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위안부2012. 2. 2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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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되지 못한 필리핀 ‘위안부’문제 
경계를 넘어 일본군 ‘위안부’문제 생각하기② 

사카모토 치즈코 mygunmo@hanmail.net

  
 
<일다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기획을 연재한다. 그 출발로 우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담론과 논의 지형들을 살핀다. 다음 주에는 생존자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의 ‘해결’이 생존자 할머니들의 현재 삶과 존엄을 고민해야 문제임을 제기하고, 이를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운동과 생존자 할머니들의 복지 문제를 나누어 접근하는 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과 연대를 위해 일본 내에서의 운동의 흐름과 논의의 지형을 살피고, 또 한국 사회와는 다른 점령지의 역사를 가진 필리핀에서의 생존자 경험과 운동의 역사 및 현재 주요 이슈들을 소개할 것이다. -편집자 주>



2006년은 필리핀과 일본이 국교회복 5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전후 책임문제를 해결하도록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목소리는 필리핀 언론 매체에서 찾기 어렵다. 5월 8일은 50년 전 필리핀-일본 배상조양조인 바로 그 날이었지만,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아무 움직임도 보도도 없이 지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한 피해들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고, 화제조차 되지 않는다.

반복된 외국지배 역사와 빈곤 속 필리핀


그 이유를 외국지배가 반복했던 필리핀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500년대 들어와 스페인인이 자주 필리핀을 찾아와, 1571년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지배 수도를 마닐라에 설치했다. 그 후 필리핀은 300여 년 동안 스페인 지배를 받았고, 1898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파리조약에서 스페인이 필리핀을 미국에 2,000불로 양도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점령했고 전쟁 후에도 미군 간섭을 받았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본군의 폭력행위나 일본정부의 전쟁/전후 책임에 대해 논의할 때 대표적인 문제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필리핀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 점령 하 필리핀 역사 전문가인 필리핀대학교의 한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연구자’가 쓴 논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필리핀에서는 스페인 지배시대, 미국 지배시대에 대한 관심이 더 많고 일본 점령시대는 짧아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자뿐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연구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필리핀학 조교수는 ‘필리핀은 아직 생활이 어려워서 역사 같은 인문계보다 학생들은 취직에 유리한 IT관계를 전공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아직 피해자가 생존함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외국지배의 역사 속에서 혹은 오늘의 빈곤사회 속에서, 일본 점령 시대, 특히 여성이 피해자가 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회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일제 자동차를 타고, 여성들은 해외이주노동자가 되어 일본으로 간다. 그러나 그들이 할머니 세대와 단절된 것은 아니다. 단지 오늘의 글로벌 소비사회를 사는 세대로서 역사에 대한 공감보다 소비욕망이 클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 성폭력, 성착취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필리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 이야기 중 딸이나 며느리가 엔터테이너로서 일본에 가있다는 이야기도 가끔 등장한다. ‘애기 많은 것이 복’이라는 필리핀 문화와 욕망을 위한 섹스를 금하는 카톨릭 문화로 인해 피임과 낙태에 소극적인 필리핀 사회에서는 몸과 섹스, 임신, 출산 등 ‘성과 생식에 관한 건강과 권리’(reproductive health/rights)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권리를 억압당한 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시급한 일로 보인다.

필리핀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삶

전쟁 당시 일본군은 필리핀을 점령했으나, 미군과 필리핀 항일 게릴라 때문에 안정된 지배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위안부’를 데려 돌아다니면서 ‘위안소’를 경영하기보다는 무차별로 강간한 ‘현지조달’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증언 중, 필리핀에 연행된 이야기가 가끔 나오지만, 그분들은 ‘위안소’를 경영할 만큼 비교적으로 안정된 지역이나, 혹은 언제 게릴라 습격을 당할지도 모르는 아주 위험한 지역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리핀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을 들면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해서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눈앞에서 학살해, 여성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준 상태로 강간한 사례가 많다. 자매로, 어머니와 함께, 혹은 이모, 고모 등과 함께 강간 피해를 당한 여성도 있다. 여성의 집이 마치 ‘위안소’처럼 되어 일본군인들이 몇 번이나 다녀온 경우도 있고, 일본군이 점령한 학교나 병원에서 그 일부를 위안소로 만들어 현지 여성을 데려온 경우도 있다.

한국 할머니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필리핀 할머니들도 공포감 때문에 ‘도망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대부분의 필리핀 여성들은 자신의 생활지역 동네나 일본군을 피하려고 소개(疎開)한 마을에서 피해를 당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본군에 의해 감금당한 건물에서 자신의 생활지역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 탈출을 시도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항일 게릴라가 도와줘서 탈출한 경우도 있고, 탈출 후 그런 게릴라와 결혼한 여성도 있다.

또한 다시 집으로 돌아온 딸의 피해를 듣고, 부모가 시장(市長)에 상의해서 시장이 일본군에 항의문이나 탄원서를 썼거나 직소한 경우도 있다. 그런 편지서류들은 일본군 자료로서 방위청 방위연구소도서관에서 오늘날 발견됐다.

필리핀 생존자 할머니들은 단 한번만 당한 피해라도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해서 피해신고를 했다는 것, 일본군한테서 강간당한 결과 생긴 아들이 현재도 살고 있다는 것, 피해 후 부모가 ‘빨리 잊으라’고 학교에 보낸 결과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직업을 갖게 된 여성도 있다는 것 등이 한국 할머니들 경우와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선 그런 여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존재하지만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 할머니들 피해사례에도 관심을 가져야 될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피해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여성들의 삶의 존엄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다.

생존자의 현재와 日-韓-필리핀의 사회적 과제

할머니들 증언에 대해 ‘사실이냐’, ‘창피하다’, ‘돈을 받고 싶어서 나온 거다’ 등 피해여성들을 다시 모욕하는 말들이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이 부정당할 때, 겨우 열어준 그들의 입을 다시 닫히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그리고 피해여성들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여성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는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인들과 같은 민족인 일본여성도 ‘위안부’로 끌려갔다. 식민조선 여성들은 취직사기나 납치로 끌려갔고, 일본 점령 필리핀에선 여성들이 무차별 살해, 강간, 연행을 당했다. 지금 우리가 집단적으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피해 및 삶은 각자 다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1년이나 지났는데, 일본은 가해자였던 남성과 피해자였던 여성이 둘 다 존재하는 사회지만, 여전히 피해자가 나타나기 어려운 사회이며, 일본정부는 아직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익적인 기술이 가득한 교과서가 채택되어 그 교과서로 배운 세대가 이제 대학생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가 된 애초부터 요구해온 것 중의 하나가 ‘교육문제’였지만, 일본에서는 피해자들의 요구와 역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피해자들을 ‘민족의 어머니’, ‘역사의 산 증인’으로 그리면서 그들을 역사 속에 묻고 ‘민족’의 행사에서 자주 언급하지만, 그들의 오늘 삶에 얼마나 관심 갖고 있을까. 그런 민족담론 때문에 3.1절이나 8.15 같은 날의 민족적인 행사 때마다 화제가 되지만, 그들은 한 여성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시민단체들의 힘으로 ‘일본군위안부생활안정지원법’을 입법시켜, 시민단체, 기업뿐 아니라 정부차원으로 생존자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할머니들의 마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웃사람의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며, 나이 많은 할머니들의 작은 생활 변화도 놓치지 않는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민족담론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가 관심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회는 언제 올까.

필리핀에서는 가부장적인 여성 멸시가 여전히 강해서 여성의 몸, 성에 대한 의식이 약하다. 일상화된 성폭력, 성착취, 성매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뿌리가 같다는 점, 오늘까지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 함께 제기되어 본격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는 한, 가난 속에서 역사적 관심을 갖기 어려운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방치되고 망각되기 쉽다. 그런 위기감으로 지원단체들은 이들을 잊지 말자고 기념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생존자 할머니들도 한 회원으로 지원단체에 소속하며,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생존자 할머니들은 사회적인 관심은 별로 없어도, 할머니들과 함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는 자식이나 며느리들의 모습이 당사자인 할머니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서 받은 큰 돈을 할머니들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고 가족들이 써버려 현재 할머니에게는 의료비, 사후 장례식비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국가는 늘 여성을 ‘이급시민’으로 주변화시켜 왔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피해를 당한 자는 여성이다. 여성은 늘 국가, 전쟁, 성폭력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한국인과 필리핀 생존자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군의 가해성과 폭력성은 거의 비슷해, 이 문제가 분명한 ‘폭력’문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차이점은 필리핀과 한국 사회의 차이점과 연결될 듯하다. 가령, 2차 세계전쟁이 끝난 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여유 없이 한국전쟁이 일어나 다시 생존의 위기를 맞아야 했던 한국인 할머니들과 그렇지 않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필리핀 할머니들의 모습은 다르다.

할머니들은 오늘 한 명씩 돌아가신다. 마지막 힘을 다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주시고 ‘이러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는데, 아무 소용도 없이 숨을 잃어버린 모습은 내일의 나의 모습과 겹친다. 언제나 여성은 남성의 대화자가 아니었지만, 어서 빨리 남성을 여성의 대화자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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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