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경순의 노트2015.05.11 14:09

내가 사는 집은 14평이다.

얼마전까지 쓰던 사무실도 14평이었고

돌아가신지 1년만에 정리하고 집을 비운 엄마의 집도 14평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각기 다른 14평에 들어 앉아 있었던 각종 짐들과 한달이 넘게 씨름을 했다.


엄마는 50여평에 누리고 살던 짐들을 10년이 넘게 계속 들고 다니며

마지막 종착지였던 14평의 집에 남기고 떠났다.

돈이 없어지니 가지고 있던 좋은 물건들을 하나씩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내주며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자 했던 엄마.

그렇게 하나씩 몇해를 주었을텐데도 14평안에 남아있는 물건들은

두달에 걸쳐 친구들을 불러내어 나누어주고 치우고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버려서야 정리가 됐다.

살때야 수천만원이 넘었을 그 많은 물건중에 돈으로 건진건 재활용센터에서 

무게로 달아 계산해준 엄마의 옷들뿐이다. 

여러번 리어커에 실어 대여섯번 왕복해서 받은 그돈은 단돈 오만원.

그나마도 옮기는 중에 길에 세워진 자동차 범퍼를 긁어 수리비용으로 나가버렸다.

참 코메디같은 일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가 그랫다.

상진이때처럼 옷 다 태우지 말고 사람들한테 나눠줬으면 좋겠어.

엄마의 그 말만 아니었어도 나는 진즉에 다 내다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말이 걸려 가능한 나눠 줄 수 있는걸 고려한답시고 4월 한달내내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친구들에게 쓸만한 물건들을 나눠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정작 엄마가 아끼던 물건들은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유행도 달라졌고

자개장세트도 그만큼 낡았다.

나눠줄 물건보다 버려야 할 물건들이 많구나 하는 사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야 알게되었다.

애초에 엄마의 물건들은 내 취향이 아닌지라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저 비싸다는 것만 생각하고는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쓸만한 물건들은 산지 얼마안된 가전제품과 운동기구 그리고 유행을 안타는 옷들과 주방기구와 

엄청나게 많은 고가의 백들 뿐이었다.

다 나눠주고 버리고 정리를 하고는 내 집으로 가져와야 할 짐들을 한쪽에 챙겨놨다.

엄마가 평소에 내가 가졌으면 하는 물건들이 뭐였을까 생각을 하다 

이미 내집에 있는 원목미니서랍장과 세트였던 거울과 미니 원형탁자을 챙겨야겠다 생각했지만

그 최소한의 짐들도 나의 좁은 14평의 집에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원목 세트는 포기하고 엄마와 관련된 짐들만 챙겨왔는데도 5박스가 된다.

집에 가져온 다섯박스는 자리를 찾지 못한채 나의 좁은 거실에 일주일이 넘게 버티고 있다가

힘쎈친구 한 녀석이 집을 방문해 옳거니 하고 이미 포화상태인 베란다로 꾸겨넣었다.

박스안에 있는 물건들을 좀 다시 봐야겠는데 물건을 꺼내 펼칠 공간이 없어 모른척 이사갈때가지 버티기로 한다.


그리고 4월의 마지막날 나의 14평 사무실에 있던 물건들이 또 집으로 왔다.

영화창작공간 사무실에서 1년8개월 동안 썼던 각종물건들 중 대부분을 나눠주거나 버리고

촬영장비와 편집장비 그리고 자료로 보았던 많은 책들과 자료집들만 집으로 가져왔는데도 

이미 포화상태인 나의 책상과 책장은 자리를 내줄 기미가 안보인다.

결국 다시 대기실처럼 좁은거실의 중앙을 버티고 일주일을 보내다 

이제서야 여기저기 빈틈을 찾아 수납과 정리가 끝났다.

그리고 책상위에 편집장비들이 완벽하게 셋팅이 됐다.

정리된건 편집장비들 뿐 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이 내방과 수림이방까지 장난 아니게 널려있다.

친구가 방문하면 거실에 있던 짐을 방안으로 던져놓고

등산짐을 꾸릴때는 방안의 짐들을 거실로 옮겨놓고

빨래를 걷을때는 베란다와 가까운 책상주변에 옷들이 수북하고

책상에 앉을때는 다시 옷들을 바닥에 옮겨놓고...


그러다 생각했다.

14평의 집을 좁다 생각말고 거대한 텐트라 생각하자고.

혹은 넓은 캠핑카라고 생각해보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어제 친구가 갖다 준 상추에 고추장 넣고 박박 비벼 먹음서 

드라마 한편 때리고 나니

갑자기 집이 너무 넓어 보인다.

세상에 이렇게 넓은 텐트라니.....끄윽....

당분간 이 주문을 외우면서 여름을 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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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 경순이야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