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10. 12. 26. 16:53

다시 편집을 시작한지 벌써 한달반이 지나간다. 지난 일년간 어떤일이 있었는지도 잊을만큼 작년 이맘때랑 거의 똑같은 분위기로 편집에 빠져 살고 있다. 마치 중간이 사라져버린것처럼 말이다. 영화를 편집할때는 단계가 있다. 한참 편집구성을 하고 그림들을 붙여갈때는 종종 다른 영화로 기분전환을 하는데 편집이 점점 촘촘해지기 시작하면 다른 영화들이 나를 매혹시키지 못한다. 그때부터는 내영화가 더 재밌으니까..ㅎㅎ

우자지간 그런 기분으로 그림들과 놀면서 이번달까지 1차 가편을 마무리하겠다는 각오로 임하면서 음악감독인 지은에게 전화를 했다. 올해초 있었던 여성영화제 상영본으로 이미 나의 까탈스런 요구에 한번 홍역을 치른터라 다시 새로운 버전으로 음악에 대한 작업을 요구하니 그녀는 미리부터 엄살이다. 근데 시간은 대충 몇분정도 나올거 같아? 응..대충 두시간이 조금 넘을거 같은데...헉...있잖아...시간을 좀 줄이면 안될까...아니 뭐 나야 레드마리아가 잘 나오기만을 바라지만 웬지 요즘 관객들이 한시간반이 넘어가면 힘들어 하더라고..

마지막 수화기를 놓을때까지 그녀는 내심 그 복잡한 이야기를 다시 볼 생각에 심적부담이 상당했는지 영 목소리의 톤이 무겁다. 전화를 걸기전 그 신나던 내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다. 그래..내맘이 다 똑같은건 아닐테지. 관객들이 보고싶은 영화랑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랑 아구가 늘 맞는건 아닐테니까. 그렇게 작년 이맘때도 턱도 없이 모자라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성영화제에 맞춰보겠다고 거침없이 밀어붙이며 러닝타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여기저기 잘라냈던 기억이 새롭다. 근데 볼만한 영화의 선택기준이 과연 러닝타임에 문제일까.

길게 많은 이야기를 끌고가려면 이야기에 집중할 모티브가 명확해야 한다. 시간을 느끼지 못할만큼 집중하며 불 수 있는 이야기의 연결. 이번편집의 방향을 잡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그거였다. 여성의 몸과 노동을 이야기 하기 위해 그 많은 주인공들의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연결해서 하나의 줄기로 만들어 갈 것인지. 찍었던 테잎들을 구석구석 찾다보면 잊고 있었던 보석들이 하나씩 발견되며 이런 나의 고민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욕심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좋은 장면도 주변을 까먹으면 자체발광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렇게 편집을 하다보니 일년전 무엇을 놓쳤고 무엇에 쫗겼으며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 안달이었는지가 하나씩 생각나며 웃음이 난다. 마치 인생을 먼저산 어른들의 10년전에 들려주던 그 이야기가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를 뒤늦게 알게되고 오래전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의 행동이 이런거였구나 라는걸 한참 시간이 지난후에야 느끼게 되는 그런것처럼. 제아무리 빠른 메모리를 장착해 온갖 정보를 순식간에 파악해도 알고 깨닫고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두뇌회로라는건 얼마나 느리고 갑갑하게 움직이는지.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지라 안부를 묻고 살기도 힘들어진 요즘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 살자고 하지만 우리 마음의 반은 빠른 메모리에 적응이 돼 기다리는 것도 진의를 아는 것도 빠르게 전달이 안되면 오해와 불신과 실망과 상처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만난 사람들은 그런 조급함에서 조금은 비껴살고 치열하지만 느리게 확인하고 가진건 없지만 관계가 주는 행복함이 무엇인지를 생활속에 실천하며 사는 거 같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 비로서 알게 됐는지도.

편집을 하면서 이런저런 행복한 고민들을 하게 해준 지난 일년이 고맙다. 그런 시간이 있어 느리게 이제사 편집을 하지만 좀 더 다른 시선으로 영화와 다시 만나 고민들을 더 확장하고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이런 행복한 시간들이 언젠가는 끝나고 그 행복한 고민들이 관객과 궁합이 맞을지 안맞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만 분명 이 영화로 나는 많은 이들과 또 다른 대화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왜냐면 우리가 해야만 하고 하게 될 이야기라고 믿고 있으니까.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