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기2009. 11. 1. 16:42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휩사여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건 아니고 그저 빈둥거리고 있다. 빈둥거리며 시간을 떼우는 곳이 요즘 내방에서의 일과다.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쩌다 빨래나 하러 들르는 이공간이 그렇게 빈둥거리는 곳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난 이 빈둥거림이 얼마나 즐거운지...

나의 공간이 처음 생겼을때 나의 기쁨은 잠잘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원초적인 안심이었는데 생활과 분리된 이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의 휴식처가 되어가는 거 같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의 뒷치닥 거리며 잔뜩 쌓여있는 집안일과 남편이나 동거인에 대한 불편함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고 헉헉대는 그런 전투장이 아닌 마치 별장처럼 이따금 찾아와서 아무생각도 없이 그냥 빈둥거리거나 가끔 책을 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나가야지 하는데 머리가 말이 아니다. 요즘은 씻는 일을 거의 수영장에서 하다보니 덩달아 씻는 도구들도 죄다 사무실로 옮겨져서 막상 씻으려고 하니 샴푸도 없고 린스도 없다. 쌀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고작 샴푸정도로 허전함이 느껴지다니...쩝...하지만 씻어야겠지. 게다가 생리중이니 사무실에 나가도 내일까지는 수영장에 갈수도 없을테고 일단 오늘 왕창 씻어야 버틸 수 있을테니까.

돌아서려는데 정태춘 박은옥의 시디가 눈에 걸린다. 지난주 정태춘 박은옥 30주년 콘서트에서 사온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시디. 그날 참 많이 울었었다. 나만 우는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죄다 울고 있었지. 비슷한 세대의 비슷한 공감대로 고독하고 외롭게 음악을 중단한 그를 격려하면서 그리고 슬쩍 자신의 숨겨둔 외로움을 함께 보태어 다들 그렇게 한 공간을 즐겼던거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러나 그 기억은 너무 빨리 잊혀진다.

나만해도 그렇지 않은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컴퓨터와 편집기를 여는 순간 삼개국의 수천장에 달하는 번역본을 펼치는 순간 타임라인의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상들을 듣기 시작하는 순간...이미 그 시간은 내머리속에서 비워진다. 그래도 다행인건 이렇게 빈둥거리는 시간에 우연히 접한 그 시디를 통해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낸다는거. 그래서 빈둥거리는 시간들은 지루하지 않고 생산적이다. 뭐 그렇게 위안을 삼고 있지만 역시 편집이 걸린다. 씨발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거야.

나름 시간에 쫒기며 살고 있는데 며칠전 ‘쇼킹패밀리’상영때 만난 세영이 그런다. 나는 그렇게 편집할때 꼼짝도 못하겠던데 경순은 너무 많이 노는거 아니야. 흐미...나쁜지지배. 가끔 산에 가고 가끔 영화 보는거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그리고 덧붙여서 말하기를 나는 스트레스 쌓이면 00을 만나서 배설(일종의 수다)하곤 하는데 경순도 배설 할 곳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지지배 이제 별걸 다 아네. 머리까지 영화배우처럼 잘라서 더 이쁘다. 너무 걱정하지마 니가보면 또 다른 맛이 있는 영화만들어서 보여줄께. 이런... 아직도 내입은 현실과 다른 말들이 툭툭..ㅎ

아...좋다...오늘 하루 그냥 게길까. 이것저것 쓰고 싶었던 글들이나 쓰고 읽고 싶은 책이나 읽으면서 뒹굴뒹굴... 맞어 난 요즘 푸코에게 배설을 하는거 같다. 푸코는 아마도 그의 친구이면서 학문적 동지인 역사학자 폴벤느에게 배설을 했겠지. 새로운 생각들을 퍼붓고 의심하고 공유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동지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그건 애인과는 또 다른 관계다. 내가 왜 이렇게 흥분이 되는지... 그나저나 공간이 바뀌면 내머리는 왜 이렇게 긴장감이 없어지는 것일까.

참 어제 핑크영화제에서 만난 주희씨의 말이 생각난다. 언젠가 핑크토크를 위해서 한국의 에로영화를 만들었던 00감독을 불러 이야기를 했더니 쓰리엠 정책이니 한국의 정권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통에 골치가 아팠다고. 가끔 사람들이 그렇지. 머리에 찬 것이 너무 많아 가벼울 줄 모른다. 우자지간 핑크영화제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글이 길어지겠군. 일단 컷하고. 에이씨 나가야겠다. 씻자.




 

Posted by 빨간경순