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10. 10. 1. 16:52

갈수록인가 아니면 늘 그랬었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몸과 머리는 늘 따로 놀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되는 일이
늘 아구가 안맞는 생활이 사람을 갑갑하게 만드는게.
하긴 나만 그런건 아닌듯 싶다. 며칠전 니카라과이에 촬영하러 간 미례가
갑자기 메일로 동영상을 보냈다.낯선도시 마나과에서의 첫째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이 카메라와 카드 그리고 미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한
전자여권이 든 지갑을 통째로 도난을 당했고 이틀간을 꼬박 범인을 잡느라
준비되지 않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직접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범인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 식당에 CCTV가 설치되어 그 시간에 찍힌 영상이 남아있었지만
경찰에선 나몰라라 하니 결국 미례가 직접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범인의 사진을
캡처해 달라고 영상을 보낸것이다. 보내준 식당의 CCTV를 통해
밥먹는 미례의 옆에서 슬쩍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범인의 모습이 보인다.
범인들의 모습을 캡쳐받아 보내주고 나니
여비가 없어서 엄마의 기일에 가지 못한다는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여비를 좀 보내줄까 했더니 안가기로 했단다.
갑자기 CCTV에 잡힌 범인들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머릿속에 엉뚱한 시나리오가 지나간다.
만일 범인이 친구이고 친구는 지금 돈이 필요하고 잡히지 않게 CCTV에서
자기를 빼달라고 요청했다면 어땠을까.
이런게 영화라면 정말 구린 B급영화겠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때
상황은 단순하지가 않다.
갈수록 현실은 영화보다 더 쪼잔하고 비굴하고 현실감이 없다.
정말 이게 현실이라니 하는 말이 끝도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만해도 그렇다. 불과 5개월전만해도 내가 해야 할 일정은 이게 아니었는데
갈수록 엄하게 꼬이는 현실이 현실감이 없다.

한달만 쉬면 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다시 그놈의 치료만 끝나면 될 줄 알았는데
시도때도 없이 피곤한 몸은 이제 내말을 듣지 않기로 작정을 한듯 하다.
담당의사는 다들 그렇다고 그런 몸에 적응을 해야 한다고 한다.
급한 마음에 별로 위로가 안된다.
할 일은 여전히 해야 할 일로 남아있고 시간이 갈수록 해결해야 할 일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니 쉰다는게 오히려 짐이되고있다.
내가 너무 현실을 만만하게 생각했던 걸까. 그래도 된다고 말이다.
결국 몇 달을 더 미루기로 했던 편집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몇 달전 프로젝트를 열면서 느꼈던 긴장감이 이번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저것 신경쓸게 너무 많아 머릿속이 미리부터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이사이 돈도 벌어야 하고 체력과 컨디션 조절도 잘해야 하고
미뤄두었던 편집구성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한다.
편집을 하자면 번역도 다시 해야하고 안쓴 그림들도 다시 프리뷰를 해야 하고
사진부터 음악부터 애니메이션까지 다시 사람들과 만나 토론을 하고
부탁을 하고 확인작업을 위해 필리핀과 일본에도 다시 연락을 해야 한다.
국내작업이라면 혼자서 이리저리 끌어보겠는데
어쩌다 이렇게 큰산을 파기 시작했는지...

그래도 다행인건 이런 과정을 이해해주고 함께 해준 영재와 아람,경은,영란이 있어
버티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일이 많다. 영재는 이미 할 일이 너무 많고
영란과 경은은 학교를 다니고 아람도 내년 복학을 위해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
그런 아람에게 기륭을 다시 찍어야겠다고 촬영까지 맡겼다.
감독이란게 정말 끝까지 이기적인 동물이다.
당분간 더 이기적이 되고 더 비굴해지고 더 강해져야 하는데
몸을 사리며 이렇게 일을 해야되나 생각하니 꼴이 좀 우스워진다.
하긴 우스운게 한두가진가. 교육과 관련된 일은 내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돈이 없어도 노가다를 할망정 그것과 관련된 일은 늘 고사를 했는데
지금은 돈벌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 일밖에 없다.
역시 꼴이 우습다.

이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조금 어색하고 힘들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오바를 하곤 했는데 나를 위해 준비된 시간은 그리 쉽게 오지 않을듯 싶다.
이럴때는 자신을 합리화 하는게 최선이다.
이렇게 생각지 않던 일이 생긴건 좀 쉬게 하려고 그런걸꺼야.
그리고 좀 더 다른 고민으로 레드마리아를 만들고 이젠 틈틈히 공부도 좀 해 보라고
이런 일로 기회를 주는 걸 꺼야.
이렇게 저렇게 한참을 씨부렁 거리니 틀린말 하나도 없군. 근데 웬일이니
틀어놓은 시디에서 나오는 가사가 죽인다

“.....미치듯이 헛소리 개소리 하고 자빠지지.....”

하하하 그러게...




Posted by 빨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