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13. 9. 19. 00:38

내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먹지 않은 과일이 복숭아다.

아주 어렷을때 크게 알러지가 나고서는 내주변에 복숭아라는 존재는 

그냥 싫고 가까이 할 수 없는 과일이었다.

그래서 나 이외의 가족들도 친구도 모두가 복숭아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었다.

한번은 동생이 모르고 복숭아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내가 어찌나 지랄을 떨었던지

동생은 미안하다는 말을 며칠간 해야했다.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나에게 복숭아는 참말로 요상하게 

싫다는 감정을 깨우쳐주는 상징처럼 되버렸다.

심지어 그 싫다는 감정은 자가증식까지 해대서 냄새부터 모양까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싫었으니...


근데 그 복숭아를 최근에 아주 우연히 먹게되었다.

그것도 촬영하는 도중에 말이다.

예전같으면 어떤 상황이었어도 그것을 피하거나 치워달라고 말을 했을텐데

호기심이랄까 나의 그 싫어하는 감정에 대한 도전이라고나 할까.

너무 당연시 되버린 그 상황의 처음이 언제였나 기억도 안나는 마당에

나에게 유일한 터부가 된 그 과일과 싸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아는 친구들이었다면 놀라면서 봤겠지만

처음 본 분들의 대화를 촬영하고 있던지라 그냥 자연스럽게 집어먹어 보았다.

어머...근데 웬일이니.알러지가 없는것이다.

그렇다고 맛이 아주 좋았던건 아니지만 웬지 신기해서

몇개를 더 집어 먹어 보았다.

그리고 하두 신기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복숭아를 사들고 왔더니

수림이가 놀란다.

아니 엄마 이거 복숭아네?

맞어 복숭아야.이제 부터 먹어보려고.

수림이는 얼씨구나 하면서 복숭아 몇개를 후다닥 해치운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한번 먹어보면 될것을 왜 그렇게도 싫어했던 것일까.

사실 나는 복숭아 냄새도 굉장히 싫어해서 과자든 사탕이든 음료수든

복숭아 냄새가 나는 것들은 담배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들만큼이나 

그 냄새를 싫어했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하두 어린시절의 기억이라 끔찍했다는 잔상만이 남아있어서

복숭아를 먹었다는 기억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그렇게 나는 그 복숭아를 먹어 볼 생각을 안했던 것일까.

멀리서 보기만 해도 몸이 근질거리던 그건 또 뭐였고

복숭아 냄새만 나면 구역질까지 난건 무슨 생리현상이었는지.


우자지간 처음 맛 본 그 복숭아가 그리 맛있지도 않고

그 냄새가 여전히 좋지는 않지만 하두 신기해서 자꾸 먹어본다.

그리고 이제는 적어도 복숭아를 보고 피하거나 성질부릴 일은 없어졌다 생각하니

조금은 허무하기도 하고 그 숫한 복숭아와 얽힌 일들에 웃음이 난다.

근데 갑자기 왜케 몸이 간지러운지.ㅎ

내가 시작하는 영화가 복숭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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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