다행인건 이들에겐 오기와 투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이 살아있다는 것이 다시 그길로 또 걸어가게 하는 힘인 것을. 나도 그렇게 아직 심장이 식지 않고 있기에 이렇게 최종본을 끝낼 수 있었겠지. 그래서 흐믓하다. 2년전 여성영화제를 앞두고 수술을 받을때는 소원이 그래서 레드마리아를 완성하는거였는데 막상 완성을 하고보니 10편은 더 만들어야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든다.하하하
우자지간 그 끝을 잔소리 한마디 없이 기다려준 영재와 지금은 다들 곁에 없지만 함께 해준 스텝 경은,아람,영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늘 힘들때마다 이들이 있어 한 산 한 산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음악이며 사운드며 색보정이며 몇 번의 수정을 마다않고 작업해준 지은이,용수,재원에게도 너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친구는 애니메이션을 해준 성애다. 물론 편집이 길어지는데 공을 세운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기다린만큼의 보람이 있어 아주 흐믓했다. 이렇게 작업을 같이 하고 진행을 하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제작비. 일본 촬영을 고민하다 꾸리게 된 제작위원회의 후원은 새롭게 시도해본 소중한 경험이었다.
보통 후원금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크게 부탁을 하고 받았기 때문이다. 50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기꺼이 내주신 제작위원들께 너무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담스럽다면서도 직접 제작위원장을 맡아 여기저기 이름을 팔아주신 김은실선생님, 친구라는 죄로 월급쟁이 친구들이 100만원 200만원 투척해준 감동의 순간, 제작위원으로 친구로 수술 후에는 죽까지 끓여서 매달 화학치료가 끝날때마다 먹을것을 챙겨준 박혜경선생님, 그리고 병원갈때마다 덜덜거리는 프라이드를 씽씽몰며 나를 데리고 다녔던 미례, 집이 없어 미례집에서 신세질때 고모가 살던 방을 저렴하게 소개해준 세영이, 그리고 워낭소리의 덕을 왕창 은혜입게 해준 영재의 특별한 지워금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사실 레드마리아 제작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어떻게 그 기간 가장 힘든일과 가장 행복한 일들이 완벽하게 겹칠 수 있었는지. 그 행운이 함께 했기에 필리핀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을 다시 촬영하면서 레드마리아라는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거 같다. 만일 예전처럼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해야 했다면 아마 지금도 영화는 완성되기 힘들었을것이다. 그 많은 번역을 거쳐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으며 그 많은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나. 족히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치며 이렇게 레드마리아가 왔다고 생각하니 정말 긴 길을 관통했구나 싶다.
아마 예전 같으면 제작이 끝나기 무섭게 다음작업으로 올인했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그렇게 일년쉬자고 작정했지만 그 심심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거 같아 안해보던 일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배급이라도 재밌게 해보자고 맘먹고 있다. 사실 지난달만해도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영화거리를 내지를뻔 했는데 번번히 다음날 일어날때쯤 체력이 딸리는걸 확인하고는 단칼에 단념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여름쯤에 프랑스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갔다 알프스를 등반해보는게 작다면 작은 꿈인데 부디 실현이 되기를. 그곳에 가면 친구가 50에 진입한 기념파티를 해준다고해서 정말 땡빚을 내서라도 가야만 한다. 그리고 올해는 연애운도 있단다. 아싸...^^ 혹시 프랑스에서 붕쥬르 하면서 부딪힐 어떤 놈 혹은 년? ㅎㅎ 우자지간 신나게 일년을 또 살아보지 뭐.
일본의 조순자 선생님의 직업은 지적장애인들을 돌보는 개호사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사 같은 것이다.
메부끼는 조순자 선생님이 돌보는 친구들의 공동체다.
시설에 있다가 독립해서 모여산다.
선생님같은 개호사는 이들의 일상생활을 돕는다.
요리도 하고 바느질도 하며 취미생활을 즐기고
군고구마를 팔거나 공장에 나가며 일을 하기도 한다.
키요짱은 일주일에 한 번 집에 가는 날보다 메부끼를 더 좋아한다.
그들은 함께 있으면 즐겁다.
영화만들며 놀기<민들레>1999,<애국자게임>2001,<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003,<쇼킹패밀리>2006,<잼다큐 강정>2011,<레드마리아>2011,모든영화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음.
redsnowm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